우리는 왜, 청교도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는가?

by holyway posted Feb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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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예배의 회복과 교회의 갱신을 위한 청교도 신앙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이래, 오늘날 만큼 한국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고, 교회의 본분을 망각한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교회의 세속화' 가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오직 말씀' 만을 붙들고 말씀가운데 살며, 말씀만을 전했던 청교도들의 신앙과 초대교회 정신으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말씀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지키며 살기위해, 목숨을 걸고 '메이 플라워호' 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과 정신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시간 목숨을 걸고 바른 신앙과 믿음을 지키려했던 그들의 삶을 조명해 보면서, 교회의 세속화와 이단의 범람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한국 교계가 정화되고,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청교도 신앙(Puritanical Faith)이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믿음위에, 은혜와 은사를 말씀과 융화시켜가면서,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 청교도인들이 가지고 있던 바른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청교도 신앙을 통하여,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기초한 신앙의 기본정신과 사상을 배울수 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영적 충만함을, 우리의 신앙에 정립시켜 성경적 예배의 회복과 교회의 갱신을 이루어 낼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1.성경적 예배의 회복에 대하여, 

교회의 가장 큰 사명 중 하나는, 성경에 입각한 바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주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교파와 교회에 따라 예배의 형태와 순서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수 있으나,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는 거의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세상문화를 받아 들이면서, 예배의 본질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의 본질을 경시하거나, 무시하고, 사람들의 편의와 자기 만족을 위해, 무분별하게 비성경적인 요소를 예배의식에 도입하고 있는데,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우리는 이러한 변질된 예배를 경계해야 합니다. 

 

가. 예배의 본질.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의 본질이 상실된 예배이며, 이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 없는, 일종의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배에 세속화된 인간적인 방법이 개입되어 있거나, 미신적이며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끼어들게 된다면, 그것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중 1-4계명들은, 모두 예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드려지고 있는 상당수의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예배의 본질을 상실한 체, 단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편으로 변질 되어가고 있습니다.

바른 예배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말씀을 즐거워 하는 동시에, 예배 드리는 성도들은 신령한 은혜를 맛보고 체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고달픈 영혼들이, 예배를 통하여, 위로 받으며, 치료받고, 회복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마는, 이것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예배해야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성경 말씀대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바라보며, 그를 힘입어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에 대한 예표요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약 제사가 예표하는 바를 실제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는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 죄를 용서 받고, 구원과 영생을 얻어 천국백성이 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바로 이와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아벨은 우리에게 바른 예배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방법대로 양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짐승을 대신 죽여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통해,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기의 노력으로 얻은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방법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예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가운데 있는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예배가 말씀에 기초한, 순결한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다. 성경적 예배의 회복.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보아도, 오늘날처럼 예배하기 위해,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 건물들이 세워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은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외형적이고 숫적인 면에서는 놀라운 성장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면에서는, 오늘날처럼 초라하고 타락한 시대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어 지지 않고 있으며,그 대신 각종 성공적인 세상 이야기와 생소한 프로그램들이, 예배의 자리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인지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는데,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이기 때문 입니다.

오늘날 드려지고 있는 많은 예배가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포장은 되어 있어, 마치 복음을 선포하는 것 같지만, 예배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이 아닌, 기복 사상과 세상 이야기와 교회성장 프로그램으로 꽉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예배라고 할수 없으며, 예배를 빙자한, 한낱 '종교적 행사' 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의 외적 성장만을 위해서, 무분별하게 도입한 세상적인 예배의 모습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영과 진리'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하는 참된 예배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주일성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시고, 제7일에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모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주일 성수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이제는 제대로 주일을 성수하는 교회나 성도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 안식일을 우리에게 지키라 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 보면서, 더욱 힘써 이 날을 거룩히 지키는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가. 안식일의 기원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것이 안식일의 기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다음 날 곧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창조를 완성하셨다는 표시로 하신 것입니다.

'창조의 완성'을 나타내는 것이, 쉬셨다는 것이 첫째 의미입니다.

다음으로는, 이런 위대한 창조를 완성하시고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신 일을 보시고 큰 기쁨과 만족에 들어가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정하심으로써,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니라 끝이 있으며, 더 나은 질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하는 것을 미리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육체의 피곤이나 푸는 날로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영원한 안식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감사와 소망과 기쁨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나. 회복되어야 할 주일성수.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신령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쉬지 못하고 일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 마음에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는, 제7일을 안식일로 구별하여 지켜라 하셨기 때문에,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도록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천하 만민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주님이시며, 구세주다' 라고 선포하신 영광스럽고 기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새 생명과 새 소망을 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 주님과 함께 승리한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금요일 밤 또는 토요일 예배로 대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휴가를 떠나는 교인들을 위해 산이나 바닷가에 수양관 겸 주말 교회를 마련하여 휴가지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언뜻 듣기에는 좋은 발상같고, 성도를 무척이나 배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일 예배를 다른 날 예배로 대치하는 것은, 제4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사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정해서 지켜온 주일 예배를, 다른 날 예배로 대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와 교만에서 나온 비신앙적이며, 인본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와 청교도들은 생명을 바치면서 주일을 거룩히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주일에는 해야 할 일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 즉, 복음에 관련된 일은 힘써 행해야 하지만, 세상 일과 오락같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은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기 때문에, 주일마다 하나님께 나아와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며, 예배함으로 메마른 우리의 영혼이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체워지고, 이 땅의 충만한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가정예배에 대하여, 

가정은 우리 사회의 사회의 출발이며 기초 단위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그리고 교회도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훈련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해 왔던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은 아담의 가정이었습니다. 본래 '아담' 은 '에덴동산' 에 홀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담을 향하여,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시면서 '하와' 를 만드시고 인류 최초의 가정을 친히 세워주셨습니다.

이처럼, 가정은 그 처음 시작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를 볼 때에, 인류 역사상 오늘날처럼 가족 관계가 파괴되고, 가정이 무너지고 붕괴되었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앞서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가정에 관한 많은 저술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해법으로 제시하는 심리학 이론이나 상담 기법들은, 임시 방편적이거나 핵심을 겉도는 방법에 불과합니다, 가정문제의 핵심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통한 해결책이 유일함에도 불구하고 그와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해결해 보려는 책은 거의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 예배' 야 말로 무너지고 상처투성이인 가정을, '신앙의 힘'으로 회복시키며 치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가정에서 찬송과 기도와 성경을 읽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철저한 개인 신앙, 개인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큐티하는 일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제는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신앙으로 회복되지 못하면, 우리 개인은 물론, 이 사회와 나라와 우리 교회까지도 희망이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편 118편을 보게되면,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어 여호와께서 권능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가정에서 '복된 소리, 구원의 소리' 가 흘러나와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너진 가정들이 다시 세워지고, 파괴된 가족관계가 원만히 회복되어 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4.교리교육에 대하여, 

교리적인 바탕이 없는 신자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균형있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조'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어릴 때부터, 교회와 가정에서 배우는 것은, 영적 골격이 튼튼한 성도를 양육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 됩니다.

 

가, 교리교육의 중요성 

토마스 왓슨은 그의 책 [신학의 체계] 첫 장에서, 그는 '요리문답'은 사람들을 터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최선의 방편이라고 말합니다. '신앙고백' 없이 그리스도를 믿거나, 공식화된 '신조' 없이 성경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이러한 교육들이 중요하냐 하면, 그것은 '신조'들은 성경의 교훈을 잘 요약해 주고,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거짓된 교훈과 생활을 막아내는데 있어서 공적 표준으로서 방패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의 설교자들은, '나 만큼은 성경 말씀 중심의 목회자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사로운 성경해석과 교리적으로 잘못된 말씀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잡음이 발생하고, 교회가 분규에 휘말리는 문제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성도들이 뜨거운 신앙을 가진것 같으나, 이단적인 사상과 만났을 때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별하거나, 참 신앙을 변증해 내는 데 있어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습니다.

 

나, 시급한 교리교육의 재개 

'요리문답교육'은 종교개혁시대부터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에 의해 교리교육을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성경신학'이 발전하면서 요리문답교육은 점점 계단공과식 '성경교육'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교육이 '성경교육' 위주로 바뀌면서, 사사로운 성경의 해석과 오류로 말미암아, 성경적 권위를 훼손하거나, 취향에 맞게 취사선택 하는등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적인 교육이 교회를 잠식하고 교회가 세상문화와 동화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만일 각종 교회교육 프로그램과 특별활동에 밀려서, 교리 교육이 시행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의 교회는 영적, 신학적, 교리적 혼란에 휘말려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 수행에 집중하지 못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실천으로 영적 골격과 체질이 튼튼한 성도와 교회들로 자라도록 더욱 힘써야 겠습니다. 

 

5. 성도들의 경건의 능력에 대하여,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아무도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갖기위해서는,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시고, 또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권능과 능력을 보여준 믿음의 사람들은,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쉬지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편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즐거워 하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되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진리안에 머물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가정에서 드리는 '바른 예배'와 '교리교육' 등이 잘 시행될 때, 성도의 경건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비로소 마련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성도의 영적 성장과 변화 곧 '성화'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더욱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그리고 청교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진리 안에 머물며, 거룩하게 살면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때에, 이 나라에 성경적 예배가 회복되어지고, 세속화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갱신되어지는 놀라운 변화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보여질 줄로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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