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완전(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 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빌 3 : 12 )
Ⅱ
1.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완전합니까? 이것이 두번째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육신의 생활처럼 몇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오직 어린 아이와 같고, 어떤 이들은 좀 더 성숙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의 첫번째 편지에서(2:12이하) 이를 적용하여 어떤 이들에게는 "자녀(아이)들아"하고 불렀고, 어떤 이들에게는 "청년들아"하고 불렀으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아비들아"하고 불렀습니다.
요한은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사함을 얻음이요"하고 적었으니, 이는 곧 너희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뒤에 계속하여 적힌 대로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신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저들은 악한 자의 무서운 화살 곧 저희의 첫번 얻은 화평을 교란시키는 의심과 두려움을 없이 하였고, 저희 죄가 사함 받았다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가 저희 마음에 지금 거하는 까닭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 사도 요한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저들은 저희의 깊은 영혼으로부터 성부 성자 성신을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분량에까지" 자란 "완전한 사람"(엡 4:13)인 까닭이라고 한 것입니다.
2. 내가 이 설교 후반부에서 중요하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주로 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들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일지라도, 첫째로 죄짓지 않을 만큼 그같은 의미에서 완전하며, 혹은 죄를 안지을 만큼 '하나님께로서 난' (역시 여러가지 의미로 취해진 표현임) 것입니다(요일 5:18).
만약 어느 누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된 특권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이 문제는 추상적 사고에 의하여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추상적 사고란 끝없이 이어지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원점으로 돌아올 뿐입니다.
또한 이 문제는 한 두 개인의 경험에 의하여 결정지어질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범죄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율법이나 증거에 호소하여야 합니다(사 8:20).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 함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며,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만 따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판단받아야 합니다.
3. 지금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롭다하심을 입은 자들, 최저의 의미에서 거듭난 자들일지라도 "죄를 계속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죄 가운데서 더 이상 살 수는 없습니다"(롬 6:12). 저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5절).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 이후로는 저들이 죄를 섬기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저들은 죄에서 벗어났습니다.(6,7절) 저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11절). 죄가 저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저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이들은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14,18절).
4. 이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적어도 위에서 말한 사람들 즉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 혹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외적인 죄(outward sin)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이 위에서처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 자유를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나니라"(벧전 4:1,2). 여기 "죄를 그쳤음이니"하는 말을 아주 쉽게 해석한다면, 이는 외적 행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데 곧 외적인 행위, 바꾸어 말하면 율법을 외적으로 범하는 것을 중지하였음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
5. 우리가 잘 아는 요한 1서 3장 8절 이하의 말씀에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였습니다.
6. 이 말씀은 참으로 오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이는 단지, 고의로는 죄를 짓지 않는 것,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는 정도로 범죄하는 것이 아닌 것, 혹은 전에 죄를 짓던 것만큼은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 사도 요한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에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각 장을 모두 읽어도, 요한 1서를 다 살펴보아도, 아니 요한이 쓴 편지 전체를 뒤져보아도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법은 그런 주장을 간단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를 확증할 수 있다면, 그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여 보십시요.
7. 하나님의 자녀들이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바침하는 실례들을 흔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끌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장합니다. "무슨 말이냐?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면서 자기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등 죄를 짓지 않았느냐? 또 모세는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할 때에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죄를 짓지 않았느냐? 그 뿐인가, 비록 단 한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조차도 헷 사람 우리야의 일과 관련하여 살인과 간음까지 범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하는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는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로부터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첫째로 다윗은 그의 생활 전체에 있어서는 그는 유대인 가운데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장 거룩했던 그 사람도 때로는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와 같은 사실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한 범죄할 것이요 또 범죄란 피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그런 결론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전제들로부터 결코 그러한 결론이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8. 위와 같이 논쟁을 거는 사람들은 아마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고찰해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고 하셨습니다.
걱정되는 바는, 혹 어떤 사람들이 이 말씀에서 "천국"을 "영광의 나라"로 생각하고, 마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영화된 성도 중 지극히 작은 자가 이 땅의 누구보다도 위대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상상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제가 이것을 언급함은 그 잘못된 견해를 충분히 반박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 "하늘나라"(다음 절에서 침노함을 당한다고 되어 있씀), 곧 누가가 표현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진실되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참된 그리스도인 모두가 속하여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두 가지 점을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이 땅 위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는 없다는 것, 이는 결국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그 외의 어느 유대인도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주님께서 선언하고 계시듯이 하나님 나라(주님께서 이 땅 위에 설립하러 오신 그 나라요, 지금 침노하는 자가 빼앗기 시작하는 그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세례요한보다도 크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해석하는대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분명히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뜻이며,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에 유대인들이 누렸던 것에 의해 우리의 특권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주어진 역할(섭리)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섭리를 유대인들의 섭리 정도로 격하시키는 사람이나,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미약한 실례를 들면서 이로부터 그리스도를 옷입은 사람이 유대인 보다 더 큰 능력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 사람은 누구나 크게 과오를 범하는 것이며,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9.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주장합니다. '설사 앞서 들은 인물들의 범죄의 실례가 별 효력이 없는 것으로 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바침하는 근거가 성경에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곧 성경에 "대저 의인도 하루에 일곱번 범죄하느니라"고 기록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귀절이 결코 없습니다. 그들이 인용하려는 말씀은 잠언 24장 16절처럼 보입니다만, 그 말씀은 바로 이렇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주장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본문에는 "하루에"라는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의인이 그의 일생 동안 일곱번 넘어진다면 그제서야 그것은 납득될 만한 것이지요. 둘째로 성경 본문에는 "범죄한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넘어지다"라는 말은 범죄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시적인 고통에 빠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그 앞에 있는 성경 말씀을 보아서 더욱 분명하여집니다. 즉 그 앞 절에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의인을 환란 가운데서 건지실 것이다. 그러나 네가 넘어질 때에 너를 구출할 자는 없을 것이다"함과 같은 뜻입니다.
10. 그러나 반대자들은 또 다른 근거를 대기도 합니다. 즉 솔로몬이 분명히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 8:46, 대하6:36)라고 하였고, 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고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솔로몬의 시대에는 과연 그랬습니다. 그리고 아담부터 모세에 이르기 까지, 모세에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솔로몬에서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에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그날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는 선만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유업을 이을 자라도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다"(갈 4:1) 는 말씀은 철저한 진리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교적인 섭리시대 아래 있던 옛 성도들인) 저들은 그들이 교회의 어린아이 상태로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갈 4:3)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 - 즉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은혜를 얻게 하심이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지금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갈 4:7). 따라서 율법 아래 있었던 것이 어떤 상태였든, 이제는 복음이 주어졌으니 사도 요한과 함께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라고 말해도 틀림없습니다.
11. 유대교의 시대와 기독교의 시대 사이에는 광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그리고 보통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관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바로 요한 복음 7장 38절 이하에서 제시하고 있는 근거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합니다. 사도 요한은 고마우신 주님의 말씀, 즉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신 말씀을 적은 후 곧 이어 "이는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 "그를 믿는 자가 후에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기적을 행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고 사도 요한이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성령은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파송하사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을 권세를 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칠 능력을 주셨고 더우기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하셨던 것과 같은, 성결의 은혜를 베푸시는 성령은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인간과 심지어 배반자들까지 위하여 은사를 받으셔서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거하시게 된 것은, 곧 "주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을 때"(엡 4:8)였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이 완전히 도래했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던 자들"(행 1:4)이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해 처음으로 죄를 정복하고도 남음이 있는 자들이되었습니다.
12.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이 큰 구원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베드로도 역시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혈육에 속한 형제들에 관하여, "너희는 지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느니라"(벧전1:9)고 말하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곧 은혜의 섭리)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어서 따라올 영광(영광스러운 구원)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에 의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바 된 것이라."(벧전1:10-12) 즉 이는 오순절 날에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참된 신자의 마음 속에 계시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근거 위에,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 그들에게 임했던 은혜에 근거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처럼 강력한 권고를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이가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모든 언행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13. 이와 같은 사실들을 숙고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특권은 결코 유대적 섭리 시대 아래 있던 사람들에 관한 구약성경의 기록에 의하여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때가 찾고, 성령이 임하신 바 되었으며, 하나님의 크신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 인간에게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가 이제 이 땅에 세워졌습니다. 이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영께서 예전에 선언하셨으니(다윗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표본이요 표준이 되기에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슥 12:8)고 하였습니다.
14. 그럼, 사도 요한이 한 말,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요일 3:9)라는 말씀이 그 말의 평범하고 통상적이며 조심성 없는 뜻에 따라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원한다면, 그 증거는 신약성서에서 가져와야 합니다. 그렇게 아니하면, 이는 마치 허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흔히 제시되는 증거들의 첫 번째 것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들로부터 취해집니다. '사도들 자신이 범죄하였으며, 뿐만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도인 베드로나 바울도 죄를 지었다.(고 말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날카롭게 대립했고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외식했다.'
좋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범죄하였다고 합시다. 이 사실로부터 얻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밖의 다른 사도들도 때때로 범죄하였다는 말입니까? 그런 증거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또는 사도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범죄하였다고 결론을 추리하시렵니까? 이것은 더욱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추리입니다. 그래 여러분은 사도 중에 두 사람이 단 한번 범죄하였다고 하여, 어느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모두 그들이 사는 동안 범죄하고 있거나 범죄할 것이라고 떠들어댈 것입니까? 아! 형제여, 정상적인 아이들이라도 그런 추리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최소한 여러분은 어떤 논법으로든 누구든지 좌우지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하나님은 금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에게 참으로 충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족합니다. 그리하여 시험이 임할 때 우리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각 사람이 당하는 각양의 시험에서 피할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에 유혹받는 누구도 굴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15.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님께 세번이나 간구하였으되 시험에서 피할 수 없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말을 문자대로 번역하여 음미하여 봅시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사신)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여지지 않게하려 함이라. 이것이(혹은 그가) 내게서 떠나도록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이러한)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7-10)
16. 이 성경 말씀이 범죄의 필연성을 옹호하는 자들의 강력한 방패의 하나이므로 이를 철저히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여기 언급되는 "가시"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결코 사도 바울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물며 바울이 범죄할 수 밖에 없는 필연성 아래 놓이도록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로 이 말씀으로부터 어느 누구이건 그리스도인은 범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입증될 수는 없습니다.
둘째로, 초대 교부들은 이것은 육체적 고통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터툴리안은 심한 두통이라고 했으며, 크리소스톰과 성 제롬도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성 시프리안은 다소 일반적인 용어를 써서 근육이나 몸의 여러가지 심한 고통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세째로 이런 해석에 대하여 사도 바울 자신이 "육체의 가시가 나를 찌르고, 때리고, 친다"고 한 표현은 위의 사실과 꼭 부합됩니다. 또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도 이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이 두절에서만도 네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째로 이 가시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는 어떤 외적인 죄나 내적인 죄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교만, 분노, 정욕과 같은 외적 표현이나 또는 내적 발동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뒤따라 나오는 사도의 말로 보아서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 만큼 분명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러한)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 사도 바울의 교만이나 성냄이나 정욕에 대하여 자랑하였다는 말입니까? 교만이나 성냄이나 정욕같은 약한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렀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한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하니라." 곧 "내가 육신으로 약할 그 때에 영적으로 강하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나는 교만과 정욕으로 인하여 약할 때에 영적으로는 강해진다"고 감히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오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함께 하신다"고 알고 있는 여러분이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만이나 분노나 정욕을 자랑삼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약성을 기쁘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런 약함이 여러분을 강하게 만듭니까? 만약 그것들을 피하기 위하여-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여러분은 지옥에까지 뛰어들려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스스로 판단하여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런 것들을 자랑하며 기뻐할 수가 있을까를!
마지막으로 기억하실 것은 사도 바울에게 이 가시가 주어진 것은 그가 이 서신을 쓰기 14년 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서간도 사도 바울이 생애를 마치기 수년전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이후에도 달릴 긴 코스를, 싸워야할 많은 싸움을, 또한 획득하여야 할 많은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여러 은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더 많은 것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만약 이런 것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도 바울은 그 당시 느끼고 있던 어떤 영적 연약함으로 부터 강하게 된 적이 결코 없었다고 우리들이 추단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 성장한 바울이 여전히 똑같은 연약성 때문에 힘겹게 애썼다거나, 혹은 그가 죽을 때까지 더 향상된 상태에로 조금도 나갈 수 없었다고는 절대로 추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하여 볼 때에, 사도 바울의 경우 그것은 사도 바울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지 않았느냐는 질문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도 요한의 주장과도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17. 그러나 성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범죄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직접적으로 부인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즉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3:2) 그러면 여기에 "실수한다"는 말이 죄를 짓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나도 그렇다고 봅니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들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아니한 많은 스승이나 선생들이 아닙니까? (아마도 행함이 없이 믿음을 가르치는 허울좋은 사람들로서, 앞장에서 신랄하게 책망받은 사람들이 틀림 없습니다.) 결코 사도 자신이나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의 성경귀절(성경에서나 마찬가지로 모든 다른 곳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담화의 비유적 표현인) '우리'라는 말 속에, 사도 야고보 자신이나 다른 참된 신자들이 포함되는 게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다음 3가지 이유에서 명백히 나타납니다.
첫째로, 9절에서 같은 "우리"라는 말을 읽습니다. 곧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저주하노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진실로 이것은 사도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둘째로, 앞의 성경귀절 바로 앞에 있는 말씀으로부터 이 사실이 증명됩니다. 즉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1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도다"(2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실수로 인하여 더 큰 정죄를 받을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야고보나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을 좇아 행치 아니하고 영을 좇아 행하는 그들에게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8:1이하 참조).
세째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도다"하는 말씀 자체가 "우리"란 말이 모든 사람 혹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왜냐하먼 먼저는 "우리가 다" 실수다 많다고 하고 나서, 바로 이어 실수가 없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실수하는 자들로부터 명백히 대조 구분하여 '온전한 사람'이라 언급하였습니다.
18. 이와 같이 야고보는 자기가 한 말의 뜻을 몸소 명백히 설명하여 확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사람들이 더 의심하지 않도록 야고보 선생보다 몇 년 뒤에 쓴 서한에서 위에서 외치고 있는 바와 같은 명백한 선언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의 새로운 문제가 제기됩니다. 어떻게 사도 요한의 말에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느니라"(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하니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5:18)고 말한 적이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1:8) 하였고, 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10)고 말한 바도 있는 것입니다.
19. 얼핏 보아 매우 곤난한 문제인 것 같으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해소됩니다.
첫째로, 10절 말씀이 8절 말씀의 뜻을 결정하여 줍니다. 8절의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이 10절에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현재 숙고하는 사항이 우리가 지금까지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가 아닙니다. 또한 이 귀절들은 "우리들이 지금 죄를 행한다, 죄를 범하고 있다"라고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째로 9절의 말씀이 8절과 10절의 말씀을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9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즉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였다고 확신한다고 하여 이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불필요하다거나 깨끗함을 받아야 할 죄가 없다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거다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여 주십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게"(요8:11)하려 하심입니다.
20.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에는 자기 모순이 없으며 다른 성서기자들과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모든 주장을 한 견해로 집약할 때에 더욱 명백하여 집니다.
첫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게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둘째로, 아무도 나는 범죄치 않았으며 깨끗함을 받아야할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또한 장래에 범할지도 모르는 죄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네째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범죄할 수밖에 없다거나 혹은 범죄하였다 하더라도 (글자 그대로) 그는 계속하여 죄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대언자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혹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의심하는 자가 있을까를 우려해서 3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 취급하고 자기의 뜻하는 바를 매우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즉 3장에서 그는 말하기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마치 내가 계속하여 죄짓는 사람들을 격려나 하였던 것처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가 의로우심같이 의로우니라.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바 되셨으니,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니라."(7-
10)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 때까지는 마음 약한 사람들이 어떤 의심을 자아낼 수도 있었던 점들이 마지막 성서기자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해결되었고 또 명백하게 결론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교리나 신약성서의 전체적 취지(tenor) 와 일치하게 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할지라도 그런 것입니다.
21. 그러나 두번째로, 악한 생각이나 성품으로 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에서, 완전한 사람들이라고 확인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주 안에서 강한 자"와 "악한 자를 이긴 자"(일2:13), 아니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자"(13이하)들만입니다.
첫째, 악하고 죄된 생각으로 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에 관한 생각"이 반드시 "악한 생각"이 아니며, 죄에 대한 생각과 죄된 생각과는 아주 뜻이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선량한 사람도 타인의 행한 살인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악하고 죄된 생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로우신 우리 주님께서도, 마귀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 4:9)고 시험하였을 때, 그 마귀의 말을 틀림없이 생각하고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주님께서 악한 생각이나 죄된 생각을 품으셨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주님은 참으로 그런 생각을 품으실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실된 그리스도인도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눅6:40)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악하고 죄된 생각에서 자유하셨다면 그의 제자인 그리스도인들도 악하고 죄된 생각으로 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22. 그렇다면 주인(스승)과 같은 종(제자)에게 있어서 악한 생각은 어디로 부터 생기는 것입니까? (만약 생긴다면) "사람의 마음으로 부터 악한 생각이 나옵니다"(막7:21) 따라서 사람의 마음이 악하지 않는 한, 악한 생각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만일 나무가 썩었다면 그 열매도 썩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가 좋다면 그 열매도 좋을 것입니다(마12:13). 이에 대하여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7-18)
23. 사도 바울도 참 그리스도인의 이런 특권에 관하여 자신의 체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한 힘이라. 모든 상상(여기에서는 상상을 '이론'이라고 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기스무스'라는 그 말은 하나님의 선언이나 약속 혹은 은사들에 대항하는 불신과 자만에서 나오는 모든 이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을 파하여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느니라"(고후10:4이하)
24.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생각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처럼, 악한 성품으로 부터도 해방됩니다. 앞서 인용한 우리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보아도 이는 분명합니다. "제자가 그 스승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스승과 같으니라"(마10:23, 눅6:4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바로 앞서 주님께서는 기독교의 가장 숭고한 교리, 그러나 혈과 육에 대하여는 가장 괴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라"(눅2:27,29)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시므로,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눅6:39).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해됩니다. "이런 문제에 관하여는 육체와 의논하지 말라 - 곧 영적 분별이 없는, 다시 말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눈이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들과 의논하지 말라. 의논하면 저들과 네가 함께 멸망하게 될까 염려된다."
바로 그 다음 절에서, 주님께서는 -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고난을 받았다면, 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으로 만족하다. 그리고 그 때 의심치 말아라. 그러나 나는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스승과 같기 때문이니라.'고 한 내 말을 성취시키겠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현명한 척하는 이 우둔한 자들이 모든 방면에서 우리들에게 직면케하는 두 가지의 커다란 반대 의견들 - '이것들은 너무 고통스러원 감당할 수 없다', 혹은 '그것들은 너무 높아서 도달할 수 없다'-을 제거하십니다.
그러나 스승이신 우리 주님은 모든 죄된 성품으로 부터 자유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죄된 성품으로 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25. 그리스도인 누구나가 사도 바울과 함께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이 말씀은 외적인 죄와 함께 내적인 죄에서도 해방받은 것을 명백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소극적으로도 표현되었고 또한 적극적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나의 악한 성질 곧 죄의 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 전부를 뜻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는 말씀과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분리시킬 수 없도록 결합된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짝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지 않습니까?(고후6:14,15)
26.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 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깨끗게 한 것입니다. 이는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신 사람은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신을 깨끗게 하기"(요일3:3)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겸손하였기에, 그는 교만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뜻과 욕망으로 부터 깨끗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만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냄(분노)으로부터 깨끗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유하시고 점잖으시며 인내하시어 오래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냄이라고 할 때 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으로 말을 합니다. 모든 성냄이 모두 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한번 "노하심으로 둘러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노하셨고, 같은 순간에 죄인에 대하여는 슬퍼하신 것입니다. 범죄에 대하여는 노하시고 기뻐하시지 않으셨으나, 범죄자에 대하여는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하여는 미움을 보이셨지만, 사람들에 대하여는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셨습니다.
완전한 이들이여! 가서 이와 같이 행하십시요. 분노하더라도 범죄하지는 마십시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는 혐오를 느낄지라도, 거역하는 사람만은 사랑하고 따뜻하게 동정하여야 합니다.
27.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외적인 죄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죄로 부터 구원하십니다. 악한 생각으로 부터 그리고 악한 성품으로 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의 죄로 부터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죽기 전에,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을 때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사도 요한의 명백한 말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모든 의문을 풀면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니(마치 죽기 전에는 안된다는 이런 주장을 미리 예견하고, 자신이 그 근본에서부터 이를 뒤집어 놓으려는 듯이) 그는 이런 체험이 사람이 죽을 때나 죽음 뒤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스승처럼 바로 이 세상에서도 악한 생각과 성품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단호히 주장하였습니다(요일4:17).
28. 이 말씀은 그의 서신 1장 5절 이하에서 한 말씀과 꼭 일치됩니다. 그 말씀이란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니…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1:9)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이 죄에서의 구원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보혈이 죽음의 시각에서나 심판 날에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에) 우리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를 모든 죄로 부터 깨끗게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분명한 것은, 만일 죄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모든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은 것은 아닌 것이며 또 우리의 영혼에 조금의 불의라도 남아있다면 우리는 모든 불의에서 씻김을 받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어느 죄인이든지 그로 하여금 그의 영혼을 거스려 - 이 말씀이 칭의에만 관계되거나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깨끗게 한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라고 - 말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까닭은 첫째, 이는 사도 요한이 분명히 구분하여 놓은 것을 함께 혼동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먼저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그런 다음 '모든 불의로 부터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1:9).
둘째, 그렇게 말한다면, 이는 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내면적인 성결이나 외면적인 성결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보다 반드시 먼저 와야 한다는 주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기서 말하는 깨끗게함이 단지 우리를 죄책으로 부터 깨끗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 때에 우리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1:7) 조건 하에서가 아닌 한, 우리는 죄책으로 부터의 깨끗함 즉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죄와 불의에서 구원함을 받은 것이요,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짓지 않으며, 악한 생각과 성품에서 자유함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지금 그들은 완전하다고 할 것입니다.
29.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태초로 부터 있었던 거룩한 선지자들의 말씀을 성취시켰습니다. 특히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이루셨으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리라"(신30:6)고 하신 것입니다. 다윗을 통하여 외치셨으니,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에스겔 선지의 말씀이니, 곧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너희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고…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함을 알며…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루리라"(겔36:25)고 하였습니다.
30.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과 선지서에 이와 같이 약속되었고 또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확증시켜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완전케 하여,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 부터 우리를 깨끗게 해야 합니다.(고후7:1). 우리는 그의 안식 곧 들어간 자는 자기 일을 그치는 그런 안식에 들어갈 많은 약속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혹 그 약속에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히4:1)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갑시다.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어,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합시다(롬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