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영과 아들의 영
- 존·웨슬리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니라."
( 롬 8 :15 )
1. 성 바울은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들"은 하나님의 영을 마셨습니다.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롬8:15) 그런것이 아니고 "여러분은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의 마음에 그의 아드님의 영을 보내주신 것입니다"(갈4:6) "당신들은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에 의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롬8:15)
2. 노예와 두려움의 영은 이 사랑스러운 아들의 신분을 주는 영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노예의 두려움에 의해서만 좌우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요일3:1)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습니다"(마12:34)
3. 그러나 인류의 대부분, 아니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세계라 불리어지는 것의 대부분이 이 정도에까지도 도달되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상 그들은 아직 거기 도달하기에는 멀었고 "그들의 생각하는 일 모두에 하나님은 없습니다"(롬1:21첨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좀 더 많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 앞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4. 아마도 하나님의 긍휼로서 이제는 더 좋은 영에 관여되고 있는 당신들 대부분은 당신들이 그들과 마찬가지였고 동일하게 정죄되어 있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당신들이 날마다 그 죄와 피 가운데를 전회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적당한 때에 당신들은 "두려움의 영을 받았습니다"(롬8:15). (당신들은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중에 두려움은 사라지고, 사랑의 영이 당신들의 마음을 채운 것입니다.
5. 두려움도 사랑도 없는 최초의 정신상태에 있는 사람을 성서는 "자연적인 인간"(고전2:14)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예와 두려움의 영 밑에 있는 사람은 가끔 "율법에 매어 사는 사람"(동9:20) 이라고 말해집니다. (물론 이 표현은 보다 가끔 유대교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구원의 길이었던 시대의 사람 혹은 유대교의 율법에 속한 모든 의식과 예식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일을 의미하고 있지만)
그러나 두려움의 영을 사랑의 영과 바꾼 사람은 "은혜 아래 있다"(롬6:14)고 말해지는 것이 적당합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어느 영에 속해 있는가를 아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으므로 나는 분명히 첫째로 "자연적인 사람"(고전 2:14)의 상태, 둘째로 "율법 아래 있는"(고전9:20) 사람의 상태, 셋째로 "은혜 아래 있는"(롬6:14) 사람의 상태를 지적하기를 힘쓸 것입니다.
Ⅰ. 자연적인 인간
1. 그러면 첫째로 자연적인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합시다. 성서는 이것을 잠자고 있는 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잠 자는 자여 일어나라"(엡5:14)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은 깊은 잠 속에 있으며 그의 영적 지각은 깨어 있지 않으며 그 지각은 영적인 선도 악도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해력의 눈은 감겨져 있습니다.
그 눈 위에는 끊임없이 구름과 암흑이 머물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누워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 사항에 관한 지식이 들어올 입구가 없으며 그의 영혼에 접근하는 길이 모두 폐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은 사항에 대하여 굉장히 어리석은 무지 속에 있습니다. 그는 알아야만 할 것을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합니다. 그 진정한 내적인, 영적 의미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전적으로 문외한입니다. 그것을 가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그 복음적인 성결에 대해서 그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골3:3) 사람들만이 얻는 그 행복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2. 그리고 깊이 잠들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는 휴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경이기 때문에 또한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쳇, 내게 무슨 위해가 일어날 일이 있을 겐가" 모든 방면에서 그를 뒤덮고 있는 암흑이 어떤 종류의 평화 속에 그를 버려둡니다. 물론 악마의 행위 그리고 현세적인 악마적 정신과 평화가 일치하는 한에서의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는 자기가 낭떠러지의 가장자리에서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위험 때문에 떨 수는 없습니다.
그는 두려움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한 이해럭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왜 그는 전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에 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으로 "하나님은 없다"(시14:1), 혹은 "주는 하늘 가에 앉으셔서 굽히사"(사40:22), "땅 위에서 되는 일들을 보려고 하시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신4:31)고 말하는 것으로 그는 만족하는데 그것은 바로 에피규리안의 모든 의향과 목적을 만족시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루기 힘든 자비의 개념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에 대한 모든 본질적인 혐오, 하나님의 정의, 지혜, 진실, 그 모두를 혼돈시켜서 삼켜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신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발하시는 보복을 그는 전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율법의 중요점이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 것, 외적으로 비난 받지 않는 것이라고 상상하여 그것이 마음의 모든 기질, 욕구, 사고, 운동까지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혹은 이것에 관한 책임이 소멸됐다고 상상하고 있씁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기"(마5:17)위하여 그 백성을 죄에서가 아니요 죄 가운데 있는 그대로 구원하시고 성결 없이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자신의 발언은 이렇습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동5:18)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동7:21)
3. 그는 자신에 대해서 전연 무지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멀지 않아 회개하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실로 그것이 언제일지 그는 정확하게는 모르지마는 그가 죽기 전의 언제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일은 전적으로 자기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자기가 하려고 한다면 가기가 회개하는 것을 누가 방해할 것입니까? 단지 한번 결심만 한다면, 그는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목적을 달성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죠.
4. 그러나 이 무지가 교양인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에게 만큼 강하게 빛을 반짝이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만일 자연적인 사람이 이 교양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면 그는 광범위하게 그 이성적 기능, 의지의 자유, 인간이 도덕적 행동자이기 위한 그러한 자유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서 좋은 것이요 자기 눈에 최선으로 보이도록 악이나 혹은 선에 자기 마음을 향해서 좋다고 그는 읽거나 논의하거나 실증하거나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신은 그의 마음 위에 이중의 맹목의 너울을 펼칩니다. 그것은 결코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까닭입니다" (고후4:4)
5. 자기 자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무지에서 때로는 자연적인 사람 가운데 일종의 기쁨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지혜와 선을 축하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는 가끔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종류의 일에 쾌락을 가질는지 모릅니다. 육신의 정욕, 혹은 안목의 정욕, 혹은 허영을 만족시키는 일로 인해서입니다. 특히 만일 그가 큰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풍부한 행운을 향수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히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호화롭게 지내게"(눅16:19) 할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가 잘 지내고 있는 한, 의심 없이 사람들은 그에게 대하여 좋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것이 현세적인 행복의 총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몸을 단장하고 방문하고 이야기를 하고 먹고 마시고 놀기 위해 일어서는 일이 행복의 총계인 것입니다.
6. 만일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아첨과 같이 죄의 마취제를 투약 받고 백일몽의 하나로 자기는 위대한 자유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상상할지라도 그것은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얼마나 쉽게 그는 자기가 모든 비속한 잘못이나 교육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정확하게 바로 판단하며 모든 극단을 피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는 말할는지 모릅니다. "나는 약하고 또는 좁은 영혼이 가진 모든 광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것이지만 그는 "위에서 부터 오는 지혜"(약3:17), 성결, 마음의 종교,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건전한 마음으로 부터 모두 자유롭습니다.
7. 이 모든 어간에 그는 죄의 종입니다. 그는 다소 날마다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종의 멍에를 메고 있지"(갈5:1)않습니다. 그는 정죄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교의 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의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공언할지라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약하다. 우리는 모두 약하다. 각 사람은 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는 성서에서 인용할 것입니다. "왜요! 솔로몬은 말하지 않았는가! 옳은 사람은 하루에 일곱 번 죄에 떨어진다고? 그리고 의심 없이 자기들이 그 이웃 사람들보다 더 선량한 인간이라고 가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위선자이거나 혹은 광신자다"
만일 어떤때에 진지한 생각이 그를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다음과 같은 말로 질식시켜 버립니다. "왜 나는 두려워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부패의 노예의 기반에 얽매어 있는 일에 만족하여 그는 죄의 기꺼운 종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거룩지 않으며,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죄를 정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복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대단히 쉽게 그에게 붙어오는 죄를 말입니다.
8. 이것이 자연적인 인간 모두의 상태입니다. 그가 지독한 파렴치한 범죄인이든지 혹은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한, 좀 더 세평이 좋고 또 점잖은 죄인이든지 꼭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이런 인간에게 죄의 의식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가 회개 곧 율법 아래로 오도록 인도되고 두려움을 품게 하는 노예의 영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다음으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Ⅱ. 율법 아래 있는 인간
1. 어떤 두려운 섭리, 혹은 성령의 실증과 함께 적용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은 흑암과 죽음의 그늘 속에 누어 잠자고 있는 자의 마음에 부딪칩니다. 그는 그 잠에서 두려운 방식으로 흔들려 깨워지고, 그래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을 의식하도록 일깨워집니다. 그것은 순간의 사건일는지도 모르고 점차적인 사건일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이해력의 눈이 열리고 또 이제 처음으로, (그 너울이 부분적으로 제거됨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진정한 상태를 식별합니다. 두려운 빛이 그의 영혼 위에까지 돌파해 옵니다. 밑이 없는 나락으로부터, 최저의 깊은 곳으로부터, 유황이 타고 있는 불바다로부터 반짝여 온다고 생각되는 빛입니다.
그는 마침내 저 사랑이 풍성하시고 긍휼 많으신 하나님이 또한 "태워버리는 불"(히12:29)이기도 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옳으신 신이시요 두려운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행위를 따라 갚으시고 모든 헛된 말, 아니 그 뿐 아니라 마음 속의 상상 때문에 불경건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분명하게 다음의 사실을 인정합니다.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합1:13)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역하는 모든 자에게 보복하시고, 면전에서 악인에게 보복하십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히10:31)
2.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이 내적, 영적 의미가 그의 위에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은 무한히 넓은 것"(시119:96)이요 "아무것도 그 빛에서 숨겨지지"(욥25:3 참조)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그 계명의 하나하나의 부분이 단지 외적인 죄, 혹은 복종만이 아니요 하나님 이외의 어느 누구의 눈도 꿰뚫어 볼 수 없는 비밀한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항에 관계하고 있음을 납득하게 됩니다.
만일 이제 그가 "살인하지 말지니라"(출20:13) 하는 것을 들으면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입니다"(요일3:15), "형제더러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마5:22)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율법이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라고 말하면 주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귓 속에 들려집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인과 간음한 것이다"(마5:28)
이처럼 모든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힘이 있어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롭다"(히4:12) 고 느낍니다. 그것은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낼 정도로 찔러"(동) 줍니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위대한 구원을 무시하고 그의 죄에서 자신을 구해 주셨을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동 10:29), "계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즉 아무것도 깨끗게 하지 못할 흔한 것으로 여기어 온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므로 더욱 그렇습니다.
3. 그리고 "지음 받은 것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벌거숭이요 그의 눈 앞에 드러나 있어서 우리는 그에게 모든 것을 고해야 한다(히4:13)는 것을 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또한 그는 자기가 벌거숭이요 자신이 꿰멘 모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부터, 종교 혹은 도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초라한 모든 가장, 또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일 때문의 모든 비참한 변명으로부터, 벌거숭이가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제야 그는 자기 자신이 옛 희생과 같이 목에서 아래로 걸려서 이를테면 둘로 쪼개져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내면의 모든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벌거숭이요 그는 그의 마음이 전혀 죄의 덩어리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 있음"(렘17:9)을 봅니다. 그의 마음은 전연 부패해 있으며 가증스러워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조금도 선한 것이 머물러 있지 않으며, 다만 있는 것은 불의와 불경건 뿐입니다. 그 움직임, 기질, 사고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악할 따름입니다.
4. 그리고 그는 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의 감동으로 인하여, 비록 그의 생활이 비난 받지 않았다 해도, 그의 마음의 죄 때문에 자신이 결코 소멸할 수 없는 불 속에 던져진다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다만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에 느끼는 것입니다.(그러나 그의 생활이 비난 받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니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마7:18)것이기 때문에)
그의 "죄의", 특히 그의 죄의 "삯", 정당한 보수가 "죽음이라"(롬6:23)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둘째의 죽음이요, 그 죽음은 죽지 않습니다. 지옥에서의 육체와 영혼의 파괴입니다.
5. 여기에서 그의 기분 좋은 꿈, 기만적인 휴식, 거짓 평화, 헛된 안심은 끝납니다. 이제는 그의 기쁨은 구름과 같이 사라집니다. 일찌기 사랑했던 쾌락은 이미 그를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쾌락은 맛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 구역질나는 단맛을 혐오합니다. 그것을 감당하기에 지쳤습니다. 행복의 그늘은 도망쳐 망각 속으로 잠겨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이 벗겨져서 안식을 구하지만, 조금도 얻지 못한 채 여기 저기 방황합니다.
6. 이제는 그러한 아편제의 연기가 소산되었기 때문에 그는 상처 받은 영혼의 고통을 느낍니다. 그는 영혼 위에 풀어 놓여진 죄가(그것이 교만, 성냄, 혹은 악한 욕망이든지 이기심, 악의, 질투, 복수, 혹은 그밖의 무엇이든지) 완전한 비참인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기가 잃어버린 축복과 자기 위에 도래한 저주 때문에 마음의 슬픔을 느낍니다. 이처럼 자기를 파멸시키며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를 경멸한 사실 때문에 격렬한 회한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그 진노의 결과로 그가 옳게 당연히 받기에 합당한, 그리고 자기 머리 위에 내리어진 것을 본 형벌에 대한, 생생한 느낌에서 오는 두려움, 그에게 있어서는 지옥의 문이요 영원한 죽음의 입문인 죽음에의 두려움, 하나님의 진노와 정당한 복수의 집행관인 악마에의 두려움, 거기다 인간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그의 육체를 죽일 수 있다면 그 일로써 그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지옥에 던지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가끔 대단한 높이에 까지 올라가므로 이 가엾은, 죄많은, 죄의 책임이 있는 영혼은 모든 것 곧 아무것도 아닌 것, 유령,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잎새를 보고서도 놀랍니다. 그 뿐입니까, 어떤 때는 그것은 정신 착란에 접하는 일까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인간을 "술에 취한 것이 아니나 취해 있는"(행2:15)것으로 만들고 기억, 이해력, 모든 자연적 능력의 행사를 정지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그것은 절망의 아주 가장자리에 까지 접근하는 일이 있어서 죽음의 이름만으로도 떠는 사람이 "목숨보다도 숨막히는 죽음을 선택"(욥7:15)하기 때문에 매 순간 죽음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옛날에 그런 사람들이 한 것과 같이 이러한 사람이 그 마음의 불안 때문에 악을 쓰게 되는 일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18:14)
7. 이제 그는 죄로부터 탈출하려고 진정으로 소원하여 죄와의 투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싸워도 그는 정복할 수 없습니다. 죄는 그보다 더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열심히 도망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 속에 굳게 매어 있으므로 밖으로 나아 올 수 없습니다. 그는 죄에 대항하여 결단하지만 여전히 계속 죄를 범합니다. 그는 올무를 보고 몸서리치도록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으로 달려들어 갑니다.
그의 자만하는 이성은 다음의 일을 하는 데 쓸모가 있을 따름입니다. - 즉 그의 죄책을 크게 하고 그의 비참함을 증대시키는 데 필요할 뿐입니다.
그의 의지의 자유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악을 향해 자유로우며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리 방황하며 그리고 더구나 "은혜의 성령을 모욕하는"(히10:29) 자유입니다.
8. 자유스러우려고 그가 투쟁하고 소원하며 힘쓰면 힘쓸수록 그는 그의 쇠사슬, 죄의 사슬을 느낍니다. 그 사슬로 사탄은 그를 "그의 뜻대로 사로잡아 가두는"(롬7:23) 것입니다. 그는 매우 불만을 품고 있지마는 사탄의 종입니다. 그는 반항하지마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죄 때문에 노예와 두려움의 멍에에 매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질, 습관, 혹은 외적인 어떤 정황에 의하여, 그가 특히 그리고 향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외적인 죄 때문에 거기 얽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떤 내적인 죄, 어떤 나쁜 기질, 혹은 신성하지 않은 장애에 얽매어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것에 대해서 애를 태우면 태울수록, 그것은 승리를 얻고 맙니다. 그는 그의 사슬을 물어 뜯을 수는 있을 것이나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그는 끝없이 애를 씁니다. 회개하고는 죄를 범하고 그리고 또 회개하고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그 가난하고 죄많고 무력한 불행한 인간은 어쩔 줄 몰라서 다만 신음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롬7:24)
9. "율법 아래"(고전9:20) 있으며,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노예의 영"(롬8:15) 아래 있는 사람의 그 모든 투쟁이 앞 장에서(롬7장), 한 깨달은 인물로 말하고 있는 사도에 의하여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었다"(7:9) 나는 굉장하게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동7:9-10) 그 영적 의미에서 계명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의 마음에 왔을 때에 나의 타고난 죄가 발동을 하고 파동을 일으켰고 타올라, 그래서 나의 모든 미덕이 죽어버렸습니다.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할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얻어 나를 속이고 또 그 계명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동 7:10,11) 그것은 부지중에 내게 덮쳐와서 나의 모든 희망을 도륙했고 그리고 분명하게 생명의 복판에서, 내가 죽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거룩합니다. 그리고 계명도 거룩하고 옳고 선합니다."(동7:12) 나는 더 이상 이 계명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의 부패를 탓합니다. 나는 "율법은 영적인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존재로서 팔린 몸이 되어 죄 아래 있습니다."(동7:14) 나는 이제 율법의 영적인 성질과 "죄 아래 팔린"(전적으로 그 주인의 뜻대로 처리되는, 돈으로 산 노예와 같이) 전적으로 노예가 된 나 자신의 육적인 악마와 같은 마음 양쪽을 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동7:15) 이것이 내가 그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노예의 속박이요, 이것이 나의 엄격한 주인의 포박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욕은 내게 있으나 그것을, 이행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동7:18-19)
"여기서 선을 행하려는 의욕을 가진 나에게 악이 들어와 있다는 법칙", 내적 강제적 힘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곧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혹은 동의하고 "있으나" - "속 사람으로는"이란 "마음" 속에서는의 뜻입니다. - "내 지체 속에 다른 법", 또 하나의 강제적인 힘이 있어 "내 마음의 율법", 혹은 속사람에 "대항하여 싸워", 그래서 죄의 "법 또는 권세 아래 나를 사로잡아 가두는 것을 봅니다."(동7:21-23) 그것은 이를테면 나를 정복한 자가 그 전차의 차바퀴로 나를 잡아끌어 내 영혼이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는 바로 그것에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동7:24) 누가 이 무력한, 죽을 운명으로부터, 이 죄와 비참의 노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입니까? 이것이 이루어지기까지에는 "나 자신은 마음" , 혹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 내 마음, 내 양심은 하나님 편이지만 - "육으로는", 육체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동8:25), 내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나는 재촉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고전9;20) 자의 얼마나 생생한 묘사입니까! 그는 떨어버릴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느낍니다. 그는 자유와 능력과 사랑을 갈망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을 품고 노예의 속박으로부터, 그 죽음의 몸으로부터 "누가 나를 구원해 줄 것입니까"(롬7:24) 하고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라"(동7:25)고 대답하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Ⅲ. 은혜 아래 있는 인간
1. 이 가엾은 노예의 속박이 끝나고 그가 그 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롬6:14) 되는 것은 그 때입니다. 세째로 우리는 그 상태를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은혜, 혹은 성령의 능력이 지배하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그는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은 것입니다. "그 영에 의하여" 그는 이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롬8:15)
2. "그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시107:6), 그의 눈은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즉 애정이 깊으시고 은혜가 깊으신 하나님을 보도록 열려집니다. 그가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8:18)하고 부르짖고 있는 동안에, 그는 그 영혼의 깊은 속에서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동33:19) 그리고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시는"(동 34:5) 것도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다음의 사실을 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서가 아닙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동34:6,7)
3. 하늘의 치료하는 빛이 이제 그의 영혼 위에 침투해 옵니다. 그는 "그가 찔러 죽인 그분을 봅니다."(슥12:10) 그리고 " '어두움 속에서 빛이 비쳐 나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에 비추어 주십니다."(고후4:6)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랑의 빛을 봅니다.
그는 감각에 의하여 본 적이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깊이에 대한" 신적인 확신을 가집니다.(히11:1, 고전2:19) 특히 하나님의 사랑, 예수를 믿는 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 광경에 압도되어 그의 영혼 전체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20:28)하고 부르짖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모든 부정이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짊어지신"(갈3:13참조) 분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그의 죄를 제거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제 그는 얼마나 명백히 다음의 사실을 통찰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며 인간들의 죄과를 인간들에게 돌리시지 않고 죄가 없으신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고후5:19,21) 그 자신이 이 계약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여기서 죄의 책임과 죄의 힘이 다 끝납니다. 이제 그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몸으로"(즉 그 죽을 육체에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2:20)
여기서 자책과 마음의 슬픔과 상처난 영혼의 고통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십니다."(요16:20참조) 그가 상처를 냈으나 이제는 그의 손으로 싸매 주십니다.
여기서 또한 저 두려움을 품게 하는 노예의 속박이 끝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주를 믿음으로써 굳게 섰기"(갈5:1참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지금은 그에게서 멀리 가버린 것을 알고 있으며 또 하나님은 더 이상 진노하는 재판관으로 보지 않고, 애정이 깊으신 아버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악마를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악마는 "위에서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권한도 없다."(요19:11)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천국의 상속자이기에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오랜동안 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과거에 그가 "노예가 되"(히2:15) 것입니다. 차라리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집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 집은 우리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인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는 하늘에서 오는 살 집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고후5:1,2)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동5:4) 하기 위해 이 땅 위의 장막을 벗으려고 열망합니다.
"그를 이 일에 합당하게 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 보증으로 성령을 그에게 주셨다."(동5:5)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리고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3:17) 다만 죄의 책임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일 뿐이요, 죄로부터의, 저 모든 속박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으로부터의, 저 모든 노예의 속박의 가장 천한 것으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의 노고가 무익한 것이 아닙니다. 함정은 부서졌고 그는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만 싸울 뿐만 아니요 이기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싸울 뿐만 아니요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죄를 섬기지 않습니다."(롬6:6) 그는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산 자입니다."(동6:11) 그는 "죄가 그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육체의 욕정에 굴복하는 일이 없습니다."(동6:12) 그는 "지체를 죄에 내어주고 불의의 도구가 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체를 하나님께 바쳐 의의 도구가 되게 합니다."(동6:13) 왜냐하면 그는 "이제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동6:18)
6. 이와 같이 "우리 주 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으며"(롬5:1)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할 것을 바라면서 기뻐하는 것이며"(동5:2), 모든 죄, 모든 악의, 욕망, 기질, 말 행위를 지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동8:21)의 산 증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같은 귀한 신앙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한 소리로 증언합니다. "우리는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에 의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동 8:15)
7. 이 성령께서 끊임없이 "그들 속에서 활동하셔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시는"(빌2:13) 것입니다.
이 영이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전 인류의 사랑을 그들의 마음 속에 부어 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은 이 세상의 사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생활의 자랑으로부터 정화되는 것입니다. 이 영으로 인하여 그들은 분노와 교만으로부터, 모든 비열한 그리고 무절제한 정욕으로부터 구출을 받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악한 말과 행위로부터, 모든 거룩지 않은 생활 양식으로부터 구출 받습니다. 어떤 사람의 자손에게도 전혀 악을 행하지 않으며 모든 선한 행위를 하는 데 열중하기 때문입니다.
8. 이상의 모든 것을 요약한다면 자연적인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됩니다. 첫째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조금도 빛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전혀 어두움 속을 걷습니다. 둘째의 사람은 고통스러운 지옥의 불빛을 봅니다. 셋째의 사람은 기쁜 하늘의 빛을 봅니다.
죽음 속에서 잠자고 있는 자는 거짓 평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자는 전혀 평화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믿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 마음을 채워 지배하므로 참된 평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든지 혹은 받지 않았든지 이교도는(세례를 받은 이교도란 일찌기 세례를 받았지만 이제는 전혀 이교도로 살고 있는 사람의 뜻 - 역자 주) 상상의 자유 - 그것은 실상 방종이지만 - 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 혹은 유대교가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는 섭리 아래 있는 사람은 무겁고 슬픈 노예의 속박에 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참된 빛나는 자유를 즐깁니다.
깨어나지 않은 악마의 자녀는 즐겨 죄를 범합니다. 깨어 있는 자는 내키지 않게 죄를 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범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 주시므로 악한 자가 그를 다치지 못합니다."(요일5:18)
결론을 말한다면 자연적인 사람은 정복하는 일도 없으며 싸우는 일도 없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싸우지만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싸워서 정복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롬8:37)
Ⅳ
1. 인간의 삼중 상태, 즉 자연적인 상태, 율법적인 상태, 복음적인 상태에 대한 이상의 간단한 설명에서 인류를 진지한 사람들과 진지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이상의 상태의 어느 쭉에 속하든지 간에 사람은 진지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가졌을 때만이 아니요 그가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노예의 영"을 가졌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성의 있는 유대교도, 혹은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진지한 이교도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정황은 결코 사람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성실하냐 어떠냐 만이 아니요 "당신들은 과연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반성하고 자기를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고후13:5) 무엇이 당신의 영혼 속에서의 지배적 원리인가 정밀하게 검토해 보시요.(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에게 크게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닙니까? 그것은 오히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유대인의 상태까지도 와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다만 이교도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마음 속에 하늘을 지니고 있습니까? 당신은 아바 아버지라고 늘 부르는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슬픔과 두려움에 압도되어 "음부의 뱃속에서"(욘2:2) 처럼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입니까? 혹은 당신은 이 모든 사항에 서툴러서 내가 의미하는 바를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까? 이교도여, 가면을 벗으시요! 당신은 결코 그리스도를 옷입지 않았습니다. 가림 없는 얼굴로 서시요. 그리고 영원히 살아 계신 분 앞에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나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에 전혀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는 것을 고백하시요.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문제는 당신이 죄를 범하는가 혹은 죄를 범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만일 죄를 범한다면 즐겨서 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어서 입니까? 어느 경우이든지 하나님은 당신에게 당신이 누구에게서 나온 자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요일3:8) 만일 당신이 즐겨 죄를 범한다면 당신은 악마의 충실한 종입니다. 악마는 당신의 노고에 보답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내키지 않게 죄를 범한다면, 그래도 여전히 당신은 그의 종입니다. 악마의 손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구출하십니다.
당신은 날마다 모든 죄에 대하여 싸우고 있습니까? 그리고 날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까? 나는 당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합니다. 아 당신은 빛나는 자유 안에 굳게 서시요.
당신은 싸우고 있으나 정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승리를 얻고자 애를 써도 얻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계속 따라가시요. 그러면 당신은 주를 알 것입니다.
당신은 조금도 싸우지는 않고 도리어 안이하고 게으른 유행의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까? 아, 어떻게 당신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서 말하는 일을 감히 할 것입니까? 그것은 단지 이교도 사이에서 그 이름을 비난 받게 할 따름이 아닙니까? 깨어나시요. 당신 잠자는 자여! 심연이 당신을 삼켜버리기 전에 당신의 하나님을 부르시요.
2. 아마도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평가 이상으로 자기를 높게 생각하는가, 왜 그들이 그 실상을 통찰하지 못하는가 하는 사실의 하나의 이유는 그들 몇몇 영혼의 상태가 가끔 함께 섞여 있고 또 어느 정도 동일인 안에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처럼 경험은, 율법적 상태 혹은 두려움의 상태가 가끔 자연적인 상태와 섞여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그처럼 깊이 잠자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적은 것이요, 그들은 때로는 다소라도 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부르짖음을 기다리지"(미5:7)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은 들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적어도 잠시동안 이교도가 "자기들은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사44:11)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두려움 가운데 둡니다. 그들은 죄의 중하를 느끼고 또 진정으로 장차 올 진노로부터 도피할 것을 열망합니다. 그러나 오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좀처럼 죄의식의 화살이 그 영혼 깊이에 꽂혀지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신속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질식시켜서 진흙 속에 그들이 딩구는 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복음적 상태 혹은 사랑의 상태는 흔히 율법적 상태와 섞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을 품게 하는 노예의 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언제나 희망 없이 머물러 있는 자는 적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드물게 밖에는 이 사실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시103:14) 하나님은 "육체 혹은 자기가 만드신 영이 자기 앞에서 소멸되는 것"(시142:3 참조) 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좋다고 생각되셨을 때에 하나님은 흑암 속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새벽의 빛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선의 일부분을 그들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고, 그래서 자신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시65:2)이신 것을 보이십니다. 비록 그들은 아직 저 멀리에 있지마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에 의한, 그 약속을 봅니다.(미7:7-9) 그 사실로서 그들은 "그들 앞에 놓인 경주의 길을 견디며 달려 가도록"(히12:1) 격려를 받습니다.
3.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속이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인간은 꽤 멀리까지 가더라도 그래도 아직 자연적인 혹은 고작해야 율법적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동정심이 많고 또 자비심이 풍부한 기질의 소유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상냥하고 예의 바르며 관대하고 친절한 인간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온유, 인내, 절제를 가졌고 다른 도덕적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모든 악덕을 떨어버리고 보다 높은 정도의 미덕에 도달하려고 하는 많은 욕구를 느낄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많은 악을, 아마도 정의, 자비, 혹은 진리에 몹시 반대되는 모든 것을 끊을는지 모릅니다. 그는 많은 선을 행하여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사람에게 의복을 입히며 과부나 고아들을 돌볼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공중예배에 출석하고 사생활에서 기도를 사용하며 많은 신앙서적을 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역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도 하나님도 모르는 단지 자연적인 인간일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는 회개한 일도 없고 또 복음을 믿은 일도 없고 두려움을 품게 하는 영에 대해서도 또는 사랑의 영에 대해서도 모두 미지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령 이런 모든 것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크게 두려움을 품게 하는 깊은 죄의식, 모든 죄를 내던지고 모든 의를 완성시키려는 열렬한 욕구, 희망 안에서의 빈번한 희열과 종종 그 영혼에 언뜻 번득이는 사랑의 접촉이 가해졌다 해도, 그래도 여전히 그러한 일도 인간이 은혜 아래 있으며 참되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질 수 있는 일은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이 그의 마음 속에 머물러서 그가 끊임없이 "아바, 아버지"(롬8:15)라고 부를 수 있을 때가 되고 부터 입니다.
4. 그러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당신은 당신의 높은 소명의 목표에 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요. 당신은 선량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자연적인 상태 안에 머물러 버린다든지,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높임을 받는 사람들이 보통 그런 상태로 살다가 죽는 저 율법적 상태 안에 머물러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달성하기까지 계속 따라간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더 좋은 것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악마와 같이 두려워 떨기 위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의 천사들처럼 기뻐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눅10:27) 당신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살전5:16-18)하게 될 것이요, 당신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 당신은 "무엇이 선한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또 온전하신 뜻인가를"(롬12:2) 입증해야 합니다. 이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요."(동12:1)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빌3:13) "이미 얻은 바를 굳게 잡아"(동3:16)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당신을 온전케 하사 하나님 보시기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 속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히1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