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 롬 10 : 5 - 8 )
1. 사도는 여기서 모세에 의해 주어진 계약을,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언약과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다음의 사실을 관찰하는 일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의 뒤엣 부분도 앞의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모세 자신에 의하여 말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당시에 있었던 언약에 관해서 입니다(신30:11,12,14).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 성 바울이 여기서 행위의 언약(the covenant of works)과 대립시키고 있는 것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상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확립하신 은혜의 언약(the covenant of grace)입니다. (이 은혜의 언약은 하나님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이래로부터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교 시대(the jewish dispensation) 이전의 사람들 또 유대교 시대의 사람들을 상대로, 즉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상대로 확립된 것이다).
행위의 언약은 낙원에 있었을 때의 아담을 상대로 맺으신 것이지만, 그러나 흔히들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해서 하신 유일한 언약이라고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 사도의 편지상대인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이 장 처음에 사도가 그렇게도 애정이 넘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을 향한 나의 간절한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열성에 대하여는 나도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지식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와 긍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즉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거저 용서하시는 칭의)를 알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의(그들의 용서와 용납의 기반으로서-불경건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분을 믿는 믿음에 우선하는-그들 자신의 거룩함)을 세우려고 애쓰며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의에 복종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생활방식의 잘못으로 인하여 죽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를 위하여(for rightousness) 율법의 끝마침이 된다"(롬10:4)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단한번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최초의 율법 혹은 언약 - 실제로는 이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모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요 천진무구한 상태에 있던 아담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을 종결지으신 것입니다. (이 최초의 율법 혹은 언약의 엄격한 취지는, 조금도 경감없이 "이것을 하라 그리고 살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를 위해서 좀더 좋은 언약, 즉 "믿으라 그리고 살라"를 획득하셨습니다. 믿으라, 그리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는 죄의 책임과 죄의 힘 쌍방으로부터 구원받고 그 결과 죄값으로 부터 오는 결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좋은 언약을 그리스도께서 획득해 주신 것입니다.
4.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인간 사이에서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무지한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지만 그 열심이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하나님께 용서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한 기반으로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롬10:2-3) 여전히 애쓰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의에 복종시키는(롬10:3) 일을 격렬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확신컨대 형제들이여, 내 마음의 소원과 당신들을 위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당신들이 구원을 얻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길로부터 이 커다란 거침돌을 제거하기 위하여, 나는 다음의 사실을 보여주려고 힘쓰고 싶습니다. 그 첫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10:6)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요, 그 둘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일의 어리석음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복종하는 일의 지혜로움입니다.
Ⅰ
1. 먼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말합니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산다고"(롬10:5참조). 끊임없이 완전히 율법의 모든 것을 행하고 준수한다면, 그 때에 당신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율법 혹은 언약(보통은 행위의 언약이라고 말하지만)은, 낙원에 있었던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며 부족함이 없는 복종을, 인간이 그 지음 받던 때의 거룩함과 행복 안에 영원히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 요구한 것입니다.
2.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의, 즉 내적, 외적인, 또는 소극적 또는 적극적인 의를 성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헛된 말을 끊고 모든 악한 행위를 피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애정, 모든 욕망,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은 그 마음과 모든 생활양식에서 인간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과 같이, 계속 거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정결하신 것처럼, 인간은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처럼 완전해야 합니다. 인간은 주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영혼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 보편적인 자애심에 의해 인간은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사실 것입니다. 인간은 힘을 다하여 주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일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해야합니다.
3. 이것이 율법의 의가 요구하는 사항이었습니다. 이것들을 행한 자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하나님에의 전적인 복종, 내적 외적 거룩함, 그 마음과 생활의 하나님의 뜻과의 일치가, 그 정도에 있어서, 완전할 것이 더욱 요구되었습니다.
외적 혹은 내적인, 어떠한 율법의 어떠한 사소한 점이나 제목에 관한, 어떠한 정도의 모자람도 그것을 위한 항변이나 참작은 전연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가령 외적인 사항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다 지켜졌다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가 최고의 정도,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지켜지지 않은 한, 아직 그것으로도 충분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또 각자의 전 능력으로 영혼의 전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힘을 다하고 능력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이 언약의 요구에 그것이 부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4. 또 하나의 사항이 율법의 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즉 이 온전한 복종, 그 마음과 생활 양자의 완전한 거룩함은 또한 연속된 것이요 전연 중단이 없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은 순간부터 그의 시련의 날들이 끝나고 영원한 생명 안에서 그가 확증될 때까지 죽 계속되어야 합니다.
5.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당신이여, 사랑안에, 당신이 만들어진 그 하나님의 형상 안에 굳게 서시요. 만일 당신이 생명 안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마음 가운데 이미 씌여져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시요. 마음을 다하여 주되신 당신의 하나님을 사랑하시요. 당신 자신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영혼을 사랑하시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마시요. 생각, 말, 행동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목표로 하시요. 육체나 영혼의 한 움직임에 있어서까지도 당신의 목표인 하나님으로부터 또는 위로 부르신 하나님의 상급으로부터 벗어나지 마시요.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당신의 영혼의 모든 힘과 능력으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사항에서 또는 모든 정도에서 당신의 존재의 각 순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게하시오.
'이를 행하시요. 그리하면 당신은 살 것입니다.' 더욱 더 당신의 빛은 빛나고 당신의 사랑은 불타오르게 되어 마침내 당신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지배하기 위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궁전에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6.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끌어 내리는 것이요"(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미리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도록 요구하신 어떤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또 '누가 깊음 속에 내려갈 것이냐고도 말하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것이다"(마치 이것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 아직 남아 있는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그러면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이 말씀의 취지에 따라 당신이 이제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로 받아들여지도록 말입니다.) "이 말씀이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롬10:6-8). 즉 이 말씀이란 바야흐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죄 많은 인간을 위해 이미 확립하신 새 언약입니다.
7.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10:6)란 하나님의 독생자의 공로과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저 칭의의 조건(및 그 결과로서의 현재의 구원이요 또 만일 우리가 그 안에서 끝까지 참고 견디면 주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타락 후 얼마 안되어 아담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즉 "뱀의 머리를 상할"(창3:15) 여인의 후손에 관하여 아담과 그 후손에게 하신 처음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좀 더 분명하게 하늘로부터의 하나님의 천사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그 천사는 말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창22:16-18). 그 사실은 더욱 충분히 모세나 다윗이나 그 뒤를 잇는 예언자들 또 그들을 통하여, 각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인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사람들(하나님의 백성) 까지도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소수자 밖에는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생명과 불멸"이 옛 유대인들에게는 현재 그것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러한 것처럼은 아직까지 "밝히 드러나지"(딤후1:10) 않았던 것입니다.
8. 이제 이 언약은 죄 많은 인간에게 "죄 없는 복종을 수행하여 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조건이라면, 죄인은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셨고 고통 받으셨던 모든 일에 의해 전연 유익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생명에 이르기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끌어 내리는 일"이나 혹은 "밑을 모르는 곳", 보이지 않는 세계 "속으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릴 것"(롬10:6,7)을 요청 받는 일과 같은 일입니다. 이 계약은 불가능을 행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에게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도움을 받는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연약함을 비웃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실상 엄밀하게 말해서, 은혜의 언약(the covenant of grace)은 우리가 칭의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전연 아무 것도 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의 독생자와 그가 이룩하신 화목제물 때문에, "행한 것이 없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며"(롬4:5), 그의 신앙을 그에게 의로 돌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즉 그처럼 아브라함은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15:6). "그리고 아브라함은 할례라는 표를 받았으나 그것은 믿음의 의의 증표이요 그가 … 믿고 의롭다하심을 받기에 이르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롬4:11).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들도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즉 신앙이 의로 인정되며,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신앙(faith)이 완전한 복종(perfect obedience)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주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의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4:23-25). 주는 우리의 죄 용서를 확실하게 하시기 위하여, 믿는 자에게 대해서의 장차 올 둘째의 생명을 확실하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사신 것입니다.
9. 그러면 용서의 언약, 거저 주시는 사랑의 계약, 용서하시는 긍휼의 언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요. 그리하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 16:31)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믿는 날에, 당신은 확실히 살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호의를 다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당신은 저주로부터,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은 죄의 죽음에서 의의 생명에로 살리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예수를 믿는 가운데 끝까지 참고 견디면 당신은 결코 둘째 사망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주와 함께 고난을 받은 후에 당신도 영원히 주와 함께 살며 또 왕노릇할 것입니다.
10. 이제"이 말씀은 당신에게 가까이 있습니다"(롬10:18). 이 생명의 조건은 분명하고, 쉽고,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은 당신의 입에 있고 당신의 마음에 있습니다"(동). "당신 마음으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를 "믿고, 자기 입으로 주 예수를" 당신의 주, 당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에,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롬10:9)
정죄로부터, 당신의 과거의 죄의 책임과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고 또 당신의 생애의 모든 남은 날동안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힘을 소유할 것입니다.
11. 그러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롬10:5)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10:6)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최초의 언약, 즉 행위의 언약과 둘째의 은혜의 언약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본질적인 불변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전자는 그것이 주어진 상대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며 하나님의 총애를 즐기고 있는, 이미 거룩하고 행복한 인간으로 가정하고, 그가 그 안에서, 즉 사랑과 기쁨, 생명과 불멸 안에서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을 정하고 있습니다.
후자는 그것이 주어진 상대인 인간이 현재 거룩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에서 멀어져 있어, 그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으며, 그의 영혼은 죄에 의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죄를 통하여 육체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급히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은혜의 계약은 인간이 그 잃어버린 진주를 되찾고 하나님의 호의와 형상을 회복하여,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만회하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인 그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에 복귀시키기 위한 조건을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다시 말해서, 행위의 언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호의,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거룩함과 행복 안에 존속하기 위한 조건으로, 완전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점에 대한 완전한 그리고 끊임없는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은혜의 계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호의와 생명을 회복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오직 믿음만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복종치 않은 자를 의롭다하시는 분에의 산 신앙만을 요구합니다.
13. 다시 거듭 말하자면, 행위의 언약은 아담과 그 모든 아들들에게 자기들로서 값을 지불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여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미래의 축복을 다 받도록 됐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언약에서는, 우리에게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하나님은 아시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솔직히 용서해 주시는"(눅7:42)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대신 값을 지불해 주신 분을 믿는다는 유일한 조건 위에서의 일입니다마는, 그분은 자신을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제물"(요일2;2)로 주신 것입니다.
14. 이처럼 최초의 언약은 이제는 모든 사람의 자녀들로부터 아주 거리가 먼 것을 요구했습니다. 즉 죄 없는 복종을 요구한 것이요 그것은 "죄 중에 잉태되고 죄악 중에 출생된"(시51:5) 자들로부터 먼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둘째의 언약은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을 요구합니다. 마치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당신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긍휼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의 하나님께로 가지고 오라. 그것들은 구름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경건하지 않다면, 불경건한 자로서의 당신을 의롭다하실 여지가 하나님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앙의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가까이 오십시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은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십시요!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시기' 때문이다.
Ⅱ
1. 이러한 일을 고려해 본다면, 내가 둘째로 하려고 제안한 바와 같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롬10:5)를 의뢰하는 일의 어리석음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10:5)에 복종하는 일의 지혜로움을 보이는 일은 쉬운 것입니다.
여전히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롬10:5) -그 조건은 "이를 하라. 그리고 살라"이지만-를 끊임없이 의뢰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다음의 사실에서 풍부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첫걸음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언약의 조건으로 어떤 복을 조금이라도 요구할 권리를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 이면에는, 그 언약이 성립된 그 당시의 상태에 자기들이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헛된 추측인 것입니까! 그 언약은 무죄의 상태에 있었던 아담에게 대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토대 위에 서 있는 이 건물 전체는 전적으로 연약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모래위에 세우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들은 결코 행위의 언약이 "허물과 죄를 죽었던 사람"(엡 2:1)에 대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고 죄를 전연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했을 때에 그 사람에 대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것이 한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호의와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요, 그것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완전하게 될 때까지, 그것을 존속시키고 증가시키기 위해 의도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2. 또 이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자기 자신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율법이 불가결한 것으로 요구하는 복종 혹은 의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점에서도 완전하며 전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들 가운데 누가 그러한 복종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혹은 그 결과로 그것으로 살 수 있습니까?
당신들 중의 누가 하나님의 외면적 명령일지라도 그 일점일획까지 모두 다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대소를 불구하고 하나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행하지 않고 버려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무익한 말은 전혀 하지 않고, 당신의 회화가 언제나 듣는 사람들에게 은헤를 주기에 합당하여, 당신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고전10:31) 있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내면적 명령의 모두를 성취하는 일은 훨씬 당신에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내적 명령은 당신의 영혼의 기분이나 움직임이 모두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눅10:27), 전 인류를 당신 자신의 영혼과 같이 사랑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실전5:17-18), 하나님을 항상 당신 앞에 모시며, 모든 애정, 욕망, 생각을 하나님의 율법에의 복종안에서 보전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까?
3. 더우기 당신이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의 의는 소극적, 적극적으로, 내적, 외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한 정도에서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율법의 소리는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눅 10:27)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경감도 허용하지 않으며, 어떤 부족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복종의 완전한 척도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정죄하는 것이어서, 그 위반자에게는 즉시 저주를 선고합니다. 그것은 정의의 변치 않는 여러 규칙만을 존중하는 것으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한다"(렘13:14)고 말합니다.
4. 그러면 "잘못한 일을 지적하는 일에 극히 엄격한" 그러한 재판관(Judge) 앞에서 누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거기서는 "모든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는"(롬3:20) 아담의 자손은 아무도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할 그러한 법정에서 심문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얼마나 무력합니까? 왜냐하면 가령 우리가 진정 힘을 다하여 이제 모든 명령을 지켰다 해도, 오히려 일찌기 저지른 유일한 위반이 생명을 요구할 우리의 권리 전체를 철저히 파멸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는 한 점에서라도 범한 일이 있다면, 이 의는 끝장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완전한 동시에 끊임없는 복종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 모두를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판결에 따른다면 어떤 정도라도 일찌기 죄를 범한 일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집어 삼킬 무서운 불을 두려워하면서 기다리는 것만이 있습니다."(히10:26-27)
5. 그러니, 타락한 인간, "죄악 중에서 출생하고 모친이 죄 중에서 그를 잉태한"(시 51:5) 그 사람이 이 의로 인하여 생명을 찾아 구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 중의 어리석음이 아닙니까? 인간은 본래 전적으로 "땅에 속한 것이요, 육에 속한 것이요, 악마에 속한 것"(약3:15)으로 전적으로 "부패하고 혐오할 만한 것"(약3:16)입니다. 인간은, 그가 은혜를 발견하기까지는, "아무런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롬7:18). 아니 그 뿐만이 아니요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의 선한 생각까지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실로 전적으로 죄요, 순전히 불경건 덩어리요, 자기가 들여마시는 매 숨결마다 죄를 범합니다. 말이나 행실로 그가 저지르는 죄악은 머리털보다도 수가 많습니다. 이러한 불결한, 죄 많은,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자기 자신의 의에 의해 하나님께 받아 들여지기를 추구하려고, 즉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롬10:5)로서 살려고 꿈꾼다는 것은 그 무슨 우둔이며 그 무슨 몰지각한 일입니까?
6. 이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동)를 신뢰하는 일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사정은 "신앙에 의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롬3:2)에 복종하는 일의 현명함을 동일하게 증명합니다. 앞서의 각 고찰에 유의하면 이 사실은 쉽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만 두고라도, 이 의의 길에 제 일보를 내딛는 일의 슬기로움,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일의 현명함은 다음의 사실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즉 진리를 따르며, 사물의 참된 본질을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참된 상태를 입술로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인정하는 일 이외의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이 세상 속으로 부패한 죄된 본성을 가져온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본성의 부패는 실상 우리가 쉽게 상상한다거나 표현할 말을 발견한다거나 할 수 있는 이상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모든 악한 것에로 향하는 경향이 있고 모든 선한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교만, 자의, 통제할 수 없는 격정, 어리석은 욕망, 천박하고,무절제한 애정으로 가득차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상으로 이 세상이나 쾌락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는 우리의 마음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니며 많은 점에서 불경건하며 부정한 것입니다. 그 정도는 말과 행위에서의 우리의 실제적인 죄가 하늘의 별처럼 많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모든 점에서 우리는 부정을 보시기에 못견디시는 순결한 눈을 가지신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존재요, 또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당연한 삯인 분격과 진노와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받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우리의 의로서도(왜냐하면 우리는 전연 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우리의 행위로도(왜냐하면 그것들은 그것들이 자라난 나무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한다든지 혹은 우리가 정당히 받기에 합당한 형벌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만일 우리에게 내맡겨진다면 악한 행위 그리고 육적인 마음의 악한 기질로 인하여 우리는 더욱 더 악해지고 죄에 점점 더 깊이 빠지며 더욱 하나님을 진노케 할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부정의 되를 채우고 우리 자신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래의 상태 그 자체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사실을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다 인정하는 일, 즉 우리 자신의 의, 곧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롬10:5)를 거부하는 것은 사태의 진상을 따라서 행동하는 일이요, 따라서 참된 지혜의 실례입니다.
7. "믿음에 의한 의"(롬10:6)에 복종하는 일이 현명하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분명합니다. 내가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선택되어 세워진 하나님과의 화해의 방법이라는 일입니다.
그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지으신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주권적인 주님이십니다.
이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지성이 전혀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자기보다 더 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왕국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과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모든 것을 묵종하는 일, 그 일에서도 다른 모든 사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선하게 생각하시는 바를 행하시게 합시다"(삼상 3:18)고 말하는 것이 참된 현명함이요 건강한 이해의 표적입니다.
8. 다음과 같은 것이 더욱 고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을 당신 자신과 화해할 어떤 방법을 주신 일,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져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기억으로부터 전혀 도말돼버리지 않은 것은, 순전한 은혜, 자유로우신 사랑, 분에 넘치는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하시려고 지정하신다 해도, 하나님의 부드러우신 긍휼, 그의 값없이 주시는 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감사로써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의심 없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으로 그처럼 강하게 하나님을 반항하였고 그처럼 오랜 동안을 그리고 완강하게 하나님을 반역해 왔습니다. 그러한 우리일지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그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목전에서 아직도 호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9. 한 가지만 더 고려해 볼 것을 들어봅시다. 최상의 수단으로 최고의 목적을 겨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제 어떤 피조물이든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피조물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의 호의와 형상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호의 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는 최선의, 실로, 하늘 아래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수단은 "믿음에 의한 의"(롬10:6)에 복종하는 일,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호의야말로 생명 그것보다도 귀한 것이요, 이 하나님의 형상이야말로 영혼의 진정한 생명인 것입니다.
Ⅲ
1. 그러므로 당신이 누구시든지 간에 만일에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호의에로 화해할 것을 소원한다면, 당신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마십시요. "나는 먼저 이것을 해야 한다. 나는 먼저 모든 죄를 정복하고 모든 악한 말과 행위를 끊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선을 행해야 한다. 혹은 나는 먼저 교회에 가서, 주의 성찬을 받고, 더 많은 설교를 들으며,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고.
아 나의 형제들이여, 당신은 전연 길에서 벗어나 버렸읍니다.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당신의 화해의 기반으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쓰고"(롬10:3)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기까지는 당신은 죄짓는 일 이외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나는 먼저 이것과 이것을 해야 한다. 그러면 나는 믿을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고, 먼저 믿으시요. 당신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요. 이 선한 토대를 먼저 놓으시요. 그리하면 당신은 모든 일을 훌륭히 하게 될 것입니다.
2. 또 당신은 마음 속으로 "나는 아직 받아들여질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충분할 만큼 선량하지 못하기 때문에"라고 말해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받아들여지기에 합당할 만큼 누가 충분히 선량합니까? 또 그런 사람이 존재한 적이 있습니까? 대체 거기에 합당한 충분할 정도의 선량한 인간이 아담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었읍니까? 혹은 모든 것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도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에게 이르러 보아도 조금도 선량하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는 아무 선한 것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예수를 믿을 때까지는, 당신은 결코 선하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오히려 당신은 더욱 더 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받아들여질 자격을 얻기 위하여 이 이상 악하게 될 필요가 대체 있는 것입니까? 당신은 이미 넉넉할 정도로 나쁘지 않습니까? 실로 당신은 그같으며 하나님도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체하지 마십시요. 이제 모든 것은 준비돼 있습니다. "일어나, 당신의 죄를 씻어 버리시요."(행22:16) 샘은 열려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어린 양의 피로 당신을 희게 씻을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어린 양은, "우슬초를 가지고" 하듯, 당신을 "정결케 해 주시고" 당신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씻겨 주시고" 당신은 "눈보다 희게 될" 것입니다.(시51:7 참조)
3. "그러나 나는 넉넉할 만큼 깊이 죄를 뉘우치고 있지 않다, 나는 넉넉할 만큼 내 죄를 느끼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마시요.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당신이 자신의 죄를 현재의 천배라도 느끼고 천배라도 깊이 뉘우쳐 주었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되어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믿기 전이 아니요 믿은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당신을 그렇게 해 주실른지도 모릅니다.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당신은 많이 우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를 바라보십시요. 보시요 얼마나 그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이 이상 그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아 하나님의 어린 양이여,
당신이 맛보신 고통이
사랑이
일찌기 있었습니까?
예수께서 당신을 보시고 당신의 굳은 마음을 타파하기까지, 예수를 견실하게 바라보십시요. 당신의 굳은 마음이 깨뜨려질 때에는 당신의 "머리"가 "물"이 되고 "당신의 눈이 눈물 근원"이 될 것입니다(렘9:1).
4. 또한 당신은 "그리스도에게 가기 전에 나는 좀더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도 말하지 마시요. 확실히 만일 당신의 주님이 오심을 지체하신다고 가정한다면, 주님이 당신에게 명한 것을 모두 힘껏 하면서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일이야말로 적당하고도 옳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정을 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주님이 더디실 것이라고 어떻게 당신은 아십니까? 아마도 주님은 높은 곳으로부터 동틀녘처럼, 아침 햇빛에 앞서, 먼저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이쪽에서 시간을 지정하지 마시요. 매 시간 그를 기다리시요. 이제 주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이미 문 앞에 오셨습니다!
5. 그리고 무엇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죄가 도말되기에 앞서, 더 이상의 성실성을 가지도록 기다리려고 하십니까?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더 합당한 자로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 당신은 여전히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롬 10:3)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당신이 거기에 합당하기 때문이 아니요 그분의 불쌍히여기심이 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의로웁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실성 안에 무슨 선한 것이 있다고 하면, 왜 당신은 그것을 신앙을 갖기에 앞서 기대하십니까? 왜냐하면 신앙이야말로 참으로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의 유일한 뿌리입니다.
특히, 당신은 얼마나 오랜 동안 다음의 일을 잊으려 합니까? 당신의 죄가 용서 받기 앞서서, 당신이 하는 모든 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당신의 죄 용서를 획득함에 있어서 하나님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당신의 등뒤로 내던져지고 발로 밟혀지며 무시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호의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는 순전한 죄인, 즉 죄 많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파멸된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공적 이외에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아무 것도, 드릴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당신을 사랑하사 그 자신을 당신을 위해 주셨습니다"(엡5:25 참조)
6.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사람이여,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당신은 자기 자신 안에 사망의 선고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을 정죄된 죄인으로 당신 스스로 느끼고 있고, 당신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를 행하라" - 즉 내 모든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라 - "그리하면 살 것이다."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말씀은 당신 가까이 있습니다(롬10:8) 지금, 이 즉시, 지금 이 순간에, 그리고 당신의 현재 그 상태로, 당신은, 죄인으로서, 다만 죄인으로서 복음을 믿으시요. 그 때에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겨,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히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