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종교를 가진 분들에게 드리는 진지한 호소
(An Earnest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번역 : 내리감리교회 김흥규 목사님
1. "당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cf. 고전 4:3)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라" (cf. 시 37:6, B.C.P.)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귀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우리의 원리와 행위에 대하여 명료한 설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기를"(cf. 고후 4:2) 바랍니다.
2. 우리는 동료 피조물들의 수없이 많은 과오와 곤궁을 압니다--이를 누가 모르리요. 종교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나 무기력한 형식뿐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간에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몹시 슬퍼하며 더 나은 종교, 즉 종교를 주신 하나님께 합당한 그런 종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확신시킬 수 있다면 분명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이 종교는 사랑, 즉 하나님과 온 인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부여받은 모든 선과 우리가 향유하기 원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주 하나님을 우리의 온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영혼, 곧 지상의 모든 인간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믿기에 이 사랑이야말로 무질서한 세상이 쏟아내는 모든 악과 인간의 모든 곤궁과 악덕을 위한 삶의 명약이요 불패의 치료가 됩니다. 이 사랑이 있는 곳마다 미덕과 행복이 손에 손을 맞잡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하나님의 모든 형상과 동시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cf. 골 3:12; 빌 4:7; 벧전 1:8)이 있게 될 것입니다.
티하나 없는 영원무궁한 햇빛; 드리는 기도마다 응답되고 모든 소원이 단념된다;. . .욕망은 사라지고 애정은 한결같고, 환희의 눈물, 그리고 하늘에 감도는 탄식.
4.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길 고대하는 종교, 즉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영혼 깊은 곳, 마음에 터잡고 항상 그 열매로 자신을 보여주고, 모든 순진무구함에서 끝없이 분출될 뿐 아니라--왜냐 하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모든 종류의 선행에서 분출되며, 미덕과 행복을 도처에 퍼뜨리게 됩니다.
5. 많은 사람들이 아는 그대로 증언해 줄 수 있다면 바로 이 종교가 여러 해 동안 우리가 추구해 온 그런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내내 우리는 지혜를 구했지만 찾지 못했고 우리는 기력을 헛되이 소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전적으로 확신하면서 이 사실을 온 인류에게 선언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방황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가 겪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서 사랑의 종교, 심지어 믿음에 의한 종교에 이르는 좁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그 당시 누구도 우리를 이 길로 인도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그렇게 하지 못했을 망정) 바랍니다.
6.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정할 때)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 즉 육신의 눈이나 우리 육신의 어떤 감각 기관으로도 인지할 수 없는 것들의 증거(cf. 히 11:1)--가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증거인데 이로서 영적인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식별하게 됩니다. 감각이 자연 세계에 관련된 것 같이 믿음은 영적 세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모든 영혼의 영적 감각입니다.
7. 아마 당신은 믿음을 이런 시각에서 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하고 싶습니다. 성서에 따르면 믿음은 새로 난 영혼의 눈입니다. 이에 의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히 11:27) 합니다. 그 결과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까닭에 더욱 특별한 방법으로[딤후 1:10]) 참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을 보며 "아버지께서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요 1서 3:1) 보게 됩니다.
믿음은 영혼의 귀인데 이로써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게 되며"(cf. 요 5:25),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cf. 막 2:5) 말씀하시면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음성조차 듣게 됩니다.
(내가 만일 이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믿음은 영혼의 미각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써 신자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cf. 히 6:5),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며 알고"(cf. 시 34:8; 벧전 2:3), 실로 "죄인에게 향하신 자비로우심을"(cf. 눅 18:13) 맛보아 알게 됩니다.
믿음은 영혼의 느낌이며 이로써 "신자를 덮으시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cf. 눅 1:35)을 통하여 "신자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게 되는"(행 17:28) 주 하나님의 존재와 현존하심을, 그리고 모든 보이지 않는 세계와 영원한 것들의 전 구조를 알게 됩니다. 특히 이로써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cf. 롬 5:5)을 느끼게 됩니다.
8. "이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마음의 모든 불안과 상처받은 영혼의 격통, 불만족, 두려움, 슬픔, 그리고 여러 해 동안 특히, 이 세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고요한 명상에 잠길 때,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겪은 바, 이 세상과 우리 자신 속에 있는 표현할 수 없는 무기력증과 권태로부터 해방됩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헛되이 구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온 인류의 사랑을 발견케 됩니다. 이 믿음이--우리가 알고 느끼기에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죄와 곤궁, 모든 불행하고 불경한 성품으로부터 해방되어 이 구원에 동참하는 만인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부드러운 평화가 깃들고 우리의 생명을 만들 듯이 우리의 평화를 짓고; 까탈스러운 성격의 거친 길 위에 저녁을 허락해주고 각 사람의 가슴 안에 작은 천국을 연다.
9. 만일 당신이 "그렇다면 모든 이들이 왜 이러한 믿음을 갖지 않는가? 적어도 이 구원이 매우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품은 모든 이들이 왜 이 믿음을 갖지 않는가? 왜 즉각적으로 믿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면, (성서적 가정 위에서) 우리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이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전능하신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믿음은 무덤 속에 누운 시신을 다시 살리는 능력에 버금가는 바 죽은 영혼을 일깨우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새로운 창조이며 하늘과 땅을 처음 창조하신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영혼을 새롭게 창조할 수 없습니다.
10. 당신 자신의 체험이 이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당신이 이 믿음을 당신 자신에게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거나 듣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지금 당신 자신의 능력 안에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 속에 하나님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어떤 지각을 이미 가졌거나 가질 수 있습니까? 나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만년의 불쌍한 헤시오드(Hesiod)가 잘 알려진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을 때 당신은 이것을 기독교의 교육에 대한 편견 탓으로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건 잠들어 있건 간에 수백만의 보이지 않는 영적 피조물들이 지상을 걷는다.
이제 당신의 영혼 속에 이러한 영적인 피조물들이나 이 피조물들을 지으신 분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혹은 당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으로 당신 자신과 영들의 세계 사이의 교통을 열 수 있습니까?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장막을 부수고 영원의 빛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알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렇게 믿지도 않고 또 믿을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확신케 될 것입니다.
10. 당신 자신의 체험이 이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당신이 이 믿음을 당신 자신에게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거나 듣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지금 당신 자신의 능력 안에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 속에 하나님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어떤 지각을 이미 가졌거나 가질 수 있습니까? 나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만년의 불쌍한 헤시오드(Hesiod)가 잘 알려진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을 때 당신은 이것을 기독교의 교육에 대한 편견 탓으로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건 잠들어 있건 간에 수백만의 보이지 않는 영적 피조물들이 지상을 걷는다.
이제 당신의 영혼 속에 이러한 영적인 피조물들이나 이 피조물들을 지으신 분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혹은 당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으로 당신 자신과 영들의 세계 사이의 교통을 열 수 있습니까?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장막을 부수고 영원의 빛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알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렇게 믿지도 않고 또 믿을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확신케 될 것입니다.
11. 믿음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데 이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자, 즉 "이전에 거룩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오는 모든 축복으로 영광의 관을 씌우기에 합당한 그런 이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며 불결한 사람들, 구원이 임하는 시각까지 오직 영원히 멸망받기에 합당한 이들, 즉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유일한 기도라고 해봐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외치는 그런 자들에게 베푸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공적이나 선함도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앞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우리 안에 단지 죄와 비참한 지경에 처해있다는 의식 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가정하지 않습니다. 보고 느끼고 욕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물리칠 능력이 전혀 없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항상 기뻐하시는 아들"(cf. 마 3:17; 12:18; 17:5; 벧후 1:17) 예수를 위하여 믿음을 값없이 주십니다.
12. 이것이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를 간략하게 대충 스케치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본 원리이며 다른 사람들을 이 원리에 충실하도록 하고 이 원리에 적합한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이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비록 기독교 체계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당신이 비난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우리를 규탄하는 일에 다른 이들과 함께 동참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악을 우리가 당신에게 행하였단 말입니까? 당신은 도대체 왜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cf. 행 22:22)며 외쳐야만 합니까?
13. 확실히 당신의 판단은 우리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믿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당신은 믿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불신앙이라는 죄목으로 옭아매는 이들을 대항하여 어떻게 당신 자신을 방어할 것입니까? 당신은 "모든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성의 빛에 따라서 판단해야만 하며 이에 따라 판단할 경우 정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이성의 원리에 충실해서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빛에 의하여 판단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똑같이 비난하지 않고서 감히 우리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빛에 따라 우리는 성서가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 동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14. 이 점을 좀 더 고려해 보도록 합시다. 당신 자신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서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때때로 당신은 그 분 앞에 두려워 떨 것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이 있으며 도덕적 선과 악에는 차이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 결과 당신은 이 세상에 양심과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선한 일이건 악한 일이건 간에 자기가 행한 것을 돌아보게 될 때 자기를 자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양심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인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까지 당신은 "믿음의 자원자"(a volunteer in faith)가 되는 어려움에 빠지지 않고서도 잘 지내 왔을 것입니다.
15.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당신 자신과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의로우시고 선하시며 (하나님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속성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히 11:6)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가 믿기에 이와 같이 선하신 주님이 받으실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다음의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믿는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 마음에 완전히 확정된다면 부지런히 그 분을 구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상을 바랄 수 있습니까?
16. 다시 되새기지만 우리가 믿기에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행해야만 하고 악한 것은 삼가 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선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평화와 선의를 증진하고 동료 시민의 행복을 함양시키는 등 인류의 선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악은 이에 정반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당신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에 따라 인류가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는 일과 (나는 지금 오직 현재 세계에만 관하여 말합니다.) 인류의 슬픔을 줄이고 이들이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라고 가르치는 노력을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17. 그러나 다시금 묻나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의해서 인도되어야만 합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양심이 나의 양심을 배제할 수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적어도 우리에게서 당신 자신이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즉 이성을 가진 피조물에게서 불가 분리한 개인적 판단의 권리를, 강탈하도록 항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신실하게 따라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거리낌없는 양심"(cf. 행 24:16)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알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원리에 근거해서 적어도 우리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라도 있습니까? 당신은 편애와 편견에 대하여 많이 말하지만 이러한 일에 당신 자신이 연루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이 반대하는 교리 체계를 우리가 믿고 굽힘없이 변호한다고 해서 당신은 우리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당신의 적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에게도 적이 되지는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를 금하십니다! 나는 일찍이 엄청난 부를 가졌다가 비참한 나락에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격렬한 고통 속에서 심지어 간단한 음식이나 위로해 줄 친구 하나 없이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그의 집주인이 모든 것을 끝내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가 누워있는 병상을 치우려고 했을 때 스스로 비참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피범벅에 뒹굴고 있는 그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내가 그에게 화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당신에게도 분노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부러워할 수 없듯이 나는 당신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 당시 그 불쌍한 남자를 위해서 그랬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일과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혈기 방자한 당신을 바라보시고 "살아나라!"고 말씀하시길 소리 없는 눈물로 간구할 뿐입니다.
19. 내가 그와 처음 대화했을 때 그 불행한 남자는 "선생님, 저는 당신이나 그 어떤 사람도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에 있는 한 마디도 믿지 않기 때문에 저에게 성경에 대하여 말씀하셔서는 안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며 가장 귀한 분이며 '세상의 영혼' (anima mundi) 이시며 '만물 속에 두루 퍼져서 만물을 움직이시며 만물의 엄청난 힘과 혼합되어 있는 혼'(vastam totam Mens agitans molem et magno se corpore miscens)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것 이상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암흑투성이며 생각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이 매일 밤낮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바라건대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십니까? 그들을 어느 곳으로 인도하려고 하시는지요? 어떤 종교를 설교하시고 이 종교는 무엇에 좋은지요." 그에게 대답하기를 "나는 매일 밤낮으로 내 설교를 듣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설교하지요. 당신은 나에게 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냐고 물으셨지요. 나는 그 사람들이 덕이 있고 행복한 사람, 즉 자신의 삶에 있어서 안락하고 이웃에게는 쓸모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지요. 내가 그들을 어떤 길로 인도 하냐고요? 천국으로, 즉 재판관이 되시고 만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보자되시는 예수께로 인도하지요. 내가 어떤 종교를 설교 하냐고요? 사랑의 종교, 즉 복음에 의하여 밝게 드러난 친절의 율법을 설교하지요. 이것이 무엇에 좋으냐고요? 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향유하도록, 다시 말해 이들 모두가 하나님을 닮고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임종시에 침착한 확신을 가지고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cf. 고전 15:55, 57)고 외칠 수 있도록 하는 데 좋지요."
20. 당신은 이런 종교를 이성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하려고 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성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생명과 호흡,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아직도 당신을 계속해서 사랑하시며 음식과 기쁨으로 당신 마음을 만족케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답례의 사랑을 요구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든 않든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 그 보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의 어버이이신 것을 알고 당신의 모든 마음을 다해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 이성에 맞는다고 당신은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21. 우리의 이웃을,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이성에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한 형제, 즉 한 아버지를 둔 자녀들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서 마땅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해야 합니까? 이런 사랑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하시는 사랑과 같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보다 더 공정한 사랑의 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신은 황금률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에 있어서 형제 사랑을 측정하는 데 있어서 유일하게 적절한 규범)--즉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을 옹호하듯이 이러한 사랑의 온당함을 옹호하게 될 것입니다.
22.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즉 친구와 원수 선인이나 악인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에게 착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이성에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의 계속되는 사랑의 수고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만일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면 우리는 티투스(Titus)가 한 말, "친구여, 나는 하루를 잃어버렸다네"(Amici, diem perdidi)에 당연히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자 혹은 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것으로 족합니까? 우리는 다음의 시구에서 언급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서는 안됩니까?
가장 처절한 감옥이요 가장 무거운 쇠사슬인 죄악의 참혹한 오점 아래 누가 한숨을 쉬는가?
우리는 자신의 과오로 인하여 참담한 지경에 빠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이들에게 자비 베푸는 일을 중단해야만 합니까? 우리가 이런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발견했다면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cf. 마 10:8)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불, 즉 욕망과 분노, 원한, 복수의 불에서 그슬린 상태로부터 구해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는 일이 가장 이성에 부합되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글쎄,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설교와 삶을 요약해 놓은 것임을 우리의 원수들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인류를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이성에 부합되는 일임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설교하고 실행하고 있는 종교가 최고의 이성에 부합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3. 아마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일 우리가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만 말했더라면 당신은 큰 반대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도무지 이 표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인내심을 가지고 내가 당신에게 다시 하는 말을 듣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믿음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에 의하여 의심과 두려움, 슬픔으로부터 해방되어,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의하여 상처 입은 영혼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구원되며,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신 바 하나님과 온 인류의 사랑으로 인하여 모든 형태의 죄악들로부터, 즉 악한 욕망이나 말과 행위로부터 구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24. 우리는 이와 같이 위대한 구원의 결과가 세상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그렇게 별 볼일 없고 공허하고 하찮은 것에 의하여 야기된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이성에 맞지 않는 일이 없음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말했던 그런 믿음과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 교통함이 이 땅위에 있다고 가정할 경우, 이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신 자신은 "믿는 자,"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cf. 창 5:22, 24), 이제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어 영원에 거하는 자에게는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cf. 막 9:23)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우리와 논쟁하려면 우리를 공격하는 근거를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이 땅위에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단호히 부인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하는 일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가슴속에서 당신을 몰래 비난하지 않고서 결코 이 땅 위에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 이제 당신은 우리가 외치는 바 참으로 이성에 맞는 종교, 즉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이 종교가 믿음이라는 하늘의 선물 없이 당신의 가슴속에 심어질 수 없기에 이 선물을 달라고 마침내 하나님께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25. 만일 당신이 "그러나 이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경우, 나는 "이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 도대체 누구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아마 당신은 이 세상에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이를 개인적으로 잘 모를 것입니다. 이러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고백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요 5:2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케"(롬 8:16) 하는 이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신자로 불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러한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26. "그러나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생에 걸쳐서 이와 같이 허망하게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이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든지 다 발설하도록 허락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나는 처음에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사악함이 우리가 이들을 기독교로 복음화 시키려는 희망에 장애가 된다고 역설했던 매우 강한 이성론자와 부지불식중에 대화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당시에 내가 받은 보고서를 근거로 해서) 그 인디언들이 가진 절제, 정의, 진실성에 대해서 언급하자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이 인디언들이 이와 같은 덕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해서 얻게 될 이득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기독교인이 되어서 그들에게 무슨 득이 있습니까?" 나는 인디언들이 이와 같이 형식적인 기독교인이 되어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이성론자는 덧붙여 말하기를, "기독교로 당신이 의미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나의 명료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훌륭한 분별력이나 선한 본성, 좋은 매너보다 당신이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이 내가 기독교로 말하는 것 안에 최고도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훌륭한 분별력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빈약하고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한 본성이라는 것도 기독교적 박애의 희미하고 미미하게 닮은꼴일 뿐입니다. 그리고 좋은 매너는, 인간의 본성이 예술이라는 것에 의하여 도달한 완전한 형태의 매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가시적으로 표현된 대화라는 거룩함의 죽은 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술에 의하여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나는 기독교라고 부릅니다." 그 이성론자는 깜짝 놀라서 말하길, "선생님, 당신이 말씀하시는 이 것이 바로 기독교라면 나는 일찍이 내 생애에서 이런 기독교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27. 아마 당신의 경우에도 이 이성론자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기독교인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살아 있는 증거를 보기까지 당신이 기독교인을 안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서적 기독교만이 이와 같은 진정한 기독교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비이성적인 사람을 보게 될 때마다 비록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부른다고 해도 자신이 천사가 아니듯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참으로 진정한 이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은 기독교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은 입증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의 최초의 헌장에 의하여 명백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된 말씀에 호소합니다. 누구의 기질이나 말, 행위가 올바른 이성에 위배된다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성경에 위배된다는 사실이 명약관화합니다. 가능하고 생각해볼 만한 예를 무엇이든지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삶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28.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성에 근거해서 철저히 이에 부합하는 종교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신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질문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이성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의미하는 것은 영원한 이성 혹은 사물들의 본성,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속하는 관계성과 더불어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선포하는 바로 그 종교, 즉 명백하게 영원한 이성 위에 근거하고 영원한 이성과 사물들의 본질적 본성에 철저히 부합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기초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관계성과 더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 위에 정초해 있습니다. 이 종교는 하나님의 본성에 철저히 부합하는데 이는 이 종교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것 이외에 그 어디에서부터 이 참된 종교가 시작될 수 있겠습니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닮을 수밖에 없기에) 이 참된 종교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온 인류를 사랑합니다. 이 종교는 또한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의 뜻을 행하며,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그 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29. 우리가 가르치는 참된 종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즉 그가 정말로 누구인지--어리석고, 사악하며, 비참한--아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면으로 보거나 인간의 본성에 부합됩니다. 이 종교는 모든 생각하는 영혼들이 (아마도 자신이 원래 처했던 상태에 대한 희미한 기억으로부터) 희구하듯이, 이러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 즉 인간을 진실로 현명하고, 덕스럽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 종교는 또한 사랑하는 아버지와 고마움을 알고 순종하는 아들, 즉 만유의 주와 신실한 종이 영원히 결합됨으로서, 자기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함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모든 것을 완성합니다.
30.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이성이라는 말로 추론하는 능력, 즉 어느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를 추론해 내는 능력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종교에서 이와 같이 이해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전면 부인하고, 아니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추론을 참된 종교를 철저히 파괴하는 것으로 저주하는 바 "신비적 성인들"(mystic divines)로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한 권위를 성경에서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과 당신의 사도들이 그 반대자들과 끊임없이 논리적 싸움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고대나 혹은 현대에 나타난 모든 작품들 가운데 히브리서만큼 정밀하고 견고하고 일사불란하게 연결된 일련의 추론이나 논쟁을 알지 못합니다. (나사렛 예수이외에) 우리가 일찍이 알고 있는 바 가장 강력한 논쟁가는 다소 사람 바울인데 그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매우 단순한 방향을 설정한 사람입니다.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cf. 고전 14:20).
31.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종교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내는 데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든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할 뿐 아니라 진지하게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타당성 있게 논리를 편다는 사실은 당신의 논증에 근거를 세울 수 있는 바 참된 판단이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정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도 알다시피 만일 당신의 전제가 틀린 경우 이 틀린 전제로부터 참된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ex falso non sequitur verum) 모든 논쟁의 단계에서 당신은 실패하게 됩니다.
32. 마찬가지로 어떤 사물에 대하여 당신이 참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전에 당신은 먼저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에 대하여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전적으로 고정되고, 명료하며, 확정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모두 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런 종류의 대상들을 식별할 수 있는 감각들--영적인 종류의 대상을 전혀 식별할 수 없기에 백해무익한 "자연 감각"뿐만 아니라 영적인 선악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영적인 감각들까지--을 가지는 일이 확실히 필요합니다. 단호히 말해서 당신이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혈과 육의 기관에 의존하지 않는 바, 당신의 영혼의 눈을 열어 주는 새로운 종류의 감각을 가지는 것이 절대 필요한데, 이 새 감각은 당신의 육체적 감각들이 보이는 세계에 대하여 증거가 되듯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길이 되며, 영적인 대상들을 식별하고, 당신에게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는 것"(고전 2:9)들이 어떤 것인지 알려줍니다.
33. 그리고 당신이 이와 같은 내적인 감각들을 갖기 전에, 즉 당신의 이해의 눈이 열리기 전에, 당신은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들도 이해하거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 결과적으로 당신은 또한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에 대하여 참되게 판단도 할 수 없고 타당성 있게 추론도 할 수 없으며 당신은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는 합리적 근거나 재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4. 진부한 예를 들어보면, 만일 당신이 자연적인 시각 능력을 전혀 가지지 못할 경우 색깔에 대하여 이성적 추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다른 감각 기관들이 받아들이는 모든 생각들은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청각이나 그 어떤 다른 감각도 당신의 시력부족을 보충해주거나 이렇게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만일 "영적인 시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 경우 당신의 외적인 감각 기관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당신의 모든 생각들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실로 믿음이나 "내적인 감각"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생각이 색깔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생각이 소리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생각과 다른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다르기 때문에, 당신은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올바른 추론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외적인 감각 기관에 의하여 생겨나는 감각적 사고들은 한 屬의 상이한 種일 뿐인데 반하여 믿음의 사고들은 외적 감각 기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사고들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감각 기관들이 내적인 감각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만 한다거나 당신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35. 그렇다면 당신의 이성은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 것입니까? 어떻게 당신의 이성이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영적인 것들로 옮아가게 될 것입니까? 보는 것들로부터 보지 못한 것들로, 보이는 세계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가는 데에는 얼마나 깊은 심연이 있는지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성이 이 엄청나게 깊은 간격을 건너게 될 것입니까?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자로 오셔서 당신이 지금까지 경멸했던 믿음을 당신에게 주기 전까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은 독수리 날개 위에 실려서 영원의 영역을 향하여 비상하게 될 것이며 당신의 계몽된 이성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즉 "당신의 성령으로 당신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고전 2:10) 하나님까지 탐구하게 될 것입니다.
36. 나는 누군가 나에게 간절히 읽어보기를 권했던 최근에 출판된 논문, 즉 논증에 정초하지 않은 기독교(Christianity Not Founded on Argument)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도움을 얻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문을 정독해 본 결과, 이 책에 대한 나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 전체에 일관되게 펼쳐진 거대한 디자인이 기독교 전체를 추악하고 경멸해서 마땅한 것으로 만든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할 요량으로 이 논문의 저자는 다른 사람들이 이후에 제기했던 바 기독교에 대한 수많은 반대 주장들 중에 가장 그럴듯한 것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열성적으로 수집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필력으로 이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저자는 자기가 마치 기독교인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공언된 교리, 즉 하나님의 영의 초자연적 영향력을 옹호하는 것을 자랑삼아 보이고 여러 문장에서 (실로 거의 모든 구절의 도입부분에 있어서) 마치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처럼 말해서 단 몇 구절도 자기 뜻과 상관없이 나온 것처럼 떠벌립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 이 저자는 모든 가능한 기술과 이성의 과시를 통하여 그리고 가장 고심한 문장의 흔적을 가지고 "기독교는 이성에 어긋난다." 혹은 "이성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기독교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자신의 요점을 수미일관 전개하고있습니다.
37. 이 논문은 진지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조차 손쉬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으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저자가 마치 기독교의 친구가 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논문의 거의 모든 페이지가 지독한 거짓과 엄청난 신성모독으로 가득차 있으며 이 거짓과 신성모독은 2년이나 3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서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대답할 수 있고 저자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비이성적이고 경멸해 마땅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 것과 똑같이 자기를 비이성적이고 경멸해 마땅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바 논파된 오류들과 흔해빠진 궤변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38. 나는 지금까지 기독교 체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로 말해 왔습니다. 나는 이제 또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 즉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경을 믿지만 종교인의 성격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 몇 마디 덧붙이려고 하는데 우리 자신의 원리나 실제에 관해서 보다는 그들 자신의 원리나 실제에 관련해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나는 당신을 마찬가지로 이성의 사람으로 여기고 말하고자 합니다.
39. 나는 오직 질문만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그런 사람입니까?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바 이성의 사람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과 모순이 없으며 당신의 원리와 행동은 서로 일치합니다.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판단해보도록 합시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습니까? 당신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고 있습니까? 당신은 백성들의 관원을 비방치 않습니까? 당신은 날마다 할 수 있는 한 사치스럽게 생활하며 술고래나 대식가가 아닙니까? 당신은 욕심의 신을 당신의 배속에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복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호색가요 간통자가 아닙니까?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양심에 대고 분명히 대답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성경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만일 성경이 옳다면 당신은 길 잃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 안에 들어 가 있습니다(cf. 마 7:13). 당신의 "멸망은 잠들지 않습니다"(벧후 2:3). 당신은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당신 자신에게 쌓고 있습니다"(롬 2:5). 만일 성경이 옳고 (당신이 이런 상태로 계속 남아 있는 다면) 당신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당신에게 더 좋을 뻔했습니다.
40. 당신이 자신을 스스로 이성의 사람이라고 부르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성이 스스로 모순에 빠진단 말입니까? 당신은 이성의 사람으로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하늘 아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일 것입니다. 당신은 늘 헛된 맹세를 일삼는 자요, 안식일을 범하는 자요, 호색가요, 술고래이면서도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믿는다고 말하니 당신이야말로 땅위의 괴물이요, 온 인류의 이성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이성과도 엄청난 자가당착에 빠진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 이 위대한 이름에 의하여 당신이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을 당신은 매일 모독하는 바) 좌로나 우로나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불신자라고 고백하든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십시오. 더 이상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성경을 내 던지든지 당신의 죄를 털어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십시오. 그 사이에 당신이 자랑하는 이성의 불꽃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갈 5:21)이라고 외쳤을 때마다 당신이 여태까지 그랬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처럼 우리를 당신의 원수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이렇게 함에 있어서 "담대히 말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사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을 말하며 이 말이 우리 자신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분의 말씀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즉 거세하거나, 부드럽게 해서 말씀의 질을 떨어뜨리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41. 그러나 당신은 이런 경우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모든 일들을 삼가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한 점 흠이 없는 명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은 영예로운 남성이거나 덕성을 갖춘 여성입니다. 당신은 추악한 일은 경멸하고 책망할 만한 일이 전혀 없는 삶과 대화를 이어 온 사람입니다. (내가 당신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아침부터 밤까지 당신은 남에게 해도 주지 않고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밀짚이 물위를 떠다니듯이 누구에게도 해도 끼치지 않고 선행도 베풀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당신은 해마다 철마다 아무런 선한 일도 하지 않고 그저 평온하게 인생을 보냅니다.
. . . 당신은 그저 부드럽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하루를 허비한다.
42. 나는 이제 당신이 직면하게 될 미래의 처지를 말함으로서 당신이 가지는 기질의 태평함에 충격을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현재의 것들에 대하여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
나는 한 때 인디언들로 불리는 이른바 "합리적인 사람들" 큰 일행이 강가에 일렬로 앉아 가끔 서로 쳐다보기도 하고, 또 가끔 하늘도 쳐다보고, 그리고 간혹 물위에 이는 거품을 바라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하는 동안을 제외하고) 한 해의 대부분을 아침부터 밤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매우 안락한 사람들이었지만 당신은 그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이들 인디언들보다 얼마나 덜 행복합니까?
43. 당신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옷입고 춤추고 앉아서 놉니다. 당신은 외출합니다. 당신은 가면무도회와 극장, 오페라 하우스, 공원, 궁중 집회, 응접실에 앉아 있기도 합니다. 당신은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왜 어떨 때는 말하고 어떨 때는 서로 쳐다 봅니까? 당신은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 다음 주, 다음 해에도 도대체 무엇을 할 예정입니까? 당신은 여전히 다시금 먹고 마시고 잠자고 옷입고 춤추고 앉아서 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쳐다보기 위하여 다시 외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일이 전부입니까? 아아, 당신이 이렇게 하는 데서 인디언들이 하늘과 물을 쳐다보면서 행복하지 않은 것과 무슨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오, 불쌍하고 지루한 인생의 수레바퀴여! 나는 M대령이 (혹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누구라도) 심지어 자기가 버젓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와 같은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기를 선택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어떤 보람도 찾지 못했던 까닭에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고 솔직하게 선언할 것이 분명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44.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할 일이 있고 이 일을 위해 끊임없이 고용된 많은 사람들이(이 땅위의 통속적인 사람들과 단조로운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도처에 깔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이 숫자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당신은 무역이나 다른 명망있는 직업에 고용되어 있습니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시간과 노동, 생각을 무익한 일에 쓰지 않는 것이 당신을 위해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경우 당신은 부자가 되어서 돈을 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돈이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금과 은 그 자체를 위하여 이들을 쌓아두는 일은 거미나 나비의 날개를 쌓아두는 일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황당하며 매우 비이성적인 일임을 만인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의 재물을 모으는 일을 더욱 큰 어떤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더 큰 목적이란 무엇입니까? 그야 물론, 당신의 인생을 즐기는 일, 편안히 사는 일, 쾌락을 누리는 일, 신사처럼 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즉, 노골적으로 말해서 위에서 언급한 행복의 전부이거나 아니면 일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목적이 사실상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이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원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강가에 앉아 있는 쓰리아노휘(Thleeanowhee)와 그의 동료들에게 찾아가 함께 앉아 보십시오. 당신은 40년 동안 고생스럽게 일한 후에 그 인디언들 못지 않게 행복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45. 당신은 아니 그 어떤 이성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이런 인생에 만족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족할 수 있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어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 땅위 어느 곳에서 그 좋은 곳을 찾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생긴 지구가 모든 유럽의 기술을 총동원한다고 할지언정 지구상에 거하는 거민들의 절반이 잠자지 않고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일자리에 종사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실로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수중에 무료하게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찾고 있는 바로 이것을 우리는 당신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이 종교만이 우리를 할 일없이 무료하게 있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이 종교는 우리 삶의 빈 공백 모두를 채워 줍니다. 이 종교야말로 많든 적든 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분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해서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게"(cf. 출 16:18; 고후 8:15) 해줍니다.
46. 다시 한번 물어 봅시다. 당신은 (혹은 이성을 가진 사람 모두가) 당신이 지금 영위하는 삶을 살도록 당신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적어도 당신이 성경책을 발로 밟기 전에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매 페이지마다 (그리고 당신의 양심이 이에 동의하는 바) 하나님 영광의 썩어질 수 없는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심지어 현재의 처지에 있어서도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로 향해 가는 영원무궁의 영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당신의 뜻을 행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향유하도록 이 썩어질 세상 넘어 하나님과 거하도록 당신을 창조한 목적 이외에 그 어떤 다른 목적이 있겠습니까. 오, 이제 당신 자신과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는 바" 성경을 더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여기에서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행복한 상태를 발견케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cf. 살전 5:16-18),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cf. 마 6:10) 모든 이들에게 이 행복한 상태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를 위하여 당신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이 목적을 위하여 당신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슬리지 마십시오!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인 바"(cf. 잠 3:17) 이 종교의 살아 있는 증인에게로 당신을 기꺼이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화를 내지는 마십시오.
47. 당신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성의 사람이 거의 아닙니다. 나는 악은 피하고 선은 행하며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까닭에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예배와 성례전에 항상 참석합니다. 나는 매일 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많은 좋은 책들을 읽습니다. 나는 매 1월 30일과 금요일마다 금식합니다." 당신은 정말 이 모든 일을 행합니까? 당신이 이렇게 행하고 이보다 더 할 수도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께 닿을 수 있는 그런 종교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당신이 일찍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갈 수도 있고 또 나간다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만일 당신을 판단한다면 당신이 "당신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당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cf. 고전 13:3) 당신은 진정한 종교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48. 하나님 앞에 유일한 가치를 지닌 이 종교가 바로 당신이 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원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원하는 바) 사랑의 종교를 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듯이 당신의 이웃을 당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당신의 양심에 대고 반문해 보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 이웃의 거치래만 화려한 종교가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없듯이 당신의 형식적인 종교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 당신은 일을 명확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지요. 이제 당신은 적나라한 진실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당신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cf. 딤후 3:5). 당신은 단지 "회칠한 담"(cf. 행 23:3; 마 23:27)일 뿐입니다. 당신의 주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이런 사람이 아닙니까?" 너무나 확실히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의 심중이 심히 악하기"(cf. 시 5:9, B.C.P.) 때문입니다. 당신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요? 당신은 돌을 사랑하지 않듯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이 당신 속에는 없습니다(cf. 요1서 2:15).
49. 당신은 영원한 지옥형벌에 빠지기 일보직전에 있습니다. 당신은 실로 "하나님께 열심은 있지만 지식을 쫓지 않습니다"(cf. 롬 10:2). 오, 당신은 얼마나 지독하게 속고 있었는지요. 당신은 지옥으로 직행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천국으로 착각하고 있군요! 내적인 것 없이 외면만 있는 종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 아니 하나님을 엄숙하게 조롱하는 것과 다름없는 바,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훨씬 더 사악한 것임을 자세하게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내면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른바) 당신의 믿음이라는 것은 생명력 있는 구원의 원리가 아닙니다. 당신의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 즉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가 아닙니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이 "열광주의"로 부르는 바로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당신이 이 믿음을 또한 모독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 없이 사는 상태에 당신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cf. 골 3:3), 즉 하나님을 보고 맛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심지어 욕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당신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기 때문에"(cf. 고전 2:14)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50. 오, 이제 더 이상 빛을 향하여 당신의 눈을 가리지 마십시오. 당신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인 것을(cf. 계 3:1) 아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영혼은 죄와 교만과 허영, 고집, 육욕,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빠져 전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 있습니다.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교통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당신은 아무 때에도 하나님의 형용을 보지 못했고 (믿음에 의하여, 우리 주께서 옛 사람들에 반대하여 증언했듯이) 그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영적인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불신자들에게 분노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줄곧 불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cf. 사 6:10). 당신은 "굳어져, 아무 느낌도 갖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51. 인내심을 갖고 조금만 더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나의 영혼은 당신으로 인해 괴롭습니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않는 당신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cf. 고후 4:4), 당신은 "당신의 삶의 실수 속에서 죽음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은 중대한 범죄를 짓지 않고 자선을 베풀고 교회와 성례전에 참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지만 실제 당신의 행위에 있어서는 마귀를 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의 뜻을 여전히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즐거이 자기 멋대로 합니다. 교만, 허영, 그리고 고집이 (진실로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열매들) 당신의 모든 말과 행위를 오염시킵니다. 당신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안에 있습니다. 오, 하나님께서 우뢰같은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52. 그러나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증인 없이 당신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만인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비록 적은 수이긴 하나 믿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믿음의 능력을 알고 저 내적인 생명의 종교,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cf. 빌 2:5; 롬 14:17)에 낯설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부터 떠나거나"(cf. 딤전 6:10) "예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진리"(cf. 엡 4:21)에 우리가 거슬리는 행동을 했다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cf. 히 6:5) 당신으로부터 기쁘게 배우고 싶습니다. 만일 우리의 그릇된 것을 고치고 부족한 것이 채워진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까지"(cf. 엡 4:13) 우리는 "의인이 우리를 치고 책망할지라도 은혜로 여길 것입니다"(시 141:5, B.C.P.).
53. 아마도 이제 당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첫 번째 일은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사람이 죄 없이 살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성경이 우리가 한 말과 똑같은 것을 (즉, 우리가 의미하는 바 죄를 범하지 않고서는)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더 이상 죄에 거하지 않는다"(cf. 롬 6:1-2)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으므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게 하려 함이라"(cf. 벧전 4:1-2)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매우 명백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로다"(요1서 3:8-9). 요한은 또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 1서 5:18)고 했습니다.
54. 이제 당신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신 것을 압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 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반문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실 때 의로우시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실 것입니다"(cf. 롬 3:4). 당신이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이 이 위대한 진리와 모순에 빠질 때 은밀한 양심의 견제를 자주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당신 자신이 부인하도록 교육받은 것을 얼마나 자주 바랬습니까? 아니 당신은 지금 당장 이것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를 진지하게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영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이 영광스러운 자유를 열망하지 않습니까(cf. 롬 8:21)? 당신이 이 자유를 기대해야만 하는 어떤 강력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신은 이미 이 자유를 미리 맛보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처음 빛을 비추신 그 시간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이 시간, 즉 "주님의 등불이 당신의 머리에 처음 비치었던 그 시간"(cf. 욥 29:3)을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버터와 꿀을 먹었고 눈을 높이 들어 당신 발아래 구름을 보며 하늘을 타고 있었다. 땅위에 있는 모든 것들 훨씬 위에서 당신은 의기양양하게 하늘을 타고 있었다. 당신은 독수리 날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고 그 분과 말했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사도들의 말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리라"(요1서 5:18)는 말씀이 참으로 옳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경험적 기독교인으로 알고있었던 사람들이 "이것은 당신이 결혼식을 올릴 때나 그렇지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당신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당신에게 말할 때 당신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당신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쳐다보았으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약해졌습니다. 그 때 당신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당신을 안내해 줄 사람이 있었고 당신이 지금 비난하고 있는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확고부동한 입장에서 결코 이탈하지 않았으며 이런 의미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cf. 롬 11:29)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55. 당신은 이러한 사실에 다른 또 하나의 반대, 즉 우리가 완전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반대를 결합시키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완전에 대해 당신은 반대했습니까? 이 완전이라는 말은 성서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결코 반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어려움은 이 완전의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정시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해 왔으며 기독자의 완전은 무지나 실수, 약함, 유혹과 같은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갈 2:20), "믿음으로 내 마음이 깨끗해졌다"(행 15:9)고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온 천하에 외쳤습니다. 기독자의 완전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cf. 고후 10:5) 하는 것입니다. 기독자의 완전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우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cf. 막 12:33)입니다.
56. 이제 성경을 믿는 사람이 이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부인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감히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당신은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성경이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가 선포하는 것의 전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 바울과 더불어 기독자의 완전, 즉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열렬히 사모하는 영혼의 상태의 높이와 깊이인 것입니다. 오, 이 완전을 위해 쉬지말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고(cf. 히 4:16), 이것을 하나님께 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우리는 참으로 자연인으로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막 9:23)는 사실을 압니다.
57.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cf. 엡 2:8)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또 다른 반대 주장을 낳는다는 사실을 듣지 않았습니까? 바울도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 곳에서 바울은 말하길,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당신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만일 이것이 이미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것으로 의미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으로서만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시는지"(요 1서 3:1) 알자마자 (사도들이 말하듯이)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으로 우리가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요 1서 4:19). 그런 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라"(cf. 요 1서 4:21)는 우리 마음속에 쓰여진 계명으로부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온유, 겸손, 모든 거룩한 기질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것들이 구원, 즉 기독교적 구원과 죄로부터의 구원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외적인 구원으로부터 생활과 친교의 성결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당신이 믿은 바 대상을 알진대 더 이상의 증인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58. 그러나 아마 당신은 우리의 구원을 이처럼 가능케 한 믿음이 우리가 기술한 바와 같은 신뢰와 확신을 함축하고 있는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믿음이 확신, 즉 우리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셨다는 확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아무 거리낌없이 고백하는 데 만일 표 대결로 우리가 즉각 포기해야만 하는 문제를 결정할 경우 당신은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일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처에 퍼져 있는 이름만 가진 모든 기독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을 모조리 당신 편으로 만들 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내가 나중에 언급한 이 사람들은 당신이 방어하는 바 저 유명한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의 선언, 즉 "fiduciam(신뢰, 확신, 혹은 용서의 확신)을 신앙의 본질로 삼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받을지어다."를 열렬하게 지지할 것입니다.
59. 이 교령이 통과되었던 시간, 즉 우리의 설교집(Homilies)이 출판된 후를 고려해 본다면 트렌트 공의회의 디자인은 "저 저주받을 만하고 이단적인 교리"를 신앙 고백함으로써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를 저주하는데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국 국교회가 구원에 관해 가르치는 설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 . . 심지어 마귀들조차도 . . .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을 믿는다. . .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기적을 행하셨고 당신을 하나님 자신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 . 마귀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즉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가장 잔혹한 죽음을 당하셨음을 믿는다. . . 마귀들은 이와 같은 우리의 신조들을 믿기에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모든 사실들을 믿는다. . . 그러나 이와 같은 그들의 모든 신앙에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여전히 마귀일 뿐이다. 마귀들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채 여전히 저주받을 [지위에 빠져 있다.] 올바르고 진실한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우리의 신조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저주에서 구원받았다는 . . .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60. 실로 로마의 교황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속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저주가 당신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은 있습니다. 당신은 영국 국교회의 일원입니다.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논쟁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국교회가 선포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믿음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는 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만일 당신이 영국 국교도가 아니어서 우리 교회가 하는 말을 듣든지 듣지 않든지 간에 적어도 성경이 하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욥이 자기의 믿음을 외치는 것을 들으십시오. "나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신 것을 믿노라"(cf. 욥 19:25).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믿었을 때)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외쳤던 말을 들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믿음의 성격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이)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온 세상의 믿는 이들과 함께 증언했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 .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2-14).
61. 그러나 멀리까지 가서 증언을 들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가슴속에 신앙 고백에 대한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cf. 시 34:8), 하나님께서 죄인인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cf. 눅 18:13)을 알기 전까지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말로 논쟁하고 투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당신의 입술로 자인합니다. 그리고 죄인인 인간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하한 표현을 쓰든지 간에 당신이 곰곰이 생각해 볼 경우 항상 발견하게 되는 진리는 이 표현들이 직간접적으로 용서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용서하는 사랑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인간에 의하여 상처받은 하나님께서 이제 인간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 입을 통하여 듣기 원하시는 노래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씀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오 주여, 내가 주를 찬양하리라.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 .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1-2).
62. 그렇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참된 믿음의 본질이 됩니다. 죄의 용서는 믿음이 이에 대한 증거가 되는 바 보이지 않는 것들 중에 첫 번째가 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사실을 분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별로 중요치 않은 일로 우리에게 시비를 겁니까? 우리가 이 신앙이 보통 "순식간에"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신이 보기에 중요한 반대가 됩니까? 먼저 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것에 대한 진실한 기록인 사도 행전을 당신이 숙독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도 행전에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을 처음부터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 믿음에 의하여 "순식간에" 죄를 용서받지 않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고넬료와 삼천명의 사람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의 경험이 또한 이러한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수년이 흐르는 동안에 나는 오직 서너 가지의 예외만 발견했습니다. (아마 당신 자신이나 당신이 알고 있는 한 두 사람 정도가 이 숫자에 포함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주 예수를 믿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순식간에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cf. 행 26:18) 돌아 왔습니다.
63.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cf. 요 5:25) 순식간에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cf. 롬 1:16)--"사역은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기 때문에"(cf. 고전 12:6)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에 역사 하시든지 아니든지 --을 알고 있는 당신에게 왜 믿겨지지 않는 일이 되어야만 합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실 때 행하시고 보이시는 일을 보통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cf. 창 1:3).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습니다"(cf. 시 33:9). "이와 같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습니다"(cf. 창 2:1).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현재의 경우에 행동하시는 양식이 당신의 능력과 사랑에 매우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는 아무 장애가 없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위엄이 뛰어나듯이 자비도 넘치기 때문입니다"(집회서 2:18). 인간 편에 어떤 장애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것은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 죄인이여, 이제 구하기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cf. 마 7:7). 당신이 구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까지 주실 터인데 이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엡 2:9) 당신의 공로나 선행과 아무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은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cf. 롬 4:5) 때문입니다.
64.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말함으로서 죄인들을 격려합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들이 회개토록 격려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죄인들이 자신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고 회개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지 이와 같은 격려가 없는 까닭에 얼마나 많은 죄가 쌓이고 또 쌓이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까? 당신의 마음이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애통해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무엇이 그리도 소중해서 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죄인을 회개로 이끌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마다하며 무슨 고통을 마다하겠습니까. 당신의 사랑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을 수" 없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당신이 믿었고 그들이 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당신이 가졌었더라면 대답은 "예"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리라고 왜 당신은 믿지 않습니까? 당신은 왜 그들이 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지지 못합니까? 그것은 명백히 당신이 그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cf. 고전 13:7)이 없기 때문입니다.
65. 그러나 당신이 이와 같은 반대가 가지는 모든 힘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죄인들의 괴수를 격려하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격려의 말은 통상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을 사신 주님을 부인하는 자여,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평안을 구했지만 그 어떤 평안도 찾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웃는 가운데도 당신의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일하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렵니까(사 55:2)? 당신의 영혼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여전히 뼈아픈 허공에 빠져 있습니다. (당신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당신은 죄책감과 양심이 잠깨는 것을 발견합니다. (당신이 기술하는 바) 저 소름끼치는 유령의 종교가 여태껏 당신을 이따금씩 괴롭힙니다. "하늘에서 굽어보는 의"(cf. 시 85:11)는 우리에게 결코 불유쾌한 광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가 당신에게는 어떻게 보입니까?
높은 하늘 보좌에 앉아서 무서운 얼굴을 한 채 죽어야 할 운명의 존재를 위협하시는 분 (Horribili super aspectu mortalibus astans).
얼마나 자주 당신은 당신이 거부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에 빠집니까? 얼마나 자주 당신은 무시무시한 불안에 빠집니까? "장차 심판이 있고 불행한 영원의 세계가 있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당신은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언제까지 이런 상태에 만족할 수 있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영혼을 죽일 수 있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여기 오랫동안 회의에 빠진 노름꾼이 누워있다. 여기 그의 회의가 끝나고 마침내 확신하다. 오, 그러나 죽음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당신은 내세가 없다고 이미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몇 차례 더 이 세상에 지루하게 빠진 후 마침내 무로 빠져 들어갑니다. 만일 당신이 사고와 시간과 영원의 물결에 휩싸인 잠시 동안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종류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까?
. . . 창조되지 않은 흑야의 광대한 자궁 안으로 삼킨 바 되고 잃어 버렸다!
그러나 당신은 이러한 사실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광대한 광경이 뒤에 있으나 구름과 흑암이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의혹과 불확실 투성입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이리 저리로 내던져지고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오, 이제 하나님의 지혜에 대적하여 인간의 지혜를 더 이상 높이지 맙시다. 당신은 충분히 오랫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났습니다. 당신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침내 당신의 눈을 열게 하십시오. 당신은 영혼의 안식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안식을 구하십시오. 당신은 이제 당신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한 인물이 되었고 당신의 상태는 어둠과 혼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당신은 비참하고 무질서한 세상에 불안하게 떠도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어서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합니다"(cf. 시 39:6).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당신의 헛된 추측으로 얻게되는 근심을 신속하게 흩뜨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하늘과 땅을 더하고 영원과 시간을 더하심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을 열어서 당신으로 하여금 심지어 현세에서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66. 오, 지독하며 비열하며 수치스러운 죄인인 당신이여 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가 악한 길에서 떠나라.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cf. 슥 1:4; 겔 18: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cf. 겔 33:11). 오, 서두르며 지체하지 마십시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 . 화려한 의복과 붉은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냐"(cf. 사 63:1,2)? 그는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분"(cf. 사 53:6)이십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36)!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cf. 요 1:14)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를 보라! 주 예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주께서 당신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분의 자비가 당신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평안히 가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cf. 요 8:11)!
67. 이제 당신은 이 모든 일에 동참할 수 없습니까? 이것이 바로 당신의 마음의 언어가 아니겠습니까? 오, 당신은 우리의 모든 관심, 우리의 한결같은 수고가 온 세상이 당신이 느끼기에 견고하고 내적인 생명력 넘치는 종교로 이끌기 위함인 것을 언제나 알 수 있는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산산이 부서지게 하는 이 종교의 힘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만일 그러면 나와 손을 잡고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 10:15-16).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사이의 차이점은 우리가 서로 일치하는 것만큼 크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작은 일에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가장 큰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을 같이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우리를 악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를 반대하거나 우리의 일손을 약화시키는 일이 어떻게 감히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친구 집에서 받은 상처에 대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불평할 것입니까? 확실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습니다"(cf. 눅 16:8). 사탄은 자기에 대적하여 분열되지 않습니다. 주의 편에 선 자들은 왜 주의 편에 섭니까? "지혜는 어떻게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cf. 눅 7:35)?
68. 그 이유가 우리가 종교를 탐심의 탈로 만들뿐이라는 사실과 또 이러한 일반적인 비난을 뒷받침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특별한 예들을 당신이 들었기 때문입니까? 이것은 또한 우리가 설교함으로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었으며 결국에 가서 우리가 교회를 해치고 파괴하는 바 가면을 쓴 천주교도라고 당신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69. 당신은 이렇게 들었습니다. 글쎄요. 당신은 이것을 믿을 수 있을는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마태 복음 5장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나는 당신이 이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곳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읽습니까(cf. 눅 10:26).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당신은 이것이 (다른 모든 성경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이루기 위하여 꼭 일어나야만 할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사실이 그렇다면 오늘날 이것은 당신의 귀에 또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cf. 눅 4:21). 우리 주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선포하는 주의 복음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비방하고 핍박하고 (이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미하라) 거짓으로 우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합니다. 어떻게 사실이 이와 다를 수 있겠습니까.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사람들이랴"(마 10:24-25).
70. 우리는 우리가 선포하는 바 믿음으로 지금 얻을 수 있는 내적인 구원만을 고백합니다. 이 내적인 구원을 우리가 외쳤다는 이유로 (이것 말고 다른 어떤 죄도 없는 것으로 가장된 바) 우리는 그 때까지만 해도 기꺼이 환영받았던 교회에서 더 이상 설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악명 높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처음 택했어만 했던 교회에서 이와 같이 설교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우리는 이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cf. 딛 2:11)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서"(시 103:22, B.C.P.) 선포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은 성전에만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행 17:24)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설교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향해 불평하는 현실적이며 유일한 근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이 구원을 선포한다는 사실을 온 인류 앞에 공언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장소에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문이 열려있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즉 산 위든 평지이든 강변이든 (이곳에서 설교했다는 충분한 전례가 있기에) 감옥이든, 아니면 유스도의 집이든지 두란노 서원에서든지(cf. 행 18:7; 19:9) 장소를 막론하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어느 곳이든지 감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 전하는 사명을 받았으니,"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cf. 행 9: 16, 17).
71. 여기에서 우리는 사실은 인정하되 우리의 잘못은 부인합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혐의에 있어서는 우리는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세상이 이를 입증할 수 있다면 이것을 입증해주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는 옥스퍼드에서 여러 해 동안 우리 삶의 양식을 지켜봤던 사람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이 분들은 우리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cf. 행 26:5)는 사실과 옥스퍼드에서 우리가 활동했던 기간 동안에 우리가 받은 엄청난 반대가 지나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성경과 책읽기, 금식하기, 기도하기, 우리 자신을 부인하기, 교회와 성찬에 참여하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병든 자와 감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기, 무지한 자에게 교육하기, 사악한 자를 개화시키기 등에 구원에 "꼭 필요한 일 이상으로" 헌신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1729년부터 1737년 사이에 우리가 공개적으로 행했던 바 악명 높은 죄라면 죄이겠고 마지막 날에 우리 주께서 심판하실 일들입니다(cf. 요 12:48).
72. 그러나 지나간 일들은 다 잊어버린다 해도 "당신들 중에 이제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습니까"(cf. 요 8:46)? 당신들 중에 누가 (나는 여기에서 특히 동료 목회자들에게 호소하는데) 우리가 불경하고 부정한 대화를 했다고 개인적으로 죄를 물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마음속으로 (정직하고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행 24:16)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이런 일에 당신도 우리와 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큰 슬픔으로 말하지만) 실상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노골적으로 부인할 수 없게 불경하고 부정한 사람들, 즉 주정뱅이, 대식가, 악을 악으로 갚는 이, 거짓말쟁이, 헛된 맹세하는 자, 주의 날을 더럽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일에 반대한다는 열심히 어디 있습니까? 성직자가 술에 취한 나머지 천여명 회중 앞에 간신히 서서 자기 교회의 또 다른 성직자를 욕지거리와 노골적인 언어 폭력으로 맹공을 퍼붓습니다. 그런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한 사람의 성직자는 여전히 성만찬을 집례할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의 성직자는 옥외 설교가라는 이유만으로 성찬을 분급조차 받을 수 없습니까?
73. 오 교회의 기둥이며 아버지인 당신들이여,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양무리를 치도록 당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까(cf. 행 20:28)? 오 당신은 내가 조금 더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아 주십시오. 이렇게 하는데 하나의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도록 당신이 나를 강요하지 않았습니까? 당신들 성직자 중에 누가 당신이 "악하다고 추방했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cf. 고전 4:13) 여긴 사람들보다 그 삶에 있어서 더 무흠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 더 끈기가 있습니까? 당신들 중에 누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고 내어 주는 일에"(cf. 고후 12:15) 더 열심을 냅니까? 혹은 당신들 중에 누가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빌 2:17) 양무리들을 위하여 더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74. 당신은 캐틸린(Catiline)의 역사가처럼 "이런 일이 조국을 위해서만 될 수 있었더라면"(Si sic pro patria)라고 말하시렵니까? 만일 이런 일이 교회를 해치거나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방어하기 위해 되어졌다면! 바로 이 명제, 즉 교회, 심지어 영국 국교회를 보이지 않게 해치거나 노골적으로 파괴하려는 세력에 반대해서 우리가 교회를 지금 방어하고 있다는 명제를 나는 입증하고자 합니다.
75. 우리가 천주교도라는 (우리가 매일 매 시간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토록 엄중하게 저주하는 교리를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에 나는 열을 쏟으며 반박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우리가 최근에 옥스퍼드에서 행했던 설교들의 제목을 보기만 해도 우리가 천주교도라는 주장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수치스러운 비난인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천주교도라면 크라이스트 교회와 링컨 대학(Lincoln College), 아니 모든 대학의 우두머리들 역시 천주교도로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76. 당신 자신은 우리가 천주교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판명하지만 우리에게 덮어 씌어진 다른 혐의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교회를 공개적으로 파괴하지는 않지만 은밀하게 해치고 있다고 여전히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은 교회를 어떻게 의미합니까? (우리의 신조가 정의하듯이) 보이는 교회는 "신실한 (혹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coetus credentium)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이 교회의 속성은 (다음에 나오는 말에 의하여 기술되겠지만) "이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설교하고 때에 맞게 성례전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본래적 설명에 따를 경우) 영국 국교회는 무엇입니까? 영국 국교회 역시 "영국에 있는 신실한 사람들, 진정한 신자들의 모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이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면 그들은 교회가 아닌 다른 이름하에 고려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듣고 성찬을 분급받기 위하여 가시적으로 함께 모일 경우 이 회중은 보이는 영국 국교회가 됩니다.
77.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회의 어떤 부분을 긍정하는지도 모른 채 (마치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cf. 렘 7:4]고 외친 이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여, 교회여!" 라고 격렬하게 외치는 이들이 이 문제를 좀더 고려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조에 따르면 지방이나 국가 교회는 그 지방이나 국가의 참 신자들이 모인 회중입니다. 만일 이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을 경우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교회의 한 부분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에 참여하기 위하여 가시적으로 함께 회집할 경우 영국 국교회나 불란서 국교회 등과 같이 보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78. 이러한 사실을 전제할 때 나는 당신에게 묻기를 어떻게 우리가 교회, 즉 영국의 보이는 지방 교회를 해치거나 파괴합니까? 우리의 신조는 세 가지가 보이는 교회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첫째로, 살아 있는 신앙인데 이것 없이는 보이는 교회든 보이지 않는 교회든 간에 교회라는 이름은 일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설교하는 일인데 (결과적으로 경청하는 일) 이 말씀이 없이 신앙은 기력이 쇠하여 죽게 됩니다. 셋째로, 정해진 시간에 성례전을 베푸는 일인데 바로 이와 같은 일반 수단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증진시킵니다. 이제서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요점들 가운데 도대체 어떤 점에서 우리가 교회를 해치거나 파괴하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문을 닫았습니까? 우리가 영국내에 있는 "믿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이기라도 했습니까? 우리의 설교에 근거한 바 (즉,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나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와 화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해서 하나님을 확실하게 신뢰하고 확신하는 일") 믿음이 무엇인지 기억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또한 온 세상에 호소하는 데 우리가 교회의 생명과 영혼이 되는 신앙을 파괴하고 있습니까? 실상에 있어서 우리가 활동하기 시작한 후에 영국에 믿음이 줄어들었단 말입니까? 나는 이것이 거짓말의 아비가 간신히 발설하게 될 주장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위의 첫 번째 요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분명히 교회를 해치지도 않고 파괴하지도 않습니다. 두 번째 요점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설교하고 경청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방해합니까? 우리가 어떤 목회자이든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설교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전혀 설교하지 않든지 혹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지 않든지 할 때 우리가 방해합니까? 아니면 그들 자신이 방해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듣는 이들의 숫자가 줄어들도록 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읽든지 설교해서든지 간에) 말씀을 듣는 이들의 숫자가 우리가 출현한 후에 줄어들었습니까? 우리의 설교에 의하여 공중 예배를 드리는 보통 장소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었습니까? 우리의 활동으로 인하여 교회에 빈자리가 전에 보다 더 많아졌습니까? 확실히 진리나 겸손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든지 우리가 교회의 원수나 파괴자라고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 것은 교회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교회의 안녕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으로 성례전, 특히 주의 성찬을 때에 따라 베푸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교회를 해치거나 파괴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보기나 충고로 사람들이 주의 성찬을 멀리 하도록 합니까? 우리가 가장 열심히 사역했던 곳에서 성찬을 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가장 적습니까? 런던과 브리스톨(Bristol), 뉴캐슬(Newcastle)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오, 이제 당신은 사방으로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불빛에 반대하여 더 이상 당신의 눈을 닫을 수 없습니다!
79. 내가 믿기에 지금에서야 당신은 우리를 이와 같이 반대하는 일이 얼마나 취약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나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든지, 아니면 세례와 성만찬을 때에 따라 베풀든지 간에 우리를 비판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가 손쉽게 반박할 수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다"(cf. 삼상 2:17)는 사실을 마지막 날에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이든지 아니면 당신의 이성을 통해서이든지 간에 다 아시고 밝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80.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 법을 준수하지 않고 해친다는 항의를 합니다. 어떤 교회법을 말합니까? 전례 법규 혹은 표준 법규를 말합니까? 내가 지금까지 시무 했던 모든 교구에서 나는 어떤 진노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 고지식할 정도로 꼼꼼하게 이 전례 법규들을 지켜 왔습니다. 내 자신이 녹을 지급 받는 국교회의 목사이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지금도 이 법규를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이 법규들 가운데 몇 가지를 당신에게 말하고 우리들 중에 누가 이러한 법규들을 가장 잘 준수했고 또 준수하고 있는지 당신이 생각해 볼 것을 권합니다.
1. 우리는 금식하는 날과 금육제의 날을 지켰습니다. 즉 사순절 40일, 사계대재일 주간, 그리스도 승천제 삼일간의 기도, 성탄절을 제외한 한 해의 모든 금요일, 등등.
2. 성만찬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성만찬이 시행되기 전에 교구의 보좌 신부에게 자기의 이름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
만일 성만찬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 중에 공공연하게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 교구의 보좌 신부는 이들이 진실로 회개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할 때까지 성찬에 참여할 수 없음을 이들에게 사전에 통고해주는 법을 지켰습니다.
3. (니케아 신조를 암송한 후에) 교구의 보좌 신부는 이 다음 주에 어떤 축제일과 금식하는 날을 지켜야 하는지 회중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법을 지켰습니다.
4. 그런 다음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성찬을 받은 뒤 만일 이들 중 누구라도 참석할 경우 주교나, 사제, 부제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성찬을 분급하고 그런 뒤에 회중들에게 성찬을 나누어주는 법을 지켰습니다.
5. (그리고) 수많은 사제들과 부제들이 있는 대성당과 대학 교회, 대학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매주 주일에 사제와 더불어 성찬을 받아야 하는 법 (이렇게 할 수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한)을 지켰습니다.
6. 세례 받아야 하는 어린이들은 마지막 성서를 읽은 뒤 곧바로 세례반에 나와 준비해야만 한다는 법규를 지켰습니다.
7. 모든 교구의 보좌 신부들은 교인들에게 어떤 중대한 필요성이 없는 한 어린이들을 자기 집에서 세례받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고해야 하는 법을 지켰습니다.
8. 모든 교구의 보좌 신부는 주일이나 축제일에 저녁 기도회에 두 번째 성경을 읽은 후에 교리문답 중에 편리한 시간을 내어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수많은 어린이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시험해야 하는 법규를 지켰습니다.
9. 주교가 견신 성례를 위하여 자기에게 찾아와야 할 어린이들에 대한 보고 (지식)를 요청할 때마다, 모든 교구의 보좌 신부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주교에게 보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어린이들의 이름을 손수 서명해서 직접 제출하든지 아니면 서면으로 제출해야 한다는 법규를 지켰습니다.
81. 이제 문제는 이러한 전례 법규들을 꼭 지켜야만 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를 반대할 때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사실에 있어서 당신이나 나나 이 법규를 얼마나 잘 지켜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 법규들을 때로 목숨을 걸고 정기적으로 엄수했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두려운 것은 당신들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법규들을 전혀 지키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 법규들 중에 더러는 준수하지도 않은 체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교회의 전례 법규들을 지키지 않았다고 규탄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란 말입니까? 얼마나 볼썽 사나운 일인지요! "오, 이 일을 가드에게도 알리지 말고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cf. 삼하 1:20)!"
82. 표준 법규에 관해서는 나는 당신이 먼저 두세 가지 명백한 문제들을 고려해 볼 것을 원합니다.
첫째로, 당신은 표준 법규들을 다 숙독 했습니까? 둘째로, 이러한 표준 법규들이 영국 국교회에 의하여 법적으로 정해진 일이 없으며 전체 대주교구 회의에 의하여 정기적으로 확인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영국 국교회의 표준 법규"로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셋째로, 어떤 권위에 의하여 법률로 정해진 일이 없는 표준 법규들을 내가 지켜야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제 당신과 나는 다른 한가지의 문제, 즉 당신과 나 중에 누가 이 표준 법규들을 잘 준수했는가 하는 문제에 의견 대립이 있습니다. 몇 가지 경우만 든다해도,
표준 법규 29. 성만찬을 받지 않을 경우 그 누구도 어린이를 위한 대부나 대모가 될 수 없다. 표준 법규 59. 매 주일과 매 축제일에 저녁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 모든 교구 신부, 대리 신부, 혹은 보좌 신부는 반 시간 동안 혹은 그 이상으로 자기 교구의 청소년이나 무지한 사람들을 시험하고 가르쳐야 한다. 표준 법규 64. 모든 교구 신부, 대리 신부, 보좌 신부는 매 주일마다 그 다음 주에게 있게 될 축제일이나 금식하는 날에 대하여 회중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표준 법규 69. 어떤 목회자도 주일이나 축제일에 세례받기 위하여 교회에 나온 어린이에게 세례 베푸는 일과 교회나 교회 마당에 모셔진 시신 묻는 일을 거부하거나 연기해서는 안된다. (주의: 장례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 해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표준 법규 75. 교회에서 일하는 그 어떤 사람도 낮이나 밤이나 간에 주사위 놀이나 카드놀이 등을 하면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서는 안된다.
이제 지난 1년 동안 오직 이 다섯 가지의 표준 법규들만 지켰고 자기 회중 앞에서 (국왕의 재가로 인해 매년에 한번씩 하도록 되어 있는 바) 모든 표준 법규들을 읽었던 성직자들이여, 만일 우리가 영국 국교회의 (이른바) 표준 법규들을 준수하지 않았다면 앞장서서 우리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83. 그러나 우리는 (이른바) 교회의 친구가 될 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이 교회의 우두머리들에게 순종하지 않으나 (우리가 성직 안수를 받을 때 순종하기로 서약했었으나) 그들의 경건한 훈계나 명령에는 순복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중요치 않은 모든 개별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교회의 우두머리들에게 순종하며 또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행 20:24)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주 예수께 받은 우리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만난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전하는 사명"(렘 23:33)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cf. 행 5:29). 성직 안수를 우리가 받았을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네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권위를 부여하노라"라는 말을 들으며 우리가 서약했던 약속을 우리는 결코 깨뜨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단의 경건한 훈계나 명령에는 순복하기로" 서약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명령들에 대해서는 결코 순복한다고 약속하지 않았으며 약속할 수도 없었습니다.
84. (혹자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은 왜 교회를 버립니까?" "교회를 버리다니요!" 당신은 우리가 교회를 정말 버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의 담이라도 넘어 떠난단 말입니까? 당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의식을 버린단 말입니까? 당신은 매일 그 반대의 사실을 보고 또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근본 교리, 즉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버립니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공적인 일, 사적인 일, 글이나 대화에 있어서 우리의 한결같은 주제입니다. 교회 헌법에 그토록 중요하게 표현되어서 (당신이 거의 깨닫지 못하겠지만) 이 법의 가장 미소한 것이라도 범하는 날에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될 수 없는 바 교회의 관례 (십계명이 이 관례의 표준이 되는 바)를 우리가 버렸습니까? 내가 믿기에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주장을 펴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은 또한 이 문제로 "교회를 버린다"고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당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말을 한 것을 당신 자신도 모른 채 그대로 옮겨서 말했습니다. "헛소리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은 참된 관찰에서 나온 것이기에 조금도 놀랄 일이 못됩니다.
85. 이 혐의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다른 반대는 "우리가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실한 사람들," 혹은 참된 신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가 감히 어떻게 이 사람들을 분열시킵니까? 아니, 우리의 엽합회 조직을 통해서 분열시켰다고요. 좋습니다. 이제 사정은 매우 단순합니다. (당신은 말하기를) 우리가 교회의 참된 신자들을 엽합회 결성을 통하여 하나로 결합시킴으로서 "교회를 분열시켰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기 드문 방법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군요. "오, 그러나 당신은 이와 같이 서로 연합된 참 신자들을 교회의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분열시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참신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한 떡을 먹고 한 잔을 마시기 위하여 "하나로 연합함으로서" 전에는 영국 국교회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알기까지 어느 교회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 연합회를 버렸습니까? 당신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들이 이 연합회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례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 즉 교회에서 분리되어서 안된다는 사실은 우리 연합회에서 정해 놓은 규칙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라도 교회에서 분리되거나 떠날 경우 우리와 함께 할 자격이 없습니다.
86. 나는 이와 같은 이의 제기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다루었는데 이는 진실한 생각을 품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와 같은 이의 제기와 대답을 공평무사하게 다룰 경우 우리가 교회를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고 또 분열시키거나 떠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으로 나는 믿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cf. 롬 9:2).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온에 선을 행하시며 예루살렘에 성을 쌓으시고"(cf. 시 51:18), 우리의 황폐해진 교회가 다시금 융성하며 "온 세상에 찬송 받으시길"(cf. 사 62:7) 기도합니다.
87. 그러나 당신은 아마도 우리가 실상에 있어서 교회를 전혀 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목전의 이익에 눈이 멀어 모든 행동을 한다고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특히 내가 보수를 많이 받는데 브리스톨이나 킹스우드(Kingswood), 뉴캐슬이나 다른 곳에서 받은 급료보다 훨씬 더 많게 화운더리(Foundery)에서만 일년에 1,300 파운드를 받고 있으며 나보다 오래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거지로 죽지 않을 것이므로 시간을 잘 선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들었을 것입니다.
88. 이것이야말로 일찍이 시도된 반대들 중에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반대라는 사실을 나는 거리낌없이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서 나를 부정적으로 몰고 갈 수 있으며 (이렇게 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금전적인 문제는 증거를 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금전에 얽힌 문제에 관해서 나는 처음부터 내가 살아 온 삶의 양식에 호소합니다. 지난 12년 혹은 14년 동안 혹은 이 중 어느 시기에라도 내가 살아온 삶의 양식을 지켜 본 사람이라면 (비록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목전의 이익에 눈먼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주께서 주신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cf. 행 20:35)는 것을 내가 계속해서 기억하지 않았습니까? 옥스퍼드 사람들이여,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내가 당신들에게 어떤 이득을 구했습니까? 내가 누구에게라도 어떤 것을 취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누구에게서라도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탐한 적이 있습니까? 심지어 내가 당신과 헤어졌던 시간에도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누구에게 주는 것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까? 엡워쓰와 우르트(Wroot) 사람들이여, 내가 거의 3년여 동안 목회하면서 당신들로부터 어떤 이득을 취했습니까? 혹은 누구로부터 무엇을 취하거나 탐한 적이 있습니까? 사바나(Savannah)와 후레데리카(Frederica) 사람들이여, 후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당신들 중에 증거해 주셨지만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이득을 구한 적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라도 내가 무엇을 취한 적이 있습니까? 심지어 내가 굶주리고 헐벗는다고 해서 내가 누구의 음식이나 의복을 (여러 달 동안 나는 물론이고 당신 역시 은과 금이 없었기에) 탐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 자신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내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89. (혹자는 말하기를) "그러나 지금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나는 아무 부족한 것이 없으며 내가 다른 곳에서 받는 보수보다 훨씬 더 많이, 런던의 주교가 받는 연봉을 받고 있습니다." 내 친구여, 어떤 곳에서 받은 보수를 말합니까? 좀더 정확한 정보를 갖게 된다면 뉴캐슬과 브리스톨, 킹스우드 (런던을 제외하고 헌금을 거두어들인 유일한 장소들인 바)에서 헌금은 여러 연합회의 집사들에 의하여 수금되고 지출되었지 결코 처음이고 나중이고 내 수중에 들어 온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나 이러한 사실을 알기 원하는 이들은 누구든지 이 집사들 중에 누군가가 보관하고 있는 헌금 장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내가 어떤 연합회에서든지 당신이 받은 정도만큼의 사례비만 받았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90. 런던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1739년 11월에 그 당시 내가 몰랐던 두 사람의 신사 (볼씨와 웟킨스씨[Mr. Ball and Mr. Watkins])가 찾아 와서 내가 다시금 무어필즈(Moorefields) 근처의 화운더리라는 곳에서 설교하기를 원했습니다. 마지못해 마침내 나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곧바로 나는 그 장소를 인수하도록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매우 열성적이었던 사람들이 그 장소를 살 수 있는 금액 115 파운드를 나에게 빌려주었습니다. 볼씨와 웟킨스씨가 건물을 구입하고 보수하는데 계속해서 필요한 돈을 충당하기 위하여 1년에 4 혹은 6 쉴링 혹은 10 쉴링 정도를 헌금했던 몇 사람의 기부자 명단을 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 기부 금액은 한 해에 거의 200 파운드, 다음 해에 약 140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91. 연합회(the United Society)는 약간 늦게 시작되었는데 이 회의 집사들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주간 모금과 지출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내가 전혀 관할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합회의 많은 사람들이 1/4 분기에 걸쳐 실시하는 기부금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액수에 거의 필적합니다.
92. 이와 같은 기부금들을 지금까지 쓰게 된 용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건물을 매입하는 데 115 파운드를 사용했고, 둘째로 화운더리 빌딩에 산재해 있는 거대하고 거친 잔해 더미들을 보수하는데 (나는 거의 새로 건물을 짓는다고 말하고 싶은데) 썼습니다. 셋째로, 남녀 신자들을 위한 빌딩의 회랑을 만들고, 넷째로, 연합회의 방을 처음 크기보다 거의 세배 정도 늘리는데 사용했습니다. 모든 세금들과 특별한 경우에 필요한 지출은 모두 이 기금에서 사용했습니다. 지금까지 금전이 결코 남아돌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정반대로 재정에 관한 한 나는 아직도 거의 300 파운드 정도 빚을 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전해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 밖에 브리스톨에 지은 학교 문제로 인하여 진 150 파운드의 빚과 뉴캐슬에 지금 짓고 있는 새로운 빌딩과 관계된 200 파운드 이상의 또 다른 빚이 있습니다. 나는 이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함께 앉아 이런 재정에 얽힌 문제를 다 고려하게 한 다음 과연 내가 물질적인 이득을 얻고자 이와 같이 행동하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고 싶습니다.
93.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모든 일용품들과 모든 의식주의 편리, 아니 삶에 있어서 없어도 좋을 많은 여분의 것--어떤 것과도 무관할 뿐 아니라 어떤 신사의 자유보유 부동산보다 덜 불확정인 바--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침착하고 신중하게 자기의 평안과 자기 친구의 대부분과 명성과 자기의 본성과 교육에 걸맞는 모든 삶의 양식을 벗어 던진다는 사실이 물질을 탐한다는 비판과 일치하리라고는 당신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600 혹은 700 파운드의 빚을 얻기 위하여 이 사람이 밤낮으로 고생하고 자기의 모든 시간과 힘을 바치며 확고한 헌법을 알면서 파괴하고 약함과 고통과 질병과 죽음에 서둘러 빠져 들어간다는 사실을 당신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94. 그러나 다른 쪽으로 균형을 맞추어 생각해 본다면, 나는 당신에게 하나의 명백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양심을 제쳐놓고서) 도대체 어떤 이득을 위하여 당신은 이와 같이, 즉 내가 살아가는 방법과 똑같이 살려고 할 것입니까? 당신은 무슨 보상을 위하여 손쉽고 게으르고 유행을 쫓는 방법이 아니라 당신의 온 힘을 다하여 매주 18번 혹은 19번씩이나 일년 내내 설교하려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사시사철 두세 달에 한번 꼴로 7-800 마일 여행을 다닌다면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줄 것입니까? 당신은 선행을 베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이외에 무슨 다른 급료를 바라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수천의 금과 은을 가진다 해도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95.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신이 나로 인해 받은 위로는 무엇입니까? 왜요? 그것은 "내가 거지로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내 뒤로 남겨 놓기 위하여 부를 쌓고 있습니다. 이 부를 내 뒤에 남겨 두다니요? 누구를 위해서요? 내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요? 내 아내와 자식들이 누구입니까? 당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의 자식들이 아니라면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이들을 모두 먹여 살리실 것입니다(cf. 마 6:26). 실로 내가 어떤 부를 쌓았다면 그것은 "내 뒤에 남겨 놓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간다면 먼지 같은 금과 바다의 모래 같은 은을 내 뒤에 남겨 둔들 그것이 내 영혼에 도대체 무슨 위로가 된단 말입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천국과 이 세상에 가로놓인 간격을 뛰어 넘어 내 뒤를 따라 오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시 이것을 찾아 뒤로 돌아 올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눈을 들어 지옥을 본다면 당신의 물질적인 부가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당신이 일찍이 하늘 아래에서 가졌던 소유들이 당신의 혀를 서늘하게 할 물 한 방울의 가치나 되겠습니까(cf. 눅 16:19-24)? 오, 지옥 불꽃 가운데서 고통 당하는 자에게 남겨진 물질적 부가 주는 위로여! 당신은 자기를 죽이는 불쌍한 영혼에게 주는 위로 형식으로 쓰여진 바 (내가 한 때 엄청나게 경탄해 마지않았던) 유명한 시구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무덤은 피어나는 꽃들로 옷입혀질 것이며, 녹색 잔디는 당신의 가슴 위에 가볍게 놓여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 해의 가장 일찍이 찾아오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봄의 첫 번째 장미꽃들이 피어 날 것이다. 천사들이 은 빛 날개로 그늘을 만드는 동안 이 곳은 당신의 유골에 의하여 거룩한 곳이 되는 도다.
96. 당신이 경청하든지 잘 참고 기다리든지 간에 이제 나는 내가 이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먹고자 선택하는 음식과 내가 입고자 선택하는 의복을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내 머리 묻을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생활과 경건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것은 온 세상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열왕들은 나에게 더 이상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세상의 금과 은을 나는 똥과 배설물로 여기고 내 발아래 밟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니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인데) 세상의 금과 은을 거리의 진흙처럼 여깁니다. 나는 이것에 욕심을 두지 않고 구하지 않으며 이런 것들이 나에게 붙어서 나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 떨어내지 못할까 오직 두려워할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물질이 분명 내 손을 거쳐가겠지만 나는 불의한 황금신만 지나가게 하고 이 물질이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것처럼) 내 손에 남지 못하도록 할 작정입니다. 지금부터 주께서 나를 부르실 때 그 어떤 저주받은 물건도 나의 진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cf. 수 6:18; 7:1). 내가 남겨 두고 떠날 보물들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하는 이 말을 들으십시오. 만일 내가 10 파운드 (나의 친교 모임에서 생긴 빚과 미불 잔금보다 많은 바)를 남겨 놓고 떠난다면 당신이나 온 세상 사람들이 내가 도둑이나 강도로 살고 죽었다고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97. 결론은 맺기 전에 나는 하나님을 아는 당신이 모든 문제를 기초부터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나라의 종교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거룩한 기질들, 즉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친절과 세상을 멸시하는 것과 인내와 절제와 오래참음(cf. 골 3:12),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과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cf. 살전 5:16-18),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바 온 인류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고전 13:7)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아마 당신은 사악한 기질을 가진 수없이 많은 사람들 빼놓고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을 한 사람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고의 사람들로 알려진 이들 가운데, 그리고 가장 엄격하게 종교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 당신은 어떤 허영이나 교만, 완강함과 고집, 분노, 쉽게 성내는 것, 불만, 의심, 분개, 지나친 애정, 고삐풀린 격정, 어리석고 상처 주는 욕망 등을 볼 수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종교 생활을 하고 심지어 "경건의 모양"(딤후 3:5)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을 몇 명이나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이 가는 곳마다 외적인 종교마저도 전반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에 자주 비분강개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적은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 장소에 나왔습니까? 얼마나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성만찬에 참여했습니까? 그리고 심지어 이 적은 무리의 양들조차도 시간이 주어졌을 때 모든 사람을 대하여 선행을 베풀고자 열심을 내었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당신은 모든 곳에서 외적인 무종교 상태를 근심 어린 마음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어느 곳에서 사람들이 저주하고 헛된 맹세를 일삼고 신성모독을 하고 주일을 범하고 술에 취하고 말싸움하고 떠들썩거리고 복수하고 음행을 일삼는 것을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고 단 한 주간도 보낼 수 있었습니까? 이런 일들이 구석진 곳에서 일어났습니까? 모든 종류의 엄청난 부정이 홍수처럼 온 천하에 창궐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대했고 또 반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증가하지 않았습니까?
98. 이제 당신은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곧 일어 나셔서 당신의 공의를 세우시고 당신의 영을 위로부터 내리사 온 땅을 새롭게 하시며 쫓겨난 자들의 가슴에 당신의 사랑을 널리 부으시며 모든 거룩한 하늘의 성품을 내놓으시고 분노와 교만 악한 욕망과 모든 부정하고 세상적인 성품을 내쫓으시고 외적인 종교--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가 융성하고 넘치도록 하실 것이며 이 외적인 종교가 퍼지는 곳마다 외적인 무종교를 폐하시며 마귀가 하는 모든 일들을 파괴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의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지식이 순식간에 이 땅을 온통 뒤덮고 마귀와 그 자식들이 온 힘을 다해 반대했고 또 반대할 수 있었을지라도 날마다 확장되리라는 사실을 들었더라면 당신이 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그 날을 보고자 열렬히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99. 보라, 주의 날이 오도다. 주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찾으시고 구속하고 계십니다. 눈이 있어도 당신은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합니까? 이 때에 주께서 우리의 수치를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이미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영을 쫓겨난 자들 위에 쏟아 부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그들 가슴 위에 널리 흘리십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일, 온유, 친절, 겸손, 거룩한 하늘의 애정이 미움과 분노, 교만, 복수, 비열하거나 허망한 애정을 밀치고 들어섭니다. 그러므로 주의 능력이 미치는 곳마다 외적인 종교의 모든 형태가 분출됩니다. 하나님의 집이 가득 차고 주의 만찬을 받는 자리는 사방으로 발딛을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보이는 사람들은 삼가 선한 일을 계속하고 (시간이 있을 때)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모든 종류의 선을 베풂으로써 자기 이웃 사랑하는 것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모든 악행을 삼갑니다. 이들은 또한 마귀가 하는 모든 일들은 물론이고 (아무리 이것이 멋지다고 할지라도), 저주하기, 주일 범하기, 술취하기 등은 입에 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구석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지 않는 까닭에 명백하며 입증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제 당신은 주께서 당신을 찾으시는 날을 인정합니까? 당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안에서 기뻐합니까(cf. 벧전 2:12)?
100. 어떤 장애가 있습니까? 이 장애가 사람들이 말하는 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도구로 기쁘게 쓰시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입니까? 오, 어리석은 자여, 당신은 마귀가 죽었다고 생각합니까? 혹은 당신은 마귀가 자기의 왕국을 위하여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거짓말이 아니면 마귀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우겠습니까.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아닙니까? 당신은 여태껏 이렇게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귀와 그 자식들이 우리에 대하여 모든 종류의 악한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마귀들이 계속해서 서로를 속이도록 내버려두십시오. 만일 당신이 마귀가 하는 모든 말, 즉 우리가 연약하며, 어리석고, 사리 분별없이 사악하며, 배우려 하지 않고, 심지어 선행에 대한 계획이나 실천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마귀에게 속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한가지 사실, 즉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허다한 증인들이 이것을 입증해 줄 것에 대해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의 백성들을 찾으신다는 추론 역시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 모든 이들이 주께서 자기를 찾으시는 날 평화를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을 알게 될지어다!
101. 전반적으로 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말리엘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여전히 권면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뽑아 세우신 당신에게 나는 당신이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 아버지 집에 함께 속한 자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든지 간에 당신이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는 것"(cf. 삼상 23:16)이 당신이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에게 주의 이름으로 행운을 빌어 주고, 어떤 일도 우리를 동요하지 않게 하고 우리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기쁨으로 마치려 함에 우리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도해 주는 일을 당신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