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부인

by holyway posted Mar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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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기 - 부 인 

그리고, 모든 사림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 
를 지고 따르라.' (눅 9:23) 


1. 여기에서 주어진 교훈은,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도들이나 적어도 초대교회의 신도들, 또는 박해를 받는 사람들과 연관된 것이라고 흔히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슬프게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은혜로우신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동안 그를 섬기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이 말씀을 전하셨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어떠한 예외나 제한없이 우리들과 그리고 전 인류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의무가 사도들이나 초대교인들에게만 특별하게 부과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도 없이 바로 그러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떤 특수한 국가를 염두에 두시지 않은 것처럼 특수한 계층의 인간이나 특수한 시대를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 모든 인간, 모든 사건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성격의 것입니다. 그 의미는 '어떤 인간'이든지, 즉 어떤 계급이나, 신분이나, 처지의 사람이든지, 이 세상의 어떤 국가, 어떤 시대에 살든지, 충실하게 '나를 따르려할 것 같으면' 모든 점에 있어서 '자기를 부인해야 될' 것이며, 어떤 종류의 십자가든지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을 완전하게 표현하자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단지 편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제자로 남아 있게 되는 일에 있어서 절대적이고도 필수불가결한 성격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 일의 성격상, 우리가 이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더 주님의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님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인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임금이나 자기의 육적인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추종하거나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고 주님께 등을 돌리거나 주님을 외면하게 됩니다. 

3. 특별히 혁신과 부패로 인하여 교회의 종교개혁이 점차적으로 진행된 이래로, 거의 모든 세대와 국가에 걸쳐 수 많은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공중 설교나 개인적인 권면을 통해, 자기 부인의 중대한 의무에 대해 그렇게도 많이 쓰고 말해온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성직자들은 이 문제를 취급한 많은 소책자들을 해외에까지 널리 유포시켰고 우리 나라안에서도 이런 책자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기 경험의 입증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를 알았습니다. 
나는 첫째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항상 자기부인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히도록 할 것입니다. 



 

1. 나는 첫째로,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수 많은, 강력한 대적들에 의해 심한 반대를 받았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점이 숙고되고 철저히 이해돼야 할 가장 필요한 요점인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본성은, 심지어는 자기자신을 방어하기까지 하면서, 여기에 대해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세상, 즉 자기의 본성(은혜가 아니라)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도를 위해, 자기 부인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혐오합니다. 그리고 이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우리 영혼의 가장 큰 대적은 여기에 대해 온갖 반대의 돌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특별히 근년에 와서 악마의 멍에를 어느 정도 벗어버리고 마음속에 은혜의 참된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까지도, 자기부인을 주님께서 특별히 강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기독교의 이 위대한 교리에 동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성서가 여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양,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극심하게 또한 전적으로 이 교리에 대해 무지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강한 편견을 가지고 이 교리와 아주 거리가 먼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에 관하여는 능력이 전혀 없고, 종교에 관하여는 영이 전혀 없는, 멋진 언사와 행동을 가진 외면적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부분적으로 이것을 받아 들였고,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 때 도래할 세상의 권능을 맛보았던 사람들로부터 부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부인을 실천하지 않고, 이 교리를 다른 사람에게 천거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이 사실을 의심한다면 당신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거의 알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 자기 부인의 모형입니까? 이것을 철저히 실천하기를 고백하는 사람들 조차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천거하거나, 이것을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들은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즉 마치 '행위로 구원을 얻기'위해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하는 것인 양 자기 부인을 끊임없이 묘사했습니다. 모든 종류의 율법무용론자들은 우리가 "율법주의 혹은 율법을 전한다!"라고 우매하고도 무의미하게 청승맞은 외침을 해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교리에 깊게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거짓 스승과 거짓 형제들 (그들은 복음의 단순성 때문에 다소간 미혹당했습니다)에 의해, 중요한 복음의 교리를 전도시키고, 기만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지금 읽으려고 하는 것을 결코 지울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손으로 기록될 수 있도록, 읽기 전에, 읽을 때에, 읽은 후에 열렬한 기도를 하십시오. 

2. 그런데 자기 부인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부인해야합니까? 어째서 이런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모든 지적인 피조물 즉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땅의 모든 인간들에게 똑같이 구속력을 가지는 최고의 불변하는 법칙이라고 답변하겠습니다. 그것이 그렇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피조물과 그들의 창조주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뜻이, 크든지 작든지 간에,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행동의 유일한 법칙이라면,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로부터 즉시 자기 부인의 근거와 이유와 함께 그 본질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부인의 성격을 압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행동의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확신으로부터, 우리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을 부인하거나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라는 바로 그 점이 그 이유라는 것을 압니다. 즉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하나님께 곧바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한 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 가던 인간의 뜻은 지금은 다른 길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다를 뿐만 아니라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 뜻과 전혀 반대가 되어 하나님을 떠나 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옳은 한 길을 가려고 한다면 다른 길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두 길을 다 걸을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나약한 마음과 가냘픈 손을 가진 인간은 두 길을 교대로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두 길을 동시에 걸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동시에 쫓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여 자기를 따르든지,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든지 해야합니다. 

4. 우리는 지금 기회가 허락하는 대로 자기 본성의 타락에 빠짐으로서, 자신의 뜻을 추종하는 것을 잠시 동안은 틀림없이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에 있어서나 자기의 뜻을 따르므로 자기의 뜻의 사악함을 그만큼 더 강하게 하고, 거기에 깊이 빠짐으로 우리의 본성의 타락을 끊임없이 증가시킵니다. 그래서 구미에 맞는 음식만을 섭취하므로 우리는 흔히 육신의 질병을 더하게 하고, 미각을 만족시키므로서 질병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것은 쾌락을 가져오는 것 같지만 또한 죽음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5. 그렇다면, 대체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며, 비록 자기의 뜻이 기쁨이 된다 할지라도 자기의 뜻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생되지 않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는 어떤 쾌락이라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즐겁고 화려한 길로 인도할지라도 곁길로 가기를 거절하는 것이며, 취향에 맞을지라도 우리에게 치명적인 독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할 뿐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뜻과 무언가 상반되는 것이며, 자신의 본성에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 보다 조금 더 어려운 일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가는 일이며, 혈육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다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참는 것보다는 쾌락을 따르는 것이 보다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앞에 놓여진 경주를' 달리는데 있어서 흔히 우리의 달리는 길에 십자가가 가로 놓이게 됩니다. 그것은 무언가 즐겁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하는 그런 성격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선택은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든지 하나님의 길, 즉 '우리에게 내리신 거룩한 명령'을 외면하든지 해야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외면하기를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한 지옥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이 간직한 부패와 사악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오른편 눈을 뽑아 버리고 오른 손을 자를 필요가 흔히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일이나 수행하는 방법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말하자면 어리석은 욕망과 과도한 애정에서 떠나는 일, 또는 그 욕망과 애정의 대상으로부터 떠나는 일인데, 이런 일이 없이는 타락과 질병이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전자의 경우, 이것이 영혼에 깊이 뿌리박혔을 때 이런 욕망과 애정을 떼어버린다는 것은 예리한 칼로 가슴을 찌르는 것과 같고, '영과 육, 뼈마디와 골수'를 갈라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인간의 불순물을 태우시는 연단하는 불꽃으로서 우리의 영혼 속에 자리잡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 일의 성격상,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영혼은 두 동강이로 찢겨질 수 없으며, 고통 없이는 연단의 불길 속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 죄로 병든 정신을 고치고 우매한 욕망과 과도한 애정을 고치는 방법은 그 일의 성격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고 질병의 성격 때문에 흔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무엇이나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이 그의 욕심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임을 잘 아셨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생각하는 자체만도 그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그는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 청년은 지상의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오히려 하늘의 소망을 버리는 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듣기를 원치 않았던 짐이었고, 그가 지지 않으려고 했던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저런 경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분명하게 요청 받아야 될 것입니다. 

4. '십자가를 지는' 일은 '십자가를 견디는' 일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온순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참을 때, 그 때는 적절하게 '십자가를 견딘다'고 말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을 자진하여 감수할 때, 자신의 뜻에 상반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게 될 때, 또한 현명하고 은혜로우신 창조주의 뜻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을 선택할 때, 우리가 적절하게 말해서 '십자가를 지는'것이 됩니다. 

5.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견딘다는 것은 물론 져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는 십자가란 홀로 그 사람만의 것은 아닙니다. 그와 모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입니다. 시험이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볼지라도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것이며' 그런 것은 현세에 있어서 그들의 일반적인 성격과 상황에 흔히 일어나고,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가 처한 모든 상황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 십자가는 그 자신의 것이고 자기에게 독특한 것입니다. 즉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으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기독교의 지혜가 지시하는 데로 그 압력을 제거하는 데 그 수단을 사용한 후에) 도공의 손에 있는 진흙처럼 놓여지게 된다면, 그것의 질과 양과, 정도와, 지속성과 그리고 다른 모든 환경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복지를 위해 지시하시고 명령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6.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은혜로운 주님께서 '단지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거룩함에 동참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의 영혼의 의사로서 행동하신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분이 우리의 상처를 찾으시는 가운데 우리를 고통가운데 내버려 두신다면, 그것은 오직 상처를 고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건강한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서 곪고 부패한 부분을 잘라 버리십니다. 만일 우리가 온 몸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다리 하나를 잃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한다면, 비유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온 영혼이 지옥에 던져지기 보다는 차라리 오른 손 하나를 자르기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 것입니다. 

7.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의 본질과 근거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떤 사람이 말하듯이) 자시 자신을 훈련한다는 뜻이 아니며,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몸을 찢는 것도 아니며, 두건이나 쇠로 만든 요대나 우리 몸의 건강을 해치는 어떤 것을 부착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이 아닌 무지를 통해 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납하실런지를 우리가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뜻에 상반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는 것이며, 쓰더라도 몸에 좋은 약을 택하는 것이며, 어떤 종류든지, 정도이든지 간에, 그것들이 본질적이든 우발적이든, 영원한 기쁨에 필요할 때에는 잠시동안의 고통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1. 나는 둘째로,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지 않거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충실하게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부인이 결핍되어 있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은혜의 수단의 결핍, 능력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듣는 일에 대한 결핍, 성례전이나 기독교적인 친교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 중에 어느 것도 결핍된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거나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거나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몇 가지 실례를 가지고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즉, 그가 들은 바를 기뻐하고, 진리를 인정하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는 아직 '허물과 죄'로 죽어 무감각과 무의식 상태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지금 그는, 주님이 혐오하고 있다는 죄를 알고 있지만, 그의 가슴 속에 품은 그 죄에서는 떠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욕과 불결한 욕망으로 가득찬 채 말씀을 들으려고 왔습니다. 그는 그러한 욕망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깊은 감명이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날 수 없으며, 그의 우매한 마음은 아직도 완악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부인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무감각과 무의식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3. 그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약간 뜨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왜 그는 그렇게 빨리 눈을 다시 감습니까? 왜 죽음의 잠에 다시 빠져들어 갑니까? 그가 다시 마음 속에 있는 죄악에 굴복하고 달콤한 독을 다시 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속적인 감명이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자신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인 무감각 속으로 다시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4.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경우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깨어났을 때 다시는 졸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일단 받아들인 감명은 사라지지 않고 깊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도 그들이 구하는 바를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애통을 하고 있지만 위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이고, 받은 바 은혜를 따라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쉽게 둘러 싸고 있는 죄, 즉 어떤 체질 상의 죄, 직업과 관련된 죄에서 떠나지 않고 또한 그들이 행할 수 있고 마땅히 행해야 된다고 알고 있는 선을, 죄를 수반한 어떤 불쾌한 환경 때문에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5. 그런데 그 사람은 '하늘의 은사'를 받았었습니다. 그는 '장차 올 세상의 능력을 맛보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았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했었습니다. '그에게 주셨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과 같이 나약합니다. 그는 다시 세상의 일을 좋아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욱 맛보려고 합니다. 마침내 그의 이해의 눈은 닫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의 사랑은 완전히 냉담하게 되고, 하나님의 평강은 이제 그의 마음을 다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가 다시 악마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외면적인 행위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어리석고, 쾌락적인 죄에 다시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교만, 분노와 욕망, 아집과 완고함에 빠져 버렸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사를 불러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인 태만에 굴복해 '항상 기도하며 모든 인내로서 조심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파선을 당한 것입니다. 

6. 그러나 아마 그가 믿음의 파선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그의 영혼과 더불어 끊임없이 증거하시는 양자의 영이 어느 정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예전과 같이 의에 굶주려하지도 목말라 하지도 않고,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형상과 충만하신 기쁨을 갈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지치고 연약하게 되어, 사실상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는데 있어서 전력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고, 말씀을 숙고하지도 않고, 금식하지도 않고, 종교집회에 참석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그가 이런 일들을 전적으로 등한히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이 일을 수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경건의 행위는 물론 자선의 행위에도 열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충분한 재질을 가지고 자기의 힘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와, 모든 정도로서 사람들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해 선을 행함으로, 주님을 열심히 섬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습니까? 메마른 시절의 기도는 그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기회를 통해, 계속하여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잠이 달콤하거나 삶이 차겁고, 어둡고, 구질맞기 때문입니다. 
왜 그는 자비의 행위를 계속을 못합니까? 옷의 경비를 절약하고 값싸고 맛없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굶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외에도 병든 자와 감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는 것은 여러 가지 불쾌한 경우가 따르는 것입니다. 
대개의 영적인 자비의 행위는 그런 것입니다. 즉 견책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가 그의 이웃을 견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치심, 때로는 공포가 끼어듭니다. 왜냐하면 조소를 받을 뿐 아니라, 더욱 큰 불편함에 자신을 노출시킬런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이런 불편함과 그와 비슷한 생각에서 그는,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비와 경건의 행위를 부분적으로 태만히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완전하게 될 수 없고 그는 은혜 안에서 자랄 수 없습니다. 즉 그가 '자기를 부인하거나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7. 어떤 사람이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부인 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의 결핍에 항상 기인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나팔소리가 들려와도 죄 가운데 죽은 자가 깨어나지 못하는 것,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자가 깊고 영속적인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 죄에 대해 깊고 영속적인 확신을 가진 자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 하늘의 은사를 받았던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지속하지 못하고 신앙이 파선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멸망의 포구로 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지치고 연약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높으신 부르심의 상급의 표적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1.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이든,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자기 부인과 날마다 십자가를 짐의 교훈에 반대하는 자들은 성경말씀이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부터 얼마나 쉽게 깨달았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일반적인 성격은 물론 수많은 특수한 본문들에 대해서 이런 사람들은 얼마나 저들이 전적으로 무지한 것입니까! 진실하고 순수한 기독교인의 경험에 대해 얼마나 저들이 친숙하지 못한 것입니까! 성령께서 예전에 행하셨고, 오늘날도 행하시는, 인간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해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자녀의 경험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큰 소리로 자신있게 (무지의 자연적 열매)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모든 점에서 헛된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저울질해 본 후, 결핍된 것을 발견합니다. 

2. 우리는 둘째로, 많은 특별한 개인들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조차도 한 때는 열을 내고 빛을 비추었지만 지금은 빛도 열기도 잃어버리게 된 진정한 이유를 여기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복음의 귀중한 교리를 미워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적어도 가볍게 취급하여 왔습니다. 그들이 '우리는 모든 자기 부인을 짓밟고, 이것을 파괴시키기에 전력을 다하겠다'라고 뻔뻔스럽게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들은 자기 부인의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하거나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비주의 작가들이 자기 부인을 가르친다'고 악한 인간은 말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 부인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영감받은 작가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기꺼이 들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3. 여기서부터 셋째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자기 부인의 교훈을 반대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다소의 찬성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의 피로부터 깨끗해지려면 자주, 그리고 주로 이것에 대해 말해야 됩니다. 가장 분명하고 강력한 방법으로 그 필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이것을 강조해야 되고 '한 줄 한 줄, 한 교훈 한 교훈' 강조해 가면서 여기에 대해 외쳐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는 거리낌없는 양심을 갖게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의 영혼과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4. 끝으로, 당신들 각자 자신의 영혼에 이 교훈을 적용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당신이 골방 속에 거할 때 이것을 숙고하십시오. 마음속에서 그것을 음미하십시오. 이것을 철저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하도록 유의하십시오. 깨닫자마자 실행할 수 있도록 힘을 얻기 위해 능력 많으신 분에게 부르짖으십시오. 지체하지 말고 바로 이 시간부터 이것을 실천하십시오. 생의 제반 환경에서 발생되는 수 천가지의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이것을 보편적으로 실천하십시오. 처음 일을 행한 시간부터 그리고 끝까지 지속적으로 견디므로 드디어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갈 때까지, 중단하는 일이 없이 그 일을 실천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