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증언(이선희교수님 번역)

by holyway posted Mar 10,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웨슬리의 회심에 대한 그 자신의 증언 

(출처The Journal of the Reverend John Wesley, AM., 
Ed. Nehemiah Curnock, 8 vols., : London: The Epworth 
Press, 1938. vol.1 PP.98-106). 

(1738년 5월: 역주) 24일 수요일에 일어난 일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전후에 있었던 일들을 연결하여 서술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에 서술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은 자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빛을 보다 더 많이 베풀어 주시기를 빛의 아버지께 간구하기 바란다. 

1. 나는 대략 10살이 되기까지는 세례시에 나에게 주어진 바 "성령의 정결하게 하심"(washing of the Holy Ghost)을 통하여 죄를 범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로지 "보편적 복종(universal obedience)으로써만, 즉 하나님의 계명 전체를 지킴"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것을 나는 진정으로 배웠고, 지도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열심으로 훈육되었다. 외적인 의무들과 죄들(outward duties and sins)에 관한 범위에 있어서는, 나는 이러한 훈육을 즐겨 받았고 또한 이렇게 훈육받은 내용들을 자주 숙고하였다. 그러나 내적인 복종 또는 거룩함(inward obedience or holiness)에 관하여 나에게 가르쳐진 모든 것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지하 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진정한 의미(the true meaning of the Law)에 대하여도 무지하였던 것이다. 

2. 그 다음 6-7년은 학교에서 지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전보다 더 게을러졌으며, 심지어 외적인 의무들에 대하여도 태만하였다. 내가 외적인 죄라고 알고 있는 그런 행동들, 비록 그런 행동들이 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끄러운 것들이 아니었지만, 이런 외적인 죄들을 거의 지속적으로 행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성경은 여전히 읽었으며 기도도 아침 저녁으로 드렸다. 이제 나는 내가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1)내가 다른 사람들만큼은 악하지 않다는 것, (2)종교에 대하여 여전히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 (3)성경을 읽고 교회에 다니고, 기도를 드린다는 것에 걸고 있었다. 

3. 대학으로 진학하여 5년 동안, 나는 여전히 공적으로 사적으로 기도를 드렸으며, 성경 이외에도 또한 몇 권의 다른 종교적인 책들,특히 신약성경의 주석서들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기간 동안에 내적인 거룩함(inward holiness)에 대하여는 개념조차 없었다. 오히려 나는 이런저런 잘 알려진 죄를 상습적으로,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 아주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짓고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그렇지 않은 잠깐 동안의 기간들도 있었고, 그런 식으로 죄짓지 않으려고 짧게나마 애를 써보기도 하였다. 특히 일년에 세번 의무적으로 받게 되어 있는 성찬을 받기 전후하여 그러하였다. 이 무렵에 나는 나에게 있었던 작은 그 빛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거역하며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었으니, 많은 성직자들이 나에게 "회개"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준 바 그러한 일시적인 것들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내가 무엇으로 구원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지금 나는 잘 말할 수 없다. 

4. 내가 22살 가량 되었을 때, 아버님께서 나를 강요하여 성직자가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사, 나는 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christian Pattern)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 진정한 종교라는 것은 가슴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true religion was seated in the heart)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켐피스에 대하여 매우 화를 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물른 나는 그의 책을 Dean Stanhope의 번역으로만 읽기는 했지만, 그는 지나치게 엄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전에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던 만큼,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주 꽤많은 위로를 얻고는 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져 보지 못했던 한 종교적인 친구를 만남으로써, 나의 생활양식의 모든 형태를 바꾸기 시작하였고, 진지하게 "새로운 삶"에 마음을 쏟기 시작하였다. 나는 하루에 한두 시간을 구별하여 종교적 은둔을 위하여 썼다. 나는 매주 성찬을 받았다. 말에 있어서든 행위에 있어서든 나는 모든 죄에 대항하여 근신하였다. 나는 내적 거룩함(inward holiness)을 목표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그만큼 행하므로, 그만큼 선한 삶을 살므로", 스스로 좋은 그리스도인(a good Christian)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아니 하였다. 

5. 그 후에 다른 대학으로 옮기면서, 나는 그전부터 지극히 중요한 결심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바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그 결심은 바로 하찮은 교제관계를 일절 떨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의 가치를 점점 더 깨닫기 시작하였다. 공부에 더욱 전념하였다. 행위로 짓는 죄들에 대항하여 더욱 조심스럽게 근신하였다. 나는 내 자신이 그에 따라 살고 있던 바의 종교적 모델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종교적으로 살라고 조언하였다. 그런데 이즈음에 Law씨의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과 "진지한 부르심"(Serious Call)이라는 책을 만나면서부터는, 물론 이 두 책에 있어서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전보다 더욱 하나님의 율법의 지극한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확신하게 되었다. 빛이 나의 영혼 위에 너무도 강렬하게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더 이상 연기하지 아니하기로 결심하되, 그 전에 그렇게 결심해 본 바가 없을 정도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내적으로 또한 외적으로 전력을 다하여 지켜 행하기를 지속적으로 노력함으로써, 나는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때 이미 나는 구원의 상태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6. 1730년 나는 형무소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도와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른 선행들을 행하되, 나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모든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을 위하여, 몸소 찾아가 보거나 또는 나의 적은 물질을 베풀어줌으로써 행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나는 물론 사치는 일절 생략하였고, 소위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들도 많이 생략하며 살았다. 나는 곧 이런 행위 때문에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름이 재수 없는 이름으로 내뱉어지는 것을 (은근히) 즐거워하였다. 이듬해 봄에 나는 고대교회에서 보통으로 지켜졌던 바의 수요일 금요일 금식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오후 3시까지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이쯤해서는 나는 여기에 무엇을 더 이상 행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든 죄에 대항하여 열심히 싸웠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자기부정을 어떤 종류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모든 은혜의 방편들(means of grace)을, 공개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성을 다하여 활용하였다.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결코 놓치지 아니하였다. 나는 이것 때문에 악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런 모든 선행이 내적 거룩함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내적인 거룩함이, 즉 하나님의 형상이,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내가 목표하는 것, 내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도달하고자 목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몇 년을 지속적으로 노력한 후에, 내가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런 모든 노력이 나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하며,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시리라는 어떠한 확신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나는 적지 아니 놀랐다. 이런 노력을 하는 동안 내내 나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미 놓으신 기초 이외의 다른 기초,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기초를 어떠한 인간도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7, 그후에 곧 한 명상가가 나에게, 외적인 행위등은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전에 나는 이미 이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훨씬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몇 번에 걸친 대화를 통하여, 내적 거룩함 또는 '영혼이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것'(a union of the soul with God)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는 그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그는 외면적인 행위에 대한 신뢰를 너무 사려분별없이 반대하도록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듣고는 낙담하여 외적인 행위에 대한 의욕을 모두 상실할 정도였다. (2)그는 나에게 (말하자면, 외적인 행위들 속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소위 "정신적 기도"(mental prayer)와 이와 유사한 수련 방법들을, 영혼을 정화하여 하나님과 합일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건대 이 모든 것들은, 즉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히고 했던 것들이 나 자신의 행위(my own works)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추구하는 소위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것도 사실에 있어서는 실로, 내가 그전에 다른 이름 하에 추구하였던 바 '나 자신의 의(義)'(my own righteousness) 바로 그것이었다. 

8. 나 자신의 행위들과 나 자신의 의를 신뢰하는 이 세련된(refined) 방법 가운데서(신비적 작가들에 의하여 그토록 열심히 주입교육을 받은 대로), 나는 침울하게 질질 끌려갔다. 그러나 이런 노력 안에서 아무런 위안도 도움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까지 말이다.(선교사로서: 역주) 그러나 (미국행)배 안에서 나는 다시금 외적인 행위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저주시는 긍휼을 베푸셔서 나에게 26명의 모라비아교도들(Moravian brethren)을 동반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는 바, 이들은 나에게 "보다 탁월한 길" (a more excellent way)을 보여주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소위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배운 것이 많고 현명했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그 길은 나에게는 어리석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인간도 그것으로써는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없는 저 義(that righteousness)를 설교하고, 따르고, 신뢰하기를 계속하였다. 

9. Savannah에 있었던 기간 동안 내내 나는 이런 식으로 허공만 치고 있었다. 그 분을 믿는 살아 있는 믿음(a living faith in Him)에 의하여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義'(the righteousness of Christ)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세우는 일을 추구하였다. 그것도 모든 시간을 바쳐 열심으로 노력하였다. 나는 이 때 적절히 말해 "율법 아래" 있었다.(롬6:14)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는 율법은 선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내적인 사람에 있어서 율법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나는 "육적이요, 죄 아래 팔려 있었다". 매일 같이 나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는 바를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미워하는 그것을 나는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그, 원하는 바 선을 어떻게 실행할지를 나는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을 나는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원하지 않는 악, 그것을 나는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하였거니와, 그것은 바로, 내가 선을 행하고자 원할 때 악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내 지체 속에 있는 법이 내 마음의 법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여전히 나를 죄의 법 속에 포로로 잡히게 하고 있는 것이다"(롬7:14-23). 

10. 이렇게 죄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천박하며 비참한) 상태에서 나는 끊임없이 투쟁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에는 죄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종노릇하였다면, 지금은 기껍지 않은 마음으로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노릇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나는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고 일어났다가는 다시 넘어지고 하였다. 어떤 때에는 내가 져서 마음이 무거웠고, 어떤 때에는 내가 이겨서 마음이 기쁘고, 이런 식이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율법의 가공할 일들을 미리 맛보는 것(some foretastes of the terrors of the law)같았고, 후자의 경우에는 복음의 위로를 미리 맛보는 것 같았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내내 지속되어 온 이와 같은 (자연과 은혜 사이의 싸움 (struggle between nature and grace)이 계속되는 동안에 나는, 특히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될 때마다, 다시금 눈에 뜨이게 기도로 돌아오고는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위로를 많이 받았다. 이런 위로는 실로 믿음의 삶을 잠깐이나마 미리 맛보는 것(short anticipations of the life of faith)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율법 아래" 있었고, "은혜 아래" 있지 못하였다. (이런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살다 죽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그런 상태이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더불어 싸움을 하고만 있었을 뿐, 죄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에게는 성령이 나의 영과 더불어 주는 증거가 없었다.(롬8:16) 실로 그런 증거를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증거를 믿음으로써 추구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율법의 행위(the works of the law)로써 추구하였기 때문이다.(롬9:22) 

11. 1738년 1월 영국으로 돌아올 때, 죽음의 절박한 위험 속에서,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매우 마음이 편치 않은 가운데서, 이 불안의 원인이 불신앙(unbelief)이라는 것과 그리고 참된 살아있는 믿음(a true, living faith)을 얻는 것이 나에게 "필요한 유일의 것"(눅10:42)이라는 것을 나는 강하게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믿음을 이 믿음의 올바른 대상(its right object)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즉,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 혹은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이 믿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이 믿음이 충분치 못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Peter Bohler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true faith in christ) (이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에 대하여 단언하기를, 이 믿음은 이에 불가분적으로 동반하는 두가지 열매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를 이기는 것(dominion over sin)과 용서를 감지하는 데에서 항구적인 평화(constant peace from a sense of forgiveness)"라고 했을 때, 나는 매우 놀랐으며, 이를 마치도 새로운 복음인양 생각하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확신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반박하면서, 이 두가지 열매가 없는 경우에도, 특히 용서의 의식이 없는 경우에도, 믿음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애를 썼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논박했느냐 하면, 나는 믿음에 관련된 모든 성경구절을 적당히 해석하여 본래의 취지에서 멀어지도록 오래 전부터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었고, 또한 성경과는 다르게 말한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에 의존하도록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어떤 사람도 그러한 용서의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느낄 수 없다'(feel)고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상 말이 안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용서받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용서의 의식 없이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겐 믿음이 있노라고 자부케하던 나의 모든 주장이 단번에 땅에 떨어져버렸다. 

12. 내가 다시 Peter Bohler를 만났을 때, 이 논쟁을 내가 원하는 척도에, 즉 성경과 경험적 사실(Scripture and experience)에 놓고 검증하자는 나의 제안에 그는 동의하였다. 나는 먼저 성경에게 누구의 의견이 옳은지를 물어 보았다. 그런데 인간들의 주석들(the glosses of men)을 배제하고,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을 숙고하되, 말씀과 말씀을 서로 비교하며, 모호한 구절은 보다 명료한 구절을 가지고서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숙고하여 본 결과, 성경구절들은 모두 나의 의견에 반대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마지막 보루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적 사실은 그 성경구절들에 대한 "문자적 해석'(literul interpretation)과 결코 일치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므로 나는 그것에 관한 (당신의 의견을 입증하는: 역주) 살아있는 증인 몇을 찾기 전에는 당신의 의견이 옳다고 인정할 수 없소". 그는 어느 때라도 그러한 증인들을 나에게 보여 줄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원한다면 다음날이라도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그는 세 사람을 데리고 다시 왔다. 그 세 사람은 모두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중거하기를,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살아 있는 믿음은 과거의 모든 죄들에 대한 용서의 의식 및 현재의 모든 죄들로부터의 자유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한 입으로 또한 말하기를,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과 이 믿음을 진지하고도 끈기 있게 구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은 이 믿음을 틀림없이 베풀어 주신다고 하였다. 나는 이제 철저히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믿음을 구하되, 끝까지 추하기로 결심하였다. 
(1)나는 청소년 시절부터, 그런 줄도 모르고 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실제로 나의 구원의 희망을 그 위에 근거시켜 왔던 바의 '나 자신의 義나 행위들"에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의존했던 것을 모두 전적으로 포기함으로써, 그 믿음을 구하기로 결심하였다. (2)다른 모든 은혜의 수단의 항구적인 사용, 특히 바로 이 믿음, (하나님이 이 믿음을 보시고: 역주) 의롭다하시는, 구원하시는 믿음, 바로 '나'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온전한 의뢰, 그리스도를 바로 '나의 그리스도'로서, '나'의 유일한 칭의요 성화요 구속으로 신뢰하는 믿음, 바로 이 믿음을 구하는 기도를 계속적으로 드림으로써, 이 믿음을 구하기로 결심하였다. 

13: 나는 이런 식으로 그 믿음을 구하기를 5월 24일 수요일까지 계속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관심이 흐려지고, 감정이 무뎌지고, 냉랭해지고, 전과는 달리 죄에 자주 반복하여 빠지고는 했지만). 아침 5시 경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성경을 펴서 다음의 말씀을 받았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외출하려 할 때, 성경을 다시 펴서 다음의 말씀을 받았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막12:34). 오후에 성 바울 교회에 가자고 하여 갔다. 찬송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당신을 불러 왔습니다. 오 주님. 주여, 나의 목소리를 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귀를 기울이시사 나의 탄원의 목소리를 들어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당신께서 지극히 엄히 지적하신다면, 견뎌낼 자 누가 있겠나이까? 당신께는 자비가 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신을 두려워하나이다. 오, 이스라엘아, 주님을 신뢰하라, 주님께는 자비가 있고, 주님께는 구속하심이 풍성하게 있으니. 그리하면 주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로부터 구속하시리라"(시130) 

14. 저녁 때 나는 매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街(Aldersgate-Street)에 있는 한 모임에 갔다.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Luther)의 '로마서를 위한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쯤에,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진정 신뢰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바로 '나의' 죄를 이미 가져가 버리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고 하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15. 나는 나를 독특한 방식으로 심술궂게 이용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다.그런 다음에 나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 나의 마음에 처음으로 느낀 것을 공개적으로 중거하였다. 그러나 곧 그 원수가 나에게 암시했다: "이것이 믿음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너의 기쁨이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나는 배우기를,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신 주님을 믿는 믿음에는 평화와 죄에 대한 승리는 필수적으로 뒤따르나, 이 믿음의 시작에 보통 동반한다 하는 기쁨의 황홀경에 대하여는, 특히 깊이 애통해온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깨서는 그 자신의 뜻에 따라서 그런 기쁨의 황홀경을 주기도 하시고 보류하기도 하신다고 배웠던 것이다. 

16. 귀가 후에 나는 유혹들로 시달렸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면, 그 유혹들이 도망갔다. 그것들은 거듭하여 나를 찾아왔다. 내가 종종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면, 그 분께서 "그 분의 거룩한 곳으로부터 나에게 도움을 보내 주셨다".(시20:2) 주로 이 점에 나의 지금의 상태와 전의 상태 사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은혜 아래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에 나는 율법 아래에서 온 힘을 다하여 분투, 실로 투쟁하여 왔다. 그러나 그때, 자주는 아니지만, 때때로 정복당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항상 정복자였다.. 

17. 25일 목요일. 잠을 깬 순간에, "예수님, 주님"이 나의 마음에 그리고 나의 입술에 계셨다. 나의 온 힘이 나의 눈을 그 분에게 고정하는 일에 기울어 있으며 나의 영혼이 그 분을 계속해서 모시고 있음을 나는 발견하였다. 오후에 다시 성 바울 교회에 갔을 때, 찬송가에서 하나님의 좋은 말씀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찬송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그 친절하심을 나의 노래는 늘 찬송하리라. 나는 나의 입으로 당신의 진리를 세세대대로 늘 증거하겠나이다". 그런데 그 원수가 두려움을 나의 마음에 주입했다. ".만약 네가 진정으로 믿고 있다면, 왜 너에게 눈에 뜨이는 변화가 없느냐?" 나는(아니 내가 아니다) 대답하였다: '그것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나는 안다'. 즉, 나는 '이제 하나님과의 사이에 화평'(now peace with God)을 누린다. 그리고 오늘 나는 죄짓지 아니한다. 나의 주님 에수님이 나에게 금하신 바,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18. 그러나 그 유혹자는 계속하기를, "그러나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네가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나의 주님이 내 대신 대답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을 열어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받았다: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 7:5). 그렇다면 내 안에 두려움이 있으려면 있어라; 그러나 나는 앞으로 전진하여 그 두려움들을 나의 발 아래 밟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26일 금요일: 나의 영혼은 계속하여 평화 가운데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유혹들 때문에 여전히 우울한 가운데 있다. 모라비아 교도인 텔취히(Toltschig)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문의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이 전에 했던 것처럼 그 유혹들과 더불어 싸워서는 안 되고, 그 유혹들이 나타나는 순간에 그들로부터 피하여 예수의 상처 밑을 도피처로 삼으라"고 하였다. 오후에 들은 찬송가에서도 나는 동일한 것을 배웠다. 그 찬송가는 이러했다: "나의 영혼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조용히 기다립니다. 그 분으로부터 나의 구원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진정 나의 힘이요 나의 구원입니다. 그 분은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크게 넘어지지 아니할 것이라. 오, 너희의 신뢰를 항상 그 분에게 걸으라, 백성이여. 너희의 마음을 그 분 앞에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니" 


27일 토요일: 나에게 기쁨이 결여되어 있는 한 이유가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것에 있다고 믿고, 나는 아침에 교회에 가서 나의 마음을 그 분 앞에 쏟아 놓기를 계속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이날에 나의 영혼은 넓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지금도 역시 많은 유혹들에게 습격당했다 할지라도, 나는 나의 구주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도록 그 이상의 힘을 얻어, 정복자 이상이 었다. 

28일 일요일: 나는 평화 가운데 눈을 떴다. 그러나 기쁨은 없었다. 나는 저녁 때까지 이와 같은 평정한 상태 가운데 있었다. 이날 저녁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서 열광주의자, 유혹자, 새로운 교리를 내놓는 자라는 거친 비난을 받았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화를 내게 되지는 않았다. 단지 조용히 짧게 응답한 후에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방식의 잘못 때문에 사망을 구하고 있는 그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한 그런 부드러운 관심을 갖고 응답해 주지는 못했다. 
이 날 나는 아침에 Bloomsbury에 있는 聖 죠오지 교회에서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이니,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리고 오후는 Long-Acre에 있는 채플에서,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하신다"고 설교하였다. 이것이 이들 교회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마26:39). 

29일 월요일. 페터 뵐러가 영국에서의 선교에서 얻은 첫열매 가운데 한 사람인 Wolf씨와 함께 둠머(Dummer)씨를 찾아 갔다. 나는 그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많은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수준은 나의 수준을 너무도 능가하여 있기 때문에, 그와 내가 서로 간에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인가 하고 의심하도록 종종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많이 궁리해 볼 것 없이 나는 여기서 멈추었다: '그의 것은 '강하고' 나의 것은 '약하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의 믿음(some degree of faith)을 주셨다는 것을 이 믿음의 열매를 보고 안다. 즉, 나는 '항구적인 평화'(Constant peace)를 누리고 있다 - 불편한 생각(uneasy thought)이 조금도 없다. 그리고 '죄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sin)를 누리고 있다 - 거룩하지 못한 욕망(unholy desire)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31일 수요일: 역주). 그러나 나는 수요일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켜 드렸다. '깨어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뿐만 아니라, 믿음에 있어서 건전치 못한 사람을 관하여 부드러운 사랑을 갖고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랄하게 말하였던 것이다. 곧바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감추셨다. 나는 마음이 괴로웠다. 이렇게 무거운 마음이 다음날(6월 1일) 아침까지 지속되었다. 


(6월 1일: 역주). 내가 다른 사람을 권고하고 있는 동안에 나의 영혼에 평안함을 주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때에, (얼마간 기도 드린 후에) 나를 다음과 같은 은혜로우신 말씀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었으니, 진실된 마음으로, 믿음의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갑시다 흔들림 없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굳건히 붙드십시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그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간에 사랑과 선행에로 권고하십시다".(히10:22-24) 


6월 3일 토요일: 나의 옛 원수들 가운데 하나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나는 입술을 열 힘도, 심지어 도음을 청하여 위를 바라다 볼 힘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힘닿는 대로 의기소침하게나마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 그 유혹은 사라져 버렸다. 


6월 4일 일요일: 이 날은 참으로 축제와도 같은 날이었다. 아침에 기상하면서부터 오후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기도하고, 성경 읽고, 찬송 부르고, 죄인들을 회개로 부르곤 하였다. 요 며칠 사이에 성경을 열어 어떤 크고 귀한 약속에 귀기울여 보지 않은 기억이 거의 없다. 복음은 진실로 그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위대한 약속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발견하게 되었다. 

6일 화요일: 나는 마음의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더욱 많이 누렸다. 이런 것을 이제 대담하게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유: 저녁에 나는 oxford로부터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이 편지는 나를 매우 당혹케 하였다. 편지에는 이런 주장이 들어 있었다: "지극히 적으나마 참다운 믿음이 있다면, 의심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어느 때든 어떤 종류의 의심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 그는 믿음이 약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온전히 (wholly) 해방하기까지는, 어떤 누구도 전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 
나를 인도하여 주십사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나는 성경을 열어 고린도전서 3:1을 받았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 부르는 자들을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들은 "딱딱한 음식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요,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육적인" 인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하나님의 건물이요, 하나님의 성전이다" 라고 한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 사람들도, 물론 그들의 믿음은 '약한 것'이 확실하지만, '어느 정도의 믿음'(some degree of faith)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독서와 기도에 몇 시간을 드리고 난 후에, 나의 마음은 매우 평온하여졌다. 그러나 나는 일종의 마음의 아픔을 느졌다. 아직도 나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오, 하나님, 나를,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모두 "의심에 찬 논쟁"으로부터 건져 주시옵소서! 


7일 수요일: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잠시동안 물러나 독일을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 

(번역: 이 선희 교수,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