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by holyway posted Mar 10,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5:15) 


우리의 첫 조상이 한번 범죄한 것은 그 조상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 대대로에게까지 악의 영향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하여 신랄한 항의를 해왔습니까? 
죄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고의적인 반역에 의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지금까지도 계속 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박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든 덕, 의로움, 그리고 진정한 거룩함마저도 빼앗겼습니다. 또한 교만과 사악함, 그리고 모든 마귀가 하는 것 같은 기질로 인하여 악마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가지게 되었고, 잔인한 열정과 천박한 욕망 등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망도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와 고통, 병, 그리고 거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용이하지 않은 격정들과 기질들이 줄이어 따라 들어왔습니다. 
반면에 이에 상응하는 비난은 매 세대마다 반복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담 때문이다." 



이 엄청나면서도 중요한 아담의 타락 사건은, 어린아이들 까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아담의 타락에 대해서 비난해 보지 않았습니까? 타락한 인간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를 믿으면서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에 이를 것입니다. 아마 아담이 고의로 그의 창조주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에 대하여 여러분은 그를 심하게 정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에게 모든 비애가 미치리라. 

.오히려 비난이 이 구절에 머물렀으면 좋았을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꼭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그것은 가끔 아담으로 부터 창조주께로 그 비난이 돌려진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마저도 바로 이 문제에 부딪치게 될 때, 물론 하나님의 정의는 아니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문제 삼을 자유가 있다고 외쳐오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좀더 부드럽고, 완곡하면서도 간접적인 방법으로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예 가면을 내동댕이 치고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의 자유의지를 남용할 것을 과연 미리 알지 못했을까요?" 라고 묻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런 일로 인해 분명 그의 모든 후손들이 끔찍한 결과를 받는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들이 불순종하도록 그렇게 내버려 두셨나요? 차라리 그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담으로 하여금 그 죄를 저지하는 것이 쉬운일이지 않았겠습니까?"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 처음으로부터 되어졌던 그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일을 미리 막을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는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막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허물이 있는 곳에 거저 주시는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전자에 의한 잘못으로 생긴 악은, 후자에 의해 돌아오는 선에 비하여 아무것도 아님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첫 사람이 타락을 허락하시는 일이 인류에게는 훨씬 최선임을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의 후손들에게는 악보다도 은혜가 풍성하게 생겨났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죄가 흘러넘칠 정도라면,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더 흘러 넘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하긴 그가 그것을 받고 안 받는 것이 그의 선택일 때의 이야기지만,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많은 글이 발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문제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이해되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문제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며, 다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진리로써 다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볼때, 

은혜의 섭리를 주장하는 한편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방법을 정당화하는 일이 다른 원칙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리를 아는 정직한 탐구가들에게는 중요한 진리가 얼마나 명백한지 모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제발 우리의 이해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하셔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류가 어떤 잠재력을 얻었는가 하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좀더 거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셨으며, 
둘째로, 우리가 누렸던 것 이상의 행복을 하늘나라에서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후손이 누렸을 수도 있었던 것보다 이 세상에서 더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실락원 이후 누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실도 이것보다 분명할 수는 없습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점에 대해 연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모든 인류가 아담안에서 그 치명적인 상처를 받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본성을 취해시는 일도 필요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였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라고 로마서 5장 12절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씀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이가 죽었으나, 예수 안에서는 살리라 하는 말씀에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의 불순종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한 사람의 순종에 의해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의 놀라운 사랑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했던 예수님의 순종은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영들이 놀랄정도의 말,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생각이나 바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라는 복된 소식이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 자신께로 화목케 하시고 계십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죄없는 자로 죄가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말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이 되게 하셔서 아드님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으 오른편에 나타 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실 일이 없을 뻔했습니다. 
이것의 필연적인 결과는 무엇입니끼?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시고,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의의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성령님에 대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진실로 믿음에 의해 의롭다하심을 받는 특권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 안에 있는 속량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우리들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에 있었던 그 큰 공백은 우리의 사랑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존재의 저자이시며, 천사와 인류의 아버지되시며, 창조자, 보존자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했어야 했습니다. "오! 주 우리의 통치자시오! 당신의 이름이 이 땅에서 얼마나 위대한지요?"라고 찬양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을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런 광채시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셨던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는 사랑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또한 '자신을 단 한번의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온전한 희생과 제물과 만족을 드리신' 주님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본받지 못했으며 부활의 능력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을 계시하신 성령님을 사랑할 줄도 몰랐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어둠으로부터 그의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셨으며, 죄 용서함을 받는 그날 우리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시고 구속의 날까지 인치시는 분이신 그를 우리는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위의 모든 것이 사실대로라면, 오류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순수하고 부패하지 않은 종교'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의 큰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함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 곧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 분을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게 하셨으며,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게 하셨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불 때 우리는 위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행악자를 위해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다 주시며,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던 성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볼 때, 위의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살펴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주신 유익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육체에 거하는한 이 사랑에 관한 확실한 이유가 사도들에 의해서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의 위대한 사건은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 위대한 사건이 없었더라면 성부, 성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람에 따라 커가는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박애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비례해서 증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도들의 말씀에서 강력한 능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사랑하는 자들이여, 하나님이 우리를 이와같이 사랑하시는데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보십시요. 이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외아들로 저주를 받은 죽음을 죽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아버지와 똑같이 영광을 누릴 위치에 있으며, 또 영원한 존귀를 받아야하는 그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형태의 사랑이겠습니까? 
그 사랑은 가능한 한 당신의 영원한 신성을, 자신을 비우셔서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영광을 스스로 내던지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사람의 형태로 오셔서 종의 형체를 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아주 비천한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 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웃들을 사랑해야 합니까? 만약 아담이 타락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친숙하게 지내는 사랑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아담 이후론 그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그 차원 높은 사랑을 우리 이웃들에게 베풀고 있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깊으신 명령을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아담의 타락에 의해 이렇게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주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첫 조상의 행동에 의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고통도 들어왔고 또한 모든 후대 자손들에게도 이르게 된 것' 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정의 뿐만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가 악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선을 가져오게 하시는지요! 고통으로부터 거룩함과 행복함으로 이끄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고통이라는 통로를 통해 모든 인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끝없는 혜택을 받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로 환난(affliction)이라 불리우는 것이 하나님의 언어에서는 축복이라 칭해진다."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 고통이 없었더라면, 종교의 상상한 부분,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을 거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존제 자체가 바로 그 고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없었더라면 그것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기반 즉 우리의 고통 위에 우리의 모든 수동적 은혜들이 세워진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기독교의 은혜 중 가장 고귀한 형태의 은혜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참고 견디게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완전한 의탁을 말해 줍니다. 모든 시련의 때에 우리로 하여금"이는 여호와시니, 선한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3:18)라는 말을 마음으로부터 말할 수 있게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광경인지요. 어떤 아빙인(세네카)은 놀라서"하나님께 가치있는 모습이여, 선한 사람이 역경과 싸워 이기다니"하고 부르짓지 않으면 안되지 않았습니까?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로 향한 신뢰의 바탕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두려워할 것들에 관하여 하나님을 신뢰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저 조용히 하나님 안에서 머물러 있었다면.그러한 신뢰의 근거가 없었을 것입니다.우리의 영혼이 만약 고통과 위험 등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는가?"(요18:11)라고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고난을 통해서 다져지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더 기꺼이 받아들임직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때가 바로 '격동의 날"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위험을 눈 앞에 두었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슬픔, 병마귀, 고통 그리고 죽음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자연적인, 또는 도덕적인 악이 없었더라면 인내심, 온유함, 친절함, 그리고 오래참음 등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건대 아마 아무것도 존재치 못했을 것입니다. 악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악 하나씩에 해당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위의 선한 것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주에 행악자가 없었더라면, 누가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악을 선으로써 정복한다'라는 그러한 전제 밖에서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은총들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신에 의하여 자리잡게 하기 위함입니다."라고 여러분들은 말하겠습니까? 틀림없이 그것들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럴지라도 그것들에게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현상태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더 사용되면 될수록, 우리의 은혜도 더욱 강해지고 증가됩니다. 또한 나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 불굴의 정신, 온유, 친절 오래참음 더불어 증가함과 꼭같이 비례해 심지어 현세에서의 행복도 증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고난의 수많은 기회를 주었고, 그들의 거룩함과 행복을 증가시키는 모든 수동적 은혜들을 행사할 수많은 기회를 준 것같이, 아담의 타락이 그의 후손들에게 수많은 경우들에 있어 선을 행할 기회를 주며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행할 기회를 줍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선한 일들이란 없었을 것입니다. 자애심,긍휼, 신성한 자비를 행하는 일이 막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어느 누가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마음은 내 생애를 통해 다 알려졌다오; 
가엾은 사람의 외침, 과부와 고아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에, 
나는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를 돕기 위해 자비의 날개를 
저어 날았다오; 
내 자신, 내 가진 모든 것을 과연 그에게 줄 수는 없을 
까? 
바로 이러한 것이 은혜끼치려는 자의 모습이리라 
모든 세상의 즐거움조차도 
선을 행하는 기쁨에 미치지 못하리. 
(챨스 웨슬리) 

확실히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큰 보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합시다."라는 계명 말입니다; 모든 종류의 선한 일과, 모든 부류의 선을 행합시다. 우리는 선을 행할수록, 더욱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우리의 먹을 양식을 나누어주고, 또 헐벗은 자에게도 우리의 겉옷을 입혀주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병든 자나, 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는 것이 바로 인생 항로에서 여러가지 악으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다욱 친절한 봉사를 수행할수록, 현세에 선한 봉사를 하는 것이며, 현세에 있어서조차 우리가 더욱더 위로를 받으며, 우리 심령에 더 큰 보상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을 다시 정리해서 말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한 생활을 할수록, 우리는 이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여기서 거룩함과 행복함의 불가분 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수록 우리 심령에 오는 보상은 더욱 크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을 받을수록, 우리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영광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으로 인한 타락은, 첫째로 더욱 거룩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으며, 둘째로 우리 스스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으며, 또 세째로 그 선한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의 능력으로 바꾸어 영광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머물도록 하며 자손들에게도 유익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현세에 사는 우리에게도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류 첫 조상의 타락으로 인해, 그의 후손들이 현세에도 누릴 수 있는 유익과 또한 그들이 영원한 생명에까지 거둘 수 있는 더 큰 유익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사실을 좀더 확실히 알기 위해서 사도들의 증거를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별이 영광에 있어서 다른 별과 다른 것같이, 죽은자의 부활도 그러합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별은 틀림없이 가장 거룩한 성도일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의 형상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일 것이며; 또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수많은 고난을 당하신 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지은 죄의 댓가로써 이 세상의 고통을 받은 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은 상급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런 경우 그들은 거룩해지는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포기하고, 그에 대한 신뢰, 또한 위험 속에서도 인내하는 겸손함, 온화함, 그리고 순종의 미덕이 아니었더라면, 이러한 상급은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 거룩해질수록 하늘에 있는 그들은 더 커다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수고만큼 그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의 업적만큼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타락은 수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인들이 지금까지 이루어 놓았던 그 업적들, 즉 사방에서 억눌린 자들을 도와주었던 그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면류관을 얻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일했던 것과 같이, 고난을 당하면서 일한 것에 대한 하늘의 보상이 풍성할 것임을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짧은 순간에 당한 작은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놀랍고도 영원한 영광의 상급을 주신다."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고난을 들어오게 했던 사건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영원한 영광을 더욱더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준 격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모든 사람에게서 고난이 끝난다할지라도, 우리의 '찬양의 시'는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영원히 흘러넘칠 것입니다. 아래와 같은 찬양의 시는 계속 불리워질 것입니다. 

인생의 고통과, 분함과, 산만함은 머지않아 끝나리. 
비탄의 한숨은 더 이상 들리지 않으리. 
죄가 더 이상 이 세상에 들어오지 못하리. 

우리가 별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아담의 타락 사건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유익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들의 첫 조상의 허리춤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죽지 않는다면, 아담의 후손 각자가, 직접 하나님께 대답하여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가 타락을 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적을 했다면, 다시 회복 할 수 있는 기회는 물론 전혀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대안도 없이 멸망받아야 한다는 것이 필연적인 결과처럼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은 자비를 고려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 계약은 "죄 짓는 자는 죽여 마땅하니라"입니다. 
어느 누가 자비의 계약 아래 살려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누가 단 한번의 내기로 영원을 모험에 걸기로 원하겠습니까? 비록 언약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그런 절망적인 모험을 하지 않고 비록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합니까? 훗날 우리는 그곳에서 이렇게 찬양할 수 있게 될것입니다. 

나의 범죄가 하늘에 까지 
나의 범죄가 하늘에 까지 미치고 더 높은 하늘로 
치솟았도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끝없는 용서를 받았도다 
내가 주님의 자비하심을 보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는 여러분들의 관심을, 특히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께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말과, 또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말들이 바로 이 점에 촛점을 맞추게 됩니다. 즉 아담의 타락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을 불러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땅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하늘과 땅이 인정하고 
천사와 사람들이 합세했도다 
나와 더불어 
인류의 구세주를 찬양했도다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께 경배하라 
예수의 이름이 복되도다! 

만약 아담을 타락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을 것이며, 천사들마저 보길 원했던 신비스런 예수님의 사건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으로 인하여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천사도 인간도 예수님 안에 있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귀한 은혜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 인한 타락사건에 대해 불평할 필요가 전혀 없어지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로 부터 우리는 현재에 있어서나 앞으로의 영원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허락하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심판 이상의 자비와 기쁨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우리는 이제 이 땅에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려야 오히려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바로 그 사건에 구원을 위한 놀라운 사건이 놓여져 있고, 또 하나님의 지혜가 놀라울 정도로 나타나고 있으며, 거룩하심과 공의와 자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수 백만의 인간을 영원한 불 속에 살도록 미리 결정해 두셨다면, 그리고 그 이유가 나 자신이 태어나기 수백, 수천년 전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결정되어진 것이라면, 저는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혹 악마나 그의 조무래기 마귀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꼭 그러한 결과를 나타낸다면, 수백만의 불쌍한 영혼들이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 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불타는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래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세상에 퍼진 죄의 근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죄가 하나님도 바꿀 수 없는 물리적인 법칙에서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도저히 그 해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입발린 말로써 이리저리 핑계만 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해답을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을 그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셨고, 이해와 자유를 지닌 영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유를 남용한 사람 - 아담과 하와 - 이 그만 악을 행하여 죄와 고통을 이 세상으로 들어오도록 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를 더 확실히 나타내기 위해 아담의 타락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축복하신 것보다 더 많은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은 "오, 하나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도리에 대한 신비하고도 독특한 수천 가지의 사건과 또한 우리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이 시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계획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만의 의지에 따라, 그는 이 세상을 운행하는 계획을 세우셨고, 또 인류의 조상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죄인이 되도록 하셨으며, 또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그 자유의 선물을 얻을 사람들이 더 영광스럽고 행복한 삶을 영원히 누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