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On Sin in the Belivers) 고후5:17

by holyway posted Mar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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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On Sin in the Belivers)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1763년 3월 28일 Lewisham에서)

(조종남 역 "존 웨슬레의 설교선집" 6번  쪽, 구미중앙교회 김성호성도 타자) 

1)'신자 안에 있는 죄' 라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죄가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 안에 죄가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에게도 죄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이죄에서 전적으로 해방을 받은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단순히 어떤 호기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렇다고 하거나 저렇다고 하거나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들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해결한다는 것은 신자의 현재의 행복 문제나 영원한 행복 문제에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2)그러나 이런 문제가 초대 교회에서 변론되어진 일이 있었는지는모르겠습니다. 실은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에 대하여 논의할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상고하여 본 바에 의하면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남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들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강하게 될 때까지는 '정사와 권세' 와 싸워야 하듯이 또한 혈과 육과 악한 성질' 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3)우리 교회는 정확하게 이 초대 교회를 따르고 있습니다. 교회 신조 제9조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원죄는 모든 사람의 본성의 부패를 말하는 것이고, 이 에 의하여 사람은 그 본성에 있어 악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 으므로 육은 영과 반대되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본성의 부패성은 거듭난 사람에게도 남아 있다. 그러므로 헬라어로 '프로네마 싸르코스'라고 부 르는 이 육의 정욕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 리하여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기는 하지만 이 정욕 은 그 자체가 죄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4)다른 모든 교회들도 같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희랍 정교회나로마 뿐만 아니라 그 외의 구라파에 있는 개신교회들도 - 어떤 교파에속하였든지 간에 - 모두 이같은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교파들은 이것을 너무 지나치게 다루어서 신자의 마음의 부패를 설명할때,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극복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이것에 얽매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5)이런 극단을 피하려는 나머지 많은 선량한 사람들, 특히 고(故)진젠돌프 백작의 지도 하에 있었던 사람들은 또 하나의 극단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모든 참다운 신자들은 죄의 지배(dominion of Sin)에서 구원 받았을 뿐 아니라, 밖에 있는 죄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에있는 죄 자체(Being of inward sin)에서까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미 죄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많은 영국 사람들은 약20년 전에 이런 견해를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본성의 부패성조차도 이미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6)독일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추궁을 당하자 그들은 - 적어도 그들 중의 대부분은 - 죄가 아직도 육에는 남아 있지만 신자의 마음안에는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그불합리성이 드러나자 그들은 이 주장을 깨끗이 포기하고,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을 주관하지는 못할지라도 아직은 남아 있다는 것을인정하였던 것입니다.

 

7)그러나 독일 사람들의 이 주장을(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접하게 된 영국인들은 그리쉽게 설복(說服)되거나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이런 주장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고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사람들은 이 견해를 버리지 않고 오늘날까지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1)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알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서라면 이 문제를 조용히 공정하게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나는 '거듭난다, '외로워진다' 또는 '믿는자' 라는 말들을 별 차이없이 같은 말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이 말들의 뜻에는 다른 점도 없으며(첫번째 말은 내적이고 실제적인 변화를 가리키고, 두 번째 말은 상대적인 의미가 있으며, 세 번째 말은 거듭나고 의로워지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등의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은 믿는 자는 누구나 그가 의롭다함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한 가지 사실에 귀착하는것입니다.

 

(2) 여기서 죄라 함은 내적인 죄를 말하는 것으로 어떤 죄된 성질이나 의욕, 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종류나 어떤 정도의 것이든지 사람 속에 있는 자만이나 완고, 세상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것은 정욕, 분노, 불평 같은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과 반대되는 성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이 문제는 외적인 죄(Outward Sin)에 관한 것, 즉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을 인정하며 또한 이를 열심히 견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한다' 는 것에 동의합니다.

우리가 지금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내적인 죄가 하나님의 자녀들속에 늘 머물러 있는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며, 사람의 영혼이 육체 속에 있는 한 죄는 계속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뿐만아니라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내적인 죄나 외적인 죄에 다시 빠질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 즉 거듭난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받은 그 때 과연 모든 죄에서 지유를 얻는 것인가 하는 것이며, 그후에 그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는 한 늘 죄가 없다는 말인지 하는 문제들을 상고해 보자는 것입니다.

 

(4)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의 상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이들은 거듭나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요 1:12)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아들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천국의 상속자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 4:7). 그의 몸은 바로 '성령의 전' 이기에 하나님께서 영으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지음을 받은자입니다. 그는 씻음을 받았고 성별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속한 모든 부패로부터 깨끗함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사랑 가운데 걷는 한' (늘 그렇게 하고 있겠지만) 그는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들을행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행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거리낌없는 양심"(히 10:22)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의롭다함을 받은 순간부터 내적인 죄, 외적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2]

(1) 그러나 그가 모든 죄에서 지유함을 받아서 마음 속에 아무 죄도 없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믿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는 반대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소욕은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느니라"(갈 5: 17) .

이 말씀은 그가 신자들을 향해서 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는 일반적인 신자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신자에게 있어서까지도 육욕, 악한 성질이 성령을 거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긍정하였습니다. 즉 중생한 사람 속에서도 서로 대적하는 두 가지 세력이 있다는 것을 긍정한 것입니다.

 

(2) 다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고전 1:2)들에게 편지할 때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한 사람이아니리요"(고전 3:1, 3)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기서 바울은 의심 없이 신자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호흡을같이 하며 형제된 지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아직도 육에 속한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시기(하나의 나쁜 성질)가 있어서 종종 분쟁을 일으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신앙을잃어 버렸다고는 조금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그들이 믿음을 잃어 버리지 않았다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을 잃었다면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그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란 말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 아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인 동안에는 모든 신자가(어느정도) 육신에 속하여 있음을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진실로 신자에게도 서로 대적되는 두 개의 세력 곧 자연과 은총,육과 영(성령)의 두 세력이 있다는 이 중대한 논점은 사도 바울의 모든서신 속에, 아나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지시나 권고의 대부분은 이런 전제 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지들은 신자라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릇된 성질이나 소행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은 이런 것들과 싸워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의 힘으로 정복하라고 계속적으로 권고를 받고있습니다.

 

(4) 그리고 누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심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4)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의 가슴 속에는 죄가 없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말씀을 첨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 속에서 발견하신 진짜 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회개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 그들이 믿음조차 없었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5) 아니, 오히려 버가모 교회의 사자도 회개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계 2:16). 이는 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또한 명백하게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도 말씀하시기를 "그 남은 바 죽게 된것을 굳게 하라"(계 3:2)고 하셨습니다. 그 남은 바 좋은 것은 죽게 된것이지만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속에는 믿음의 불씨(spark)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마침내 "굳게 지키라"(3절)고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6) 다시 한 번 사도 바울은 신자들을 권면하면서 "육과 영의 온갖더러운 것에서 깨끗케 하자"(고후 7:1)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는신자들이 이런 것들에서 아직도 깨끗해지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악한 모양을 피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온갖 더러운 것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예로, 한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합니다. 나는 증오를 느낍니다. 곧영의 더러운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는 '악한 모양' 을 피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슬프게체험한 바이거니와) 나를 그 영의 더러운 것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은아닙니다.

 

(7)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죄가 없으며 육에 속한 마음이 없고 타락할 경향이 없다"는 따위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치되는 것이며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체험과도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마음에 타락할 경향이 있음을 항상 느끼며 또한 자연히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에게서 떠나 세상과 짝하고자 하는 성벽이 있는 것을 인지합니다.

그들은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죄 곧 자만, 고집(완고), 불신 등을매일 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들이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그것이 최선의 행동이건 성스러운 의무이건 고착되어 있는 죄를 매일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압니다.

이것은 어느 순간에라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저희의 영과 더불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을 분명히 느낌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속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죄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과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가 '영광의 소망' 이 되심을 동시에 확신하고 있는것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있는 마음 속에 계실 수가 있을까요? 틀림없이 그리스도는 그 곳에 계실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럴 수없다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병이 있는 곳에 의사가있는법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주님은 자기 사업을 수행하시며, 죄를 내쫓을 때까지 애쓰신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죄가 지배하는 곳은 지배하실 수 없으며, 죄가허용되고 있는 곳에는 내주(內住)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께서는 모든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 모든 신자의 마음 속에 계시며(is) 내주하십니다(dwells). 성전을 청결케 하는 것처럼 그 마음이 온전히 청결해지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런 마음 속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계시며 또한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9)지금까지 우리는 신자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는 교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아주 새로운 교리임을 고찰하였습니다. 이런 교리는 과거1700년 동안 들어보지 못하였고 진젠돌프 백작에 의하여 비로소 주장된 것입니다. 나는 이런 주장과 비슷한 어느 것도 고대나 현대의 글에서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 거칠고 열광적인 도덕 무용론자들(antinominians )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는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육체 속에는죄가 있다고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리든지 새로운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저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Old Religion)가 유일한 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교리가 최초의 것과 아주 동일하지 않는 한 옳은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10) 이 새롭고 비성서적인 교리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논증은 그것이 초래하는 무서운 결과 자체에서 들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오늘 화를 냈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나는 "당신은 믿음이없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또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충고하신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당신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불신자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초래되는 결말은 무엇입니까? 만약 내가 말한 것을 그가 믿는다면, 그는 응분의 큰 보상을 가진 확신을 내던져 버리게되기 때문에 그 영혼이 슬픔과 상처를 받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 멸망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자기의 방패를 내던지게 되는데 그가 '악한 자의 화전(火箭)'을 소멸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가 "세상을 이긴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함을 알고 능히 이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그는 적들 가운데서 무장해제를 하고 공격자들을 향해 문을 열고서 있는 셈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완전히 정복되었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아니 그리하여 그가 적들의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혔다고 할지라도, 또는 하나의 악에서 또 다른 악으로 빠져 들어가 그에게서 선이란 아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상할 것이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나는 결코 이런 주장 곧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부터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이 교리는 성경의 전체적인 대지와 반대됩니다. 둘째로, 이교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체험에 상반됩니다. 셋째로, 이 교리는 아주 새로운 교리로서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교리는 가장 파괴적인 결말을 필연적으로 가져옵니다.

즉, 이 교리는 사람들을 근심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3]

(1)그러면 이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요한 변론들을 공정히 들어보기로 합시다. 먼저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신자에게는 죄가 없다는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반대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깨끗하고, 거룩하고, 성별되고, 마음이 정결한 자로 새 마음을 가진 자요 성령의 전이다. 그리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그 전부가 악한 것과 같이,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 모두선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깨끗하고 성결하고 거룩한 동시에 깨끗하지 않고 성결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청결하며 동시에 불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사람이 새 마음과 옛 마음을 함께 가질 수는 없다. 또한 사람의 영혼이 성령의 전(殿)인 한 그것이 거룩하지 않을 수는없는것이다.

 

나는 위에서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유감 없이 될 수 있는 대로 강하게 내세웠습니다. 이제 이것을 하나 하나 검토해 봅시다.

①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 전적으로 선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있습니다. 나는 성서 본문은 인정합니다만 그 끝에 붙인 저들의 주석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본문이 "영으로 난 모든 사람은영적인 사람(spiritual man)이다"라는 것으로 긍정하는 데 그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전적으로 영적일 수도 있고(altogether spiritual) 전적으로 영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절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그들은 전적으로 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어느부분에 있어서는 육신에 속한(carnal)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었다"는 말에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② "사람은 깨끗하고 성결하고 거룩한 동시에 불결하고 성화되지아니하고 거룩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씻음을 받았다", "너희는 성화되었다"고 했습니다. 곧 "너희들은 음란과 우상숭배와 술취함과 그 외의 다른 외적 죄에서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고전 6:9~11). 그러나 동시에 이말에는 그들은 성화되지 못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은씻음을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즉 시기와 악한 억측과 편당심 같은그런 것들에서 내적으로 깨끗함을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들이 새 마음과 옛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지만, 분명히 그 때 그들의 마음이 새로워졌던 것은 틀림없으나 아주 전적으로(entirely) 새로워지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의 육에 속한 마음은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완전히(wholly)멸절되지는 앟았던 것입니다.

"저들이 성령의 전이 되어 있으면서 거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는 반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저들이 성령의 전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고전 6:9) 동시에 어느 정도 육신에 속해 있어서 거룩하지 않았던 것도 분명합니다.

 

(2)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성경구절이 또 하나 있는데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새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인 동시에옛 피조물일 수는 없다고 그들은 반대합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분적으로 새로와질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마음의 영에 있어서는 새로워졌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 아이' 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을 온전히 갖지는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서로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 '옛 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을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으로 해석하여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언행의 앞뒤가 거의 일치한 것으로 볼 때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해질 것입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의인(義認)을 얻는 일이나 성결이나 행복에 대한 옛 판단 또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한 옛 판단은 지금 다 지나가버렸으며, 마찬가지로 전에 가졌던 욕망, 계획, 감정, 성질, 행동도 다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틀림없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과거의 상태에서 크게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워지긴 했지만 전적으로 새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그는 슬프고 부끄럽게도 그 옛 사람이 남아 있어서 전에 가졌던 성질이나 감정의 기미가 드러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깨어 기도하는 동안에는 이런 것들이 우세한 입장을 차지할 수 없는것입니다.

 

(3) "사람이 깨끗하면 깨끗하고, 사람이 거룩하면 거룩한 것이다"라는 변론은 - 이런 종류의 표현은 20개 이상이라도 쉽게 모을 수 있을것입니다 - 모두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은 특수에서 보편으로.

즉 어떤 개개의 전제(前提)로부터 일반적인 결론을 추론하려는 하나의 그릇된 논증입니다. 그 문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온전히 거룩한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어린 아이는 거룩하지만 아직온전히 거룩하지는 않다"라는 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받지는 못한 것입니다.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죄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죄가(최소한도 어린이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또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사랑의 법까지도)의 높이나 깊이, 길이, 넓이를 분명히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불법과 율법에서의 탈선은 죄입니다. 그러면 신자의생활이나 마음에 이 율법과 일치되지 않는 것(disconformity )이 없습니까? 장성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어린 아이의 경우 그러한 것이전혀 없다는 것은 인간 성정(性情)에 비추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지않습니까?

 

(4) "그러나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롬 8:1) 하나님의 영은그들 안에 내주하신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죄책(guilt)과 죄의 세력에서. 한마디로 죄의 존재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죄책, 죄의 세력, 죄의 존재라는 말들이 마치 동일한 것처럼 한데 중첩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말들은 각각 다릅니다.

우리 신자들은 죄의 권세와 책임에서 건짐 받은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의 존재에서까지 건짐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합니다.

아무리 궁리하여도 이 본문에서는 그런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이 성령을 거스리는 육체의 소욕을 느낄지라도 그는 그에게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성령을 따라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골 1:20)는 말은 곧 그 몸의 지체는 모든 더러움에서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만약 그렇지않다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서로 연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인 신자들이 성령을 거스리는 육체의 소욕을 느낀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대적하고 극복해야 악마와 죄로더불어 교분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6)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러운 것은 아무 것이고 들어갈 수 없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히 12:22)고 반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천군 천사들이 모인 곳과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에게 기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땅과 하늘이 동의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설사 그들 속에 또 하나의 원죄가있으며 또 그것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느끼더라도 그들이 성령을 따라 걷고 있는 한 한결같이 거룩하고 더러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인데, 만일 육신에 속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화목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육신에 속한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화목이라는 것은 이 육신에 속한 마음을 전적으로 파괴시키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것은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입니다.

그 순간에 육신에 속한 마음 곧 하나님과 원수되는부패한 성질은 우리 발 밑에서 짓밟힌 것입니다. 이 육체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존재하여(exist) 그 본질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의 영에 대해 거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8)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 5:24)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반박합니다.

저들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정과 욕심은 그들 속에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종종 십자가에서 빠져 나오려고 고투(苦鬪)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린 것이 아니냐?"(골 3:6)라고도 주장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위에서 말한 대로 "옛 것은 다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것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을 가진 성경 구절을 우리는 백 개라도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 다 같은 대답을 줄 것입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결국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주셨으니 이는 깨끗하게 하사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엠 5: 25, 27)고 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에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9) "체험적으로 말해서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그 순간에모든 죄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냐?"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만약에 그들이 그렇게 된다면,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렇게 느낍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유익

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들의 실수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증명할 도리가 없는 노릇입니다.

 

(10) "사리로 보아서 사람이 속에 자부심을 자기고 있으면서도 자만하지 않을 수 있으며,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사람이 자기 속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점에서는 보다 더높이 자기를 생각함으로써 그 특별한 점에 대하여 자랑할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일반적인 성격으로 보면 거만한 사람이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 속에 노기를 가질 수도 있고 나아가 심한 노를 발할 경향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혈기에 지는 것은 아닙니다. "온유와겸손만이 느껴지는 마음 속에 어찌 그런 노기라든가 자만심이 있을 수있을 것인가?"라고 반문할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겸손과 온유가 있는 마음 속에 이런 자만과 노기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으나 겸손과 온유가 보다 더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성질들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왜냐하면 죄가 지배하지 않는 곳에 어떤 종류이건 죄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이고. 또 죄책과 죄의 세력이라는 것은죄의 본질적인 성질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 중 하나가 있는 곳에는나머지 두 가지도 다 있음에 틀림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상한 주장입니다 죄가 지배하지 않는 곳에는 어떤 종류의 죄이건, 또 그 정도가 어떠하건 죄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것은모든 체험이나 성경, 상식과 반대됩니다. 모욕의 분노는 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법과 합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런 경우가 천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지배를 당하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죄책과 죄의 세력은 죄의 본질적인 성질인고로 그 하나가 있으면모두가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옳은 주장이 못됩니다.

실례 (實例)를 들어 말하면, 내가 어떤 분노를 느낀다고 해도 그것에 한순간이라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죄책이 전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죄는세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있지만 죄책과 죄의 세력이없을 수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11)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무섭고 낙담케 하는 모든 것으로 충만해있다. 즉 이것은 우리의 힘을 점유하는 세력과 다툰다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횡령하는 것이며 우리의 구세주에 반항하여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다고 보는 죄는 그것이 우리의 힘을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제어하고 있지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을 계속 횡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횡령자는 그 지위에 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기가 한때 지배하던 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쇠사슬에 매인 채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그는 싸움을 일으키지만 그 세력은 점점 약해지고 맙니다. 반면에 신자는 계속 승리하면서 점점 강하여지고 마침내는 그 횡령자를 쓰러뜨리고 그가 지배하던 곳을 완전히 정복하려고 합니다.

 

(12)"그러나 나는 아직 만족할 수 없다. 자기 속에 죄를 가진 사람은죄의 노예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받아야 한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의 이론에따르면, 만일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음 속에 자만심, 노기, 불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면, 아니 이런 것들이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일시적이라 하더라도) 있다고 단정한다면, 자만하고 골내는 불신앙의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할 것인가?"라고 반대자들은 빈정댑니다.

나는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이 죄의 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 누구에게나 죄는(최소한도 얼마 동안은)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죄가 신자에게 남아 있다면 그는 죄성 (罪性)이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서 자만심이 남아 있다면 그는 거만한 사람이고, 완고가남아 있다면 그는 완고한 사람이요, 불신앙이 남아 있다면 그는 불신앙의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신자가 아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불신자나 중생하지 않은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하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입니다. 만일 사람의 마음 속에 죄, 자만, 고집이 있으면 거기에는 죄, 자만, 고집이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한 사람은 거만하고 완고한 사람이지만 불신자들의 상태, 즉 자만심과고집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의미에서 교만하다거나 고집스럽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과는 다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죄에순종하지 않습니다. 육은 그 두 종류의 사람에게 모두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에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영을 좇아 걷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불신앙이 신자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 곧 믿음이 전혀 없다든가 아니면 믿,음이 적다는 뜻이요,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결핍이라든가 약한 믿음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의미에서의 불신앙(no faith, absence of faith)은 신자에게없습니다. 단지 후자의 의미에서의 불신앙(little faith, weakness offaith)이 모든 어린 신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저들의 믿음은 보통 의심이나 두려움과 섞여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오, 적게 믿는 자들이여!" 또는 "오,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하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 속에 불신앙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적은 믿음에 많은 불신앙입니다.

 

(13) "죄가 신자에게 남아 있다. 사람이 그 마음 속에 죄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교리는 분명히 죄 안에 있는사람에게 용기를 돋우어 주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대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명제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런 결과는 따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느낄지라도 그가 그 죄에 굴복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지는 않습니다. 죄에게 양보한다는 것이 그 사랑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육신이 성령에 거슬리고 있다고 하여도 당신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육신을 따라 걷는다면 당신은 마귀의 자녀입니다.

지금 이 교리는 죄에 순종하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전력을 다하여 죄를 물리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5]

(1) 지금까지의 말씀을 요약해 보면 이와 같습니다. 즉 모든 사람 속에는 그가 의롭다함을 입은 후일지라도 두 가지의 상반되는 세력(principles) 곧 '자연과 은총' , 사도 바울의 용어를 따르면 '육과 영'이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졌다고는 하지만 이는부분적인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어느 정도 영적인 것입니다.

아직은 육신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들이 세상과 악마에 대하여 조심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신에 대해서도 깨어있으라고 계속적으로 권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 체험과 일치합니다.

저들은 이 증거를 느끼는 반면 또한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는 하나의 의지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지만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려고 하는, 즉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악으로 향하려는 마음, 선한 일에서 뒤로 물러서려는 마음이 있음도 알게 됩니다.

이것과 상반되는 교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교리로서 진젠돌프백작의 시대에 와서 비로소 듣게 된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가장 무서운 결말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악한 성질에 대한 감시를 단절시키며이미 사라진 것으로 들었지만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들릴라(삿16:4)에 대하여 아무런 감시도 하지 않게 합니다. 이 교리는 약한 신자의 방패를 찢어 버리며 그들의 믿음을 빼앗아 그들을 이 세상과 육신과 악마의 모든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켜 두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시고 그 성도들에 의하여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모든 세대에게 주신 이 건전한 교리를 굳건히붙잡읍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그 순간 새로워졌고 깨끗해졌고 정결해졌고 성별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직 온전히 새로워지고 온전히 깨끗해지고온전히 정결해지지는 못한 것입니다. 육신과 악한 성질이(비록 정복되기는 했지만)아직도 남아 있어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정려(精勵)하기를 힘씁시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원수에 대항하여 깨어 기도하되 간절히 합시다. 또한 그럴수록 더욱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서 혈과 육과 싸우며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울지라도 이 모든 것을 다 행하면서 악한 날에 대적하고 굳게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