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 - 스테판차녹

by holyway posted Feb 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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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I)

-준비가 전제되는 역동적인 습관


1.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한 습관입니다


1) 기질적 측면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죄의 습관이 모든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영혼을 준비시키는 것처럼, 은혜의 습관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영혼을 준비시켜서 그 주인이 사용하시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1)

이러한 말에 미흡함을 느끼는 분들을 위하여 몇 마디 더 보충하겠습니다.


(1) 내제된 준비가 언제나 표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준비는 새롭게 된 모든 사람들 속에 배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가장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이 속성보다 저 속성을, 때로는 오래 참으심을, 때로는 인자하심을, 때로는 공의로우심을 더욱 현저하게 드러내면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습관 속에 있는 신적인 성품은 배아적으로 모든 은혜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신적 성품과 연관된 의무에 기꺼이 동의하고, 하나님의 영이 은혜의 기회를 주실 때 모든 열매를 맺게 되는 원리를 그 안에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어떠한 봉사를 위하여 더욱 긴박하게 요구되는 기질이 실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죄를 범해서 영혼이 더러워진 경우가 그럴 수 있습니다.

또한 목적이 변한 새로운 피조물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그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기회가 올 때마다 이러한 습관으로의 목적을 실천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욥의 인내는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뿐 아니라 다른 모든 덕성들에 있어서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욥도 그러한 덕성들을 강력하게 드러냈을 것입니다.


(2) 준비됨이 거듭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습관들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 마음 가운데 주께 붙어 있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 것입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행11:23) 이러한 분명하고도 지속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의식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모든 봉사할 기회에 그 목적의식이 실제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초기에는 강력한 저항이 그 안에 있습니다. 지옥의 군

대가 그것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 안에 바울처럼 믿고 사역

하며, 엘리야처럼 열정적이고, 욥처럼 인내할 수 있는 최상의 활동과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준비가 실제적으로 모든 갖춰져 있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그러한 상태에까지 아직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숙을 위하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 어린아이 때가 있는 것처럼, 은혜 중에 자라가는 일도 그렇습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 영혼이 어른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른의 이해력과 이성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선한 것을 행하려고 원하는 바는 그와 함께 있습니다.

이런 특징 속에서 회복된 영혼 속에 나타나는 첫 번째 은혜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거듭남이 이전의 그루터기를 뽑아내고 새로운 줄기를 심기 때문에, 이전의 죄의 그루터기와 관계되어 있던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게 되면서 반드시 회개하게 됩니다. 또한 죄인이 구세주께 가까워지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믿음은 그 죄인을 새로운 그루터기에 접붙이는 데도 필요하기 때문에 회복된 영혼 속에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 뒤에 사랑과 경외, 감사가 뒤따르고, 구원을 얻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묵상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 활동적 측면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두 번째 조망은, 기질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활동의 면에서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새생명은 무한하신 분께서 주입하신 생명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는 하나의 습관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견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계속해서 잠만 자고 있고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새생명은 살아 있는 영이기에 활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습관이 주어지고, 그리고 나서는 행동이 뒤따릅니다.


(1) 새로운 피조물의 활동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수치심을 느낄 때 얼굴이 붉어지는 자연적인 반응이 있듯이 새로운 습관이 새로운 행동을 산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은 그들의 본성에 일치하게 움직입니다. 가시나무가 가시를 내는 것처럼, 샘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은혜의 습관에서는 거룩한 행동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입2:10)

선행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그 뿌리를 둔 영혼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에게 봉사는 먹고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노동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의롭고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새롭게 된 사람들이 때때로 범하게 되는 오류들은, 그들 안에 있는 거듭남의 새로운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원리에 의해서 어느 정도 약화되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부패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잔존하는 부패성은 결국 하나도 남김 없이 전적으로 뽑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2) 그것은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생명과 습관에 따라서 자연적인 필연성 때문에 움직이는 경우도 있지만, 자발적인 선택에 의

해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부득불 할 일”(고전

9:16)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변한 뒤에 따르는 자발적인 행위였습니다.

새로운 본성에는 달콤한 필연성과 의지의 은혜로운 선택이 있는데,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강압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필연성인 것입니다. 은혜로 날개를 달게 된 인간의 영혼은, 공중의 새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 보혈로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을 위하여 ‘왕들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계1:6). ‘왕들’이라는 말은, 새로운 피조물 안에 왕족이 지니고 있는 고결한 품성을 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라는 말은, 이러한 왕족의 고결한 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본성과 그 본성의 자유로운 선택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8) 이라고 말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그것은 열정적인 활동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영혼 안에 심어진 추진력과 영향력이 있습니다. 이 지상의 물질들 가운데서 불과 물 보다 더 활동적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처럼 성령은 물과 같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줍니다. 그리고는 불과 같은 은혜로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새로운 원리는 피조물의 모든 구석구석을 채우면서, 납덩이 같이 딱딱한 마음을 녹여서, 뜨거운 열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또한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즉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영의 활동은 신체의 활동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한 순간에 영혼은 얼마나 놀랍도록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땅 끝까지 한순간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선을 향한 열정에 있어서 은혜의 습관은 ‘사랑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피조물의 움직임은 한 순간에 지상에서 하늘에 날아올라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2. 은혜로운 습관의 활동은 역동적입니다


1) 그 활동은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열망은 그 본성만큼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이전에 지니고 있던 기질의 협소한 활동 안에 매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자연스러운 활동은, 비 온 뒤에 불어난 강물처럼, 모든 자연적인 범위를 넘어서 넘쳐흐릅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여러 번 사랑을 느끼게 되고, 또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다음과 같은 일들에 제한이 없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애정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피조물의 사랑도 제한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분을 향한 애정으로 그분을 가득 채우

고자 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 그를 슬프게하고, 하나님께서 바람의 날개로 그

에게 날아오시는 것이 그를 기쁘게 합니다.


(2) 죄에 대한 혐오감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사망의 육신이 자기 영혼의 열망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주님과의 자유로운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항해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이 때문에 하늘 문을 두드리면서, 영적 전투에 필요한 새 힘과 죄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합니다.


2) 그 활동은 강력합니다

  이 습관에는 제한 없는 사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혼을 행동하게 만드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 안에 있는 능력’(엡3:16)이라고 부리기도 하고 ‘능력의 마음’(딤후1:7)이라고도 불립니다. 거듭나게 될 때 생명과 함께 능력이 생깁니다. 새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이 능력이 어떠한 도덕적인 습관들보다 더 높은 원인, 곧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심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활동하기 위한 일조의 전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입니다.


3) 그 활동은 용이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활동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이며, 새로운 피조물 안에 어떠한 힘과 능력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 활동은 대단히 쉬울 것입니다. 습관은 그 능력을 강화시키고, 쉽게 행동하도록 해줍니다. 영혼 속에 새로운 습관이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의 도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 이전에 죄와 어리석음을 행했을 때처럼 아주 쉬워집니다.


4) 그 활동은 유쾌합니다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유쾌한 것처럼, 영혼 속의 신적인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유쾌합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잠21:15)이 됩니다. 우리가 영적 원수들을 우리의 발 아래 깔아뭉개고, 더 이상 그들과 관계없는 자들이 되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 또한 지순한 즐거움입니다.

습관적인 은혜로 채워진 마음의 즐거움은, 어떠한 감각적인 즐거움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합니다. 그 즐거움이 바로 은혜의 영이요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영혼 속에 심으신 습관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배하는 행위 속에서 달콤함을 발견합니다. 자기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이야말로 그의 즐거움이며, 또한 승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곤란으로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12:10)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영혼의 활동이 그의 생명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몸에 이상이 생겨 움직일 수 없거나, 질병에 매여 있고, 부패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는 이전에 누렸던 것을 기억하면서 기뻐합니다.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탄식

하면서도, 또한 다른 것을 소망하며 그것이 회복될 것을 믿으면서 기뻐합니다.


5) 그 활동은 영구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 있는 새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서 행하게 하되,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단일하고 조화로운 움직임으로 그렇게 합니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기 하시니”(겔36:27). 그 율례들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면서 그것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주하는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입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되었고,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보증으로 지지되고 확증되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 이 습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1,22)

이것은 아담 안에 있을 때보다 더욱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며 습관입니다. 아담의 생명은 자기의 영혼의 올곧음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이 새생명의 습관은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의존합니다. 그것은 모든 갈증을 그치게 하는 생명수이며, 영생에 이르기까지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그것은 강물이 바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영광 가운데서 흘러넘치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흘러나와 활동합니다.


6) 그 활동은 질서 있습니다

  자연적인 운동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이 습관은 영혼에 ‘언제나’능력을 줍니다. ‘거의 언제나’가 아닙니다. 이런저런 봉사 활동에 무질서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일들이 그 정해진 때와 장소가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도 ‘시절을 좇아’(시1:3)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적당한 때를 따라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적당한 때에 열매를 맺으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떠한 때에는 사랑의 열매를, 어떠한 때에는 겸손의 열매를, 또 다른 때에는 인내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 습관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새 열매와 옛 열매를 때를 따라서 따게 되는 것입니다.


3. 새 습관은 옛 습관과 싸워 이깁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모든 사실에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는 새 습관이 우세합니다

 자연의 상태에서는 한 인간 전체 속에 스며드는 부패한 습관이 우세했던 반면, 은혜의 습관이 우월하게 된 지금은 그 은혜가 영혼 전체에 스며들어서 생명은 사망을 이기고, 은혜는 자연(본성)을 이깁니다. 그래서 몸의 지체들이 죄에 대한 불의의 도구가 되는 대신에, 이제는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됩니다. 그 습관은 이성과 의지를 인도하기 위하여 심어진 것이며, 그러므로 그 안에는 주권적인 능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 안에서 감각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왕좌를 차지하게 되면서 감각은

베일에 가려졌습니다. 감각보다 이성이 더욱 탁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이성은 그 자리를 은혜에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은혜가 이성보다 더욱 탁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이제 그 고유한 권리를 은혜를 통하여 다시 회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은 창조의 법칙에 의해서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껏 죄의 법칙의 종이 되어서 거짓된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이성이 그 왕좌에서 강력히 쫓겨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은혜로 말미암아 제자리로 되돌아온 셈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만이 아니라 능력의 영도 지니게 됩니다. 그 영은 그리스도 안에도 계셨던 바로 그 능력의 영입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5:4). 은혜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집니다. 이렇게 은혜는 우세합니다.


2) 새 습관으로는 죄를 짓기가 힘들어집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뿌리를 내린 습관에 대항해서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본성에 반대되게 행하는 것은 힘겹고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떠한 피조물이 자기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에 힘쓰겠습니까? 어떠한 사람이 자기 몸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상처를 입히는 것을 즐거워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본성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광기가 그들을 사로잡아서 이성을 빼앗아 버렸을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볼 때 의와 거룩은 새로운 피조물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따라서 이제는 죄를 행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밖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지만, 이제는 새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요셉은 창세기 39장 9절에서 “내가 이 큰 악을 행할 수 없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 일이 자신의 영혼의 성향과 기질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1) ‘마음의 목적’을 거슬러서 죄를 짓기는 힘듭니다.

  마음으로 목적하는 바를 거슬러서 죄를 짓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자신의 분깃으로 선택한 자가 죄를 짓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2) 새로운 습관에 반대되는 것들은 그에게 힘듭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습관으로 너무나 기뻐하며, 그 습관 안에서만 오직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죄악들을 다시 살려 행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힘들 것임이 분명합니다.


(3) 이 본성은 사람 속에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만일 새로운 피조물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의 습관에 의해서 불편을 느끼고, 흙투성이가 되어 버리면, 그의 영은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리며, 양심은 가책을 느끼고,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죄에 대하여 불쾌함을 가진 채로 하나님께로 도피하게 됩니다. 자기를 살피면서 하늘과 땅의 도움을 호소합니다. 자기의 무기들이 날카로운지를 점검하게 됩니다.



스테판 차녹, 바로 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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