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비참함을 맛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다/ 존 플라벨
히어론 사비니안은 이렇게 말했다. “그 어느 것도 내 마음을 슬프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없도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쳐서 괴로운 죄의 의식이 일어난다면 기뻐하라. 여러분이 느끼는 고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영혼이 거듭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에는 반드시 죄의 각성으로 인한 슬픔의 고통이 수반된다. 생명의 출산을 위해 산모가 진통을 겪는 것처럼 말이다. “양심의 큰 가책”를 가지기 시작한 사람은 이전에는 죄의 악에 대해 어떠한 신중한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분명 그는 죄 짓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지옥의 타는 불’을 두려워한다. 양심의 가책을 씻어버리기 위해 선술집으로 달려가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만이 양심을 가라앉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죄의 비참함을 맛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혼을 괴롭게 하는 양심의 가책은 영혼에게 있어서 가장 예리한 고통이다. 그러나 가련한 영혼은 쉬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어디서 쉬어야 할지를 모른다. 이런 저런 방법들을 써보지만, 안식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한 영혼이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모든 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도 바라던 안식을 얻는다.
이는 굶주리고 지쳐 방황하던 ‘길 잃은 양’이 우리에 들어오는 것과도 같다. 강한 풍랑에 요동치던 배가 고요한 항구에 비로소 들어온 것과 같다. 파손 당한 배에 타고 있던 선원이 해안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여러 날 행로에 곤한 사람이 조용한 방의 푹신한 침대에 눕는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모든 달콤함도 부서진 마음을 가진 죄인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느끼는 달콤함에는 비할 수 없다. 폭풍 가운데 생사를 넘나들던 선원들이 육지를 발견한 달콤함도 그리스도를 만나 느끼는 달콤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히4:3)
-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pp 23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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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거듭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에는 반드시 죄의 각성으로 인한 슬픔의 고통이 수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