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한민국에 성령이 임했을 때(평양 대부흥 간증)

by holyway posted Jan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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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한민국에 성령이 임했을 때(평양 대부흥 간증) 


 

Stephen Goforth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이 내게 너무도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주님께 행한 것이 참으로 미미해 내 자신이 부끄러운 감정을 갖지 않고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룩한 성취와 희생을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이야기를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자 
중국인 청중들이 자주 울음을 터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 주고 산”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국에서의 복음의 승리 소식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 역시 확실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역시 겸손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한국의 주요 선교 중심지 여덟 곳을 방문한 것은 한국에서 놀라운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1907년이었습니다. 중국에 돌아와 나는 묵단에 있는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부흥 소식을 전해주자 그들도 깊은 감동을 받은 듯 했습니다.


나는 페이 타이 호에 가서 그곳 선교사들에게 어떻게 주께서 한국에 축복하셨는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몇몇이 눈물을 흘리며 그 같은 축복이 중국에 임할 때까지 기도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다른 휴양지 키궁산에 초청을 받아 그곳에 가서 한국에 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느 한 주일 저녁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설교가 끝나갈 즈음 너무 오래 설교 했다는 느낌이 들어 즉시 나는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정적이 그 현장을 압도하는 듯했습니다. 이렇게 약 6, 7분이 흐른 뒤 회중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터졌습니다. 죄가 고백되었고 나뿐 성질, 다툼, 그리고 그 유사한 죄에 대해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모임은 늦게 끝났으나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성령께서 불로 정련하시며 그들 
가운데 임재 하셨음을 느꼈습니다. 그런 후 우리는 4일간의 사경회와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교사들 가운데 지금까지 목도한 가장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중국교회가 부흥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 정각에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해 가을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현시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하기 시작했으며, 
그 권능은 만주와 그 밖에 지역에서 1908년 시작된 후 더 강력한 상태로 점증했습니다.

 

한국에서 부흥운동이 처음 목도되기 시작된 것은 1903년이었습니다.


한국의 동해안 원산의 하디(Robert Hardie) 선교사가 선교사들이 연 한 작은 기도회에서 
기도에 대해 몇 번의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주제를 준비하다 요한복음 14장과 그 밖의 성경으로부터 성령께서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심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기도에 대해 강의를 하자 모든 선교사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한국 그리스도인들 역시 기도회에 참석 대단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 하디 박사는 한국의 전역에 있는 열개의 선교 중심지를 방문하여 기도에 대해 
말씀을 전했으며, 1904년 동안에 1만 명의 한국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후 이렇게 시작된 부흥운동은 1906년까지 권능과 영적 결실을 맺는 가운데 
계속되었습니다.


1907년 6월에 평양의 스왈른 선교사는 어떻게 그들이 한국에서 더 큰 역사를 목도하게 
되었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 “나는 개인적으로 1906년 중엽까지 우리가 목도했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한국에서 
목도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의 결과를 중국에서의 결과들과 
비교할 때 우리의 선교 결실들이 이들 나라들에서의 어떤 것도 훨씬 능가하였음을 보고 
우리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목도했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906년 9월 서울에서 뉴욕의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이 1905-6년에 일어나 2년 동안 8,200명의 회심자가 세례를 받게 된 인도 카시아 지방(Kassia Hills)의 부흥운동을 우리에게 들려주었을 때 새롭게 우리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평양 집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 평양에는 감리교 장로교 선교회 소속 2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사람들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가 평양에서보다 인도 카시아 
지방에서 더 큰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더 큰 은혜가 
임할 때까지 정오에 기도회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약 한달 간 기도한 후 한 형제가 "우리가 약 1달을 기도해왔으나 아무것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느냐"며 기도회를 중단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느 때처럼 우리 사역을 계속합시다. 그러고 각자가 편리한 시간에 집에서 기도합시다."


그 제의는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선교사들은 주님께서는 인도 카시아 지방에 허락하신 그 축복을 평양에도 내려주시기를 거부하시지 않을 것임을 믿고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기도 시간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런 견해를 갖고 만약 원하면 저녁시간까지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도록
12시 정오에서 오후 4시로 기도회 시간을 변경했습니다.


그곳에는 기도 외에 다른 프로그램은 거의 없었습니다. 만약 어느 누가 격려될만한 아이템을 갖고 있다면 기도를 계속진행하면서 그것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4개월을 기도했으며, 그 결과 모든 참석자들은 감리교도들과 장로교도들이라는 
사실을 잊었고,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참된 교회 연합이었으며, 그 연합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생겨나는
일이며,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며,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즈음 스왈른 선교사는 블레어 선교사와 함께 시골 선교구 가운데 한 곳을 방문했습니다. 보통 방식으로 예배를 수행하는 동안 많은 이들이 울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스왈른 선교사는 그가 결코 전에는 그처럼 낮선 어떤 일을 만난 적이 없었으므로
청중들 가운데 휩쓸고 있는 감정의 파고가 가라앉기를 희망하면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몇 번 시도했으나 매번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두려움 속에 그는 그 어떤 다른 이가 그 모임을 통제하고 있음을 깨닫고 가능한 자신은 사람들에게서 멀리 사라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와 블레어 선교사는 기뻐하며 평양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나님께서 
시골 선교구에 임하셨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평양에 은혜의 때가 가까웠음을 믿었습니다.


이제 1907년 1월 첫 주가 왔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기도 주간 동안에 자신들에게 눈에 띠게 축복하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덟 째 날 마지막 날에 이르렀으나 아직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이 현시되지 않았습니다. 그 주일 저녁 약 1500명의 사람들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들 위에 온 하늘이 놋으로 덮인 듯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부으심을 위한 그들의 간구를 거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날 모든 사람들은 교회를 이끄는 길선주 장로가 서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자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 임종을 앞둔 한 나의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나는 ‘걱정마오, 내 그렇게 해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나는 미망인의 돈 100달러를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방해했으며, 100달러를 내일 아침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즉시 벽이 무너져 내렸고 그 거룩한 자, 하나님이 임하셨음이 느껴졌습니다.


죄에 대한 통회가 청중을 휩쓸었습니다. 예배는 주일저녁 7시에 시작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끝나지 않았으며, 그 시간 동안에 약 12명이 죄를 고백하기 위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울며 서 있었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성전에 계심이 현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지만, 이들 고백들은 인간의 힘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사탄 아니면 성령이었습니다.


거룩한 비췸을 얻는 지성이라면 곧 어느 누구도 악령이 길선주 장로 같은 교회의 주된 
일꾼으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고백하도록 만들었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고백되지 않고 숨겨져 있는 한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나, 
회개를 통해 그 죄가 드러나는 순간 그분을 영화롭게 하였으며, 
그해 한국에서 매우 예외적으로 온갖 죄악들이 고백되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한 의료 선교사가 조선(동양에서는 요리사가 시장을 봅니다)에서 가장 정직한 요리사 가운데 한명을 두고 있다고 자랑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요리사가 ‘나는 매번 의료 선교사를 속여 왔으며, 내 집과 재산이 의사를 속여 
확보한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요리사는 자신의 집을 팔아 그 선교사에게 그것을 모두 갚았습니다.


한 선생은 선교회를 위해 얼마의 땅을 사도록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땅을 확보하고
가격이 500달러라고 말했습니다. 선교사는 비록 너무 큰 금액이었지만 요구하는 금액을 
지급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 동안에 그 선생은 자신이 실제로는 그 땅을 80달러에 
확보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갖고 있는 전 재산을 팔아 선교회로부터 사취한 420달러를 다 갚았습니다.


종군 기자 매켄지에게는 자신에게서 4달러가 못되는 돈을 사취한 한 급사가 있었습니다.


부흥운동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깨달은 그 소년은 80마일을 걸어가 한 선교사에게 그 돈을 매켄지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매켄지가 한국의 기독교를 강하게 믿는 자가 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평북 의주에 아내와 한 자녀를 둔 남자가 가족을 떠나 다른 도시에 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부흥을 경험하자 
그는 이 여인과 딸들을 지원하기로 하고 의주로 돌아가 자신의 본 처와 화해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부흥운동이 이혼이 성행하는 몇몇 기독교 국가에 임했다면 그곳에서도 모종의 놀라운 사회 변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거의 완벽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아온 한 집사가 있었는데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매우 불안해 보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는 자선기금 얼마를 사취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곧 평정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는 
더 깊은 고통으로 빠져들었더니 드디어는 제 7계명을 범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수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통과한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어느 저녁에 공공집회에서 
간음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집회를 책임 맡은 선교사는 대단히 놀랐는데, 
그것은 그녀의 남편이 그곳에 참석하고 있었고 만약 그 남편이 한국의 법에 따라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간음죄를 범한 아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그 한국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듯 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는지요.


그러한 특별한 일들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기 위해 왔으나 두려움 가운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빈둥거리는 호기심으로 교회에 찾아온 한 갱단의 두목이 
죄를 깨닫고 회심했으며, 그리고 곧 경찰관에게 가서 자수했습니다.


깜짝 놀란 경찰관은 “당신을 고발하는 자가 없고 당신이 자수했으니 우리 한국 법으로는 
당신 사건을 다룰 수 없다”며 그를 석방했습니다.


한 일본 관리가 부흥운동 기간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구의 불가지론 사상에 깊숙이 물들어 영적인 일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일본인들 가운데서 조차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몰래 이를 조사하기 위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모든 불신앙이 휩쓸려 지나가고 그는 주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스왈른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기도해 왔던 것이 놀랍게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 선교사 모두가 6개월 동안 성취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단지 반나절 만에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2개월 남짓한 동안에 2000명 이상이 회심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순간 항상 그러한 결과가 오는 법입니다만, 대체로 그리스도의 것임을 
고백하는 교회가 교회 활동에 분주한 것을 그치지 않고, 
기도 가운데 그분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그 기회를 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903년에 시작된 부흥운동은 계속 점증하더니 놀랍게 차고 넘쳐 평양에서 한국 전역으로 
저변확대 되었습니다. 1907년 중엽까지 평양 지역과 관련하여서 3만 명이 회심했습니다.


평양에 네 다섯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촘촘히 앉는다면 장대현교회는 
약 2천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들은 의자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루에 펴놓은 돗자리에 앉았습니다. 장대현교회에 만약 2천명이 빼곡히 앉는다면 너무 밀착해 만일 어떤 사람이 욺쿠린 다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잠시 일어선다면 공간이 
너무도 꽉 차 한 치의 틈도 없어 결코 다시는 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3천명이어서 장대현교회는 그토록 빽빽하게 앉는다고 해도 장대현교회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여인들이 먼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끝난 후 남자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1910년까지 부흥운동이 사라지지 않았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그해 10월에 4천명이 한 주에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 외에 수천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결심 카드를 
제출했습니다.


우리는 평양 남쪽에 있는 한국의 고도(古都) 송도를 지나갔습니다.

 
1907년에 부흥운동으로 그 교회에 500명이 증가했으며, 
1910년 한 달간의 특별전도집회 동안에 2,500명이 모였습니다.
1907년 우리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모든 교회가 사람들도 가득 찼습니다.


한 선교사는 6주간의 전도여행에서 500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700명에게 학습세례를 
베풀었고 다섯 개의 시찰구역이 1년 사이에 25개로 증가했다고 말했습니다.


1910년 동안에 서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다고 말하며 결신 카드에 이름을 적어낸 사람이 13,000명이었으며, 그해 9월에 서울시내 감리교회들이 3000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수도 서울의 서쪽 제물포 항구에 있는 감리교 선교회에는 1907년에 800명의 교세를 가진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항구 반대편에는 인구 17,000명의 한 섬이 있습니다.


그 섬의 교회들은 세례교인이 4,247명이었고 그들 중 반 이상이 그해에 세례 입교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곧 섬 전체가 주의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남부 지방 도시 가운데 하나인 대구의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는 그들이 10일 동안의 기도회를 가지고 부흥을 간구하자 성령이 일곱째 날에 놀랍게 찾아오셔서 어떻게 그들을 
부흥케 하셨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부흥운동의 한 가지 결과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드는 바람에 대구 시내 교회 예배 공간이
너무 작아졌고, 시골 전역에 교회들이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에 그들은 1,976명의 회심자를 얻었고 1906년에는 3,867명의 회심자를 얻었으며 1907년에는 6,144명의 회심자를 얻었습니다.


그는 “내가 결코 가 보지 못했던 지방에 지금 교회들이 생겨났으며, 몇몇 교회는 전도인 조차 결코 한번도 방문하지 못한 곳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어떤 한 교회가 어떻게 선교사나 전도인 없이 형성되었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지역 출신 한 사람이 대구 시내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신약성경 한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이웃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읽어주어 50명 이상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교회를 설립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어떻게 교회를 
설립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들은 신앙의 출입이 물세례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사실을 추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상의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모여 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1907년 방문한 또 다른 선교 중심지는 평양 북부에 철길을 따라 위치한 선천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런 새로 시작된 선교지에서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는데, 
그것은 선교사들이 단지 8년 전에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도시와 시골지역에 15,348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그 숫자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헌금을 내지 않는 자는 
단 한명도 포함하지 않는 숫자입니다.


그들은 막 1,500명을 앉을 수 있는 한 교회를 완공했습니다. 그곳에 1년 전에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있었는데 교인이 870명으로 증가해 불가불 교회를 다시 증축해야 
했습니다. 그해 동안에 그곳 시내 선천교회가 다섯 개의 시골교회를 분립시켰는데도, 
교회가 완공되자 교인이 1,445명으로 증가했습니다.


교회로부터 복음의 빛이 닿지 않은 곳이 한 곳도 없을 만큼 구석구석까지 복음이 전해져 
거리에는 불신 가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구 우리 기독교 국가에서는
“교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은혜에서 더 멀어진다”고 말하기 때문에 교회 가까이에는 
불신 가정이 하나도 없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는 다만 그들이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매우 강력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므로 교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확신한다는 그 사실로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1916년에 나는 한국의 동해안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 푸트(Mr. Foote)가 최근 한 지역에서 한 주일을 지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주일 저녁에 그는 증축한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곳 교회는 2,500명의 청중들로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찼으며, 
그 저녁 다른 교회에서는 500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도시는 단지 3,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주민 모두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기독교가 존중되고 있는 우리 기독교 국가에서는 함께 모인다는 특권에 대해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주께서 언젠가 서구 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분명하게 말씀하실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의 중심지의 선교사역이 어떻게 시골 전역으로 확산되었는지 아이디어를 얻고 싶어
나는 블레어(Mr. Blair) 선교사에게 그가 맡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를 지도로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용천군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곳은 압록강 동쪽, 바다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그 지도의 중심에 그는 350명의 교세를 가진 한 교회를 그렸고, 
그곳에서 1마일 남짓한 곳에 250명의 교세를 가진 또 다른 교회를, 
다시 북동쪽 5마일 떨어진 곳에 400명의 교세를 가진 또 다른 교회를,
다시 2마일 남짓한 동쪽에 750명의 교세를 가진 또 다른 교회를, 
그리고 계속 그려 나갔는데 그곳 용천군에는 14개의 자립교회가 있었습니다.


내 옆에서 서 있던 휘트모어(Mr. Whittenmore) 선교사는
“그 용천군은 바로 그 북쪽에 내가 사역하는 군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곳 군에는 35개의 자립 시찰을 가진, 5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필자는 400명의 교세를 가진 한 시찰이 있는데 1년 만인 그 다음해에 3000명으로 
급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교사역이 1884년에 시작된 이후 낮과 밤 매 45분마다
한 사람씩 교회에 영입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한반도 전 마을이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어떤 누군가가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 주님을 따랐던 군중들이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점은 잘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 첫 장을 살펴보십시다. 우리는 비록 그 기준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일은 선호하지 않겠지만 한국교회에 적용하는데 기꺼이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하나님을 대단히 경외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령의 강림을 
준비하면서 10일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선교사들이 수개월 동안 매일 
한 시간에서 수 시간을 성령의 부으심을 준비하면서 전심으로 기도해왔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들 선교사들은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으로부터 어떻게 성령께서 인도 카시아(Kassia) 지방에 놀랍게 임하셨는가를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장소에 압록강을 따라 펼쳐진 소나무 숲에서 좀 떨어진 강계에서 온 권서인 
한 사람이 존스톤 박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가서 250명의 강계 교인들에게 성령께서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실제로 유효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어떤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자유롭게 그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임하실 것임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1906년과 1907년 사이 가을과 겨울 내내 
매일 저녁 다섯 시가 아닌 새벽 다섯 시에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로 모여 성령의 은사를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6개월을 기도하면서 성령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그런 후 그가 홍수 같이 임하셨습니다. 그 후 교회 교세가 몇 배로 증가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정직하십시다.


오, 그 혹독하게 추운 날씨 성령 하나님의 부으심을 간구하며 6개월 동안 내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날 수 있겠는가!


구주의 공로를 널리 알리기 위한 불타는 열정은 초대교회 오순절 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참을 수 없다고 
불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신이 구주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 했습니다. 몇몇 불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도 전도를 열심히 해 편히 지내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정리하고 기독교인들이 없는 어떤 지역으로 이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평양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중등학교에서 성령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들은 318명의 학생을 가진 한 학교(숭실중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1907년 2월 개학하는 월요일 아침에 학교를 책임 맡은 두 명의 선교사가 교장실에서 
아침 일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시작부터 그 학교를 지배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그가 지배하시지 않는다면 학교는 단지 한국에 거친 장애물(menace)이 
될 수 밖에 없는 교육받은 천박한 악당들(educated rascals)을 양산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기독교 국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께서 우리의 고등학교와 대학교들을 온전히 
통제하시도록 사모하지 않습니다. 서구의 몇몇 학교에서는 대단한 불신앙이 어떤 제재도
없이 자유롭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받은 천박한 악당들을 양산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우려하지 않습니다. 고위직의 사람들이 국고를 사취하고 어떤 일인지 이중 몇몇은
항상 무죄혐의를 받습니다. 이들은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대학을 졸업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겸비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그분이 통제하시도록 우리의 교육을 위임함으로 그 분을 경외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이 범죄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토로합니다.


1907년 2월 학교가 개학하는 그 월요일 아침, 9시가 울리기 전 평양의 숭실중학교에서 
주의 영이 통회의 역사와 함께 이들 소년들을 강타하였습니다. 통회의 절규가 위층과 
아래층에 가득 찼습니다. 곧 교장실은 죄를 회개하는 소년들로 가득 찼습니다. 
학교는 그날 개학하지 못했고 그 다음날도 개학하지 못했으며, 금요일에도 아직 개학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장로교 소년들 모두가 승리를 경험했으나 
무엇인가가 감리교 학생들을 묶고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날 저녁 모든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약 12명의 감리교 소년들이 가서 그들의 담임목사에게 그에게 한 자신들의 약속에서 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한국인 목사는 부흥운동이 감리교회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 숭실중학교 남학생들이 부흥운동을 반대하고, 
모든 공공의 죄 고백이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반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금요일 밤에 이르러 마음의 탄식을 더 이상을 참을 수 없어 
그 목사님에게 찾아가 자신들이 한 약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그 목사는 가서 선교사의 발 앞에 조아리며 부흥운동이 장로교 가운데 시작된지라 사탄이 그에게 시기심을 가득 채웠음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내게 그 주간 이들 학생들 가운데 심령을 옥죄이는 듯한 죄의 고백을 듣는 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했으며, 마치 죄옥의 뚜껑을 열어 제친 것처럼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죄악들이 적나라하게 들어났음을 들려주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학생들이 하나님과, 선생들과, 
그리고 서로 간에 바른 관계를 정립했으며, 학교는 성령의 통제하심 속에 시작되었습니다. 그일 후 바로 약 100명의 감리교 선교회 전도자들과 권서인들이 한 달간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연합 기도회 때 선교사들은 성령께서 통제하시도록 그 중요한
사경회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주의 성령으로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자, 그분께서는 바로 첫 집회 때 그의 임재와 권능을 현시하심으로 보답해주셨습니다.


다음 며칠 안에 굽은 일들이 바로 잡혔습니다. 거룩한 분이 그 모임을 통제하셨습니다.


그들은 사경회 기간동안 효과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한달이 끝날 때에 이제 그들은 
세상으로 나가 주의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시골 장로교회에서 올라온 선별된 550명의 자매들이 12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평양에 모였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북미에서 12일 동안 성경을 배우기 위해 500명이 넘는 자매들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우리는 큰 부흥이 도래할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전쟁 전 많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보다 노는 일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여인들은 모든 악령의 사역인 우상과 미신행위를 
끊어 버릴 때 화투도 함께 던져 버렸습니다.


이들 550명의 여인들은 자비로 모든 비용을 지불하며 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들 중 2명은 5일을 걸어 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업고 5일을 
걸어 그곳에 참석했습니다. 부흥을 경험한 평양의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은 만약 어떤 권능이 결핍되었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시며,


그를 통해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날 밤 그분께서 통제해주실 것을 간구했고 약속에 신실하신 그분께서 
현시하셔서 죄와 의와 심판을 확신시켜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첫날 밤 장애물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어 선교사 아내가 표현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발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혹은 고름을 짜지 않은 종기를 갖고 있는 듯 며칠을 고통 가운데 지내다 그런 후 성령께 전적으로 순복하여 승리를 얻었습니다.


가장 최고의 선생이신 성령께서 사경회 동안 그들을 가르쳐주셨으며, 
그런 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변화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남편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며느리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 동양의 시어머니들은 공포의 존재들이었습니다.


희생자들은 단지 자살함으로만 그 공포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어머니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사경회에 참석했던 몇몇 
며느리들 또한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더 근면해졌고 덜 신경질 적이었습니다.


불신 이웃사람들이 그 변화를 또한 감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여인들이 거의 집에 도착하기 전 75명의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이 3개월 동안 
신학훈련을 받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매년 3개월 씩 5년의 과정을 밟도록 
되었습니다. 평양장로회신학교는 200명 이상의 신학생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교입니다. 교과과정이 정해짐에 따라 선생들은 3개월을 끝날 때까지 성령께서 
이들 젊은이들을 충만케 해주시기를 희망하면서 매일 저녁 기도회 및 사경회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최근에 그들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셨음으로, 
자신들이 이전에 성령께 “우리가 그 학기에 최선을 다함으로 학기 말에 당신이 오셔서 
젊은이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 달라”고 간구했던 것이 대단한 불순종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 첫날 밤 하나님께 그 젊은이들을 맡겼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앙을 영예롭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오직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그분께서 그가 전에는 결코 허락하시지 않으셨던 놀라운 역사로 그 학기를 친히 가르치셨으며, 그해 50,000명이 교회에 영입됨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사실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참으로 그랬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약속하신 
성령을 간절히 구하고 그 성령께 순종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했음을 증명합니다.


한국교회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 유형을 적용해 보십시다. 사도행전에 기도는 매우 눈에 띠는 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기도에 대단히 의존했습니다.


부흥 주간에 감리교 출신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성령의 역사에 저항했습니다만 
장로교 학생들은 강권적인 부담을 가지고 변화를 받고 승리가 도래할 때까지 
간절히 금식과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 때에 초등학교에 기도의 영이 너무 강력하게 임해 학교들이 잠시 수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책을 보면서 어린이들이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있어서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느라 밤의 절반을 보내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그들이 일어나 새벽 전까지 오래 동안 기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습관이었습니다.


스왈른은 한 때 시골 지역을 방문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내일 아침 다섯 시에 기도회로 
모임을 갖기로 했다고 광고했습니다. 다음날 다섯 시에 스왈른이 와서 보니 세 명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동안 기도한 후 이들 참석자 가운데 한명이 스왈른에게 그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기도회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끝났고 그들 가운데 
몇은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산맥을 가로질러 왔습니다.

 

길 장로가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사에 부임한지 몇 년 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장대현교회에서 가장 영적으로 충만한 장로 가운데 한 사람에게 제의하여 그들 둘이 4시 30분에 매일 아침 기도회로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그 달 매일 새벽 교회에 모여 기도하자 다른 사람들도 알아채고 
참석하여 한달이 지나갈 때에는 약 20명이 매일 아침 4시 30분에 모였습니다.


이제 공개적인 기도회를 갖겠다고 광고할 때가 무르익은 듯 했습니다.


주일 예배 때 길 목사는 매일 아침 4시 30분에 기도회를 갖겠다고 광고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그 시간에 종을 울리겠다고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다음날 두 시에 400명이 교회 밖에서 기도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4시 30분에 600명이 그곳에 가득 찼습니다.


한 주간이 끝날 무렵에 700명이 매일 아침 모였으며 그런 후 성령께서 거룩한 사랑으로 
그들의 심령에 부으셨습니다. 그렇게 선명한 통찰력을 가진 목회자를 갖는 교인들은 축복된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오, 얼마나 우리가 낮아져야 하는가! 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그곳에 함께 계십니다. 영광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아침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도회가 한국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일년에 평균 한 주일 참석자가 1,100명이었습니다. 한 수요일 저녁에 나는 성장하고 있는 
토론토 장로교회 가운데 한 곳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했었습니다.


한 한국의 선교사가 설교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나는 잠시 내 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한 멋진 외모의 노신사가 다가와 내 곁에
앉았습니다. 기도회가 곧 시작되는데도 그 순간까지 그 넓은 교회당에 빈 의자들이 아직 
많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 교회당 안을 둘러보면서 그 노신사는 “나는 왜 사람들이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습니다.


내가 “사람들이 기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나를 알지 못하는 노신사는 나를 알지 못하겠다는 듯이 나를 위 아래로 흩어보더니
“당신은 정말 그들이 실제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곳에 있겠다’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그들이 주님을 멀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덧 붙였습니다. 주님은 오직 우리의 기도의 조건을 주목하십니다.


한국교회는 진지하게 가정 기도회를 드립니다.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 남자는 한국에서
교회생활을 하지 않을 우려가 있는 자들입니다.


캐나다의 몇몇 기독교 가정들은 세상일에 너무 바빠 식사기도 조차 갖지 못합니다.


푸트 선교사는 한국을 순회 전도 여행 중 한 때 길에서 몇몇 사람들로부터 그 마을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심방할 수는 없는지 부탁을 받았었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푸트는 “그곳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는데 왜 그러시죠?”라고 
답했습니다. 푸트는 그 마을에 가서 세례를 받거나 학습을 받을 준비가 된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였습니다. 푸트가 그들에게 “당신들은 가정 예배를 드립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그들은 “예, 하루에 두 번 드립니다”고 대답했습니다.


푸트가 “이 마을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마을에 모두 스물 네 가정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매 가정 마다 가정 제단을 쌓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주의 한 선교사가 1907년의 놀라운 부흥운동에 관해 모든 것을 알아보도록 
두 명의 전도인을 파송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 혹 선교사들이 가두 전도처(傳道處)를 개설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전도인들은 돌아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전혀 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가두 전도처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개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노무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한명도 없는 시골에 가서 
전도하며 여름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행상인들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여행하면서 늘 놀라운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 동해안에서 열린 한 부흥 집회에서 회심한 한 모자 장수는 
그 후 1년 안에 약 12 곳에 작은 기독교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에는 17명의 회심자가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한 달간의 휴가를 내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시간을 
보내 100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매일 적어도 여섯 명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9개월 말까지 그는 3,000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숫자는 우리 고국 북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생동안 전해야 할 만큼 많은 수입니다. 
어느 해 남감리교 선교회는 너무 예산이 모자라 송도에 학교 건물들을 세울 수 없었는데,
그곳에는 여전히 교육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150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전직 교육부 장관 윤치호는 그들에게 교사를 자원하였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년들은 거친 나무들로 교사(校舍) 골격을 세우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고
그곳에서 수업을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길선주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통해 자신의 교인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켰는지 언급했습니다. 그 때 길 목사가 쓴 한통의 편지에는 심지어 8살과 9살 먹은 아직 어린 학교 소년들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 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소매를 잡고 울면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지난 3일 혹은 4일 동안에 400명의 남자들이 와서 모두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했다”고 말했습니다. 소년들의 간절한 애원이 그들의 심령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한국의 외진 도서에까지 복음을 전한 후에 그들은 멀리 외국에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놀라운 부흥이 있은 후 서울에서 열린 장로교 독노회에서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선교를 자원할 자를 찾는다는 보고가 있자 전 총회 총대들이
일어나 자원했으며 그중 네 명이 선정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선택된 이들을 부러워하는 듯했습니다.


고국 총회에서는 이 같은 놀라운 일을 결코 목도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값없이 받은 은혜에 대해 대단히 감사했으며, 
이 때문에 그들 역시 값없이 그 은혜를 나누어주려는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1917년까지 늦게 길선주 목사는 동해안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는데 사람들이 녹아 내려 죄를 고백할 만큼 하나님의 권능이 강하게 임했습니다.


모든 슬픈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전능하신 성령께서 한국에서 처럼 캐나다와 미국에서 기꺼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의 영의 역사를 목도하시는 것인데,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런 복종의 채널을 얻지 못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유롭게 풍성히 바치는 일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또한 풍성하게 헌금합니다.


어느 한 선교사는 한국인들이 너무 바치는 바람에 자신의 교인들에게 감히 헌금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독교 국가인 서구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진실로 말할 수 있는 목회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필자는 남녀, 교사와 전도인들, 139명의 사역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선교 중심지에
있었는데 부흥운동으로 사역이 놀랍게 증가되어 사역자들 57명을 더 늘렸습니다.


그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너무 작다는 것을 발견하고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건축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전 재산을 헌금했습니다. 남자들은 시계를, 여인들은 자신들을 장식하는 은금 패물 보석 같은 장식물들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다른 이들은 땅 문서를 바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그들이 더 바칠 수 없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빚 하나 없이 교회를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한 때 매우 가난한 선교지역에 있었을 때 일입니다. 그곳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에게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너무도 불편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다 30달러에 주겠다는 멋진 대지를 발견하고 선교사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선교사가 “잘 되었군요, 가서 그 대지를 사시지요”라고 말하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 “여기 우리는 극도로 가난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형편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당신이 대지를 구입할 그 돈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것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 대지를 구입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계속 말하며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자매들이 “만약 남자 성도들이 구입할 계획이 없으면 우리가 그것을 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패물을 모두 가져와 그것을 팔았으나 겨우 1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여인이 놋 주전자 한 개를 팔았고, 다른 사람은 두개의 놋 사발을 팔았으며, 
또 다른 여인은 몇 뭉치의 놋쇠 젓가락을 팔았는데, 한국의 요리 및 음식 식기들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두 다 팔자 20달러가 되었습니다. 이제 30달러에 해당하는 그 교회 대지를 여인들이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가 더 복되기 때문에 여인들은 더 큰
비전을 받은 셈입니다. 자매들은 하나님 없고, 그리고 희망 없는 전국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을에 복음을 전하려는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 그들은 한 달에 6달러를 모아 한명의 
전도인을 파송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 선교사가 새로 건립한 교회 헌당식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는 아직 50달러의 교회 빚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교인이 일어나 “목사님, 내가 다음 주일까지 5달러를 가지고 와 그 빚을 갚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사람이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 혼자 그것을 다 갚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함께 힘을 모으면 그것을 곧 갚을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고국에는 5만 불의 빚을 지닌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 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50달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선교사는 깜짝 놀라 “당신이 어디서 그 돈을 구할 수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사님, 걱정 마십시오. 그 모든 돈은 깨끗한 돈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 후 그 지방을 순회 전도하던 그 선교사는 이 사람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 아내에게 남편이 있는 곳을 묻자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 선교사는 들에 나가다 노부(old father)가 쟁기를 잡고 그의 아들이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놀라 “왜 당신 소는 어디 두고 당신이 밭을 갈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50달러를 
빚지고 있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그 빚을 갚기 위해 소를 팔았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를 인도했던 똑 같은 성령께서 한국교회를 인도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한국 교인들의 불타는 열정입니다.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인쇄된 성경을 그토록 신속히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서만 한 해에 3000권의 성경이 팔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배웠고 심지어 
우둔한 여인들까지 성경을 배웠습니다.


사업차 여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길을 갈 때나 여인숙에 묵을 때나 그들은 성경을 펴서 읽었고 많은 이들이 말씀에 
매혹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북미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습니다.


한때 기차에서 내가 성경을 읽고 있자 한 남자가 아주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흩어보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내게로 다가와
“실례합니다만 나는 플리머스 형제단이나 천주교 신부가 아니면 기차에서 
사람이 성경이나 혹은 기도집을 읽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플리머스 형제단도 천주교 신부도 아닙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시죠?” “아 예, 저는 중국 선교사입니다” 지금 왜 내가 책 중의 책인 
성경을 기차 안에서 읽고 있는 것을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목사나 장로 그리고 집사가 여객선이나 기차를 타는 시간에 카드놀이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나이든 노인들이 젊은이들을 꾸짖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속담 혹은 
격언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을 마친 후에 만약 연소자들이 할말이 있으면 이제 노인들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말보다 실천이 매우 잘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시대에 젊은이들은 주로 비평의 권리를 독점합니다. 지금 한국인들은 가장 오래된 사람의 비평이 성경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므로 그들은 항상 성경이 그들을 
먼저 비판하도록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책, 성경을 감히 비판할 
여지를 결코 남기지 않습니다. 나는 그러한 종류의 성경 비평학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토록 많이 비평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한국인들 심령처럼 성경을 
겸손히 접근한다면 몇몇 신학교 주변에는 바울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자 에베소 거리에서 불태웠던 것보다 더 많은 책들을 불태우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을 발흥케 하였습니다.


한국 목회자들과 전도인들과 장로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투옥되면 
게으른 불평으로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대신 성경공부를 착수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옥중에 있는 동안 성경을 일곱 번 읽고


“나는 결코 나의 주가 그토록 놀라우신 분인 줄 결코 전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고 
외쳤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일본인들이 성경을 빼앗아 그것을 찢어 버릴까봐 염려되어
로마서 전체를 암송하고 풀려나자 요한복음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만약 참된 박해가 이제까지 기독교 국가에서 일어난다면 성경은 현재보다
더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푸트 선교사가 예기치 않게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발견한 마을에서 그는 그날 25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첫 세례 문답자에게 문답을 하면서 어떤 성경 귀정을 암송하고 있는지 암송해 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는 “예”라고 대답하며 성경 암송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암기한 것 약 100개의 성경 구절을 암송한 후 푸트 선교사는 그만 하라고 하고, 
만약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암기하는 모든 성경 구절을 다 암송하라고 한다면 
결코 세례문답을 다 끝낼 수 없을 것을 걱정하며 다음 세례 문답자의 문답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25명의 세례문답자 각자가 100개 이상의 성경구절을 암송할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왜 한국교회가 그토록 강하고 영향력 있는지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경 공부 때문입니다. 한해 1,400개 사경회가 전국에서 열렸고 약 9만 명이 여기에 등록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경비를 자신들이 부담합니다. 어떤 때는 1,800명이나 많은 이들이 성경공부하기 위해 한 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장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는 바람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숙소를 찾을 수 없어 불신자들 가정에 숙박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사경회 참석자들을 숙박시킨 모든 불신가정이 회심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주일학교에 참석하여 성경을 공부하는 데는 연령의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평양에 있던 어느 주일날 비가 내렸는데 그곳 그리스도인들이 날씨에 구애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 주일학교 시간에 열리는 성경공부반 몇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성경 반은 사람들이 발들일 틈도 없이 꽉 찼습니다.


초대교회는 축복된 이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 받는 것을 값진 것으로 여기고 
즐거워했습니다. 똑같은 정신이 한국교회를 특징 지웠습니다.


시기심에 가득 찬 사탄이 한국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부추겼음이 분명했습니다. 선천의 그리스도인들이 테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는 참으로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부당한 일은 결코 없는 일인데, 기독교 지도자들을 투옥시키기 위해 일제는 
그러한 음모를 조작한 것입니다. 감옥에서 일본인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자백받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무시무시할 정도로 너무도 잔인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손을 뒤로 묶고 공중에 매달았으며,


어떤 사람은 불에 달군 쇠 젓가락으로 지졌습니다. 한 사람은 일곱 번이나 기절했으나 
모든 고문 속에서도 그들은 신실한 신앙을 지켰고 결국 재판에서 그들 모두가 
무죄 방면되었습니다.


한 남자가 자신의 문중 마을에서 구주를 고백하자 문중 사람들이 그를 가문과 집에서
쫒아 냈습니다. 그는 법에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 부드러움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모욕과 부당한 잘못을 온유하게 참고 살아가면서 전 문중 사람들이 회심할 때까지
복음을 전해 마침내 그의 전 소유가 회복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 도시를 방문하는 동안 회심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후 그는 그의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러 갔습니다.


그의 문중(門中)이 분노에 차 복음을 거부하였고, 곧 분노한 친척들이 그를 쓰러트리고
거의 초죽음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는 경우 목숨만 붙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여러 주를 치료 받은 후 의사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어느 날 출혈을 하면서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른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대단히 많은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수년 동안 그는 자신의 고향 지역을 다니면서 책을 나눠주고 자신이 소유한 주님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런 후 어느 한날 그는 피를 토하며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시도했던 그 불신 지방에 그는 자신이 개척한 11개의 
교회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확실히 성령 하나님께서는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그가 행하신 것처럼 
한국에서 우리의 승천하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쉽게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로 하여금 깨어 동양의 이들 자녀들이 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하나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현시되는 것이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 풍부한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겸손으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히 그들을 통해
넘쳐흘렀습니다.


하나님은 똑 같은 구원의 충만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살았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너무도 위대하신 구원을 베푸실 구원자를 경멸하는 이들에게 정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료출처 : 캐나다 출신 Stephen Goforth 선교사의 
"When the Holy Spirit Came upon Korea in 1907"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