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와 우상숭배

by holyway posted Jan 2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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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와 우상숭배 

동영상 출처 : http://vimeo.com/7395973

 

번역:

 

갈라디아서 3:27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기도합시다.

아버지, 제가 오늘 말씀을 선포하려 합니다.

저 자신이 그대로 지켜 살기도 힘든 것입니다.

주여, 사람들이 제가 원래 아닌 무엇으로 되는 것을 믿게 만드는 위선 가운데 제가 있게 허락하지 마소서.

왜냐면 주님,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속한 약하고 가련하고 믿음없는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 주님, 만일 주의 성령님을 통하여 권능을 주시어, 이 말씀을 통하여 저의 삶을 변화시키시고, 이 말씀을 통해 저를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되도록 하신다면 주님, 저는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주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폴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합니다. 그 교회는 유대인으로부터 공격받고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

착각이 없도록 합시다. 그때엔 율법, 규칙, 지혜, 말씀에 대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율법과 계명을 가지고 있고 그건 진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율법적으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기는 쉽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향기와 생명을 옷 입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습니다.

영성의 표적은 우리 삶의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의 향기가 모든 측면에서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수 년 동안 세계를 돌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나 목회는 성공의 증거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곳에 임했고 어떤 여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내가 부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까?”

“네?”

“당신은 짧은 설교 하나를 듣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분명 봐야합니다. 아무 바보나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 그것이 제 삶의 질문입니다.

사역과 목회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내 계급과 메달을 빼고 거울을 봤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폴워셔에게 목회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시끄럽게 울리는 드럼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지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닙니다.

나는 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인과 아이들, 가장 가까운 사람과 함께 있는 것에서 당신이 예수님의 옷을 입고 있는지가 결정납니다.

이것은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얻고 하나님은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그의 아들을 닮기를 명령하십니다.

그게 전부이고 그것이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 무슨 의미 입니까?

마태복음 5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여기서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당신들이라고 확인합니다.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짐을 말합니다.

그리스어로 언톨러지는 인식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구인지가 아닌 무엇을 하는지에 많이 집중합니다.

오늘도 실제 나보다 더 영적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내가 뭘 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입니다.

깊은 내면의 내가 누구인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이 나를 무섭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성도들의 인내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심하도록 경고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병에서 나와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들어왔습니다.

한 구절을 찝어서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나는 화학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나는 텍사스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소금에는 특정한 성질과 원소가 있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그 원소를 빼어내고 그 맛을 낸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에서 특정한 성질을 빼버리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그가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는 그리스도인 만의 특정한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교체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선 원리와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지기 전엔 의미없이 대체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질문해봅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 필요한 요소들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들어옵니다.

일단 도달하고 나면 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매주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것으로 집중됩니다.

 

대체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러나 정말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말합니다. 그 필요한 요소들이 없다면 당신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문맥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나는 지금 예수님의 옷의 옷감이 이거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것에 질렸습니다. 기독교가 어떤 것을 하는 것으로 축소되는 것에 이제 질렸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제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것은 행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돌을 일으켜 너가 하는 일을 하게 하고 더 잘하게 할 수 있다.”

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너에게 확증하여준 것, 명령과 소망은 나의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이 원한 것입니다.

당신 삶의 모든 문제들은 당신의 성품이 무엇인가, 당신이 누구인가에서 옵니다.

결혼생활에서 오는 다툼들과 육적인 성냄, 그것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모든 우리 삶, 형제들과의 문제들, 양심의 방해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을 강조하지 않아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무언가가 되어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5장 1절과 2절을 보길 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예수살렘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콜로라도에 있었다면 이 교회는 높은지점(High pointe;교회이름)이라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산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씁니다. 모세보다 위대한 분이 산위에 올라가 입을 열어 가르친다.

모세의 법보다 위대한 분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기준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올릴 것입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것을 올립니다.

오래전에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나의 멘토였던 분이시며 세계에서 온갖 학위들을 받으셨고

그는 언제나 내게 말했습니다.

“폴, 신약에서 사랑은 여러 가지 중 하나가 아니다. 사랑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들은 가장 높은 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하는 것. 산속에서가 아닌 사랑하기 힘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이 하나님의 군대의 대장이 지금 우리 앞에 서서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확실히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 이외엔 진정한 선생님도 선지자도 왕도 없었다.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알아보아라.”

그는 당신에게 그의 말씀을 통해 말합니다.

이 왕은 당신에게 당신이 상상한 말씀과 다른 말씀을 가지고 찾아 올겁니다. 처음에 보기엔 모세의 법보다 쉬워보이는 말씀을 가지고. 그러나 당신이 성장하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이것은 지금까지 들어본 어떤 말보다 어려워집니다. 그 말씀은 모세의 법보다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세의 법은 십일조를 요구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법은 만약 형제가 궁핍하면 모든 걸 팔아서 그에게 주라고 합니다. 모세의 법은 일주일 중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법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드리라고 합니다. 한번의 심장박동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뛰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준이 얼마나 올라간지 보이십니까? 법의 기초적인 원리들은 모두 버립니다. 왜냐하면 빛이 오면 그림자가 있을 수 없고, 예수님 어두움가운데 빛을 비추시면, 법은 이제 이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무에서 죽으시도록 사랑한 것같이 서로를 사랑해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법을 지키는 데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없으니 그 성질들에 대해 다시 봅시다.

“복이 있나니...”

당시에 이 말씀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올바르지도 설득력있지도 않았습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믿음이 나의 길을 보시고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왜 우리는 “복”의 의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까요. 하나님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 친구가 루마니아에서 천국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 울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완벽했습니다. 왜냐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영광, 존재, 삶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마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마쳤을 때 한 남자가 손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이것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늙은 설교자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질문을 한 그 남자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복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내 아들 이안은 세 살입니다. 그는 항상 바른 것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번 바른 일을 할때면, “아빠 이거 봤어요? 잘 보세요. 아마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복이란 신성한 은혜입니다.

“이 자가 나의 기뻐하는 아들이다”

하나님이 빛나는 얼굴로 당신을 한번 보시는 것에 비해 큰 자동차와 좋은 집, 부유한 교육은 약한 빛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이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빛에서 오는 모든 축복과 좋은 것을 모두 가방안에 넣는 것. 그게 이것의 의미입니다. 얼마나 많은 축복을 당신과 제가 놓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10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우리가 QT를 갖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지 않아서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일치되도록 자라지 않아서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함” 우리는 이 단어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로마제국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철과 금속, 강한 힘을 자랑합니다.

자존심, 부, 명예, 명성, 지위, 여러분 중 몇은 이것들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맛이 매우 좋지는 않습니다.

가난함, 비천함, 깨어짐, 노예...몇몇은 그냥 지나쳐버리고 싶어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제가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가장 유명한 구절중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는 너희들에게 한가지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씀이 아마 당신들을 화나게 할 수 도 있겠지요. 저는 이 말씀으로 너무 행복합니다.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내가 모범이 될만한 기도하는 자,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는 자에겐 내겐 안식할 처소가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또한 적 앞에서 겁없고 용감한자에게 역시 내겐 안식할 처소가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위대한 것을 믿을 수 있는자에게도, 내가 다른 곳에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가 이런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왜 주님이 그러실까요?

왜냐면 그런 자는 그가 영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것을 알아야 하듯이. 그는 그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그의 실패를 보고 그의 결점들을 봅니다. 그의 믿음이 그를 심판에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왜냐면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래전에 한 신학교 학생을 알았습니다. 그는 어려보였지만 하나님의 그에게 일하고 있었고 매우 경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폴 형제님, 저는 매우 거룩하지 않고 매우 의롭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매우 무지합니다.”

나는 자비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훨씬더 거룩하지 못합니다.”그는 내 말에 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당신의 삶을 보며 내 죄를 깨닫습니다. 늙은 선지자로서 내가 어른이 되어가며 무뎌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당신이 분명 나보다 더 영성이 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보다 더 기쁩니다.”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들어보세요. 이것이 아마 당신들 중 일부를 자유롭게 할 겁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QT를 가졌고,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께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밖으로 나가 모두에게 증거했습니다. 여러분은 순종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날에 옳게 행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세상의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했고, 고양이를 발로 차지 않았고, 그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날의 끝에 너무나도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다음 날, 여러분은 늦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전날 그 프로그램을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가운데 있지 말아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기회가 있을 때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느끼는 진정한 느낌은 슬픔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상숭배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기쁨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쁨은 여러분으로 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지속적인 행함으로부터 말입니다.

저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으로부터 옵니다.

 

자, 저는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제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진정한 느낌이 있습니다. 제가 그런것들을 행하지 않을 때 말입니다.

하지만 요점은 심령의 가난함 이야말로 놀라운 것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하곤 했던 것을 여러분이 깨달을 때 말입니다.

"젊은 설교자들이여, 설교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저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신발 끈을 매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숨도 쉴수 없습니다.

때때로 저는 교회 성장 컨퍼런스에 초청받곤 합니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수행하려고 하는 이 모든 큰 일들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일어나서 말할 것입니다.

"제게 질문이 있습니다. 모든 호흡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심장의 박동 그것은 어디로 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계신 여러분들, 모든 목회자들 설교자들, 전도자들, 선교사들, 이 모든 큰 계획들...

제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숨을 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심장은 뛰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위에 하나님의 권능이 없이는 말입니다.

제 삶에 어떤 분량의 은혜라도 없이라면, 오늘 저는 여기서 여러분께 그저 자기중심적 육체에 관한요동하는 증거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될 전부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갈라디아서를 조금 읽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전 너무나도 양심이 찔렸습니다.

그 책은 의견차이와 논쟁 그와 같은 것들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전 가끔 제 아내와의 관계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보기에, 글쎄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그저 문제가 있다거나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문제는 제가 육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육신 가운데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권능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제가 영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전 영이 가난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이 기도하십니까? 당신은 얼마나 많이 두려워 떱니까? 당신은 얼마나 많이 그 분의 말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합니까?

영의 가난함... 반명 이런 곳에 놀라운 교회가 아닙니까?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이런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훌륭한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낮은 존재이며, 깨어지고 겸손한 존재입니다.

뒷 자리에 앉으며, 발을 씻어 주며, 여러분 앞에 놓인 어떤 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워하여 그것이 여러분을 자신의 필요로 몰아가는 것이며,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날 때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왼쪽으로나, 나의 오른쪽으로나, 왜냐하면 내 삶 위에 하나님의 권능이 없이는 분명히 나는 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에 있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이는 약함을 인식함입니다.

그리고 은혜에 대한 엄청난 필요를 인식함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오! 얼마나 놀라운 곳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곳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