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에드워즈의 각성된 자들의 반응

by holyway posted Jan 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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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된 자들의 반응(58-97)  


  에드워즈는 두 번째 부분에서 사람들의 심령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해 상술한다. 그는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있음과 동시에 많은 점에서 그들 사이에 커다란 유사성이 있음도 인정한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번역자 양낙흥 교수의 요약문을 거의 대부분 옮겨적는다.1)


1. 회심의 과정에 대한 관찰

  회심에 있어 첫 번째 단계는 각성이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생래적으로 얼마나 비차만 존재인가를 의식하게 되면서 각성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혼이 멸망할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멸망을 피해 신속히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첫 현상이다. 각성의 속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어떤 이들은 갑작스럽게, 어떤 이들은 서서히 각성되었다. 양심에 갑작스런 찔림을 얻은 자들은 마치 심장을 화살이 꿰뚫은 것처럼 되었다. 점진적인 각성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먼저 이전보다 신중해지고 그 후에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한 후 각성이 심화되면 자신의 비참에 대한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각성의 결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즉각 죄악과 방종을 jfl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툼, 중상,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일을 즉시 중지했다. 술집은 비고 대신 목사관이 붐비게 되었다. 또 다른 결과는 구원의 수단을 아주 진지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성경 읽기, 기도, 묵상, 예배 참석, 소그룹 모임에 큰 열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부르짖었다. 처음 구원을 찾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 대해 아주 무지했다. 그들은 자기가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멀었는지, 죄악 중에 얼마나 죽어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2. 준비 과정의 다양성

  각성 상태에서 사람들이 경험했던 두려움과 괴로움의 정도는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위로와 소망 가운데 진행했고, 어떤 이들은 저주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는데 때로는 그것이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비참에 대한 그러한 이해는 그가 구원을 받을 때까지 점점 더 증가되었다. 에드워즈는 각성된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공포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회심과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않고도 아주 신속히 회심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회심의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함에 있어 그는 그 전의 청교도들 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게 된 죄인들을 다룸에 있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방법에 매이시는 일이 결코 없어보였다. 심지어 청교도들에 의해 회심의 은혜를 받기 위해 거의 필수적인 준비 작업이라 여겨졌던 죄에 대한 개달음 조차도 에드워즈는 그것이 회심 전에 그리 깊지 않다 하더라도 회심 후에 훨씬 더 깊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사람들이 체험하는 구원의 은헤의 크기가 그들이 회심전에 경험하는 죄에 대한 깨달음의 정도에 꼭 비례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지적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이 그리 분명치 않았던 어떤 사람들이 후에 누구 못지 않게 분명한 은혜를 체험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죄에 대한 율법적 깨달음 아래 있는 동안 가장 큰 두려움을 가졌던 자들이 항상 가장 큰 빛과 위로를 얻는 것도 아니었다. 또 그런 사람들이 항상 갑작스러운 빛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회심의 때에 관한 한은 그러한 자들이 대개 가장 잘 인지하고 있었다고 에드워즈는 기록한다.

  사람들이 고통 아래 있는 시간, 즉 회심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는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어떤이들은 불과 며칠이 소요되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렸으며 심지어 수십년이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철저히 각성되지는 못했지만 자기 영혼의 상태가 양호한 것이라는 아무런 위안되는 증거를 얻지 못해 오랜 세월 동안 자기 구원에 대해 염려하면서 그것을 위해 상당한 수고를 할 정도로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한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정당한 이유를 가진 두려움들 외에 때로는 불필요한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것은 사탄이 그들을 혼란시킨 결과였다. 때로는 병적인 우울증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는데, 그것만큼 사탄이 즐겨 이용하는 것은 드물다고 에드워즈는 탄식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비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부흥들에 비하면 1735년의 부흥시에는 사탄의 역사가 훨씬 적었다고 에드워즈는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는 크게 각성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각성되지 않은 강퍅한 심령이라고 자책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그것은 그들의 각성이 깊어질수록 더했다. 때로 위험한 절망의 언저리까지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하에서 죄책감으로 울부짖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에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로 전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좀 극단에 속한 경우들이었고 보편적으로는 공포가 그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3.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각성된 죄인들은 점차 자신의 죄를 확실히 그리고 깊이 깨닫게 되었다. 성령이 그들의 사악함과 죄악됨, 그들의 불충분한 의와 오염, 그리고 무력함을 깨닫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각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신들의 외적 악행이나 죄악들에 집중되었지만, 그 후에는 내적 죄, 즉 마음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 더 강해졌다. 그들의 부패한 본성, 교만, 불신등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오염을 보게 되면, 그들은 그 더러움을 씻어 내고 깨끗케 되기 위해서 애를 쓰기 시작했다. 각성의 초기 단계, 즉 옛날 죄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되는 시기에 사람들은 흔히 자기 힘으로 의를 세우려는 율법적 노력에 호소했다. 엄격한 생활, 죄의 자백, 종교적 의무 이행등으로 하나님을 달래고 자기 죄를 보상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실패가 거듭되는 만큼 실망도 거듭된다. 때로 그들은 그러한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위로가 주어지는데 왜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하는 반감때문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죄에 대한 깨달음의 상태는 계속되었다. 때로, 그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여 절망 중에 자포자기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때에 도움이 된 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족성에 대해 과거에 어디선가 읽거나 들은 복음적 내용이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메시지도 처음부터 전파되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만일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낳기 위해 처음에는 복음의 선포를 미루고 단지 율법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메시지만을 전한다면, 절망에 빠질 죄인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성아래 놓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완전 충족하신 자비에 관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자주 격려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이었다. 결국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는 율법의 말씀과 은혜의 말씀이 골고루 섞인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각성과 격려, 두려움과 소망이 적절히 혼합되어야 해이와 태만, 그리고 결국에는 무관심을 낳는 두 극단인 자만심과 낙심 사이에 중요이 유지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그러나 죄를 깨닫고 자기 의를 세우려는 단계에 있는 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에는 합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자신들이 너무 사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들을 용납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힘으로 자신들을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 보려는 율법적 시도를 거듭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당신은 자기 힘과 의를 너무 의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면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또 포장만 바꾼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 그들은 자기 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무 긍정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한밤중처럼 캄캄해 보인다. 마침내, 그들은 힘이 진하고 상한 마음이 되며 율법적 겸비함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전적 무능과 불춘붕성을 확실히 깨우쳐 주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참된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는 노력을 쏟는 시행 착오를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을 에드워즈는 주목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구원의 서정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반복되는 무익한 시도들의 끝에 자신들의 율법적 노력의 무가치함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신 후에야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없이 죄를 깨달은 죄인들이 자비를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허망한 자기 신뢰를 극복하고 진토에까지 낮아져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강조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길이라는 말이다.


4. 겸비해짐

  각성이 구원의 체험으로 연결되는 경우 율법적 고통 후에 죄인들이 깨닫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청교도적 용어로 소위 겸비해짐을 체험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버리시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의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눈물이 그들의 가장 작은 죄조차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마음과 생활이 너무나 비열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정죄하는 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날 것을 본다고 말했다. 그들은 설령 저주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이며, 그의 정의로우심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저주받고자 하는 마음(a willingness to be damned) 이라고 불렀다. 이 정도에 이르면 그들은 대개 값었고 충족한 은혜를 분명히 감지하게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하나님의 정당성을 발견하기 직전까지 대개 아주 초조해 하던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하자마자 마음에 고요와 평안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은혜를 받게 되리라는 소망으로 하나님의 발 아래 누워 그의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 청교도들의 용어로 소위 준비된 마음(prepared heart)을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고요함이 얼마간 계속되다가 드디어 어떤 특별하고 즐거운 현현이 그들의 영혼에 이루어진다고 에드워즈는 보고하고 있다. 아주 종종 자비하신 하나님, 충족하신 구속자, 혹은 복음의 이 위대하고 즐거운 일들에 대한 어떤 위로를 주는 달콤한 전망이 즉각, 혹은 금방 뒤따랐다.


5. 드디어 은혜를 체험함

  율법적으로 겸비해진 사람들에게 은혜가 처음으로 나타날 때의 양상은 아주 다양했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자기 앞 시대의 청교도들과 견해가 달랐다. 앞 시대의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역사하실 때 어떤 특정한 단계나 방법들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의 규범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고 그는 비판한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는 무한한 다양성 중 일부를 소개한다. 어떤 영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싶어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러한 갈망은 신적인 것들의 최고의 탁월성에 대한 감각이 있을 때만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다. 영혼은 그것을 자신의 최고의 행복과 최선의 분깃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선한 것을 영원히 추구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러한 체험이 시작될 때는 대개 다른 경험들과 발견들이 즉시 뒤따라왔다고 에드워즈는 보고한다. 그것은 아주 다양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죄인들을 기꺼이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신 그리스도가 마음에 부각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고 있는 그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가지신 하나님을 줄 곧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충족성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또 어떤 이들은 그 분의 진실하심과 신실성을 보았다. 어떤 이들이 최초로 발견한 것은 복음이 전체적으로 진리이며 확실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약속의 진실성이 그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진실한 초청이 그들 마음에 나타나는 체험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참으로 초청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종 어떤 특별한 성구가 마음에 머무르면서 그들을 위로했고 때로는 은혜로운 초청과 약속에 관한 여러 성구들이 꼬리를 물고 하나씩 떠올라 영혼에 점점 더 큰 만족을 주었다. 그러한 성구들은 그들의 처지에 아주 적합한 것들이었다. 그러한 위로는 어떤 때는 성경을 읽고 있는 중에,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일반 서적을 읽고 있는 중이나 묵상중에 주어졌다.

  어떤 이들에게는 목숨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사랑 혹은 속죄를 위해 흘리신 그의 보혈의 충족성과 귀중함이 부딪혀왔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로우심의 가치와 영광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스러움에 사로잡혔다. 혹자는 그리스도가 정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방법이 탁월하다는 것과 그것의 적합성에 대한 생각이 다가왔다. 그러나 은혜를 처음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이 항상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6.  은혜 받은 자들의 반응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놀라운 감정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었다. 어떤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리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때로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큰 감사를 표현했다. 이들은 가지들이 누리게 된 영혼의 그 기쁨과 즐거움의 최고의 탁월성에 경탄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즐거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평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상의 쾌락이 얼마나 헛되고 잡되며 무가치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기쁨으로 충만한 동안 그들은 식사도 잊어버렸다.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아름답고 달콤하고 즐거워보였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탁월성에 대해 가장 주의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종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황홀한 감각이 거기에 동반되었다. 이러한 은혜 체험을 묘사하는 단어들도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보았다(sight)고 했고, 어떤 이들은 발견했다(discovery)고 표현했다. 어떤이들은 그것을 실감케 하는 확실한 깨달음(realizing conviction) 혹은 마음의 생생한 혹은 느껴지는 감각(lively or feeling sense of heart)이라고 묘사했다.


7. 회심되고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자들

  그리스도를 통해 영혼의 거룩한 평정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아직 회심되었다고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영접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은혜를 발견하고 기뻐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영접임을 몰랐다. 하나님의 자비와 완전한 구원 안에서 그들이 느끼는 달콤한 만족이야말로 그 자비를 받아들였다는 명백한 증거임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 자비를 추구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하나님 발 아래서 그의 자비를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무지로 인해 스스로를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으로 보는 사람들을 에드워즈는 겨울 나무 혹은 딱딱한 흙 밑에 눌려있는 봄의 씨앗이라고 비유했다. 그러한 사람들은 애처롭게도 자신들의 마음에 생겨난 위로와 은혜로운 감정들을 억누르고 제거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자기 마음 속에 생겨난 그러한 감정들이 보편적 조명이나 순간적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그들은 자기들이 혹 그릇된 소망을 품고 있다가 영원한 멸망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바른 지도를 받아 소망을 가지게 되면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은혜로운 성향이 생명을 얻어 활기를 띠었다. 마치 따뜻한 봄볕이 씨앗을 움틔우는 것처럼 이제 자유롭게 된 은혜가 넘쳐 흘러나와 그들에게 풍성한 만족의 원천으로 자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심체험에 관련된 다양성은 회심의 순간에 대한 인식에서도 나타났다. 은혜의 최초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정확한 시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각을 쉽게 식별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그 정확한 때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회심 날짜를 잘못 알고 있다. 그 이유는 회심의 체험의 양상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최초로 체험할 때 그것은 자주 빛의 비췸으로 나타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어떤 사람을 회심시키는 빛은 그의 주위를 온통 갑자기 비추는 영광스러운 광채와 같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침이 밝아오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약간의 빛만 나타나지만 점점 더 그 빛이 증가한다. 이따금 어두움이 드리우지만 결국은 구름을 뚫고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으로 체험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에 대한 에드워즈의 묘사는 문자 그대로 극적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주목하게 한다.

  “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한 극단적 공포 후에 죄인들이 감지하는 최초의 변화는 종종 고요함이었다. 그런 다음에 빛이 서서히 들어왔다. 칠흑같은 어두움 후에 처음에는 가물거리는 빛이, 그리고 한두 마디의 위로의 말씀이 부드럽게 그들에게 들려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달콤함과 구주의 사랑에 대한 약간의 지각을 가지게 된다. 그 때 공포와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무가치함에 대한 겸손하고 온유한 감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어떤 성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에는 빛이 더욱 강력하고 분명하게 들어온다”(81).

  청교도 목회하에서 회심의 은혜 체험은 대개 복음에 대한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확신을 가져왔다고 에드워즈는 기억한다. 기독교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이사람들 앞에 제시되는 순간 그들은 그것에 대한 시각과 미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때의 그들은 복음의 교리들의 진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마치 그들이 환한 대낮에 눈을 들어 태양을 바라볼때 그 강한 햇살로 인해 태양의 존재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비유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아주 분명한 성령의 역사들과 신성의 강력한 증거들을 직관적으로 보고 직접적으로 느꼈다. 이 직관적 시각과 감각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청교도들이 주장하는 체험의 핵심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한 머리 지식 혹은 관념적 사변적 지식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확신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이제 복음의 진실성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남들이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니까 그렇겠거니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정말 그러하다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이제 모든 것이 그들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그래서 그 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이상해했다.


8. 은혜 체험후의 변화된 모습들

  회심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인 이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설교가 새롭게 들린다. 성경이 새로운 책인 것 같다. 거기서 새로운 빛을 보기 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 같은 이야기에 대해 읽을 때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것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낀다. 이제야 비로서 그것을 실재적인 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에 대한 묵상을 하느라고 몰두한다. 어떤 이들은 무모와 세상 전부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많다고 고백했다. 어떤 이들은 가련하고 비참하며 무가치한 존재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인식에 압도당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이 과거에는 모두 너무나 냉정한 사람들이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던 식으로든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유와 겸손의 영으로 충만하여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겼다. 그들은 대개 하나님 앞에 낮게 엎드려 재 속에 처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표현했다. 그들이 진토 속에서 낮아져 자신을 비웠을 때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기쁨을 그들은 발견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켰을 때 그들은 만족스러운 안식을 가장 많이 즐겼다.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이 성경만큼 즐거워한 책은 없었다. 그리고 주일만큼 귀히 여김을 받는 시간도 없었다. 예배당만큼 사람들이 원하는 곳도 없었다. 회심자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놀라운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그들에게 가장 불친절했던 사람들에 대해 그러해싿. 사람들은 남에게 끼친 해악을 고백하고 보상하는 데 열심이었다. 회심자들은 다른 영혼들의 회심에 대해 지극한 소원을 가졌다. 어떤 이들은 가장 미미한 동료 인간이나 가장 악한 원수들의 회심을 위해 자기들이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9. 회심된 자들에게 남아있는 부패

  이처럼 놀라운 영적 변화와 감격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심된 자들 중에 구원의 확신이 너무 강해서 자기 점검이 불필요할 정도였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에드워즈는 기록한다. 회심된 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두려움과 의심을 가진 가장 큰 원인은 그들 마음 속에 남아있는 너무나 많은 부패 때문이었다. 처음 은혜를 체험할 때 온통 생기로 가득했던 영혼이 차츰 둔감한 상태로 변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교만, 시기, 원한, 복수심 등 아직 자신들 속에 남아있는 세상적 성향을 발견할 때 그들의 마음은 실망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모두 헛것이며 자기들은 위선자일 뿐 이라고 결론 짓게 한다. 그들은 자기의 강퍅하고 사악한 마음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그러나 성령의 영향이 회복되어 은혜의 활발한 움직임이 되살아나면 의심과 두려움은 곧 사라졌다. 사람들이 영적 무기력과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종종 종교적 대화였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신앙적 대화를 나누는 중에 영혼이 넘치는 기쁨으로 거룩한 활동을 재개했다는 것이다.2)   


10. 에드워즈 교회의 부흥에 대한 주변의 반응

  이러한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노샘프턴 교회 신자들과 에드워즈는 외부의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는 뉴잉글랜드 대부분 지역들이 노샘프턴을 비롯한 코네테컷 골짜기 부흥에 대해 비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 부흥에 대해 시기심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불평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퀘이커 교도들과 유사하다고 비난했고, 어떤 경우에는 종말론과 관련해 오해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노샘프턴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영적 체험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 강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에드워즈의 변명에 의하면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의 결과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구원이라는 한 가지 일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그 문제를 대화의 소재로 삼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진술하는 이 역사가 과거의 부흥들의 연장 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부흥은 자신의 전임자인 스토다드의 목회아래서도 몇 번 일어났다. 그때 역사했던 것과 동일한 영이 이번에도 역사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 정도의 비범성 뿐이라는 것이었다. “전에 회심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축복의 소나기에 같이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의 갱신시키고 강화하고 세워주시는 영향을 받았다(And God's people that were formerly converted, have now partook of the same shower of divine blessing in the renewing, strengthening, edifying influences of the Spirit of God)”(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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