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이 위험하다구요? - 윤성헌님 글

by holyway posted Feb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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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이 위험하다구요?]

오직 믿음을 말하면 어떤 사람들에겐 자꾸만 행함을 뒤로 제쳐놓는 듯한 인상을 주어 종종 불안함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 선한 삶도 살아야 하는데, 하는 것입니다. 하긴, 한국교회가 믿음을 남발하면서도 윤리적 삶이 결여되어 있으니 이런 염려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다가 성화를 뒤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갖다 붙입니다.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며 우리의 선행을 강조합니다. 믿음 '더하기' 행함, 복음 '더하기' 율법, 칭의 '더하기' 성화의 조합입니다. 믿음만 강조하는 것은 안 되고 복음만 강조하면 안 되고 칭의만 강조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룩한 삶의 강조라는 취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자칫, 여기엔 치명적인 오류가 개입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교회의 오류입니다. 비록 참된 믿음에는 선행이 열매로 따르고 복음은 율법을 포함하며 칭의는 성화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사슬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오해, 서로 다른 별개의 두 개를 잘 균형 맞추거나 종합해야 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삶이 결여된 한국교회의 원인은 칭의만 강조하는 것이며 여기에 더하여 행위, 또는 윤리, 성화를 강조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거니 생각하는 것이지요. 믿음은 아무런 문제없고, 행위만 덧붙이면 해결되겠거니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한국교회는 '믿음과 칭의'는 제대로 가르치며, '복음'은 제대로 선포해왔을까요? 거룩한 삶이 결여된, 신자의 윤리가 결여된 한국교회의 문제가 복음은 잘 가르쳤는데, 이신칭의는 제대로 가르쳤는데, 성화의 강조가 없어, 윤리의 강조가 없어 발생한 문제일까요?

묻고싶습니다. 어두움에 속한 자가 어찌 빛의 열매를 맺겠는가? (엡 5:8, 9) 애초에 좋은 나무가 아닌데 어찌 좋은 열매를 맺겠는가? 라구요.

좋은 나무라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참된 신자만이 진정한 선행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사람만이 속사람을 따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기 때문입니다. (롬 7:22) 애초에 좋은 나무가 아닌데, 애초에 거듭난 믿음이 없는데, 애초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이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는 것, 분명 맞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열매가 좋은 나무라는 증거'라는 말이기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선한 사람이 선한 행실을 드러내는 것'의 강조입니다. 열매를 가장한 거짓된 믿음, 위선적인 믿음도 얼마든지 존재하니까요?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열매를 통해 좋은 나무임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생각은 대단히 인본주의적입니다. 애초에 좋은 나무가 아니였다면, 그 열매는 제아무리 눈에 보기에 좋아도, 하나님 보시기엔 가증스런 바리새인들의 위선의 열매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명제가 참으로 성립한다고해서 역이 반드시 참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좋은 예입니다. ^^)

그러면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한국교회의 윤리의 문제가, 선행의 문제가, 거룩한 삶의 문제가, 과연 행위의 문제, 율법의 문제인가, 성화의 문제일까요?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라구요. 이것은 애초에 참된 믿음의 문제라구요.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결단코 거룩한 삶의 행보를 걷지 않습니다. 아니,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주여, 주여!' 입술로, 외형적으로 주의 이름만 부르나 정작져야할 십자가는 지지 않는 '노릇'만 하는 무늬만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위장된 행위로 자신의 더러운 속을 가리는 회칠한 바리새인이거나 적절한 종교적 행위로 스스로를 속이는 교회내 위선자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요.

구원얻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빌 1:29)이요, 선택의 결과(행 13:48; 롬 8:30; 엡 1:5)이며, 성령의 역사하심(고전 12:3)이요, 또한 회개의 열매(요 1:12-13)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쓴 우르시누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머리보다는 마음에 의한 실천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격적이고 한 사람의 실존, 곧 영혼 전체를 감싸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참된 믿음을 지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유일한 위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 인격적으로 바라봅니다. 십자가의 의에 대한 견고한 확신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공로, 바로 여기에 기초한 감사가 행함있는 믿음으로 나타나며, 성령의 역사로 율법의 제 3용도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삶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윤리의 유일한 근거는 심판대의 하나님의 판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라는 말입니다.

아직도 어정쩡하게 값싼 믿음에, 더하기 인간적인 노력의 행위인가요? 아직도 잘못된 복음에 무거운 짐으로서 율법을 더한 조합인가요? 우리는 한국교회가 성화에만 문제가 있고 칭의의 복음은 바르게 선포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오직 믿음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함을 말하며, 율법을 말하며, 거룩한 삶을 말하면서 '오직 믿음'이라고 외칩니다. (*)



(페이스북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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