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 이민규 교수, '칼빈도 무조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by holyway posted Feb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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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의 거짓 구원론을 반박함

 

거룩함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종교개혁 가르침 왜곡한 것

신자는 칭의와 성화가 성령 안에서 긴밀히 결합되어 거룩한 열매 산출해야

 

 

이번 세월호 사태로 인해 구원파의 교리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그들의 구원 교리에 의하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으면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살아도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진한 교인들을 홀리기 쉽습니다. 어떤 교인은 기존 교회에서 몇 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누리지 못했던 구원의 확신을 이런 구원파 교리를 통해 단번에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방종에 빠지게 하며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사이비 구원론은 구원파 교주와 그 일가와 측근에게서 볼 수 있듯이 양심이 화인 맞은 괴물 같은 인간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신교 구원의 교리가 얼마나 괴이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보는 많은 교회에서 전하는 구원의 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박사가 얼마 전 그의 강의와 책에서 대다수의 한국교회도 사실상 구원파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세윤 박사의 진단을 100%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1. 잘못된 구원론에 빠진 한국교회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복음의 변질입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는 잘못된 구원론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거룩함이 없어도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성경은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도 이런 사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히 12:14).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고전 6:9-10, 갈 5:21, 엡 5:5).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주를 본다고 했습니다. 죄에서 떠나 순결하고 거룩하지 못한 이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룩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성경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날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장 염려한 것이 바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가 이런 식으로 오해되는 것이었습니다.

 

 

2. ‘오직 믿음으로에 대한 이해

 

칼빈은 우리의 행위나 거룩함에 근거해서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배격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반드시 거룩함의 열매를 산출한다는 점을 동시에 역설합니다.

 

믿음으로 신분이 의롭게 되는 것과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띠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면 동시에 그를 반드시 거룩하게 하십니다. 또한 믿음은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기독교강요 3.1.1).

 

끊임없이 회개함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지 않는 이들은 곧 부패해져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는 구원의 확신과 함께 두려움과 떨림이 공존해야 합니다. 이 두려움은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종과 게으름과 헛된 자만을 막아줌으로 구원의 확신을 더 온전하고 견고하게 합니다(기독교 강요 3. 2. 22).

 

이런 칼빈의 가르침은 히브리서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히브리서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교인들에게 믿음의 확신과 위로를 주는 말씀과 함께 시험을 당해 믿음을 저버릴 수 있는 배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씀이 공존합니다. 교인들을 위로하는 말씀과 두려운 경종의 말씀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말씀이 신앙생활에 요긴합니다.

 

 

3. 위로와 두려움의 양면성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진리를 알고 은혜를 입고 배도하면 다시는 회개할 수 없다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경고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위험을 두려워하며 경계하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어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없는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에 빠지게 하며 결국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거룩한 두려움 없이 확신으로만 충만한 사람, 거룩하게 살지 않는데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이는 망할 사람입니다.

 

마귀는 거짓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확신을 전혀 흔들거나 공격하지 않고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기만에 빠져 확실하게 망하게 합니다.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믿었기에 구원받았다고 굳게 확신하는 것은 마귀가 준 거짓 확신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마귀적으로 왜곡된 구원의 복음을 통해 마귀가 심어준 거짓 구원의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며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염려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확고히 하려는 경각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함의 열매가 없는데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했는데 거룩함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자기 착각, 기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치는 말

 

내가 참된 믿음을 가졌는지, 내가 참으로 구원받았는지는 오직 거룩함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거짓 확신에 푹 빠져 신앙 생활하다가 멸망하는 것보다 괴로울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고 구원을 의심해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것이 온전한 확신에 이르는 길입니다.

 

물론 참으로 구원받은 신자들도 자신이 이룬 거룩함이 너무 미흡하고 보잘 것 없기에 그것만 의지해서는 자신의 구원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과 부패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의로움과 긍휼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신자들은 이처럼 점점 더 낮아지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는 칭의와 성화가 성령 안에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기독교개혁신보 2014년 7월 9일 기사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뤄진다

 

강의하면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아주 복합적이고 교리적인 질문이기도 하지만 단순 "예스"나 "노"로 답하는 것은 오히려 오해만 부르기 쉽다. 이 질문의 답을 단순히 그렇다와 아니다로 결정하는 것은 사실 미래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결과론으로 보느냐 현재의 불확실성에서 시작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즉, 칼뱅주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배신 없이 성화의 삶을 살며 잘 믿은 자는 하나님의 견인 때문이라 할 수 있고 성화의 삶을 전혀 살지 못하거나 중간에 탈락한 자는 처음부터 신앙이 가짜였었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 입장에서는 중도 탈락한 자에 대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기에 그렇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사색을 통한 원칙보다는 그 무엇보다 성경 본문이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는가에 가장 큰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신약학자로서 바울 서신의 균형잡힌 시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견인설을 주장한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중도 탈락'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13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8:13). 

육신을 따라(kata sarka) 사는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존재한다. 주변을 보라. 입으로는 "할렐루야 아멘, 예수쟁이"지만 삶으로 "나 예수 안 믿거든!"을 확실하게 간증하고 다니는 실천적 무신론자 교인/목회자/선교사들이 꽤나 있다. 이는 어느 시대나 분명한 현실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도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죽음은 구원 상실과 동의어

다. 


 

사도 바울의 구원관은 “이미와 아직”으로 출발하여 항상 종말론적인 긴장으로 충만하다. 즉, 최후 심판 때 결정이 날 미래의 구원을 믿음으로 '이미' 받았으나 현재는 '아직' 그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 탈락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따라서 로마서 8장 38-39절의 견인설은 교인들에게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 구원의 여정에서 중도 탈락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고 나서 이 경고 때문에 심하게 무거워졌을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그러나 분명히 다 잘 될 거야. 하나님의 사랑이 지켜 주실 거야!"라고 안심시키는 목회적 위안과 확신이지 교리적인 표현으로 보긴 힘들다. 

구원은 과정, 혹은 과정의 결과물이다. 분명한 시작이 있지만 일생의 과정을 통한 결과물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았으나(시작하였으나) 아직은 안 받은(앞으로 완성된 상태로 받아야 하는) 진행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이다. 그 중간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법에 따른 윤리적인 책임 있는 삶이 요구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갈등 때문에 고민한다. 갈등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회심자들은 육신과 성령의 갈등을 지속적으로 체험한다. 갈등이 부재하다면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형성될 수가 없다. 갈등이 없다면 이는 오히려 성령이 부재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죄악 가운데 살면서도 전혀 갈등이 없는 뻔뻔한 그리스도인들이 진짜 문제란 말이다. 그들은 중도 탈락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신자에게는 육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때론 연약하기에 질수도 있다. 문제는 육과의 전쟁을 아예 멈출 때다. 이는 성령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누구나 연약함 가운데 실패와 어려움을 겪는다. 육의 욕망은 언제나 꿈틀거린다. 그러나 성령으로 육의 욕망을 죽이며 살 때 미래에 구원이 이루어 진다(“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롬 8:13). 

그러나 그러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성령의 내주하심에도 불구하고 육의 욕망을 따라 살아 사망의 영역에서 타락을 매일 체험하면 그의 영혼은 결국 죽게 된다(바울은 주로 '죽음', '멸망'이란 심각한 용어로 구원 상실을 표현한다).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육의 욕망을 따라 사냐고? 가능하다. 로마서 8장 13절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5장 17절도 보라.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갈 5:17). 

사도 바울은 자신이 회심시킨 그리스도인들이 중도탈락하여 자신의 복음전도 사역이 헛수고로 끝날까 우려한다(고후 6:1, 갈 2:2, 4:11, 빌 2:16).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노심초사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 상황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됨을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한 때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지 아니하여 참감람나무인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순종하지 않을 때 참감람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다(롬 11:20-22). 

 20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접붙은 가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십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에게 인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롬 11:20-22).

우리는 '이미' 받은 구원과 '아직' 받지 못한 구원과의 종말론적 긴장 가운데 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미 구원을 받은 이들이 또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따른다. 자동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롬 8:17).

 2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드린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고전 15:2).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 1:22-23).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받은 구원이 아직 받아야 할 미래의 최종적 구원으로 연결되도록 늘 주의하여 깨어 있고, 자신을 스스로 살펴야 한다. 물론 구원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서 성령의 내주하심과 하나님의 은혜, 징계가 항상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완주하지 못할 이들 때문에 바울은 염려하고 엄중히 경고한다. 중간에 포기하는 자들이 있을 가능성은 절대 배제되지 않는다. 모든 과정이 결코 강제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의 과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요소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다. 이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하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책임이다.

구원파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래서 한 번 구원받은 자는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바울신학의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을 무시한 잘못된 가르침이다. 이 견해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나 신약학에서 독특한 견해가 절대 아님을 밝힌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없는구원파의 구원관은 개혁주의 장로교의 구원관과도 정면 배치된다. 

사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가르침은 예정설과 견인설을 주장하는 칼빈의 견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원파와 달리 그는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의 성립은 오로지 철저하게 중도탈락 없이 끝까지 성화의 삶이 전제되었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 번 구원 받으면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위와 거룩한 삶이 없어도 구원이 보장받는다는 말은 칼빈의 견해에 근거한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전혀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구원파식 구원론이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널리 퍼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마치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정통교리인 양 착각하고 있다. 왜 그럴까? 최소한의 신학조차 없는 신학의 빈곤 혹은 부재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참담한 현주소다. 이 중심에는 아무리 가르쳐도 공부하지는 않고 그저 유행 따라가며 교회성장을 꿈꾸는 신학생, 목회자들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신학교 교수들의 책임이 크다.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페이스북에서


출처 : http://m.cafe.daum.net/goodnewstoyou/SnyS/51?q=%EB%B0%95%EC%98%81%EB%8F%88+%EC%9D%B4%EB%AF%BC%EA%B7%9C+%EA%B5%90%EC%8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