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구원의 길
"너희가 …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 "
( 엡 2 : 8 )
1. 종종 설명된 바와 같이 종교라는 것처럼 이해하기 착잡하고 복잡하며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종교, 아니 그들 중 가장 현명한 여러 사람의 종교에 관하여서 그럴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의 종교에 대하여도 그렇습니다. 크리스쳔의 세계에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그 세계에서 기둥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종교에 관하여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본래의 형태대로만 취하여 하나님의 계시에 묘사된 대로 본다면, 얼마나 이해하기 쉽고, 얼마나 명백하고 단순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지혜로운 이 세상의 창조자시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이해력이 부족하고 수용력이 적은 현재의 인간에게 아주 적절하게 되어진 종교입니다.
이 종교가 말하는 바 그 목적과 그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은 참으로 분명합니다. 그 목적은 한 마디로 말씀드려 구원이요, 그를 얻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2. 이 간단한 두 말 곧 "믿음"과 "구원"이라는 말이 성경 전체의 요지이니, 이를테면 전 성경의 골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들에 관하여 잘못 이해함이 없도록 가능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 정확한 판단을 내려보아야 하겠습니다.
3. 그러면 아래와 같이 상고하여 봅시다.
Ⅰ. 구원이란 무엇인가?
Ⅱ.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할 때, 그 믿음이란 무엇인가?
Ⅲ. 우리는 이 믿음에 의하여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Ⅰ
1. 그러면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상고하여 봅시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종종 듣는 대로 천당에 간다든가, 영원한 행복이라든가 하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이란 영혼이 "파라다이스" 곧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브라함의 품 안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죽음 건너편,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 세계에서 누리는 행복은 아닙니다.
여기 본문의 말씀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줍니다. "너희는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먼 데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을 말합니다. 곧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지금 가지고 있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느니라" 현재완료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뜻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구원은 우리 영혼에 은혜의 동이 처음으로 틀 때부터 그것이 영광으로 완성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전 역사에 미쳐지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이 구원을 최대한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이는 우리가 종종 말하는 '생래의 양심', 그러나 더욱 적절히 표현해서 "선행적 은총"에 의해 우리 영혼 속에 역사된 것 전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선행적 은총이라 함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곧 우리가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점점 증가하는 그 마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하시는 빛, 즉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고 인애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지시하시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선행적 은총이란 성령께서 때때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모든 확신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이 성령의 역사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한 즉시 질식시켜 버리거나 얼마 후에는 이 역사를 잊어버리든지 또는 부정합니다.
3.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도들이 직접으로 말하고 있는 그 구원에 대하여서만 말합니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곧 칭의와 성화입니다.
칭의라는 말은 용서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수납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용서를 위한 값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입니다. 이 말은 좀 더 분명히 말씀드린다면 이 값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즉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다 쏟는 데까지 행하셨고 고통을 당하신 모든 것이란 말씀입니다.
칭의에 따르는 즉각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 곧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평강"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8)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4.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입는 순간에, 그렇지요, 바로 그 순간에 성화는 시작합니다. 그 찰나에 우리는 다시 납니다. 위로부터 납니다. 여기에는 상대적인 변화만큼이나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음을 느낍니다.
또한 이 사랑은 우리에게 세상사랑과 향락, 안위, 명예, 돈에 대한 사랑을, 우리 속에 있는 자만, 분노, 고집이나 그 외의 여러가지 악한 성질과 함께 내쫓으며, 한편으로 모든 인류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일으켜 줍니다. 즉 한 마디로 말씀드려, 이는 우리의 땅에 속한, 감각적이요 악마적인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5. 이런 변화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모든 죄는 없어졌노라고 자연히 상상할 것입니다. 죄는 저들의 마음에서 뿌리째 뽑히고 그 속에는 어느 구석에도 죄가 없다고 자연히 상상할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가져오기 쉬울 것입니다. 즉 "나는 죄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고로 나에게는 죄가 없다. 죄가 일어나지 않으니 죄는 살아 존재하지 않는다. 죄의 움직임이 없으니 죄의 존재는 없어졌다"고.
6.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저들은 그 견해가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죄가 단지 일시 중지된 상태이지 멸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다시 오고 죄는 살아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전에 단지 정복당하였던 것 이지 죽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저들은 자기들 속에 두 가지 세력 곧 상반되는 두 세력이 있음을 느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에 거스리는 육신이 있어 하나님의 은총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저들은 -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 힘을 여전히 느끼고 또한 하나님의 영이 여전히 저들의 영과 더불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할지라도 저들은 때때로 아직도 속에서 느껴지는 교만과 아집, 분노, 불신앙이 자기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도우시는 까닭(시편 118:13)입니다.
7. 마카리우스가 1,700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의 현재 체험을 얼마나 잘 묘사했는지 모릅니다.
익숙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총이 역사할 때 자기들은 죄가 하나도 없노라고 곧 상상을 합니다. 그러나 분별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사람들조차도 다시 괴롭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약간은 자신들 속에 죄가 없노라고 단언할 정도로 은혜를 체험하였다는 예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드디어는 저들이 그런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속에게 올라오는 부패성은 새로이 일어나서 거의 달아오른 상태에 들어가곤 하는 것입니다.
8. 우리가 거듭난 때부터 성화의 점진적인 역사는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우리의 악한 본성의 행위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는 더욱 삽니다.
우리는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조심하여 금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혜에서 은혜에로 나아갑니다. 또 책망할 것이 없이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인하면서, 우리는 다시금 은혜에서 은혜에로 계속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9. 이와같이 우리는 사도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한 대로 완전한 성화 즉 우리들의 모든 죄 - 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 등 - 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완전"입니까? 이 완전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마는, 여기서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죄를 내쫓는 사랑이며 또한 영혼의 전체를 주관하며 온 마음을 채우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곧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Ⅱ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하여 보고자 하는 점입니다.
1. 일반적으로 믿음이란 사도에 의하여 '프라그마톤 엘레그코스 우 블레포메논'이라고 정의되었으니,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곧 이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 또는 확신(이 말은 두 가지 뜻이 모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인간의 시야로나 그 외의 어떤 외적인 감관으로는 볼 수도 없고 지각할 수도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증거란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에 관한 초자연적인 증거, 또는 인간 영혼에게 비취어진 영적 빛, 어떤 초자연적인 시야나 지각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빛을 주신다", 어떤 때는 "식별하는 힘을 주신다"라는 말을 성경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하였고, 또 어떤 곳에서는 "우리 이해(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을 열게 하시며 밝히시는 성령의 이 두 가지 작용에 의하여, 우리는 생래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으며, 우리 주위에 있지만 우리들의 자연적인 기능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영원한 세계를 보는데, 곧 시간과 영원 사이에 걸려있는 휘장을 통하여 꿰뚫어 봅니다. 구름과 흑암이 이 이상 더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으니, 우리는 앞으로 나타날 그 영광을 이미 보는 것입니다.
2. 이 말을 보다 특별한 의미로 취급하여 본다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당신과 화목케 하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다"는 하나님의 증거요 확신인 것입니다.
이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곧 이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또한 왕으로서의 모든 직책을 가지신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것은 이 믿음에 의해서 입니다.
3. 그러면 이것이 "확신의 신앙"인가 혹은 "귀의의 신앙"인가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도 한 분이시요, 우리 만민의 아버지 하나님도 한 분이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믿음, 부르심의 한 소망" 즉 한 기독교인, 하나의 구원하는 믿음이 있습니다.(엡 4:4-6 참조)
이 믿음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확신(여기서는 단지 증거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요, 이 양자의 차이를 말하기는 힘듭니다)을,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셨다"는 확신임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참 산 믿음을 가지고 "믿는 자"는 "그 안에 증거를 갖고"있고, "성령께서 그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까닭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하시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과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뢰를 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리로 보아서 이 확신이 신뢰에 선행함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기까지는 하나님을 어린 아이와 같이 신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신뢰, 신임, 의존, 귀의, 또는 무엇이라고 불리어지든지 이런 것들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니요 뒤에 오는 것으로 믿음의 두번째 가지 또는 믿음의 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우리가 구원함을 받는 것, 즉 우리가 의롭다하심과 성결함을 받는 것은 이 믿음에 의해서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하심과 성결함을 받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세 번째로 상고하여 보려는 제목입니다.
이 문제가 우리 물음에서는 주요한 점이요 특별히 중요한 것이니 우리가 이 문제를 좀 더 분명하게 각별히 고찰해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Ⅲ
1. 그러면 먼저 어떻게 우리가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까? 어떤 의미로 이것이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까? 나는 답변합니다. 믿음이 칭의(의롭다 하심을 얻음)의 조건, 유일한 조건입니다.
믿음이 조건이라는 말은, 곧 믿는 자는 누구나 의롭다 하심을 못 받는 자가 없으며 또한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또 유일한 조건이라는 말은, 칭의를 위하여서는 믿음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이 믿음 외에 그가 다른 무엇을 가졌든 안 가졌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르게 말해서, 사람이 믿기 전에는 아무도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으며, 믿을 때는 누구든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명하여 또한 '회개하라' 하시지 않았느냐? 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즉 '악한 행실을 그치고' '잘 행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니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두가지 모두가 아니냐? 만일 우리가 이것 중 어느 것 하나를 짐짓 등한히 한다면 우리는 이치로 보아서 의롭다 하심을 얻기를 전연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회개하라"하셨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또한 우리가 이것을 등한히 여기면 이치적으로 보아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나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어떤 의미에서는 칭의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믿음과 같은 정도로, 또는 믿음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하되 믿음과 동등한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즉 회개의 열매들은 필요하되 단지 조건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기회나 시간이 있으면 그것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같이 그런 것 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믿음 없이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불가능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많이 회개를 하고 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하여도 그가 믿음을 갖기 전에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전혀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순간, 이런 열매를 갖고 있건 없건, 또는 회개를 많이 했건 적게 했건, 믿는 그 순간에 그는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회개와 그 열매는 단지 간접으로 필요한 것이니 곧 믿음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때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일에는 믿음이 직접적으로 첩경이 되는 유일한 조건인 것입니다.
3. "너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다고 믿느냐?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만, 성결함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다고 믿는다 그런데 너는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25년 동안(1738-1763, 역자 주) 이렇게들 부정확하게 열심히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이에 반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에 있어서 정반대입니다. 나는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우리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과 꼭 같이 성결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는 것을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진리들 중의 하나인 칭의는 성결의 진리를 탁월하게 설명하여 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성결의 조건입니다. 칭의에서 그랬듯이, 성결에 있어서도 꼭같이 믿음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치고 성결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도 성결을 못 받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유일한 조건이요; 성결을 받기에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믿는 자는 무엇을 그가 가졌든 못 가졌든 그는 성결함을 받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믿기 전에는 성결함을 받지 못하나 믿을 때에는 누구든지 성결함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4. "그러나 회개가 칭의 전에 있었던 것 같이 칭의 뒤에도 회개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선행에 열심인 것이 의무가 아니냐? 그 뿐인가? 회개와 선행은 꼭 필요한 것으로서, 사람이 만약 고의로 이것들을 등한히 여기면 온전한 의미에서 성결함을 받으리라고는, 곧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리라고는 이치로 보아서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냐? 아니, 이것들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은혜 가운데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지식 가운데서 도대체 자랄 수가 있겠느냐? 그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그 은혜를 지속할 수 있겠느냐? 너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계속하여 주장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이 성결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5. 나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계속하여 하나님의 진리라고 지지합니다. 칭의 전에 회개가 있는 것과 같이, 나는 칭의 후에도 회개가 필연적으로 있음을 인정합니다. 칭의를 얻은 사람은 모두 선행에 열심이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것들은 아주 필요하므로 만약에 이를 서슴지 않고 등한히 하면 그가 성결함을 받으리라고는 이치로 보아서 기대할 수 없으며,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그런 마음에서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는 그가 이미 받은 은혜를 지속할 수도 없으며 신앙 안에, 곧 하나님의 은혜 안에 계속하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전개해야 할 추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회개, 올바르게 이해된 이 회개와 모든 선한 일의 실천 곧 자비의 행위나 경건한 행위들(이것이 신앙에서 나온 까닭에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 모두 성결하게 되는 데에 필요한 것입니다.
6. 저는 여기서 "올바르게 이해된 회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회개를 전에 말한 회개와 혼동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의롭다하심을 받은 후에 결과적으로 오는 이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 잇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죄는 "프로네마 사르코스", 곧 육에 속한 마음이니 우리 교회가 말하는 대로 중생한 사람들 속에도 그것이 비록 군림하고 지배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악에로의 성벽, 타락하기 쉬운 마음, 아직 머물러 있어 성령에 거슬리는 육의 경향성 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이는 때때로 자만으로, 때때로 분노를 품거나,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곧 세상을 더 사랑하고, 안락을 더 사랑하고, 명예 또는 향락을 더 사랑하는 것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고집, 무신사상, 우상숭배로, 특히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런 죄들에 의해서, 천 가지 방법, 천 가지 모양으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7.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를 깨달음과 함께 우리의 생활에 남아 있는 죄, 곧 우리의 말과 행위에 아직도 고착되어 있는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또한 병행합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그 최상의 것이라 할지라도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또는 방법에 있어서나 악이 혼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수한 것을 낱낱이 지적하신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아무도 견딜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별로 생각하지 않던 곳에서 우리는 아집의 교만이라든가, 불신앙, 우상숭배 등의 교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에 우리의 흉악한 죄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던 것 이상으로 지금 우리의 최선의 일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이라는 것은 그 안에 공적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때 그 앞에 감히 자랑할 수 없는 것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언약의 보혈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없노라고 할 수 없구나 하는 것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8. 체험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들은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고 또한 우리의 말과 행위에 고착된 죄를 깨달을 뿐 아니라 만약에 대속의 피로 계속하여 뿌림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들 때문에 우리가 져야할 죄책을 확신함과 이 회개에는 또 하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곧 우리의 무력함, 즉 어떤 착한 생각을 생각해낸다거나 좋은 소원을 가진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과 더우기, 올바른 말 한 마디를 한다거나 한 선한 행동을 수행하는 일이, 먼저 우리들에 앞서서 역사하시고 또 매 순간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전능한 은총을 통하는 일 없이는 우리가 무기력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9. 그러면 성결에 요하다고 주장하는 선행은 무엇들입니까? 첫째로, 이는 경건한 모든 일들이니 공기도, 가족기도, 골방기도, 주의 만찬에 참석하는 것, 성경 말씀을 듣고 읽으며 명상하면서 하는 성경 연구, 또는 몸의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하는 금식, 절제 등입니다.
10. 둘째로는, 자비에 속하는 모든 일들입니다. 이 일들은 이것이 사람의 육에 관계되든 영에 속하든 굶주린 자를 먹이며, 헐벗은 자를 입히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감옥에 갇힌 자나 병든 자나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있는 자들을 찾아보는 일들입니다. 또한 무식한 자를 가르치려고 애쓰며, 어리석은 죄인을 각성시키며, 뜨뜻미지근한 자에게 활기를 주며, 흔들리는 자를 견고케 하며, 마음이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시험받는 자를 도와주며, 영혼들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데 어느 모로든지 공헌하려고 노력하는 것들 입니다.
이것이 회개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며, 온전한 성결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명하사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게 하시는 길입니다.
11. 여기에 극단적으로 해로운 의견이 나올 수 있습니다. 즉 이 해로운 의견이라는 것은, 보기에는 무사기한 것 같으나 해로운 것 곧 "신자에게는 죄가 없다"는 의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그 순간에 모든 죄는 그 뿌리와 가지가 모두 멸망되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는 회개를 아니하도록 전적으로 막으므로 결국은 성결에로의 길을 아주 막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나 생활에나 죄가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회개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에서 온전해질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사랑에 이르는 데는 그 회개, 곧 그 깨달음이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12. 여기서 또한 우리가 이와 같이 온전한 구원을 기대하는 데에 어떤 위험도 있을 수 없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설사 잘못 알아서 그런 은혜(축복)가 결코 얻어지지 않았고, 얻어질 수 없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리하여도 우리는 손해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이와 같이 기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활기를 주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발전시켜 주님이 오실 때, 주님은 그가 주신 달란트를, 그 남긴 것과 함께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나 돌아와서, 이 회개와 회개의 열매가 온전한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이것들은 믿음과 같은 정도에서나 같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요, 결코 동등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열매들은 필요하되 조건부로 필요한 까닭입니다. 즉 그런 시간과 기회가 있다면 필요한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런 열매 없이도 성결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는 성결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회개를 아무리 많이 하고, 또 많은 선행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곧장 성결을 가져오는 것은 전연 아닙니다. 곧 그가 믿기 전에는 그는 성결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이런 회개와 그 열매를 많이 가지고 믿었든 적게 가지고 믿었든, 이 회개의 다소를 막론하고, 믿는 순간 그는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들은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회개와 열매는 단지 간접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의 신앙을 지속시키고 증가시키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반면에 성결함을 받는 데에는 신앙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필요합니다.
믿음이 성결함을 받는 데에 유일한 조건, 곧 직접적으로 아주 필요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14.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성결함을 받는다, 곧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고 사랑 안에 온전하여진다 할 때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로, 이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성경에서 약속하셨다는 것에 대한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충분히 알기까지는 일보의 전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옛 약속을 보아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으리만큼 분명합니다. 즉, 약속하시기를 "내가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리라"(신명기30:6) 하셨습니다.
이 말은 얼마나 명백하게 사랑 안에 온전해짐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또 모든 죄에서 구원받음을 얼마나 강하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사랑이 온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한, 죄가 깃들일 무슨 틈이 그안에 있겠습니까?
15. 둘째로, 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그가 이루실 수 있다고 하는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는 불결한 데서 깨끗한 것을 나타내며 마음을 모든 죄에서 정결케 하고 모든 거룩함으로 채운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는 것을 안다면 이런 경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런 일이 전능자의 힘보다 적은 어떤 힘으로 가능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분명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16. 셋째로, 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실 수 있으며 또한 지금 이를 이루시고자 하신다는 데 대한 신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리 행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한 순간이 천년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그가 하시고자 하는 것을 이룩하시는 데 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존귀케 하려 하시는 사람 안에서 그 이상의 가치라든가 적합성이라든가를 원하시거나, 기다리시는 일은 하나님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어느 시점에 있어서든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 (히4:7, 시95:11, 마22:4), "보라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니 혼인 잔치에 오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 이 확신,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결케 하여 주실 수 있고 또 지금 우리를 성결케 하려고 하신다는 확신 외에 또 하나 첨가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신다는 신적인 증거, 확신입니다.
그 시간에 그것은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 때에 영혼은 모든 죄의 더러움에서 정결해집니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여집니다. 그 때에 신자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는 엄연한 말씀의 깊은 뜻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8.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일을 영혼 속에서 점진적으로 하시는가, 아니면 순간적으로 하시는가?"
아마 이것은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저들이 죄가 끊어지는 그런 특수한 순간을 유의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일진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곧 주님께서 그의 입김으로, 한 순간, 눈 깜빡하는 찰나에 죄를 멸하신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행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로서 이에 대하여는 편견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납득될 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매 순간 이것을 찾으십시오! 위에서 설명한 그 방법대로 그 증거를 찾으십시오. 즉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목적인 모든 선행을 하는 가운데 증거를 찾으십시오.
그렇게 하는 때에 위험은 없습니다. 그와 같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설사 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해도, 더 악화되는 위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사 여러분의 바라는 일에서 실망한다 하여도 손해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바라시는 일에 있어서 실망 당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는 올 것입니다. 지체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매시 매순간 이를 구하십시오. 어찌하여 이 시간 이 순간에 찾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믿음으로 성결해진다고 믿으실진대, 분명코 지금 이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으로 보아서 여러분은 과연 이를 믿음으로 구하고 있는지, 혹은 행위로 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것입니다. 만일 행위에 의해 구한다면, 거룩해지기 전 먼저 무엇인가가 행해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먼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또는 "이러이러하게 행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이날까지 이것을 행위에 의해 얻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으로 이것을 찾으신다면, 당신의 현재 그대로의 상태에서(as you are)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현 상태로 기대한다면 지금 곧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다음 세 가지 점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련이 있음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 즉 이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십시오. 현재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지금 기대하십시오!
이들 중 하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곧 이들 전부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인정하는 것은 곧 그 전부를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원칙에 진실하십시오! 그리고 이 축복을 구하십시오! 구하시되 당신이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just as you are), 곧 더 나은 상태나 더 악화된 상태에서가 아니라, 당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상태에는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가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지불할 것 없는, 또한 간구할 것도 없는 다만 가난한 죄인의 자리에서 구하십시오. 당신이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 이것을 구하신다면, 지금 이것을 기대하십시오.
지연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어찌하여 지연시킬 것입니까?
그리스도는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당신의 원하는 바의 전부이십니다. 그는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문에 서 계십니다! 마음 깊이에서 부르짖으십오.
그대, 하늘의 손님이시여!
들어오시오, 들어오시오.
그리곤 다시 떠나지 마시고
저와 더불어 먹으며
이 잔치가 영원한
사랑의 잔치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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