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교리를 절대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이유(마틴 로이드존스)
왜 우리는 성경교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내용이
우리가 앞으로 교리를 고찰해 나가려는 방법의 대략적인 정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요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제시하려는 몇 가지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경 자체가 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특정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는 것인데,
그 진리들이란 교리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는 말은
교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그 교리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성경을 대단히 잘 알 수 있으나,
그 교리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에 대한 내 지식은 내게 전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볼까요.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한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 대해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던가요?
선지자들은 교리를,
특히 율법에 대한 교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 교리들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백성아!
너희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율법이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실을
너희는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교리를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 스스로도 이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정말로 하셨던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7~28)
주님은 율법을 취하사 그것을 교리의 형태로 해설하셨습니다.
주님은 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저 율법을 일반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윈리들을 뽑아내서는 그것을 적용하고 시행하셨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사도들이 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본문을 취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그 본문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시하고 분석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방식은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을 백성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설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설교의 목적과 기능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건대
설교는 그저 성경 구절의 다른 번역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설교의 본질적인 역할, 그것을 행했습니다.
신약 서신서들을 예로 들어 봅시다.
서신서는 무엇입니까?
이 서신서들에서는 몇몇 위대한 교리를 강조하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교회들에는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 저자들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언제나 교리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일을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저는 성경이 그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자체가 그렇게 하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우리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만 얽매여서 그 정신은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words) 안다는 데 만족하여
말씀(word)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상황에 우리 모두도 처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문자에만 얽매인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
우리 영혼을 저주받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도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연구가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연구가 대단히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수십 세기동안 교회가 언제나 성경 교리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초창기부터 온갖 희생을 치르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교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교리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형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지망생들은 교리 문답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받았으며,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지요?
금세 이단들이 일어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진실하고 진지하긴 했으나,
옳지 않고 해로운 것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단 교사들과 거짓 교사들은 교회 내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잘못 인도했습니다.
교회 내에 이교가 발흥함에 따라
초대 교회는 우리가 보통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
예를 들면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오류와 이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신경들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믿지 않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서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완벽하게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들도 성경을 읽고 나서
상당히 잘못된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규정해야 합니다..”
교리들에 대한 정의들을 우리는 신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어떤 의미에서 하나였던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하지만 교리는 대체로 동일했습니다.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 개의 위대한 신경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새 생명, 새로운 활력, 새로운 이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회는 교리를 정리하는 것과
그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 간에 흔히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 교리들을 함께 열거하고 해설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않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그 외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영국교회에는 [39개 신조]라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또한 유럽 대륙에도 많은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라비아 교회의 신조와 개혁 교회의 신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와 전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장로교회 신앙고백입니다.
이 모든 신앙고백들 및 그에 수반되는 교리 문답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하고,
그 믿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성경 교리를 진술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초기 시절에 이 모든 것이 필요했다면,
종교개혁 시절과 17세기에 이것이 필요했다면,
분명 그것은 지금 현재 이 순간에도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는 사이비 종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의 문 앞에 와서,
그들 말로는 “성경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성경을 자기들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을 하는 순간,
여러분은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들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함께 그런 가르침들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정말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제시되는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주변에만
이 모든 오류와 사이비 종교의식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로 교회 안에도 심각한 혼란이 있습니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때는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하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모든 원수, 모든 교활한 원수,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오는 마귀가 사용하는 모든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교리를 여러분과 함께 고찰해 보아야 할 더 고상한 이유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교리 공부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들어가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어느 정도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세부적인 것들에 매여 헤매지 마십시오.
이 위대하고도 강력한, 교리의 최고봉들을 뽑아내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에 고찰은 언제나 예배이며,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교과서들에 대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말합니다.
“신학 대학들이 대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아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는 멀쩡했는데,
졸업하고 나올 때 모습을 좀 보세요!”
그것이 언제나 사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말이 간혹 사실이라면
제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의 사람들은 성경을 마치 하나의 교과서인 양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너무 자주 이 위대한 교리를
마치 그것이 인간의 사상과 아이디어인 것처럼 접근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배와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번역과 지적 지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리를 알기를 소망해야 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을 배운 후
그 지식으로 교만해지거나 지적 흥분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과 경배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 교리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소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우리 및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모든 교회가 소생하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다시 한 번 목도하기를 소망합니다.
‘로이드존스 교리강좌시리즈’(부흥과 개혁사 역간)
1권‘1장 교리공부의 목적과 방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