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함에 대한 잘못된 확신 (존 오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체험하였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체험들로 인한 거짓 확신들과 용서에 대한 헛된 거짓 확실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림자와 구름을 잡는 것과 같다. ...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 거룩, 순결, 엄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이 없다. (시 50:21) 사람들의 자신의 죄에 대해 심각성이 없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 (계명, 죄, 심판, 용서) 문제될 것이 거의 없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고, 죄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며, 용서는 단지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과 순결함에 대해서 모르는 자는 죄와 죄 성에 대해서 모르는 자이며, 용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자이다.
복음이 일반적으로 외쳐지며, 어느 정도 교리를 알고 있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용서의 준비가 되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죄에 대한 용서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죄에 대한 용서를 믿음으로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에 대한 질책으로 인하여 심령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때 마다 나는 용서함 받았다, 혹은 구원 받았다라고 스스로 자기 암시를 주거나 심리적으로 확신을 주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설득에 불과하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견해 (opinion)에 불과하다. 거짓 평안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으로 죄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죄의 용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성령의 더 깊은 죄의 질책과 책망이 있어서, 결국 자기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기까지 부르짖고 찾아야 한다. 이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주시게 되며, (갈 1:16) 이 빛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는 원리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구절을 남용한다. 그러나 같은 요한 일서 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죽음으로 죽으신 것은 죄를 없이 하기 위함이지, 우리로 마음껏 죄를 지어도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자들이다. 자신의 죄를 보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로 부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공경함이 없다. 자신의 육신적 만족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계명을 지키거나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갈 마음도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거나 용서하여 주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요 5:14, 8:11, 참고, 겔 37:23) 그리스도의 용서함을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라.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시편 116:1, 5-7절에 의하면 용서함 받은 자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죄의 용서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죄에 대해서 미워하거나 싸우는 심각성이 없다. 오히려 그 영혼은 죄를 짓는 것에 용기를 가지고 있다. 죄에 대해서 물타기를 하는 영혼이다. 유다서 1:4 에 의하면 경건하지 못한 자이며, 은혜 아래에서 죄를 짓는 방탕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남용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알면서 죄에 방임하고,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로마서 6:1, 2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용서에 대한 믿음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로 죄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해주는 능력이 된다.
용서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복음적 순종 가운데 살게 만든다. (딛 2:11, 12) 용서에 대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에 평안함이 없다. 물론 일시적으로 기쁨이 있을 수 있지만 지속적인 것은 아니다. 잘못된 근거에서 스스로의 확신은 잘못된 목적을 낳게 된다. 그것의 뿌리는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은 결국 교만하게 된다.
죄의 용서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죄에 대해서 미워하거나 싸우는 심각성이 없다. 오히려 그 영혼은 죄를 짓는 것에 용기를 가지고 있다....잘못된 근거에서 스스로의 확신은 잘못된 목적을 낳게 된다. 그것의 뿌리는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은 결국 교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