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 (1장)
1. 본문(요 3:3-7)의 해설과 분석
-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절]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아르곤’)이었는데, 그것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이라는 뜻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이스라엘 통치를 받고 있던 기간 중에도 종교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총괄하는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이스라엘의 최고 의회였습니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관찰 1 - 믿을 수 있는 증표로 기적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교회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특별한 사역을 중단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간 후에 더 이상 만나를 내려 주시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p.14∼15).
관찰 2 - 죄인의 회심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고한 죄인을 수없이 회심시키는 기적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완고한 사람들을 돌연히 정복하시는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고 그들을 복음적 상태, 즉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도록 새롭게 된 상태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살려 내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p.15).
관찰 1 - 니고데모는 확신하면서도 망설이는 연약함을 보였습니다.
관찰 2 - 세상에서의 평판을 사랑하면 신앙에 걸림돌이 됩니다.
관찰 3 - 세속적인 야망은 온전한 회심을 방해합니다.
관찰 4 -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아닙니다.
관찰 5 - 회심 전에도 어느 정도 확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본문에 있는 니고데모를 이 시점에서 완전히 확신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관찰 6 - 용기가 두려움을 눌러 이기게 되는 때가 옵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1)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의 칭송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답변을 하지 않으십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찾아 온 바리새인의 부패함에 걸맞게 자신의 응답을 적절하게 만드십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의 연약함과 무지에 맞추어서 답변을 적절하게 만드십니다.
관찰 1 - 우리의 본성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칭송하고 찬양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관찰 2 - 하늘 아래 있는 그 어떤 자연적인 특권도 우리가 은혜와 영광의 왕국에 입성하는 데는 무용지물입니다.
[4절]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성경에 매우 능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중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에스겔서 36장이나 ‘새 마음’이나 ‘부드러운 마음’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다른 성경 구절들을 연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무지하다니, 아니 하다못해 그렇게 부주의하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p.23). …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 있는 육적인 개념이 그를 사로잡아 영적인 진리들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p.24).
관찰 1 - 성경에서 구원의 핵심적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에 대해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안에 담겨진 가장 핵심적인 교리나 구원으로 인도하는 교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관찰 2 - 복음의 신비를 머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관찰 3 - 논쟁적 지식은 슬픈 것입니다.
[5∼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관찰 1 - 예수님은 중생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3절에서는 중생의 교리를 제시하셨고, 5절에서는 그 교리의 원리와 방식을 설명하십니다.
관찰 2 - 중생 교리의 근거를 예수님이 제시하셨습니다.
창조 시에 받았던 ‘원시의(元始義)’를 상실함으로써 인간은 육체로 퇴보하고 단순히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피조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타락한 인간은 영적인 시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p.26). … 반면에 성령으로 인해 중생한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p.27).
중생은 그 거룩한 의식, 곧 세례식의 근본정신이요 핵심입니다. 세례 의식 속에는 중생이 실제로 예시되어 있고 상징되어 있으며 보증되어 있습니다(p.28).
이유 1 - 본문이 말하는 출생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유 2 - 세례가 믿음에 앞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물세례를 받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p.29∼30).
이유 3 - 세례는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기독교의 성례로 제정되었습니다.
이유 4 - 세례는 복음의 비밀을 인치는 후속입니다.
이유 5 - 순교한 사람 중 물세례를 못 받은 분도 있습니다.
이유 6 - 예수님은 성령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에 나오는 물은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 디도서 3장 5절에서 … 사도 바울이 의미하는 씻음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는 표현으로 명시되었습니다. 즉, 씻음은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발원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하심이라는 뜻입니다(p.33).
물과 성령은 똑같은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의 비유는 깨끗하게 하고 생명을 태동시키는 성령의 힘을 보여줍니다(p.34). … 성령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관련하여 물에 비유됩니다(p.35).
1) ‘거듭나지 않으면’ - ‘아노센’이란 헬라어를 정확하게 해석하면 ‘위로부터’란 뜻입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다시’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p.35).
2) ‘하나님 나라’
이유 1 -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 체제를 확립합니다.
이유 2 -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룹니다.
이유 3 - 그 나라는 아들에 의해 형성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나라를 정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흘려 그것의 기초를 세우시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에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가십니다.
이유 4 - 섬김의 측면에서 복음은 고귀하고 천상적입니다.
이유 5 - 복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깁니다.
3)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5절)
4) ‘볼 수 없느니라’ (3절)
성경에서 ‘본다’라는 표현은 때때로 향유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냥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p.38).
2. 본문에서 발견한 교리
- 영혼의 중생은 복음적이고 영광스러운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담 안에서 인류는 창조된 피조물로서 본래 처해 있던 상태로부터 변질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부패한 피조물로서 지금 처해 있는 상태로부터 변화 받아야만 합니다(p.39).
실제적인 변화가 없다면 상대적인 변화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정죄로부터 완전히 놓임을 받았다는 것이므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을 언제나 수반합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 있은 후에야 따르게 됩니다(p.40).
3. 본 논저의 전개 방식
첫째, 제일 먼저 중생의 필요성에 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을 제시하겠습니다.
둘째, 중생이 복음적 상태와 영광의 상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겠습니다.
1) 중생이 복음적 의무들을 이행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
2) 중생이 복음적 특권들을 향유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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