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믿음주의를 가르치지 않고 전인격에 관련되는 경험을 가르친다 /로이드 존스
구약성경의 한 부분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과 함께 하신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유다 백성들과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개혁과 부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8:23).
이 말씀은 오늘날 적용될 뿐 아니라 그 과거에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날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대중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기 위한 길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론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온유함과 평온함, 어떤 환경 속에서도 이겨 나갈 수 있는 능력,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해도 그것들을 이겨 나가는 능력을 볼 수 있다면(비록 자신들은 감당할 수 없지만), 우리가 소유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우리 자신에게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확신과 평강과 기쁨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진리를 전하는 일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승리하는 삶의 위대한 비결인 것입니다. 참전도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이것을 찾거나 또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가능성을 믿지 않기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확신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발견된 이 위대한 느낌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의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현대 복음주의와 18세기 반까지의 복음주의의 큰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신학적으로는 서로 다른 점들이 있었음에도 이 점이 바로 현시대와 종교 개혁, 청교도 그리고 초창기 감리교 때와의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경건한 의식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습니까? 경이와 놀람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에 대한 느낌은 어디로 갔습니까?
사람들이 모세나 다윗 또는 다른 사람들이 소유했던 이 놀라운 경험들을 찾지 않는 이유는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차갑고 이성적인 믿음주의(believism)를 가르치지 않고 전인격에 관련되는 경험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또한 가르칩니다. 성경은 이 경험을 어떤 한 세대나 일정한 종류의 사람들 또는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서신서들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은 빌립보서 4:4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한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무조건 손뼉 치는, 세상적인 쾌활함은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한 기쁨이요, 깊은 곳에서 넘치는 기쁨이요, 바다로 흐르는 힘찬 강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에베소서에서 말합니다. 그들 모두는 어디서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함"(엡3:18-19)을 알아야 하며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 “안다”(know)는 단어는 매우 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뜻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얻은 지식을 말합니다. 보 다 깊이 하나님을 아는 축복된 경험을 한 데서 얻은 지식인 것입니다.
코튼 매더(Cotton Mather)의 말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표현할 수 없는 힘이 나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묘사할 수 없는 영감이었습니다. 그것은 경험한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가 이것을 똑똑히 말한다 하더라도 이 영감보다 더 능력이 있게, 감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아버지와 나를 사랑하시며, 주님의 신실한 두 종으로서 기쁘게 생각하시며, 우리가 특별한 교리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나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믿어 왔지만 그의 마음은 차가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각 있고 생동감 있는 깨달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영감이 왔다고 그는 말합니다.
19세기에 살았던 파킨슨 밀턴(Parkinson Milton)의 일기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나의 영혼은 종종 불타는 환희에 차 있습니다. 이 장막(자신의 육체)이 감당할 수 없는 무아경의 상태입니다. 순교자들, 죽어 가는 챔피언들이 하던 말들을 계속해서 반복했습니다. 사실은 그것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하늘의 포도주(Heavenly wine)는 이 세상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했기 때문입니다. 아, 죽음이 삶에 삼켜져 버릴 때, 나를 그리스도를 위해 활활 태웁니다. 이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드립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충만한 당신에게 맡깁니다”.
청교도였던 윌리엄 에임즈, “우리의 소명과 선택의 확신은 갈망되어야만 합니다”. 확신은 우리에게 가능할 뿐더러 우리의 소명과 선택받음을 확증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16세기말 위대한 청교도의 선봉자인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교회내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확신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합니다”. 확신이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찾는 것, 확신을 얻는 것, 소유하는 것, 확신을 갖고 온전히 즐기는 것은 당신의 일입니다.
- 로이드 존스,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 pp 14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