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토머스 셰퍼드의 구원 서정 이해 (그의 저작 ‘건전한 신자’를 중심으로)
토머스 셰퍼드는 17세기 뉴잉글랜드의 제1세대 청교도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설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존 코튼, 토머스 후크와 함께 회중교회 제도를 옹호하고 반석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회심론은 조나단 에드워즈의회심신학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회심론은 이후 “추구론” 또는 “준비론”으로 불려졌다.
셰퍼드는 참된 회심의 4가지 과정, 혹은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4가지의 “준비” 단계를 제시한다. 그것은 셰퍼드 자신의 신앙체험과 성경연구에 의해 형성된 ‘회심론’이었다. 그 순서는 이러하다. ‘죄에 대한 깨달음’ – ‘통회’ – ‘겸비’ - ‘믿음’
이처럼 신앙 이전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회심론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현대 기독교는 회심 이전의 어떤 필수적 예비 과정도 강조하지 않고, 즉각적 영접의 결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셰퍼드의 구원서정 이해는 논리적일 뿐 아니라 체험적인 구원의 서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존 교파들의 구원서정이해와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다.
✞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원서정 이해
: 세례(영혼이 거듭난다.) - 견진성사(세례 받은 자가 성령세례를 받는 의식이다. 세례는 각 성당에 파견된 신부가 하지만 견진성사는 보통 지역교회를 관할하는 주교가 행한다.) - 성만찬(떡에 의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한다.) - 고해성사(세례 후 타락한 자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는다.) - 종부성사(죽을 때 나머지 죄를 깨끗케 여김 받는다.)
✞ 알미니안 교회 구원서정의 특징
: 창세전의 구속사역이나 원죄에 대해서 부정하고 인간중심의 사상으로 구원의 서정을 “소명(선행은총) – 회개.신앙 – 칭의 – 중생 – 성화 -견인”으로 구별한다.
✞ 개혁주의 교회 구원서정의 특징
: 신학자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소명 – 중생 – 회심(회개와 신앙) - 칭의(양자) - 성화(견인) - 영화”로 본다.
✞ 토마스 셰퍼드 구원 서정의 특징
: 구원을 준비시키시는 성령님의 조명을 중시하며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구원이전에 있는 예비적인 은혜로 본다. “죄에 대한 깨달음 – 통회 –겸비 – 믿음” 이다.
1.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지식>
교회사에서 청교도들만큼 죄에 대한 깨달음의 문제를 깊이 다룬 집단은 없는 듯하다. 죄의 본질에 대해 그들만큼 깊고 처절한 깨달음을 가진 신자들 부류도 없었다. 그들은 회심할 때 죄를 확실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사상 어느 집단보다 더 강조했다. 그들은 죄인이 믿음을 가지기에 앞서 죄를 확실히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토머스 셰퍼드는 참된 회심에서 성령의 첫 번째 작업이 “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어떤 죄를, 어떻게, 어느 정도로 확신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셰퍼드는 요한복음 16:7-9, “7.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는 말씀에 근거하여 성령이 하시는 첫 번째 일은 “믿음을 주는”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으며 그들이 “죄책과 죄의 지배 하”에 있음을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다음에 성령은 “의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데 그것은 믿음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셰퍼드뿐 아니라 많은 청교도 신학자들의 회심론의 주된 강조점은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없이는 믿음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상식적인 사실이었다. 스스로 죄를 못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 왜 구속주가 필요하겠는가?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 예수를 왜 믿을 것이며 누구로 알고 믿을 것인가?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지 못하면 우선 마음의 번뇌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그는 사도행전의 본문을 제시한다.
사도행전 2:37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유대인들은 죄를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먼저 그들은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죄를 본 후 비로소 그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므로 순서를 정리하면, 먼저 죄를 “보고” 그 다음에 그것을 “느끼며” 그런 다음에 “믿게 된다”는 식이 될 것이다. 즉 먼저 죄에 대한 지성적 이해에서 출발하여 감성적 인식으로 전진하며 그 결과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청교도 회심론의 핵심이었다. “죄와 비참에 대한 감각 없이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 먼저 죄를 보지 못하면, 즉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 죄와 비참에 대한 느낌, 즉 양심의 가책이 있을 수 없다.”
셰퍼드를 비롯한 많은 청교도들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이 모든 멸망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사탄이 죄인을 그 죄 속에 묶어둘 때 먼저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한다 ... ‘무지’가 모든 ‘재앙’의 원인이며, 죄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며,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치 않는 이유이다.”
✞ 성령이 제일 먼저 확신시키는 “특정한 죄”
성령이 제일 먼저 확신시키는 죄는 “특정한 죄”라고 셰퍼드는 믿었다. 성령이 “일차적으로 확신시키는 죄는 어떤 죄, 혹은 어떤 특정한 죄들이다. 성령은 일반적 범과들을 가지고 사람을 사로잡지 않는다.” 성령은 단지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죄인이며 죄악 되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죄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신다. “ ... 보통(항상은 아니지만) 주님은 먼저 어떤 하나의 큰 죄(특별한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죄는 아니라 할지라도)를 기억나게 하고 그것을 생각하게 하신다. 그리고는 점진적으로 나머지 모든 죄를 지적해 내신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많은 경우 자신의 한 가지 특정한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듣고 과거의 모든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매매춘, 거짓말 등의 죄를 지적하는 목사의 설교를 들은 죄인은 자신의 모든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한 것이 바로 “한 가지 주된 죄”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살해했다는 죄를 깨달은 다음“다른 죄악 된 행습들을 기억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셰퍼드는 얌전하고 교양 있게 자란 탓으로 자기 죄를 깨닫기 어려운 사람의 경우에는 성령이 어떻게 죄를 깨우치시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어 “자신의 멸망할 처지”를 깨닫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낸다. 그런 경우 주님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추하고 은밀한, 혹은 노출되는 죄에 빠지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과 슬픔을 일으키는 특별한 계기”로 삼으신다. 그렇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게 만드신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 죄에 대한 참된 깨달음 = 죄를 보는 것 + 그 악을 깨닫는 것
성령은 특정한 죄뿐 아니라 그 특정한 죄의 “악”, 그 “지극히 큰 악”에 대해서도 깨달음을 주신다고 토머스 셰퍼드는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죄를 보는 것과 그 악을 깨닫는 것은 별개다. 어떤 경우 특정한 죄들을 많이 보고 그것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것의 큰 “해악”은 못 볼 수 있다. 그 경우 그는 죄를 보면서도 그것을 크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가벼운 문제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해악까지 보아야 “죄를 참으로 깨달았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셰퍼드는 인간이 가장 작은 죄로 인해서도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들이 범한 “지극히 작은 죄”로 인해“영원히 죽게”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처럼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그처럼 사소한 문제로 인해 그처럼 “가혹”하실 수 있음을 믿지 않는다.그래서 성령은 “가장 작은 죄”로 인해서도 영혼이 사망하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 인간은 언제 심각해지는가? 자신의 삶을 재고하게 되는가?
또 영원한 멸망에 대한 두려움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납득”이어야 한다고 셰퍼드는 생각했다. 영원히 멸망할 수 도 있다는 어떤 “맹목적 두려움이나 의심”이 아니라 “나는 죽어야만 해, 나는 이 상태로 멸망할 거야!”라는 완전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죄의 위험성, 즉 죄에 대한 사망의 심판을 감지할 때 비로소 죄인은 심각해진다.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때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된다. 죄를 알기는 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육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작은 죄에 대해서도 “바닥없는 구덩이, 영원한 불”의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죄인은 비로소 죄의 “흉악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대로 살면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이 확실하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재고하게 된다고 셰퍼드는 생각했다. “왜 말들이 전쟁터에서 앞으로 돌진하는가?자신 앞에 죽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영혼은 죽음을 본다. 그리하여 정지한다.” 그러므로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해 본 적이 없는 자는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즉 “죄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이 죽어 있으며 “정죄당해” 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한다.
✞ 성령은 어떻게 우리의 죄를 확실히 깨우치시는가? <조명>
✞ 죄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두 가지 구분 : 1) 이성적 깨달음 2) 영적인 깨달음 <조명>
다음으로 셰퍼드는 성령이 어떻게 죄를 확실히 깨우치시나 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성적적 깨달음은 관념적인 것이요 영적 깨달음은 실재적인 것이다. 단지 관념상의 깨달음은 영적인 깨달음이 아니다. 죄에 대한 지식이 모두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은 아니요, 죄에 대한 고백이 모두 죄에 대한 깨달음도 아니다.
죄에 대한 관념적 깨달음과 영적, 실제적 깨달음을 구별하기 위해 셰퍼드는 한 비유를 든다. 전자는 마치 벽에 그려진 사자를 보는 것과 같다.그런데 사자 그림을 보고 떠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산 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듣고 죄와 죽음에 대해 대화하면서 자기들은 아주 비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떨리지는 않으며 이 악들로 인해 당혹해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살아있는” 것으로 보지 못하며 죽음이 그들 앞에 “생생하게”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죄를 보나 보지 못한다. 그러나 죄가 어떤 것인지,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참으로” 보게 되면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것은 사자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 사자를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을 모른다면 그는 “정죄된” 자이며 아직 “죄를 확실히 깨달은” 자가 아니다.
✞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의 3가지 요소 <조명>
셰퍼드에 의하면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에는 3가지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1) 첫째는 분명하고 확실한 빛 속에서 죄와 그로 인한 죽음을 보는 것이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할 말은 다 있는 법이다. 아무리 몹쓸 죄를 지은 자라도 자기 죄를 완화시켜 보려고 변명을 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죄를 깨우쳐 주시면 그는 모든 핑계를 버리고 자신을 정죄하게 된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핑계에 대해 답변을 하시기 때문에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서서 “오 주님, 나는 유죄입니다. 유죄입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성령이 제시하시기 때문에 죄인은 “나는 비열해, 나는 죽은 자야!”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게 된다. 아니 이럴 때 영혼은 죄를 변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죄를 더 크고 악한 것으로 보려고 애를 쓴다. 그리하여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기가 죄악 되며 아주 비참하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다.
2) 둘째로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에는 실제적 빛이 있다. 즉 두 번째 단계는 영혼이 이 죄와 죽음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죄를 실제적으로 만드시는가? 이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듦으로써”라고 대답한다. “죄가 참으로 크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주목함으로써 보인다. 그는 죄로 인해 상한 분이다. 죄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드러나는 방식이 죄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과정이다.
성령이 모든 헛되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몰아내시며 비로소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영혼에 그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직접 나타내신다. 그러면 성령이 말씀하신다. “보라. 이것이 너의 죄가 자극했던 그 하나님이니라.” 이제 죄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제 죄를 참으로 보게 된다. (셰퍼드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이 죄를 실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짓밟고도 예사로 여기던 사람이 성령의 각성에 의해 위대한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위대하신 만큼 죄도 커 보이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죄도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셰퍼드는 사람이 자기 죄를 정말 보게 되면 과거에 자기가 했던 미친 행동들과 어리석음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게 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그때 인간은 사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님이 나 같은 형편없는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셋째, “지속적”인 빛이 있다. 영혼은 자기 앞에 있는 죄와 죽음을 “계속적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의 화살이 영혼에 깊게 박혀 뽑히지를 않는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를 깨우치시는 성령이 그를 “따라다니고” 순산순간 맞닥뜨리며, 그가 한 일들을 보고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아주 작은 죄” 조차도 이제 자기 눈 속의 티처럼 여겨진다.
그리하여 누우나 일어서나 당혹스러운 생각이 영혼을 사로잡는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때로 주님은 밤중에도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신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중에도 그러한 생각들이 따라 다녀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죄로 인해 괴로워할 때 그는 과거의 날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는 “그 모든 날들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가 나 같은 형편없는 인간에게 계속 베풀어졌구나! 그런데도 나는 계속 죄를 짓고 있구나!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나는 범죄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지 그것은 여전히 겸비해지지도 변화되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처음 죄를 깨우쳐 주었던 그 말씀은 결코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 사람을 잊지 못할 거야. 그리고 그 진리도 ...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때로 그 죄의식이 좀 해이해져서 잊어버리려 하면 성령은 다시 그에게 돌아와서 그와 쟁론한다. “너는 왜 이런 짓을 했는가? 주님이 네게 무슨 해를 가했는가? 언제까지 이럴 것이냐?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탕한 삶을 이제 살 만큼 살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죄 위에 죄를 쌓을 것인가? 이미 충분한 진노를 쌓지 않았는가? ... 그런데도 너는 이처럼 그를 버리고 그를 모욕할 것인가?”
드디어 영혼은 자기 죄를 어느 정도 고백하게 된다. “오, 주님, 저는 지극히 사악하게 행해 왔습니다. 앞에 놓인 것을 보기 때문에 전쟁터로 달려가는 말보다 저는 더 악했습니다. 요즈음 저는 제 앞에 있는 죽음을 보면서도 계속 달려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굽어 살펴주소서, 주님, 나는 심히 악합니다.” 그리하여 셰퍼드는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의 세 가지 조건을 이렇게 요약한다. “성령이 영혼 속에 분명하고 실제적이며 지속적인 빛을 던져 영혼이 그 죄와 죽음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생긴다.”
✞ 죄를 확실히 깨우치기 위한 설교
셰퍼드 당시 설교자들 중에도 죄를 깨우치는 설교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설교자들을 향해 사람들의 죄를 확실히 깨우치는 데서부터 사역을 시작하라고 권고한다. “성령님이 죄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동역 자들은 모두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고하라”(사 58:1)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지상의 소금(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 짠맛과 날카로움을 읽으면 버리우는 것 외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주께서 백성들에게 저주를 내렸을 때 그 방법은 에스겔 선지자로 벙어리가 되게 해서 그가 그들을 책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겔 3:26)고 지적한다. 예레미야의 탄식도 마찬가지였다. “너희 선지자들은 너희를 위해 헛되고 어리석은 것을 보며 너희들의 죄악을 찾아 내지 않았도다.” 결국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죄를 깨우치시는 방법은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인데 그 설교자가 그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셰퍼드의 확신이었다.
✞ 죄를 확실히 깨우치기 위한 설교 <적용적인 설교>
그러나 옛날 사람들도 죄를 지적하고 깨우치는 설교를 아주 싫어하기는 현대와 전혀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적용을 싫어한다고 셰퍼드는 지적한다. 특히 “자기 죄가 건드려지고 자기 양심이 자극당하는 긴 적용”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첫째, 그 죄가 자신의 “애첩과 같은” 죄, 그의 “헤로디아”라면 더욱 그러하다. 둘째, 설교자가 자기를 두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그것을 보지도 자백하지도 않을 것이다. 셋째, 만일 그가 자기 명예나 이득을 상실할 것이라 생각하면 그는 자기 죄를 보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셰퍼드는 날카롭게 분석한다. 그는 자기 죄로 인해 양심에 괴로움을 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죄를 자백하고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그 죄로 인해 자기를 정죄하는 데로 몰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셰퍼드가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에 대해 이처럼 높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을 볼 때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한 당시의 감각이 아주 예민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죄에 대한 참된 “깨달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셰퍼드는 지적한다. “이 시대,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적은 참 깨달음이 있을 뿐입니다.”
✞ 참된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 : 말씀 + 기도
셰퍼드는 참된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 방법을 몇 가지 제시한다. 특별한 비결은 없다. 한 마디로 방법은 말씀과 기도다.
첫째, 영혼을 말씀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거울을 당신 앞에 두시오. 말씀의 사역 중에 주님을 바라보시오. 그리고‘주님, 나를 살피소서’라고 말하시오. 주일에 설교되는 모든 말씀을 당신에게 말씀되는 것으로 주목하시오. 그 후 시간이 날 때 당신 자신을 검토(점검)하시오.”
둘째, 기도 중에 주를 바라는 것이다. 즉 욥처럼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욥 34:32)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말씀 묵상과 기도 중에 자신을 살피고 검토하는 성령의 빛 속에서 죄를 찾는 것이 죄를 확실히 깨닫는 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셰퍼드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실제보다 자신을 더 낫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다 범죄 하므로 나도 남들보다 못하지 않을 거야 ... ”라고 자위한다는 것이다. 자기 죄가 그처럼 크지 않으며, 자기는 그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점들도 있으므로 “약간의 소망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죄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심각한 죄라는 것은 셰퍼드의 일관된 지론 중 하나다. “성난 표정이나 말 한마디도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이며, 음탕한 눈길, 부정한 생각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간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오.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당신은 모든 실없는 말들과 생각들에 대해 계산을 해야 합니다 ... 기도 중에 한번이라도 쓸데없는 생각을 했습니까? 한 번의 설교라도 무익하게 들었습니까?”
2. 통회 <감정>
다음으로 셰퍼드는 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의 정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즉 성령은 이러한 빛을 “어느 정도로” 전달하는가 하는 것이다.한마디로 말해서 “죄에 대한 통회”를 낳을 정도의 빛을 비춘다. 다른 말로, “죄에 대한 감각”을 가져다 줄 정도의 죄에 대한 시각을 허락한다.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즉 “컨빅션”의 바로 다음 목표는 “통회” 혹은 “죄에 대한 감각”이다.여기서 “감각”이란 자기가 범한 “악들에 대한 영혼의 슬픔과 괴로움의 느낌”이다.
그리하여 참된 회심의 두 번째 단계는 우리말로 흔히 “양심의 가책,” 혹은 “죄에 대한 회한”으로 번역되는 “통회”이다. 그러면 통회는 무엇인가? 셰퍼드는 그것을 참회, 혹은 “죄로 상한 심령”과 동의어로 본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죄책감, 혹은 죄를 느끼는 것으로 “강퍅한 마음”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마음의 찔림을 뜻한다. 즉 영혼이 죄와 비참으로 인해 상하되 죄와 단절될 정도의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통회다. 그래서 셰퍼드는 통회의 삼대 요소가 두려움, 슬픔, 죄와의 결별 3가지라고 주장한다.
‘통회’의 3대 요소 | ||
1)두려움 | 2)슬픔 | 3) 죄와의 결별 |
1) 두려움
죄에 대한 통회의 첫째 요소는 두려움이다. 성령은 지옥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킨다.이점에서 청교도 신학의 또 한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전통적 신학이 다 그러하지만 청교도들은 내세, 심판,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세와 심판, 영혼의 구원과 멸망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현대 신학과 가장 주요한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현대 신학자들 중 천국, 지옥, 심판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현세적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내세를 믿지 않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철저히 천국과 지옥의 존재의 전제 위에 신학과 신앙을 논한다.
청교도 신학을 비롯한 전통 신학에서 그것을 제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의 과제 중 하나가 그것에 관련되어 있다. 지식이 늘고 자신감이 충만하여 지옥이나 영원한 멸망 같은 메시지에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내세와 심판, 지옥과 천국, 구원과 멸망의 실제를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멸망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복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설교를 우습게 여기고 미신적인 고대인들의 야만적인 믿음으로 코웃음 치는 오만한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예수의 구원에 대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사실은 수백 년 전 청교도 시대의 사람들도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셰퍼드는 개탄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 다가올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망이나 저주를 겁내지 않습니다. 설령 그러한 것들이 자기들의 몫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그들의 마음은 죄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고 지식이 보급되지 않았던 중세적 인간들이라고 해서 내세와 심판의 존재에 현대인들보다 더 예민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식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본래 내세와 심판,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 같은 메시지에 대해 무감각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셰퍼드는 성령이 통회의 역사를 통해 안일한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사망과 지옥, 죄에 대한 형벌”에 관한 “커다란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그처럼 두려움이 주입되면 죄인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생각으로 움츠러들어 “주님,내가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부르짖게 된다. 성령이 그러한 두려움을 주입하면 죄인은 이제 자기가 본 그 큰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준비가 된다.
여기서 셰퍼드는 심판에 대한 두 종류의 인식을 구분한다. 하나는 성령이 오시기 전에 느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오신 후에 느끼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영혼이 자신의 비참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멀찌감치서 느끼면서 아마도 자신은 그것을 면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다. 따라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는 인간의 위험, 사망, 진노, 그에게 임박한 영원을 보여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비참이 지극히 크다는 것을 보고서 그것에 대한 지극히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셰퍼드는 때로 그 두려움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죄인으로 자결을 생각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사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모부 ‘조셉 홀리’가 그 대표적인 예다.)
✞ 두려움의 성격 3가지
셰퍼드는 이 두려움의 성격을 3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그것은 성령의 역사다. 그것은 단지 천부적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적인 것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성령의 팔이 쏘아 양심에 꽂은 화살”이다.
둘째, 그것은 “분명한” 두려움이다. 즉 그 두려움에 의해 죄인들은 자신들이 비참하다는 것과 그 비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보게 된다.
셋째, 그것은 “강력한” 두려움이다. 약한 두려움은 사람들이 떨쳐 버리든지, 아니면 약한 소망이나 잠, 혹은 일에 빠짐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강한 두려움은 영혼을 흔들고“가장 높은 백향목 조차 넘어뜨리는” 두려움이다. 그것은 마음의 공포로 엄습하며 가장 완악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의 용기와 담대함까지 꺾어 버린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에 나타난 그 가장 큰 악을 성령이 보여 주시면 세상의 어떤 악도 그만큼 무서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을 감당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 ”하고 죄인은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더 나은 상태를 찾아 나서게 된다.
✞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 “하나님의 직접적 위로”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직접적 위로가 임하기 전에는 벗어날 수 없다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오만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먼지 속에 부복할 때까지 성령은 강력한 두려움으로 그를 추적한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영혼은 자신이 듣는 가장 큰 위로의 교리에 의해서도 이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목사가 아무리 그 교리를 특별히 적용해 주더라도 주님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기 전에는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청교도 특유의 강조점이 있다. 성령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인을 사로잡을 때 그는 단지 어떤 사죄에 관한 성구만으로 위로를 받지 못한다. “상한 영혼은 주님이 오시기 전, 어떤 약속들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직접적 위로를 받아야 한다.
물론 그것은 어떤 신비한 음성을 듣거나 계시를 받는 방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성령이 마음에 주시는 내적 확신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청교도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사죄와 구원의 확신을 개인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단지 객관적 계시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관적 체험이 동반되어야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청교도 회심론의 진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모르는 세상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아는 사람은 두려워한다. 셰퍼드는 그것을 비유로 설명한다. 집에 불이 나거나 강력한 적군이 침공해 도시 근처까지 쳐들어 왔다 하자. 그것이 어떤 불행인지를 모르는 아이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어른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이며 영원한 재난의 군대로서 커다란 악이다. 눈먼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으나 택함 받은 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고 확실히 알고 있으며 강력하고 계속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셰퍼드는 참된 회심을 원하는 자는 이 두려움을 다소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령은 이 두려움을 어떤 이에게는 더 크게, 어떤 이에게는 더 작게 일으키신다. “오, 주님이 이러한 두려움으로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신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 셰퍼드의 결론적 도전이다. 여기서 청교도들이 감정적 요소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드러난다. 셰퍼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체험이 없으면 참된 회심도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도대체 어느 정도로 두려움의 감정을 체험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대두될 것이다. 아마도 청교도적 답은 “최소한 분명히 감지할 수 있고 상당히 강력하며 한 사람을 사로잡을 정도여야 한다.”일 것이다.
2) 슬픔과 애통
죄에 대한 통회의 두 번째 요소는 죄에 대한 슬픔과 애통이다. 성령은 죄에 대한 기쁨을 제거해 준다. 통회 상태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죄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다가올 재앙을 보지 못하던 영혼이 두려움 때문에 안일함에서 벗어나듯 슬픔은 죄 안에서 누리던 즐거움을 제거한다.” 이 상태에서 죄인은 “밤낮으로”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비열함”, 그 모든 날의 “허영”과 무지의 죄악을 자백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미소 대신 먹구름 같은 진노만 보게 된다.
✞ 슬픔과 애통이 가지고 있는 4가지 성격
셰퍼드는 이 슬픔, 혹은 애통의 성격을 4가지로 분석한다. 그것은 첫째, 영적 기쁨에 선행하는 것이요, 둘째, 크고, 셋째, 지속적이며, 넷째, 기쁨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첫째, 그것은 영적 기쁨에 앞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한 후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먼저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 후 그들의 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다.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최초의 단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둘째, 그 애통은 큰 애통이다. “은혜의 샘”을 여시기 전 하나님은 죄인들이 자신의 애통의 분량을 채우게 하신다. “애통의 영”이 오시기 전, 죄인은 죄에서 그처럼 커다란 즐거움을 누렸으므로 그것을 끊으려면 죄에 대한 큰 슬픔이 있어야 한다. “죄가 그의 하나님이었고 ... 그리스도와 천국의 모든 즐거움보다 더 달콤했었으므로” 그것을 끊으려면 이제 죄가 “심히 쓰리게” 여겨져야 한다. 여기서도 죄와의 결별을 회심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하는 청교도적 강조점이 발견된다. 또 죄와 그로 인한 비참에 대한 애통이 아주 크지 않다면 “그리스도가 그리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여기서 셰퍼드는 눈물과 슬픔의 상관관계를 논한다. 그는 눈물이 참 애통의 필수 요소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장 큰 기쁨이 항상 웃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가장 큰 슬픔도 항상 눈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장 깊은 슬픔은 소리 없이 흐른다.” 그러나 눈물이 없으면 슬픔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이 “세상적 손실”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려 울면서 죄에 대해서는 한 방울의 눈물로 흘리지 않는다면 그가 정말 죄를 슬퍼하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세 번째, 죄에 대한 그 애통은 “지속적”이다. 비록 애통의 “행위”는 장애물들로 인해 때로 중단될지라도 애통의 “영과 샘”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다 다시 돌아와 “주님이 하늘에서 굽어 살피실 때까지” 영혼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원인, 즉 죄책과 죄의 권능”이 남아 있는 한 “결과”도 계속 남아 있다.
네 번째, 죄로 인한 슬픔은 기쁨의 길을 만드는 슬픔이다. “절망적이고 지옥 같은” 슬픔은 아니다. 그것은 보통 “약간의 자비에 대한 느낌과 섞여 있다.” 최소한 그것은 “어떤 보편적 소망”과 혼재한다.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소망의 대상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그를 구원하실 방도를 찾아내시리라는 그러한 소망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행 2:37, 욘 3:9).
그러므로 청교도들이 죄와 그 결과에 대한 깨달음으로 슬퍼하고 두려워 할 때 오직 하나님의 율법과 심판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러한 시기에도 이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라도 소유하고 있다. 즉 청교도들이 회심의 단계를 이처럼 순서대로 논한다 해서 죄 인식의 단계에서는 꼭 율법만 들어 알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고 상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권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구속을 한 번이라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명목상의 신자라 하더라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귓등으로라도 그리스도의 대속과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에 대해 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셰퍼드는 죄에 대한 슬픔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별한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깨뜨릴 때 다윗의 눈에서는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 내렸다.예레미야는 홀로 울 수 있는 오두막을 광야에 가졌으면 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방울의 눈물로 흘리지 않으며 흘릴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당신 자신의 죄를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지도 않는다.”
✞ 감정과 마음이 따라야 한다는 주장 청교도의 중심적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답게 셰퍼드는 죄를 단지 머리로만 아는 것은 지극히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적으로만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은 죄를 참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이 죄로 인해 움직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죄를 보고서도 그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고 그는 외친다. “마귀와 유기자들도 죄를 깨닫고 자기들이 사악하며 정죄되었음을 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죄에 대한 어떤 참된 양심의 가책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참으로 죄에 의해 깊이 움직일 만큼 직접적이고 감지될 정도의 영향”을 받는 것, 즉 통회에 의해서이다.
✞ 죄인들을 비참 가운데 묶어 놓는 사탄의 2가지 방법
셰퍼드는 사탄이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죄인들을 비참 가운데 묶어 둔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그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그들의 눈을 가림으로써 이다. 둘째는 그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함으로써 이다. 그런데 주 예수는 깨달음에 의해 첫 번째 오랏줄을 끊어 버리며, 통회에 의해 두 번째 오랏줄을 끊는다. 그리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그 비참을 느끼고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게 만든다.
청교도 전통에 충실하게 셰퍼드는 마음의 깨달음이 없는 머리만의 이해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견해를 편다. 그는 깨달음만 있고 통회가 없는 것은 저주라고 믿었다. 즉 “빛”만 있고 “열”이 없는 것은 차라리 둘 다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죄에 대한 지식만 있고 죄로 인한 슬픔과 괴로움의 감정이 없다면 그것은 더 큰 불행이라는 것이다.
죄를 깨닫게 하는 사역 아래 사는 수천의 사람들에게 화 있을진저. 종종 말씀에 부딪히고 주님이 성령으로 종종 만나 주시기 때문에 자기들의 죄가 많고 자기들 상태가 악하며, 만일 그런 식으로 계속 산다면 그 죄악이 자기들의 파멸이 될 것임을 들어 알면서도 하나님의 모든 빛은 열이 없고 단지 바위와 차가운 돌들 위에 비칠 뿐인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
✞ 통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통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셰퍼드의 답변은 특별한 것이 없다.
첫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죄를 살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의 과거의 죄들을 기억하시오. 그리고 당신의 현재의 길들을 생각하시오.” 각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생활의 모든 불경함, 젊은 시절의 모든 허영, 모든 은밀한 죄악들, 빛과 사랑에 대한 모든 죄들”을 검토하고 묵상하는 것이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과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둘째는 강퍅한 마음의 제거이다. 자신의 강퍅한 마음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느끼고 모든 예배와 집회 중 주님이 그것을 제거해 주시도록 그를 바라보는 것이 통회에 이르는 방법의 하나이다. 셰퍼드에 의하면 딱딱한 마음은 유기된 자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특별히 바로의 경우처럼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는 수단이 사용된 후에 혹은 바로 그때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이 그러했다.
셰퍼드는 통회의 질, 혹은 성격이 그 후에 따르는 결과를 좌우하기 때문에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만일 최초의 상처와 성령의 가격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믿음도, 거룩도 제대로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불완전하거나 엉터리라면 나머지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셰퍼드는 통회의 결여나 미비가 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커다란 과오는 그들의 상처와 슬픔이 너무 미미해서 치료받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 ”
✞ 비참에 대한 감각이 필요한가?
복음의 진리들에 대한 청교도들의 감각이나 느낌에 대한 강조는 여러 반대 의견들을 낳았다. 그리하여 셰퍼드는 여기서 그 문제를 다룬다. 믿음을 가질 수 있기 전, 혹은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전에 죄와 그것의 비참한 결과를 느끼는 것이 과연 필수적인가? 즉 청교도들이 강조하는 “감각”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다룬다. 어떤 반대자들은 “감각”이 있다면 이미 “생명”이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모든 감각과 느낌은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죄와 그로 인한 비참을 감지할 정도라면 이미 중생한 자라는 것이다(이런 주장을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로는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과 고인이 되신 김성수 목사님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그러므로 먼저 율법을 전할 필요가 없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 반대 순서를 따르는 것은 “빙빙 둘러 다니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대단히 흥미 있고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청교도 신학의 핵심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현대의 복음 전도 방식이 바로 이러한 반론에 공감하는 입장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 반론에 대해 셰퍼드는 몇 가지로 답변
이러한 반론에 대해 셰퍼드는 몇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진리에 대한 “느낌” 또는 “감각”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당시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바라고 하여 일단 학문적 권위에 호소한다.
둘째, 셰퍼드는 자기 견해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그것은 성도들의 일반적 “체험”과 일치한다. 즉 체험에 호소한다.
넷째, 그는 사역의 열매에 호소한다.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노선의 설교를 하나님은 크게 축복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적 근거이다. 그래서 셰퍼드는 그것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했다. 예수는 건강한 자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병마를 치유하러 오셨다. 그런데 병자란 누구인가?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병을 알고 느끼는 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 비참에 대한 감각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영적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감각이 있는 곳에는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을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셰퍼드는 반박한다.
✞ 복음만 설교하는 것의 위험성
그리하여 셰퍼드는 율법과 복음 둘 다를 전하는 것은 좋지만 복음만 전해서는 안 되며 차라리 율법을 먼저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이“주된 목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셰퍼드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수단은 율법을 설교하는 것이다. 혹은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의 비참을 전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은 좋은 “친구”이므로 양자를 잘 결합시켜야 한다. 그것을 분리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치료책을 설교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먼저 인간의 비참과 재난을 전해야” 한다. 혹은 양자를 혼합함으로써 청중의 마음이 양자 모두에 의해 깊이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역시 “먼저” 전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비참”이라는 점을 셰퍼드는 양보하지 않는다.
어떤 영적 비참을 느낄 수 있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듣고 믿어 생명을 가져야 한다는 반론은 셰퍼드가 보기에는 아주 불합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보기에 마치 사람이 “아프기 위해 먼저 치료되어야”하며 “상처입기 위해 고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혹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기 위해 ... 양자의 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셰퍼드가 볼 때,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주된 문제는 “깊은 겸비와 낮아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비참을 느끼기 전에 은혜의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비참을 보여 주기 전에 치유책을 먼저 보여 주는 시대는 화 있을진저! ...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 율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자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조만간에 그들이 복음의 어떤 주된 사항들을 반대하게 되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셰퍼드는 바울도 복음보다 율법을 먼저 설교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 세 장에서 먼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죄 아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런 연후에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전개했다.
여기서 셰퍼드는, 사회적 대형 비리들에 신자들이 자주 핵심적으로 연루되는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사실 하나를 지적한다. 그것은 회심전에 죄를 깨닫고 통회하는 과정이 피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자들의 스캔들이 많고 중도탈락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모든 위선적 신앙 고백의 근원은 회심 과정에서 통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밑줄 친 위의 글은 양낙흥 교수가 셰퍼드 회심론을 가지고 지금의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해석한 글이다. 양낙흥 교수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짜회심, 성경적인 회심이 없어서라고 말하기를 주저하며, 통회의 효과와 실용성에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 좋으니까 쓰자! 이거 쓰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좋아질 것이다.” 만일 셰퍼드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돌아보고 진단할 수 있다면 그때도 과연 양낙흥 교수 방식으로 접근하며 말했을까? - 역자 주)
“이 신앙고백이 넘치는 시대에 저 모든 ... 위선이 이 뿌리, 즉 처음에 이 [영혼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고 단지 약간의 죄의식만을 가진 채” 출발한 데 있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자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후에 은밀히, 혹은 추문을 일으키면서 그리스도에게서 이탈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판명되는가?”
✞ 권면
그리하여 셰퍼드는 죄인들에게 자신들의 비참을 느끼고 그로 인해 울 수 있기 위해 노력하라고 권면한다. “비참에 대한 감각”과 “통회의 영”을 위해 수고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리스도 없는 자의 비참을 느끼지 못하는 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통회 없이는 그리스도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상한 심령 없이는 상한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괴로움을 느끼고 애통하십시오. 죄인들이여 ... 지옥의 밑바닥까지 태우는 진노를 생각하고 떠십시오.” 지옥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심판의 경고는 청교도 신학의 특징들 중 하나였다.
3) 죄로 부터의 분리
✞ 죄를 버리는 것은 신앙의 행위 이전의 과정이다
죄에 대한 통회의 세 번째 요소로 셰퍼드가 지적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분리이다. 그것 없이는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죄로부터의 단절이란 죄의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 혹은 죄짓고자 하는 의지로부터의 단절이다. 즉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부터의 단절이 없는 모든 “금식, 겸비, 기도, 눈물”을 주님은 혐오하신다. 여기서 셰퍼드는 죄를 버리는 것을 신앙의 행위 시작 이전의 과정으로 본다. 죄인이 죄의식으로 인해 “무거운 죄 짐을 지고 겸비해져 죄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다. 즉 회심과 신앙의 전 단계로서 죄로부터의 이탈을 논한다. “새 감람나무에 접붙여지기 전에” 그는 “옛 뿌리로부터 잘려야 한다.” 즉 셰퍼드는 죄로부터의 분리를 믿기 전, 혹은 믿기 시작할 무렵의 “회개”와 연결시킨다. 죄를 끊지 않고 믿는 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멸망의 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를 믿는다 하면서 당신의 죄로부터 단절되지 않는다면 ... 당신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세상이 정죄를 당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온통 어두움만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셰퍼드는 죄의 처리를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은 후 그리스도가 이루는 일로 묘사한다. 즉 성화의 과정과 연결시키는 인상을 준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슬픔과 죄로부터의 분리가 어느 정도 필요할까요? 주님이 당신의 죄를 가져가 주시는 것을 기꺼워하는 정도, 아니 그것을 싫어하지 않을 정도면 됩니다.
✞ 과도한 통회를 추구하는 잘못에 대하여
그러므로 과도한 통회를 추구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와 합하기 전에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합할 자격이 없다거나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참회하는 교회에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그에게 “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상하게 하셨으므로 그에게 돌아가자. 그리하여 그가 우리를 치유하시며 이틀 뒤에 우리를 살리시게 하자”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 반론 : 죄를 버리는 것은 믿은 후 성화에 관계된 것이다.
죄와 분리되는 것이 통회의 3요소들 중 하나라는 셰퍼드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이 대두되었다. 아직 믿음도 없고 회심되지도 않은 자가 죄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즉 죄와의 결별은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를 믿고 의롭다함을 얻어 그 안에 된 후, 성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율법에 의해 자신의 비참을 느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비참이나 죄를 느끼는 것은 영혼을 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과 같은 성령의 “특별 사역”은 아니라고 이들은 주장했다.
✞ 반론에 대한 셰퍼드의 답변
우선 셰퍼드는 이 점에서 거룩하고 학식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중요한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성화의 두 가지 의미를 주장한다. 광의의 성화와 협의의 성화가 그것이다. 우선 협의의 성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성화이다. 즉 우리 속에 있는 사망의 몸에 반대하는 거룩한 삶의 습관이다. 이 의미에서 우리는 칭의 받기 전에 먼저 성화되지 않는다. 광의의 성화는, 양심의 어떤 각성들이나 생명의 성령의 행위들에 의해 소생된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성화가 칭의 보다 앞선다.
그리스도를 믿기도 전에 죄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혹자는 당시 이미 그것은 값없는 은혜의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셰퍼드는 자기가 주장하는 죄와의 분리는 단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몰아가게 하는 정도” 이상은 아니라고 답했다.
✞ 통회의 정도
그러면 어느 정도로 죄와 그로 인한 비참을 두려워하고 슬퍼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로 죄와 결별해야 그것이 참된 통회로 인정될 수 있나? 한마디로 통회를 어느 정도 해야 하나? 셰퍼드는 그 질문에 대해 통회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의 통회가 있으면 된다고 대답했다. 통회의 목적은 “겸비해져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가서 그리스도가 그의 죄를 처리하시게 하는 것”이다. 즉 통회의 바로 다음 목적은 겸비해짐이요, 마지막 목적은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다. 셰퍼드는 이 세상이 정죄 받는 이유가 죄책과 죄의 권능으로 인해 죄악 되다 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그것을 제거하시기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정결케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렘 13:17).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 그것을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 죄로부터 놓이는 방법
그러면 성령은 어떤 방법에 의해 이 죄로부터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시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도덕적” 방법과 “물리적” 방법 두 가지가 있다고 대답한다. 믿음에 의해 회심을 일으킬 때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단지 “설득하는 도덕적 행위자”일 뿐 아니라 “신적이고 직접적인 행위에 의해 영혼으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역사하는 초자연적 행위자”이기도 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혐오하게 만들 때 성령은 “두려움과 슬픔에 의해 마음을 움직이는 도덕적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결코 죄를 제거할 수 없다. 유다와 가인의 마음이 깊은 영향을 받고 괴로움을 당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었던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물리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자기 손을 댄다 ... 직접 은밀한 가격을 가함으로 그들의 강철처럼 곧은 목을 돌리고 죄의 쇠 같은 힘줄을 끊어 이 단절, 혹은 분리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모든 “악” 중 가장 작게 느껴지는 악이라고 셰퍼드는 개탄한다. 사람들은 가난, 수치, 현세의 슬픔 같은 것에 대해서는 많이 불평한다. 만일 사람들이 죄를 가난이나 불명예보다 더 큰 악으로 느낀다면 그들은 결코 “작은 이익, 이윤이나 명예” 때문에 그리스도와 선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죄는 어떤 의미에서 최대의 악인가? 이데 대해 셰퍼드는 죄의 삼중적 “악”을 제시한다.
✞ 셰퍼드가 말하는 죄의 삼중적인 “악”
첫째는 고통과 고뇌의 악이요, (유기된 자들에게도 느껴지는 악) 둘째는 하나님을 부당하게 해하는 악이요, (칭의 되고 성화된 자들에게만 느껴지는 악) 셋째는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는 악이다.
3. 겸비 <존재적인 무너짐/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역>
통회에 의해 죄인의 마음을 부스러뜨린 후, 즉 “상한 마음”을 만드신 후, 주 예수는 그를 겸비케 하는 일을 하신다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비록 넓은 의미에서는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죄인을 겸비해진 죄인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히 말하자면,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셰퍼드는 단지 상한 심령만으로는 부족하고 동시에 겸비해진 심령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통회하고 겸비한 자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성구를 그는 단지 죄로 인해 마음이 “상했을” 뿐 아니라 “낮아지기”도 한 자와 함께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해석한다. 드문 경우겠지만,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마음이 심히 큰 상처를 입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자긍심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거꾸러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의무”를 행하는 것에서 위로를 얻으면서 스스로 치유하려 한다. 즉 자기 죄들을 후회하고 버리는 식으로 개과천선하며,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다른 교인들이 하는 일을 한다. 그런 일을 통해 주님을 무마하고 스스로 구원에 대한 약간의 소망을 가진다. 이들은 죄와 씨름하면서 언젠가는 자기가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가진, 혹은 행하는 자그마한 것에 안주한다. 마치 아담이 자기 수치와 벌거벗은 것을 보았을 때 무화과 잎으로 그것을 가리려 했던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만일 자기 의를 세우는 일이 여의치 않다고 판명되면 차라리 멸망하는 쪽을 택한다. 자세를 낮추느니 차라리 절망에 빠지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죄 문제를 해결하느니 차라리 자기 의를 세우다가 실패하면 멸망하는 쪽을 택하는 오만한 경우이다. 교만은, 셰퍼드의 정의를 따르면, “인간이 자기 속에 있는 어떤 선에 의해 마음이 부풀어 자기 안에서 어떤 탁월성을 처음으로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죄”이다. 반면 “겸비함”이란, 사람이 “자기가 가지거나 행하고 있는 어떤 선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굴복하거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분의 기쁘신 뜻대로 처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셰퍼드는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수 없기 때문에 겸비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 다른 것들을 신뢰하거나 자기 자신을 자기의 구주로 삼는 자나, 자기 의무들을 행하는 것에 안주하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가질 수 없다.”
✞ 겸비케 하는 수단으로서의 율법 <‘겸비함’을 가져오는 ‘자기 개혁의 몸부림’>
그러면 어떤 수단에 의해 주님은 겸비함을 주시는가? 첫째는 성령에 의해서라고 셰퍼드는 대답한다. 성령은 직접 영혼에 역사하시지만 말씀 없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 성령은 교만과 같은 죄악 된 성향을 근절하신다.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뒤에는 겸손의 습관과 믿음의 덕에 의해 자신을 낮출 약간의 힘을 가지게 된다.
✞ 성령은 율법을 통해 4가지로 방법으로 죄인을 겸비케 하신다.
성령이 말씀을 통해 죄인을 겸비케 하신다 할 때 그 말씀은 주로 율법의 말씀이라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율법은 네 가지로 이 작업을 수행한다.
첫째는 영혼이 의무를 수행할 때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은밀한 부패를 발견하게 해 줌으로써 이다. 전에 영혼은 그 부패를 전혀 보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런 과정을 통해 영혼은 겸비에 이른다. 한때 그는 “만일 내가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죄에 대한 슬픔도 없이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면 나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또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 자백, 슬픔, 그리고 죄로 인한 고뇌가 나를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 주실 거야.” 그러나 율법은 이 모든 것들 속에 죄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드러낸다. 영혼이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은밀한 죄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나를 구원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그처럼 죄악된 것들은 나를 정죄하는 이유들밖에 되지 않을 거야 ...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둘째, 율법은 본래적 부패를 자극하여 그것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발휘되게 함으로써 죄인을 겸비에 이르게 한다고 셰퍼드는 주장한다.“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 ”(롬 7). 그리하여 죄인은 자신이 얼마나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셋째는, 죄인들이 더 이상 발버둥 칠 수 없을 때까지 애쓰는 중에 지치고 힘들고 피곤하게 함으로써 율법은 영혼을 겸비케 한다.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죄악 된 일이며,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자기의 마음과 성품까지 지극히 죄악 되다는 것을 보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은 아직 자신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현재로서는 그처럼 비열하나 언젠가는 자기 마음이 개선되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몸부림치고 추구하며 자기 힘닿는 데 까지 노력한다. 그러는 중에 영혼은 지치고 피곤해 진다.그리하여 이제 이렇게 부르짖는다. “이제 나는 내가 얼마나 비열하고 몹쓸 인간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이나 나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죄를 짓고 자신을 망치는 것뿐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 그리고 나라는 인간 자체가 온통 비열함뿐이다. 이제 나는 내가 참으로 가련하고 눈멀고 비참하며, 벌거벗었음을 알겠다.” 영혼이 최대의 낙담에 빠지게 된 것이다.
넷째, 설사 하나님이 자기를 결코 동정하시지도 않고 용서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시다는 것을 확신시켜 줌으로써 율법은 죄인을 겸비케 한다. 의무를 행하는 자신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식을 얻을 수 없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 속에서 단지 죄와 연약함, 죽음과 정죄만을 보게 될 때 죄인의 마음은 낙심에 빠진다. 그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자비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유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때 성령은 주께서 그를 전혀 고려하시지도 돌보시지도 않는 것이 얼마나 공평하고 정의로운 것인가를 나타내 보이신다. 그는 지금까지 범죄 했으며 아직도 그처럼 죄악 되지 않는가? 그리하여 죄인은 주 앞에 먼지 속에 엎드러지게 된다. 수치밖에 다른 것을 받을 아무런 자격도 없는 자로서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뺨을 주께 돌린다. 만일 주님이 그에게 자비를 보이신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주는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그에게 특별한 자비를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그와 다툴 아무 이유가 없다.
이정도가 되면 영혼은 정말 겸손해진 것이라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자신을 처리해 달라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렸기 때문이다. 이런 단계에 이른 영혼은 자기가 벌써 지옥에 던져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큰 자비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아직 살아있고 “가장 깊은 지옥 구덩이”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무한한 자비”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겸비의 핵심이라고 셰퍼드는 강조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했으니 ...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 ”(막 7:9). “여호와는 의로우시나 나는 악합니다.그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나에게 행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대하 12:5).
✞ 오랫동안 사랑의 계시를 미루는 하나님의 이유
주님이 거절하시면 스스로는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자처하면서 겸비해질 때 주님은 머잖아 그에게 평안을 말씀하시고 안식을 주신다고 세퍼드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죄인이 스스로 보기에 가장 악한 인간으로 인식될 때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체험하기 직전이다. 최소한의 자비도 받을 자격이 없고 오직 극단적 비참만을 당하기에 합당하다고 인정할 때가 바로 겸비의 상태요, 그것이 자비를 받기에 합당한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기 전에 죄인의 마음이 바로 이러한 상태, 즉 겸비의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이 회심론에 관련된 셰퍼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들 중 하나이다. 그것이 그처럼 오랫동안 사랑의 계시를 미루는 하나님의 이유이다.
✞ 겸비의 정도
그러면 어느 정도의 겸비가 필요한가 하는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통회를 낳을 정도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듯, 그리고 겸비를 낳을 정도의 통회가 필요하듯, 믿음을 낳을 정도의 겸비가 필요하다” 고 대답한다. 즉 영혼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에게 달려갈 수 있게 될 정도의 겸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4. 믿음 <성령의 은혜스러운 역사>
셰퍼드에 의하면 믿음은 “성령의 은혜스러운 역사”로서 겸비해진 죄인은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혹은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부르실” 때 온 영혼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을 받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에게로 간다”. 그리하여 셰퍼드는“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에게 간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신뢰한다”, “매달린다” 등의 표현이 다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이해한다. 그러한 이해의 근거는 “내게 나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7:37)에서 성경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는 단어와 “믿는다”는 단어를 교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믿음은 외적 부르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소명을 전제로 한다고 셰퍼드는 강조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어떤 사람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그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여기서 셰퍼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관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서 그는 천주교의 신앙에 대한 이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믿음을 “신적 증언 때문에 신적 진리에 초자연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든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그가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든지, 그가 세상의 구주라든지 하는 진리들에 동의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셰퍼드는 지적 동의와 참 신앙 사이에 아주 날카로운 선을 긋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즉 참신앙을 소유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혹은 지적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후자가 전자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후자가 전자의 “모든 속성”을 망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의 온전한 속성 중에 일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연합시키는” 것이다. 지적 동의는 믿음의 한 요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일 뿐이다. 그것이 믿음이라면 그러한 믿음은 심지어 “귀신들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참신앙은 단지 이해만이 아니라 의지를 포함한다. 셰퍼드는 이 의지가 주된 것이라 주장한다.
✞반론 : “그러면 왜 초대교회 시절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규정했는가?”
“그러면 왜 초대교회 시절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규정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신앙을 묘사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답한다. 당시에는 그리스도가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주요하고도 일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믿는 것은 믿음의 가장 중요한 행위로 보았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밝히 드러난 17세기 청교도 시대에는 예수가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논란거리가 아니므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참 믿음이 구성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셰퍼드의 관점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셰퍼드의 시대에 참 믿음은 당연히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믿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포함한다.
참 신앙은, 셰퍼드에 의하면, “마음으로 믿는”것이었다. 그것은 지적 동의를 배제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나아옴에“의지와 감정들”을 필연적으로 동반해야 했다. 그러므로 셰퍼드의 신앙관은 전인적인 것이었다.
✞ 믿음은 성령의 역사다.
어떤 이들은 하소연한다. “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어.” “난 그리스도에게 갈 수가 없어.” “나는 수단들을 통해 그를 찾지만 그가 나를 만나 주지 않아.” 이러한 불평에 대해 셰퍼드는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대답한다. 신앙의 “효과적 원인”은 성령이시다. 성령이 모든 택자들의 영혼을 꽉 붙들고서 “전능하시고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즉 우리는 “은혜에 의해 믿을 수 있게 된다.” 주께서 우리를 “불러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 VS “주제넘은 믿음” 의 구분
그러면 나의 믿음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 즉 주제넘은 믿음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셰퍼드는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에 열중하고 있다면 어떤 약속이든 사실상 당신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믿음으로 당신 자신의 것을 소유하는 것은 전혀 주제넘은 일이 아니다.”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원하는”자, 즉 주께서 “안식을 주시기까지” 계속 간구하겠다고 결심하는 자는 요한계시록 22:17을 보라고 셰퍼드는 권한다.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그리스도에 목마른 자는 또한 이사야 55:1-3을 보라고 권면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목마를 때 믿고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약속 아래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보화들을 믿고 소유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며, 주님이 먼저 그들로 “느낄”수 있게 하셔야만 믿을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은 “많은 성도들이 범하는 커다란 죄”라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반면 믿음은 지금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아들이고 양껏 마시는” 것이다. “약속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들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적용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약속들이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한지 어떻게 아는가?” 혹은 나로서는 그 약속들을 믿을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을 의식하고서 셰퍼드는 다시 대답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믿으라고 하는 주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가지고 있다.
지금 당신은 ...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 혹은 초청 및 간청에 순종해서 믿는가? 감히 그의 은혜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주제넘은 짓이 아니다. 순종이 주제넘은 행동이 아니듯이 말이다. 아니 그것은 가장 받으심 직한 순종이요, “믿음의 순종”이다(요 6:38).
초대교회의 삼천 명이 믿은 것이 바로 그러한 근거에서였다고 셰퍼드는 주장한다. 베드로가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그들에게 외치자 그들은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이때 “회개하라!”는 말은 그들에게 가장 달콤한 소리였다. 그리고 베드로의 그 권면이 주제넘은 말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그 권면을 받아들인 것도 주제넘은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믿음이란? 자신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역자 주) 셰퍼드는 그 믿음을 사랑하는 구애자의 말에 감복한 여인에 비유한다. 그분이 너무나 소중하고 “오, 나를 받아주오, 오, 나에게 오시오”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져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이 지극히 선하고 달콤하다는 감각”에서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이다.
✞ 주제넘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지 않기 위해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주제넘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지 않기 위해 믿지 않고 계속 버티고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많은 가련한 신자들”이 그렇게 한다고 셰퍼드는 지적한다. 그들은 “만일 내가 믿는다면 그것은 주제넘은 짓이 될 뿐일 거야.” 그러한 믿음은 “나 스스로 속에서 자아낸 거미줄 같은 믿음이야”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견 정직하고 겸손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심각한 문제를 낳는 태도라고 셰퍼드는 지적한다. 이“믿지 않음”은 “회개, 애통, 사랑, 및 모든 즐거운 순종의 역사를 중단”시켜 그들을 “더 나쁘게 만들며 그들 안에 있는 은혜의 영을 중지시킨다.”
셰퍼드는 어떤 믿음이 참된 것임을 보증하는 하나의 표지를 제시한다. 만일 믿음에 “회개”가 동반된다면 믿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 아니다.그러면 회개가 따르지 않는 믿음도 있을 수 있는가? “많다”고 셰퍼드는 대답한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알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뢰한다. 그러나 그들은 소위 “믿음”은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에는 죄에 대한 고백과 슬픔이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더한 사랑도 따르지 않는다.이러한 믿음은 거짓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사죄를 위해 그리스도를 의뢰하면 그가 용서하실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볼 일을 다 본 거야.”
셰퍼드는 이러한 믿음을 “보험 믿음”, 혹은 “가시나무 믿음”이라 부른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기는 하나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 그에 대한 멸시로 그분을 찌르며 할퀸다. 그것이야말로 주제넘은 믿음으로 언젠가 하나님의 투기의 불에 의해 타서 소멸될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즐겁게 여기나 그를 “따르는” 것은 부담스러워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되는 것은 달콤하게 여기나 그의 “뜻”과 연합하는 것은 괴롭게 여긴다. 이들은 “거룩함과 새로운 성품”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러나 열매가 맺힌다면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셰퍼드는 단정한다. “죄에 대한 슬픔, 사랑, 감사, 겸손”등의 복된 샘들을 낳는 믿음은 “성령이 가져다 준 구원 얻게 하는 믿음”이다.
✞ 믿음의 주체
믿음의 주체는 “겸비해진 죄인의 영혼”이다. 우리는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 “믿음에 의해 조명된 영혼은 멀리 있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생명의 주를 “갈망하고 선택하고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혼은 “멸망당할, 의지할 데 없는, 소망 없는 상태에 놓인” 영혼이다. 그처럼 낮아진 영혼이라야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며, 그리스도를 제공받을 때 기뻐한다. 그런 영혼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이며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 이 점이 청교도 신학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뉘앙스 차이다.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비참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대 복음주의는 “겸비해짐”이나 “죄의 깊은 깨달음”이 있든 없든 무조건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 겸비해진 영혼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가?
그러면 겸비해진 영혼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하는가? 이에 대해 셰퍼드는 그리스도는 “말씀”, 그리고 “은혜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말씀을 붙잡으면 그를 붙잡는 것이다.믿음의 생명과 핵심은 온 영혼이 자신을 벗어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동작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청교도적 강조점이 부각된다. 참된 믿음의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왔지만 거부당했다. 이유는 그들이 그에게 올 때 그들의 “몸만” 왔기 때문이었다. 많은 영혼들이 그에게 왔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유는 그들이 “온 마음으로” 오지 않고 “반” 마음으로 나아왔기 때문이었다고 셰퍼드는 강조한다. 믿음이란 단지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이 그에게 나아와 “온 영혼”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온 마음”을 드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온 영혼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것이란 “모든 것을 버리고” 혹은 “팔아 버리고” “밭”과 “보화”를 사는 것이다.
✞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지 않는 경우는 무엇인가?
그러면 “온 마음”으로 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평안할 때는 정욕을 행하다가 어려울 때는 그리스도에게 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저주 받을 위선”이라고 셰퍼드는 비난한다. 즉 그리스도와 세상 정욕 사이에 나누어진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양심이 괴로우면 그리스도에게 가고 정욕이 자극되면 세상으로 가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셰퍼드는 비유를 든다. 샘에서 물을 긷기 위해 파이프를 댈 때 그 파이프의 길이가 일 센티만 짧아도 물을 길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다. 믿음은 은혜를 받기 위한 파이프다. 그런데 그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오되 온 마음으로 오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에게 미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귀하다.” 그러나 “지극히” 귀하지는 않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매달린다. 그러나 그에게만 매달리지는 않는다.”
✞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라
마지막으로 셰퍼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것을 권고한다. “오라, 그러므로, 가련하고 지치고 잃어버린, 멸망할 죄인이여!”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 “최대의 죄”였다. 그러나 그러한 요청을 받는 죄인들은 다시 의심에 사로잡힌다. 과연 나 같은 죄인도 은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같이 허물 많은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실까? 그처럼 무한한 보화가 나의 몫이 될 수 있을까? 셰퍼드는 대답한다. “주님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와서 그것을 소유하라고 명하십니다 ... ” 주님의 “은혜는 무료입니다.” 그가 “여러분을 초청하시면서 들어오라고 간청하십니다.”
주님은 ... 우리에게 와서 그것[은혜]을 수락하라고 부르십니다. 자비를 자기 것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그것을 수락하라는 명령과 부르심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심들, 모든 두려움들, 그리고 모든 낙심들에 종지부를 찍게 합니다.
거저 주어진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 것이 된다고 셰퍼드는 역설한다. 물론 그것을 거부하면 우리 것이 되지 않는다. 결국 값없는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다. 셰퍼드는 여기서 아주 생생한 비유를 제시한다.
어떤 사람에게 빵이 절실히 필요할 때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무상으로 빵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가 그것을 받는다. 그때 만일 여러분이 그에게“왜 그것을 받느냐? 너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그걸 받기 위해 단 한 시간도 일한 적이 없는 자야”라고 말한다. 그가 대답하기를“그건 사실이오. 나는 무자격자요. 그러나 생명을 보존하라고 그것이 내게 제공되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습니다. 물론 그 빵이 나의 것이라고 그가 절대로 약속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확실히 내 것이 될 것’이라고 그가 말합니다.” 이것이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된 근거이다.
믿음도 그와 꼭 같다고 셰퍼드는 강조한다. 셰퍼드는 왕의 아들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 그 포인트를 다시 강조한다. 왕자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많은 자들이 거기에 나아온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만일 그들이 “와서 먹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비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오지 않으면 그것들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 “나는 그리스도에게 갈 힘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부름을 받지 못했다” 말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께 가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믿지만 그러나 “나로서는 그리스도에게 갈 힘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부름을 받지 못했다”고 하소연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서도 셰퍼드는 답변을 제공한다.
“당신이 그리스도께 갈 힘이 없는 것은 당신이 도덕법을 지킬 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그 법들이 당신과 무관한 것이라 당신은 생각하는가? 안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힘이 없을 때 당신들은 하나님께 그것들을 지킬 힘을 달라고 간구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그리스도에게 올 능력이 없다면 주를 바라보면서 그에게 당신을 이끌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주님이 갈망하는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참으로 그리고 간절히 그를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셰퍼드는 지적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묵상한다면 누구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 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를 진실로 원하는 자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그리고 자신을 간절히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묵상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회심되지 않은 자들로서 구원을 원하는 자들은 자신이 택자에 속하는지, 비택자에 속하는지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을 가지고 골몰하는 대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숙고하는 것이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 귀복적인 신앙에 대한 경계
그리스도를 찾되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찾는 것을 셰퍼드는 경계한다. 그의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외적 비참”에 놓일 때 “외적 자비”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찾았다고 그는 지적한다. 기근 때는 곡식을, 병들었을 때는 건강을, 전시에는 평화를, 그리고 어떤 “내적 괴로움”이 있으면“위로와 평안”을 위해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요4:27)고 권한다. 그런데 그 양식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이러한 셰퍼드의 지적은 한국 교회와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경고가 될 것이다.
✞ 셰퍼드의 회심론에 대한 퍼민의 9가지 반론
토머스 셰퍼드의 『건전한 신자』가 출판된 직후 당시의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인 가일즈 퍼민은 셰퍼드의 교리적 오류들을 지적하고 수정하기 위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회심의 은혜를 받기 전에 셰퍼드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준비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더할 수 없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했다.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라고 셰퍼드가 제시하는 그러한 순종의 행위는 이미 회심된 그리스도인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것이라는 말이었다. 퍼민은 셰퍼드의 신학에서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닌가? 와는 상관없이 즉각 순종해야 하는 계명이다. 죄인은 자기 죄를 깊이 깨달았든지 못 깨달았든지 제공된 예수 그리스도를 즉시 믿어야 한다.
2) 성경에는 소위 “준비” 과정, 즉 셰퍼드가 말하는 특별한 각성이나 통회 없이 즉각 예수를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사례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빌립의 전도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어떤 특별한 통회의 과정을 거쳤던가? 삭개오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슬픔, 그리고 영원한 멸망에 대한 커다란 공포가 있었는가? 그의 회심은 즉각적이지 않았는가? 빌립보의 간수가 구원을 얻기 전에 자기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 있었는가? 두아디라 성의 지주 루디아가 바울의 전도를 받고 믿기 전에 어떤 강한 감정적 체험이 있었는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예루살렘의 초대 교인들이, 셰퍼드가 주장하는 것처럼, 긴 시간을 두고 통회했던가?
3) 이것은 중생방법의 획일성을 고집하는 편협함이다. 퍼민은 중생의 방법은 다양하고 은밀한데 셰퍼드는 죄에 대한 깨달음, 영원히 멸망할 자신의 운명에 대한 슬픔, 심판에 대한 공포, 겸비해짐 등의 단계를 반드시 거친 후라야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4) 셰퍼드는 자신의 회심 체험 과정을 모든 사람의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중생 경험이 만인을 위한 규범이 될 수는 없다.
5) 중생의 과정은 다양하나 그 결과는 동일하다.
6) 셰퍼드나 후커 등이 말하는 소위 “준비” 과정에서 일어나는 체험은 사실상 이미 회심한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회심 전의 필수적 단계들이 사실은 회심된 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성화의 과정이다.
7) 준비 단계에서 그처럼 높은 수준에 이른다면 그는 이미 회심된 자이다.
8) 준비 과정의 역사들, 즉 깨달음, 통회, 그리고 겸비해짐은 사실상 중생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9) 회심 전의 여러 일들은 순서대로가 아니라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이상이 셰퍼드의 회심론에 대한 퍼민의 반론들의 요지다.
✞ 퍼민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이러한 논란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는 일은 방대한 성경주해적, 그리고 신학적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다음과 같은 재반론도 예상될 수 있다. 삭개오는 즉각적으로 예수를 영접했기 때문에 일견 통회나 죄에 대한 깨달음 없이 회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미 예수를 보기 전에 그의 속에 자신의 토색이나 부패한 삶에 대한 양심의 각성은 죄의식,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을 수 있다. 빌립보 간수의 경우도 성경 본문을 근거로 그가 깊은 죄의식을 그날 밤 이전에 경험했을 것이라고 유추할 근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성경이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그가 회심되기 전의 영적 상태를 진공으로 볼 필요는 없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이 된 3천명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짧은 순간이나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신들의 죄를 통렬히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를 느꼈을 수 있다. 꼭 여러 날, 혹은 여러 달, 혹은 여러 해 동안의 감정적 체험을 가져야만 믿을 준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믿기 전에 일어나야 할 체험으로서 죄에 대한 각성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의 길이와는 무관한 것이다. 자주 장사 루디아의 경우도 바울을 만나기 전에 이미 상당한 종교적 각성이 되었고 종교적인 삶을 살았다고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회심자들이 이처럼 “분비” 단계의 체험을 통과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 한 경우라도 셰퍼드가 묘사하는 회심의 단계를 밟지 않고 회심된 사례가 있다면 셰퍼드의 이론은 무너질 것이다.
✞ 결론 ✞
지금까지 우리는 셰퍼드로 대변되는 청교도들의 회심론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현대에 유행하는 회심론과 다른가를 발견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청교도 회심론이 믿음 이전에 거쳐야 하는 과정, 즉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슬픔, 죄로 인해 저주받을 운명에 놓인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절박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청교도들의 회심론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첫째, “가장 작은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진노하시는데 그의 공의대로 하면 모든 인간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기 전 각자가 그 사실을 절감해야 한다고 청교도들은 주장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죄에 대한 슬픔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는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무서운 심판의 실재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청교도 신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사실로, 그리고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신앙에 입각하여 그들은 성경의 어느 한 말씀도 예사로 보지 않았다. 성경이 영원한 불 못에 대해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들은 지옥의 실제를 확실히 믿고 그것을 심각하게 설교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에서는 지옥이나 하나님의 진노나 영원한 형벌에 대한 경고의 설교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을 그저 하는 소리라 보기 때문인지 아니면 현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너무 자극적인 메시지로 보이기 때문인지 현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드물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죄, 하나님의 진노, 영원한 심판 등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회개의 복음에 대해 진지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반면 성경의 고등비평이 성경의 권위와 말씀의 신빙성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 이후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 중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것은 무시하고 불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중 일부가 하나님의 진노, 심판, 인간의 죄 등 청교도들이 가장 주목하던 교리들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청교도들은 죄에 대한 이해를 관념적인 것과 영적(혹은 실재적/체험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즉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머리로 동의하는 것, 혹은 그 사실에 대한 개인적 주체적 깨달음은 없이 성경이나 교회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관념적 이해다. 그러나 자신의 죄인 됨과 그 결과로서의 비참함을 마음으로 깨달아 “마음이 움직이는”것은 영적(혹은 실재적) 이해였다. 셰퍼드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후자야말로 진정한 죄의 인식이며 후자를 경험해야 참된 회심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는 후자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태반의 그리스도인들의 죄의식은 전자에 머무르고 있다. 청교도들은 이처럼 양심의 각성과 통회의 수준과 질이 그 후의 신앙생활을 좌우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과정을 대단히 중시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에는 상대적으로 그 측면에 대한 강조가 대단히 약하다.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은 필연적으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낳고 죄를 버리고 죄로부터 떠나는 결과로 연결된다고 청교도들은 생각했다. 말하자면 죄에 대한 올바르고 깊이 있는 깨달음은 회심자의 삶에서 본질적인 변화와 갱신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현대 한국 기독교가 신자들의 삶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청교도들의 이 강조점, 즉 죄와 심판에 대한 가르침의 결핍이나 부족 때문일 것이다.
셋째, 사죄의 확신에 대해 청교도들은 현대 교회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체험적 차원을 강조한 청교도들은 죄를 깨닫고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힌 죄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 위로”에 의해 비로소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현대의 일반적 견해는 개인적인 사죄의 체험보다 객관적 계시의 충족성을 강조한다. 구원에 대한 성경의 초청과 약속을 개인들에게 적용하면 되지 개인적 체험은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청교도 구원론의 핵심은 한마디로 “체험”이다. 복음의 진리들을 단지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청교도 신학의 진수다. 그러한 영적 깨달음이 없는 단순한 교리적 지식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었다.그들은 현대 기독교에서 유행하는 가르침처럼 복음을 단지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그것을 수락하기로 하는 결단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 생각지 않았다.
의지의 결단으로 복음을 수락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개념은 사실상 조나단 에드워즈가 평생을 두고 반박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의지와 능력이 개인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즉 복음의 구원은 모든 이들에게 제시되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 일단 복음이 제시된 이상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 체계 속에서는 단지 의지적 결단을 통한 수락이 개인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전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구원 속에서는 진리의 개인적 “체험”이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적 청교도들의 신학 체계 속에서는 그러한 논리가 성립될 수 없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다. 회개하는 것도 믿는 것도 타락한 인간이 부패한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믿을 수 있게 해 주셔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옥을 피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할 필요가 없는가? 한 가지가 있다고 청교도들은 생각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구원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베푸실지 모르는(혹은 대체로 그 경우에 베푸시리라 믿는)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체험될 때까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소위 “준비론”이다.
✞ 청교도 회심론 = 체험적 회심론
여기서 “체험”에 대한 청교도적 강조가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체험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을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단지 성경에 일반적 약속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믿을 근거가 못 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초청이나 약속에 영적 조명이 비쳐야만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생길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회심을 위한 “내적 소명”의 필수성을 강조했다. 구원의 은혜는 모든 이에게가 아니라 택자들에게만 주어졌고 그 은혜가 자기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믿는 것은 자신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 복음 전도에서 사라진 부분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준비론을 비롯한 회심론은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의 산물이다.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결과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진지한 칼빈주의자들은 이 주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장로교, 감리교를 막론하고 현대적 전도가 거의 모두 아르미니우스적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아르미니우스적 교리의 바탕 위에서 회심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태반인 실정 속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는 어렵다.
체험적 회심에 대한 청교도들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체험적 신앙은 사변적 지식에만 근거한 신앙보다 복음에 대한 훨씬 더 큰 확신과 복음 전도에 훨씬 더 능력을 준다는 것이다. 체험을 통해 말씀에 대한 확신을 얻은 청교도들은 대각성과 부흥 운동들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반면 체험적 신앙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는 대륙의 기독교에서는 이렇다 할 강력한 부흥이나 각성 운동이 없었다. 그리고 교회사를 통해, 세계선교는 거의 예외 없이 부흥 운동이나 대각성의 결과였다. 아마도 영미 두 나라가 근세의 세계 선교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체험적 신앙이 없는 지성적 기독교만으로는 부흥도 선교도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머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고 믿는 것은 기독교의 흥왕 또는 사활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청교도의 체험적 신앙에 대한 강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단지 주관적 체험에만 의지하고 객관적 계시를 무시하는 신앙은 위험하다. 그러나 다행히 청교도들은 역사상 어떤 집단보다 성경 계시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분명히 확신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강조한 “체험”은 계시와 무관한 신비적 혹은 단순히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라 객관적 말씀에 근거한, 그리고 그 말씀을 확인한다는 의미의 체험이었다. 그러므로 체험에 대한 청교도들의 강조를 결코 불건전한 주관주의로 쉽게 매도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불신과 배교의 시대에 청교도들의 체험적 신앙에 대한 강조는 재조명을 받아야 마땅하다. 아마 거의 틀림없이,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과 은혜의 체험을 통해 복음을 확신하게 되는 사람들이 적으면 기독교는 점점 약화될 것이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 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