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인물연구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청교도 가운데 윌리엄 퍼킨스 만큼 강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없다.
16세기 그의 저서는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출판하였으며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졌다. 또한 그의 영향을 받았던 청교도들은 존 프레스톤(John Preston),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 존 카튼(John Cotton), 윌리엄 가우지(William Gouge),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등이 있다.
1558년 워익샤이어(Warwickshire)에서 태어나 1557년 케임브리지(Cambridge)의 그리스도 대학(Christ's College)에 입학했다. 그는 로렌스 채더턴(Laurence Chaderton)의 제자였다.1584년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그리스도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 뽑혔고, 이 때부터 성 앤드류에서 설교가로 활동했다. 그는 연구교수로서 그리고 설교가의 위치를 지키면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고, 그의 영향은 죽은 후에도 40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는 칼빈주의를 조직적으로, 그러면서도 간단하고 명료하게 발전시켰다. 그는 평이하고 대중 문체를 사용하였다. 특별히 그가 당시 반대 입장에 서있던 알미니안주의와 논쟁하면서 쓴 신학서술들을 보면, 그의 저술들은 분명하면서도 대중적인 문체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설교는 명료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는 강단에서 어려운 학교 용어로 된 논쟁의 껍데기를 벗긴 후 알기 쉽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 명백한 스타일로 글을 썼다. 그가 쓴 글들이나 설교는 독자나 청중들이 그들의 일상생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냉담하고 무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역동적이며 상관적인 관계에서 신학과 영성을 지키려 했다.
그는 교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론 신학을 배제하고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 신학을 주장함으로서 강단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신학을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단순히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생명이 없는 신학을 거부했다. 그는 설교와 글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직접 당면한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든든한 기초를 제공해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저술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논문과 갈라디아서 강해, 마태복음5-7장 강해, 히브리서11장 강해와 '양심에 관하여(On Conscience)'' 양심의 문제에 관한 설교집(A Whole Treatise of Case of Conscience)'이 있다. 그의 '설교의 기술(The Art of Prophesying)'은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일으키는 설교학의 도구가 되었으며 '황금사슬 (A Golden Chain)'은 청교도 신학의 설교의 기본적인 지침이다. 그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예정론에 대한 논쟁이었다. 퍼킨스는 에정론과 예정론이 그리스도의 삶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런 저작들은 '윌리엄 퍼킨스 전집' 이라는 3권의 책으로 편집되었다.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
리차드 십스는 영국 써벅 지방 출신이며 그래머 스쿨을 다녔으며,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로 가게 되고, 그 곳에 있는 자유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이웃의 도움으로 케임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존 칼리지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연구원이 되었다. 1609년교목으로 선출되고, 1610년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1610-1615년까지 트리니티 교구의 강사직을 유지했으나 1616년에 연구직과 강사직을 잃게 된다. 1616년에서 1635년까지 그레이 학숙에서 설교했으며 1635년 7월5일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1595년에 세인트 존 칼리지에 진학할 때, 그의 꿈은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회심이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도록 만들었다. 그는 1602년이나 1603년경 케임브리지 성 앤드류스 대학의 설교자였던 윌리엄 퍼킨스 의 후계자인 폴베인즈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 베인즈와 십스는 함께 자신들의 설교사역을 통해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베인즈가 앤드류스에서 설교할 당시, 십스는 트리니티에서 설교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로서 복음과 청교도 영성의 전파를 위해 일한 것이다. 십스를 통하여 회심한 사람은 많았다.
십스의 설교는 세련되고 우아했으며 포괄적이어서 높은자들과 낮은 자들 모두에게 매력을 그는 것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청교도의 전통으로 볼 때 완전한 강해였으며 그의 문체는 명쾌하고 산뜻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의 복음을 풍성하게 드러내었다.
십스의 설교방식은 부드럽고 은혜로운 특성을 가졌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라는 책에서 그는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으로 요구하는 설교자들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지극히 온화하신 구세주의 사신들은 지나치게 남 위에 오르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권능의 구원자가 계신다. 그는 보기 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 좋은 아버지 처럼, 그는 영육 간에 연약한 우리들을 부드럽게 맞아주신다. 그리고 한 아버지로서 병든 자신의 아이를 긍휼히 여기신다." 그의 설교방식은 대개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통한 유익들이 복음의 선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때, 하나님은 그의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을 주신다.
리차드 십스의 저서는
"상한갈대와 꺼져가는 심지(The Bruised Reed and The Smoking Flax, 1630)"
"영혼의 갈등(The Soul's Conflict, 1635)"
"열린 샘물 찾기(Discovering the Fountain Opened, 1638)"
"하나님에 대한 갈망(a Breathing after God, 1639)"
"돌아오는 배역자 (The Returning Back- slinder, 1639)"
등이 있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존 오웬은 1616년에 스태드햄의 옥스퍼드주 촌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 곳에서 근면하고 타협하지 않은 청교도 교구 목사였다. 그에게는 웨일즈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저술들의 여러 특성들 중 한가지를 표명해줄지 모른다. 즉 그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위대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가장 깊은 겸손의 필요성을 대규모적으로 묘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이라는 문제들과 대처하는 개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들을 묘사했다.
열두살에 옥스퍼드 대학의 퀸즈 대학에 입학하여 , 1632년에 문학사를, 1635년에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존 오웬의 최초의 교회 임지는 에섹스의 포드햄이었다. 여기서 그는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딸 하나만 남고 모두 어려서 죽었다. 그는 후에 근처의 코케스 홀 교구로 이사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의회 앞에서 설교 해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올리버 크롬웰에게 소개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크롬웰의 궁중 목사가 되었다. 크롬웰의 영향력으로 오웬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1651년에는 그리스도 교회의 수석목사로, 1653년에는 옥스퍼드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657년, 전제정치를 실현하려는 크롬웰의 욕망에 반대하여, 오웬은 크롬웰과 결별하고는 옥스퍼드를 떠나 사보이 회합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오웬은 옥스퍼드 시절 여러 권의 설교집과 강의서, 논쟁 팜플렛, 주석, 교리 연구서를 남겼는데, 그의 저작이 지니기 가치와 중요성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1660년 왕정 복구 이후 그의 남은 인생을 반 추방 형식으로 집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목사요 설교가로서 오웬의 문서활동이 크게 증가된 시기요 그의 저술은 당대와 우리 세대의 모든 청교도 비국교도주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80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647년에 그의 모든 저작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죽음의 죽음"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난공불락의 책으로, 속죄에 대한 고전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진술로 인정을 받았다. 1677-8년에 그는 기념비적인 "성령론"의 전반 두 부분을 간행하였다. 1681년에 그는 3편의 고전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스도론","신령한 마음의 은혜와 직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화"가 그것이다.
1656년에 그는 "신자에게 있어서 죄의 억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로부터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인간 영혼의 분석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였다. 오웬은 로마서 8장13절에 근거하여 이 논문을 썼는데, 철처한 탐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감추인 동기와 정욕과 본능과의 싸움을 선언한다. 1658년에 그 뒤이어서 "유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그들이 권력을 잡은 때에, 교묘한 도덕적 부패에 대하여, 잠복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들을 경계한다.
1688년에 그는 많은 책을 내었는데, 특히 "내재하는 죄"라는 책이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시편 130편을 강해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예정", "성경의 무오성",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독특성" 등과 같은 교리들을 전문으로 하는 , 확고하고도 타협을 모르는 칼빈주의자였다.
존 카튼(John Cotton, 1584-1652)
존 카튼은 1598년에 캠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에 갔다. 그리고 엠마누엘 대학의 연구원겸 강사로 부임하였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논리학, 수사학, 윤리학, 신학, 라틴, 히브리어 등을 공부했다.
카튼은 케임브리지에서 퍼킨스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시작해서 커튼은 리차드 십스를 통해 진정한 회심을 하게 되었다. 십스의 설교는 힘이 있었고,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충만해 있었다. 카튼의 성숙에는 다른 청교도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로렌스 체더톤과 함께 공부했다. 존 프레스톤은 카튼의 전도를 받고 회심했다. 그는 굳윈의 친구인 존 다드와 상담을 하기도 헤했다.
특히 카튼에게는 십스의 영향이 컸다. "십스 박사에 대한 카튼의 존경심은 유별난 정도였으며 변함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집안에 잘 보이는 곳에다 그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심지어 그의 설교형태도 십스의 설교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카튼은 1612년 링컨셔주 보스턴시에 있는 성 보톨프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카튼은 초창기에는 분리주의자들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카튼은 영국 교회를 떠나는 것은 분열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튼에게 영국교회를 따르는 문제에 대하여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공동기도서를 강제로 집례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그와같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사항들이 강요되어서는 안되며 카튼은 그러한 집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615년 카튼은 폭력적인 저항이나 전적인 굴종의 극단을 피하면서 그는 그의 회중들을 두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한 집단은 카튼이 "계약자"라고 여기는 내적인 집단으로서 영국국교회의 의식을 따르기 거부하는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외적인 집단으로 구별했다.
카튼의 개혁운동은 계속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보스턴에 와서 카튼의 개혁사상을 연구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의 사상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1625년 챨스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카튼의 개혁운동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챨스는 성공회 정책을 펴면서 청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특히 그는 청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특히 그는 청교도를 아주 싫어하든 윌리엄 라우드를 캔더배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성공회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고등종교법원에 소환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청교도 지도자였던 카튼이 고등종교법원의 소환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632년 라우드의 소환을 받자, 카튼은 뉴잉글랜드로 피신하였다.
그는 1633년에 영국 공안당국의 삼엄한 경계를 둟고 신대륙으로 향하는 그리핀호에 승선하였다. 그리핀호에는 카튼과 토마스 후커, 사무엘 스톤등 3명의 목사와 200명의 이민자가 타고 있었다. 카튼 일행은 8주간의 항해 후 9월4일 보스톤에 도착하였다. 그후 보스톤 교회의 목사로 1652년 12월23일 독감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신실한 목회자로 살았다. 카튼은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노하신 분보다는 자비로우신 분으로 묘사한다.
카튼의 저서로는 "아가서 요해(A Brief Exposition of the Whole Book of Canticle)"
"은혜의 언약에 대한 논고(A Treatise of the Covenant of Grace)"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Christ the Fountain of Life)"가 있다.
토마스 굳윈(Tomas Goodwin, 1600-1680)
1600년 노르폴크에서 태어난 토마스 굳윈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강렬한 종교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여섯살의 나이에 ...그는 그의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의 죄에 대해 슬피 울었다. 그 집의 하인은 굳윗이 일곱 살때 지옥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확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의 전 생애 사역을 특정지워준 영적인 성숙은 케임브리지에 있는 그리스도 대학에 있을 대 시작되었다. 그는 1613년 열 세 살의 나이에 대학에 등록하여 그 후로 수많은 명망이 있는 청교도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도 대학에서는 폴 베인즈가 퍼킨스의 뒤를 이어 연구교수로 활동하였으며 친근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영혼을 회심시키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굳윈의 영적인 성장은 정통 청교도주의자들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열네살 때 굳윈은 '기독교강요'를 읽고 "오, 이 책의 일부분을 읽는 것만으로 도 나에게 얼마나 감동이 되는가"라고 감격했으며, 또한 그리스도대학의 경건한 사람들을 보고는 "내가 저들과 함께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이라고 흥분하기도 하였다.
1616년에 굳윈은 문학학사학위를 받는다. 그러나 이전에 그는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의지력을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는 1620년 프레스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그는 한 때 인간 이성을 신뢰하였으나 거기서 헤어 나와 그 뒤로는 자유의지 관념과 대항하여 싸웠다. 1620년에 그는 문학석사학위를 받고 캐더린 홀에 연구원 겸 강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8년간을 캐더린 홀의 연구원으로 머물면서 굳윈은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었다. 1628년 프레스톤이 죽자 굳윈은 프레스톤의 뒤를 이어 트리니티 교회의 강사로 발탁이 되었고 1632년에는 그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634년 교권을 쥔 당국자들로부터의 강한 압력에 견디다 못해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회중교회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강화시켰다. 런던에서 회중교회를 설립하고 10년의 목회 기간 동안 굳윈 목사는 설교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1650년에는 의회가 그를 옥스퍼드의 막달렌 대학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굳윈 목사의 학문의 깊이와 넓이는 목회자 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왕정복구시대후 그는 런던으로 돌아가서 20년 동안 목회하며 여생을 보냈다.
굳윈은 그의 온화한 성품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강론 (A Discourse of Christ Mediator)"
"땅위의 죄인들을 향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 인간의 성품을 입고 영광 중에 온갖 질병과 죄와 비참 속에 있는 그의 지체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섭리와 온화한 사랑에 대한 논고"
"땅위의 죄인들을 향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 The Heart of Christ in Heaven Towards Sinners on Earth)"의 목적은 치열한 투쟁 가운데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 책에서 굳윈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도 땅위에 있는 우리들을 염려하고 계시며 그 분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땅위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감정을 표출하시므로 오히려 그 감정을 더 풍부하게 표현하고 계신다.
리차드 박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
그의 당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리차드 박스터는 정식적인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 영국 로우턴에서 태어난 그는 존 오웬과 리챠드 윅스테드 아래에서 공부하였다. 초기에 그는 리차드 십스의 "상한갈대"와 윌리엄 퍼킨스의 "회개"에 큰 영향을 받았다. 1634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 박스터는 4년 동안에 걸친 독학을 통해 23살의 나이에 영국 국교의 목사로 임명받았다.
1641년에 박스터는 키더민스터의 교구 목사가 되었으며 14년 동안 신실한 목사로 재직하였다. 왕정 복구가 이루어 질 당시 그는 키더민스터를 떠나 영국으로 갔으며 터스탄 , 피너스 홀, 그리고 페텔레인에서 설교하였다. 그의 성직 생활은 1662년에 영국 국교회의 통일령이 있은 후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에, 그는 마아가렛 차알톤과 결혼하였으며, 투옥이 있은 직후 토터릿지에 도망할 때까지 아크론에서 성직 생활을 계속하였다. 1685년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박스터는 이단으로 몰려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왕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는 말년을 수도원의 양로원에서 조용히 보내면서 , 그 곳에서 가끔 설교하면서 그의 저작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목사였으며, 설교가요 저술가였다. 그가 행하고 말하고 믿는 것들은 모두에 있어서 아주 독자적이었고, 그의 신학적인 저술들은 그의 동년배들에게 격분과 아울러 칭찬을 자아냈다. 그의 설교 스타일은 언제나 복음전도에 많은 강조 점을 두었다. 회심을 위한 그의 책들 중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경고 (Call to the Unconverted)은 아주 유명한 책으로 셀 수 없이 많이 간행되었다.
박스터는 168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실천적 사역은 1707년에 4절판으로 출판되었는데 1830년에는 23권의 책으로 재출판 되었다.
그의 중요한 저서로는 "성도의 영원한 안식(The Saints Everlasting Rest, 1650)"은 당대 유럽의 내륙 지방과 청교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실천하는 묵상생활들과 크게 일치하는 것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 이는 신앙인을 위한 천국과 소망과 거룩된 삶이 말씀과 삶을 일원화할 수 있을 때에 비로서 천국적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혁된 목사(Reformed Pastor, 1650)"에서 목회적 임무에 대한 확실성의 일치를 가지게 했는데 목회 자체는 영적인 리더쉽임을 알게 해 주었다. 이것은 목회적 자질과 영성이 합성되어진 목회자의 필연적인 양질로 먼저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자신의 인격 형성을 갗추는데 최우선 순위로 되어짐에 따라 하나님의 영혼들을 위하여 사역할 수 있는 분명한 비젼, 분명한 목회 철학의 확립, 목회를 위한 분명한 목표, 그리고 성도들에게 신앙의 목표점을 분명히 제시하고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목회 역할의 확실성을 알고 수행해야 할 것을 알게 했다.
"기독교 신앙의 대의들 1667"
"기독교 예배 규칙서, 1673", "신약 부연,1685", "죽음의 사색, 1687"등이 있다.
시대순 청교도
청교도 신학 문헌 연구를 위해 그들의 운동 연대가 되는 15550-1700)년 사이에서 진리를 위하여 용감했던 청교도 신앙 개혁 운동가들의 편의상 연대순으로 나누어 네 부분으로 분류하였다.
첫째, 초기 청교도들(1526-1568): 청교도 운동은 1526년 윌리엄 딘테일 (William Tyndale: 1494-1536)의 신약 성경 번역에 의한 핸리 8세 왕의 도전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가인과 아벨의 전재응로 발발되었다. 청교도주의는 종교개혁의 전승으로 , 이는 1517년에 폭발되었던 종교개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
결국 틴데일은 1536년에 핸리8세에 의해 최초 순교자가 되고 그 다음 토마스 크랜머(Thamas Cranmer:1489-1555), 휴 라티머(Hugh Lartimer:1485-1555),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1500-1555), 존 후퍼(John Hooper:1495-1555)는 1555년에 피의 여왕 메리에게 순교를 당하며, 존 낙스(John Knox:1514-1572)는 종교개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배 젓는 노예로 끌려간 사람으로 모두가 종교개혁자들과 연루된 인물들이다.
둘째, 중기 청교도들(1569-1636): 그들의 차세대 인물들인 토마스 카튜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1569년, 기독교 간소화와 장로교 정치체제 주장), 리차드 그랜햄(Richard Greenham; 1535-1594), 다니엘 다이크( Daniel Dyke; ?-1614), 로버트 볼튼(Robert Bolton; 1572-1631), 윌리엄 퍼킨스( William Perkins; 1558-1602, 복음주의 선구자), 조지 다우내임(George Downame: 1560-1634), 핸리 제콥(Henry Jacob; 1563-1624),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 복음주의 신학자)
리챠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 설교의 선구자), 윌리엄 구우쥐(William Gouge; 1578-1653), 존 볼(John ball; 1585-1640), 존 프레스톤(John Preston; 1587-1628), 예레미야 버로흐(Jermiah Borroughs; 1599-1646): 미국이주 죤 카튼(John Cotton; 1584-1652)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셋째, 절정기 청교도들(1640-1691):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와 죤 오웬(John Owen; 1616-1683)이다. 그 밖에 같은 기간 때에 공헌한 수 많은 저술가들을 연대별 순차로 소개하고자 한다.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 1599-1676), 마튜 로렌스(Matthew Lawrence; 1600-1679), 윌리엄 브릿쥐(William Bridge; 1600-1670),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1600-1679), 존게리(John Geree; 1601-1649), 토마스 쉐파드(Thomas shepard; 1604-1649), 존 밀튼(Joh Milton; 1608-1680), 리챠드 얼레인(Richard Alleine; 1611-1681), 길스 훰인(Giles Firmin; 1614-1697), 윌리엄 거널(William gurnall; 1616-1679), 윌리암 거드리(William Gurdri; 1620-1665), 토마스 맨튼(Thomas Menton; 1620-1677), 리챠드 길핀(Richard Gilpin; 1625-1700), 에드워드 피셔(Edward Fisher; 1627-1656),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 존 플라벨(John Flavel; 1630-1691), 로버트 플레밍(Robert Fleming; 1630-1694), 존하우(John Howe; 1630-1706), 죠셉 얼라인(Josep Allein; 1634-1668),토마스 왓슨(Thomas Wastson; 1637-1717); 미국이주; 인그리스 매더(I. Mather; 1639-1723, 하바드 대학총장),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ard; 1643-1729 요나단 에드워드 외할아버지), 이들은 모두 1688년 11월 종교 자유가 허락할 때까지 끝까지 싸워 가인을 물리쳐 승리했던 아벨의 후예인 비준봉 청교도주의자들이다.
넷째, 후기 청교도(1691-1750):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죤 볼(John Ball; 1665-1745),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 1676-1732), 죤 라줘(John Roger; 1679-1729): 미국출생: 윌리엄 테넨트(William Tanent; 1673-1746),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 1703-1758), 길버트 테넨트(Gillbert Tanent; 1703-1764)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