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
노병기 박사
페리 밀러는 ‘청교도주의는 곧 에드워즈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밀러의 말은 옳다. 청교도주의의 정신을 가장 심오하게 구체화시킨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청교도 신학은 거듭남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지향성으로 인해 ‘거듭남의 신학’이라고 칭해져 왔다.1) 특히 에드워즈는 철저한 중생 체험의 필요성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입장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에드워즈의 중생론은 많은 점에서 존 오웬의 중생론을 닮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성령(새로운 원리)의 주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오웬의 중생론과 같다. 에드워즈는 죄에 대한 각성의 상태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과 은혜의 주입(즉, 새로운 원리의 주입)에 ...
노병기 박사
페리 밀러는 ‘청교도주의는 곧 에드워즈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밀러의 말은 옳다. 청교도주의의 정신을 가장 심오하게 구체화시킨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청교도 신학은 거듭남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지향성으로 인해 ‘거듭남의 신학’이라고 칭해져 왔다.1) 특히 에드워즈는 철저한 중생 체험의 필요성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입장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에드워즈의 중생론은 많은 점에서 존 오웬의 중생론을 닮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성령(새로운 원리)의 주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오웬의 중생론과 같다. 에드워즈는 죄에 대한 각성의 상태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과 은혜의 주입(즉, 새로운 원리의 주입)에 ...
의하여 지각과 의지와 성향, 행동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오웬과 똑같다.
1. 거듭남의 정의 :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
에드워즈에 있어서 거듭남이란 성령의 부으심이요, 놀라운 변화를 초래하는 신적인 역사다. 에드워즈의 정의에 의하면, “거듭남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하여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great) 변화”를 의미하며, “사악한 자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2)
사람이 거듭날 때 먼저 성령이 주입되는데, 이때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며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3) 이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을 주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4) 이러한 신적인 믿음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칭의를 얻게 된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주입으로 일어나는 위대한 마음의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하였으며, 그것은 회개, 회심과 같은 말이라고 했다.
“나는 회개와 회심을 같은 말로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행 3:19)이 그것들을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백히 많은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metanonia(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회심(conversion)이란 단어도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변화 혹은 전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거듭남이란 용어는 특별히 마음의 수동적인 측면에서 본 변화입니다).”5)
에드워즈는 거듭남과 회심과 부르심과 성화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부르심과 회심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구절에서 부르심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부르심은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역사입니다.”6) 또 그는 초기 성령이 주입되면서 ‘거듭남’과 ‘성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성령 혹은 하나님의 사랑은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면서 생명의 원리로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고 성화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그들에게 부으십니다.”7)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화를 거듭남 이후에 오는 일평생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하기도 하였다.8)
2.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주어지는 거듭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생각이 에드워즈 신학의 전반에 흐르는 중심축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의지하는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God Glorified in Man’s Dependance, 1731)이라는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구속의 단계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하신 것입니다.”9)
에드워즈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그가 이것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3. 성령의 내주 : 생명의 원리
에드워즈는 성령님께서 주입되자마자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내주하신다고 했다.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을 아는 지식과, 거룩한 성향과 모든 은혜가 주어지고 지속된다.”10)
성령님께서는 내주하시는 분이 되셔서 영혼 안에 ‘생명의 원리’가 되신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은 거듭날 때에 “초자연적인 원리가 주입된다(infused).”11)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님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적인 원리가 되신다.12) 사람이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될 때 “지각과 행동에 새로운 원리”를 갖게 된다.13) 거듭날 때에 은혜의 주입으로 이러한 새로운 원리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웬의 가르침과 똑같다.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내주하는 생명의 원리로 행동”하신다는 것은 에드워즈 중생론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14)
4. 주입된 경향성
에드워즈의 경향성의 문제가 그동안 에드워즈 학자들 사이에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과 획득되는 경향성의 구별을 어떻게 했는가?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의 필요성을 말하고, ‘획득되는’ 경향성을 부인한다. “주입된 경향성(Infused Habits): 차츰 선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악한 마지막 순간이 있을 것이며, 그 사람이 선해진 첫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정죄의 상태에 있는 마지막 순간이 있을 것이며, 구원의 상태에 있는 첫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경계선에 있는 그 한순간 전에 죽으면 지옥에 가고, 한순간 후에 죽으면 천국에 가는 그런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그전보다 엄청나게 나은 사람이 되는 한순간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획득되는 경향성의 개념은 잘못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15)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새로운 경향성을 주시는 것은 성령의 주입으로 인해 즉시에 새로운 경향성을 주시는 것이지, 어떤 인간적인 설득에 의해 점차적으로 새로운 경향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5. 주입의 첫 역사인 성령의 조명
에드워즈가 성령의 주입과 성령의 조명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의 말을 보자.
“회심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이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기초이다―마음의 기질과 성향(disposition)과 영의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회심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수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영혼 속에 내주하시면서 생명과 행동의 원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본성이요 신적인 본성입니다. 영혼의 본질이 변화됨으로 신적인 빛을 받아들입니다. 신적인 것들이 이제는 탁월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영혼의 본질이 변화되지 못한 상태였을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첫 번째 활동, 혹은 신적인 기질이 발휘하는 첫 번째 활동은 영적인 이해 혹은 마음의 감각, 즉 영적인 것들에 대한 영광과 탁월함을 지각함에 있습니다. 이것은 의지의 어떠한 타당한 행동보다 앞섭니다.”16)
이로 보건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주입이 먼저이고 조명은 주입의 결과이다.17) 에드워즈의 주입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것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고 이해와 행동의 새로운 원리로 작용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조명은 주입의 결과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새로운 이해의 원리로 역사하신 결과이다. 물론 주입과 조명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그림 3〉 에드워즈의 구원의 순서: 주입과 조명의 관계
성령의 주입
↓
( 성령의 내주) ┌─ 이해의 원리 → 조명(sense of heart=믿음) → 칭의
새로운 원리─┤ ↓
(새로운 본성) └─ 의지와 성향, 행동의 원리 → 새로운 의지, 성향 , 행동
6. 거듭남과 믿음과 칭의의 관계 ― 거듭남의 선행성(先行性)
에드워즈는 거듭나야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성령의 주입으로 오는 믿음을 말한다. 에드워즈가 거듭남을 얻기 위해서도 믿음을 가지라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믿음은 주로 거듭남 후에 오는 신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청교도 신학의 특징이다.
⑴ 믿음의 정의 : 그리스도를 보는 것
성령이 마음에 부어지면 “신적인 일들의 거룩함 혹은 도덕적 완전함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이 생긴다. 에드워즈는 이 ‘마음의 감각’이 곧 믿음이라고 하였다.18)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로운 감각이라는 사상을 『신앙 감정론』을 대표하는 독특한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드워즈의 전체 작품 가운데서 어떤 사상도 이보다 더 창조적인 것은 없으며, 청교도적 신앙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 교리보다 더 광범위한 것은 없다.”19)
에드워즈는 '믿음'을 새로운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의 특권을 수반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아들을 보고 믿는’(요 6:40)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고후 3:18 ; 4:6).”20)
⑵ 철저한 전가로서의 칭의
에드워즈는 거듭남이 믿음보다 먼저 와야 된다고 했으나 철저한 전가로서의 칭의를 동시에 가르쳤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값없이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 모두가 전가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개인적 순종과 고난이 우리의 순종과 고난으로 판단됩니다.”21)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서 놓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을 모두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한다.”22)
⑶ 칭의 얻는 믿음
에드워즈는 칭의 이전의 인간의 선행의 공로를 분명히 거절한다. 가령 “그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이나 작은 선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23)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이 칭의에 근거가 되지 못하고 전가에 의한 칭의를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는 칭의를 얻는 믿음의 본질에 사랑과 회개가 포함된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사랑은 참된 살아 있는 믿음의 요소이며, 참된 믿음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실제적인 믿음에 있어서 생명이요 영혼”이다.24) 그는 사랑뿐 아니라 ‘회개’도 칭의 얻는 믿음의 본질이라고 했다.25)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모든 죄의 길에서 돌아설 것을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원치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죄에서 구원하는 구주로, 죄의 길에서 구하시는 구주로 영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분리되는 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죄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6)
(4)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행동으로서의 믿음
믿음이 칭의의 조건인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결코 믿음 안에 존재하는 어떤 탁월함이나 가치 때문(도덕적 적합성, moral fitness)이 아니라, 이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이 맺고 있는 관계(자연적 적합성, natural fitness)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데, “믿음은 바로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27) 에드워즈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믿음은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어떤 행동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어떤 행동”이다.28)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적극적으로 연합한다.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 행동” 자체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함으로써 법적인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에 있는 실제적 연합이 법적인 것의 기초입니다.”29) 에드워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했다. “믿음은 지고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믿는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를 의롭다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소유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값 주고 사신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하는 것입니다.”30)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⑸ 믿음에 앞서는 성화(중생)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데 믿음과 칭의가 성화보다 앞서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성화가 믿음에 앞서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행동이 있기 전에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뒤이은 행동이 있기 이전에 먼저 죄인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즉, 성결이 발휘되어지기 전에 먼저 성결의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듯이) 믿음의 행동이 있기 전에 본질적으로도(in nature) 어떤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성공적인 행동이 되려면, 시간적으로도(in time) 먼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정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 즉 그에 대한 적합하고도 진실로 사랑하는 개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혼이 성화되어지기 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31)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명은 성화를 칭의보다 앞세우는 약점이 있다.
7. 중생 체험의 성질 : 초자연적으로, 총체적으로, 즉시에 주어지는 중생
에드워즈는 중생을 ‘새 창조’로 말하였는데, 새 창조의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그리고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32)
⑴ 에드워즈는 첫째로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중생’을 말했다. 그가 새 창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즉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33) 즉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명백해지는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성도들이 받는 그 은혜로운 감화와 그들이 체험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효력들은 전적으로 본성 그 위에서 나는 것이며,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 속에서 발견하는 어떤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는 본성적 원리들을 행사하여 얻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34)
에드워즈는 죄인에서 성도로 바뀌는 이 변화는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고 “물리적인(physical) 변화”35)라고 말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의 어떤 직접적인 영향이나 활동이 세상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창조된 존재에게 조금이라도 임한다면, 사도 시대 이후로 그것은 물리적인 임함입니다. 만일 그것이 어떤 동기들을 일으키는 생각 중에 역사하든지, 어떤 점에서건 어떠한 효과를 낳거나 촉진하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여전히 물리적입니다. 어느 점으로나 그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기질이나 본질이 즉시 변한다고 가정한다면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36)
⑵ 에드워즈는 둘째로 ‘총체적 중생’을 말했다. 그는 중생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 때에 일어나는 변화는 인격 전반에 걸친 변화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새 사람이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속만 새 것이 아니라, 바깥도 새롭게 된 자입니다. 그들은 영과 혼과 몸 전체가 통틀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옛 것은 지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와 새로운 혀와 새로운 손과 새로운 발을 가졌습니다. ― 즉 새로운 대화 내용과 새로운 생활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합니다.”37)
⑶ 에드워즈는 셋째로 ‘즉시적 중생’을 말했다. 그에 의하면, 회심은 “즉시에” 이루어지는 역사이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다.38) “회심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심의 준비 단계인 지식, 개혁, 그리고 죄의 깨달음은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회심 이후에 따르는 은혜의 역사도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전적인 부패와 타락의 상태로부터 건짐을 받아 은혜의 상태로 들어가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소유하게 되며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수단인 ‘회심’이라는 이 은혜의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39)
8. 중생의 표지 :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 나오는 진정한 거듭남의 표지
에드워즈는 누가 참된 중생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연구를 많이 했다. 그 결실로 나온 책이 『신앙 감정론』이다. 새뮤얼 홉킨스(Samuel Hopkins)는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는 일에 있어서 에드워즈만큼 힘을 쏟은 사람이 없고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신앙 감정론』은 본래 베드로전서 1장 8절을 본문으로 해서 1743년에서 1746년 초까지 노샘프턴에서 전했던 연속 설교인데, 후에 수정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1746년에 발행되었다. 에드워즈는 처음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들’의 본질과 표지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고백했다.40)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론』을 3부로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는데, 1부는 정서가 종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다루었고, 2부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라고 볼 수 없는 것 12가지를 다루었고, 3부에서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 12가지를 다루었다. 그는 정서(affections)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1)
제1부에서 에드워즈는 종교는 머리보다 마음에 그 좌소가 있다고 말했다. “종교의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좌소가 바로 마음입니다.”42) 이는 메마른 이성주의와 형식주의를 겨냥한 말이다. 오늘날에도 성령을 느껴야 하고 체험해야 한다고 하면, 마치 못 들을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높은 정서들을 정죄하는 사람은 높은 정서를 갖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신앙적인 정서가 없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은 신앙적 정서가 없으면서도 신앙적인 정서를 보이는 사람들을 정죄하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전혀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43)
에드워즈는 이와 같이 ‘마음의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한편 제2부에서는 크게 고조된 감정이나 이상한 신비 체험을 은혜의 징조로 보는 열광주의의 오류를 크게 경계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신앙을 통해서 사탄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합니다. 기독교회의 시작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사탄은 이런 거짓 신앙을 성공적으로 활용하여 신앙의 소망스럽고도 행복한 부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44) 제1차 대각성 운동 당시 열광주의는 진정한 부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에드워즈는 분명 종교적인 정서이지만 꼭 구원에 이르는 은혜로운 정서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들로 다음과 같이 12가지를 말하였다.
⑴ 참된 중생을 입증하지 못하는 12가지 표지
첫째,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가 매우 크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인 것을 입증해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영적이지 못하고 구원과는 아무 상관 없는 종교적인 정서이면서 매우 높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큰 무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극도로 그리스도를 높이며 큰 소란을 떨었습니다. …… 사도 요한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소동을 벌인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에 큰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습니다(요 12:18). 이 때에 큰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치자,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저를 따르는구나.’라고 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한다. “신앙적 정서가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45)
둘째, 에드워즈는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 정서가 참된 신앙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 정서가 영적인 것이라는 확실한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님은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 대한 커다란 정서로 인해서도 몸이 큰 영향을 받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46)
셋째, 신앙에 대해서 뜨겁게,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해서 꼭 참된 은혜로운 정서를 가졌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지나치게 많이 말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부류의 사람 가운데서 이런 사람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징조이기보다는 나쁜 징조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잎이 지나치게 무성한 나무는 좀처럼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 사도 유다는 초대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대단한 신앙이 있는 척 가장함으로 잠시 동안 의심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을 ‘저희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유 1:12)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들을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벧후 2:17)라고 말씀합니다.”47)
넷째, 에드워즈는 신앙적 정서와 흥분이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자신들이 고안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들이 체험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어떤 영적 존재에게서 온 것”일 수 있다.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일 수도 있다. 혹은 “뇌가 병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이상한 생각과 상상”일 수 있다.48)
다섯째, 놀랍도록 성경 말씀으로 마음에 다가왔다고 해서 참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정서라고 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그런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마음 속에 아주 달콤한 약속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약속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내게 말씀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성경 본문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그 본문과 연관된 어떤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떠올라서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이런 착각에 빠지는지 설명했다. “이 문제에서 무지하고 또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 안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고, 순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서 비롯된 체험들은 반드시 옳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성경 이것저것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기만하려고 시도했다.”라고 그는 경고했다.49)
여섯째, 에드워즈는 겉으로 사랑의 표시가 난다고 해서 꼭 구원하는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이 있더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를 갖지 못한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하반절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식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50)
일곱째, 여러 종류의 다양한 종교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그는 “모든 유의 은혜로운 정서에 가짜가 끼어드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나 사울이나 아합이나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 삼상 24:16~17 ; 26:21 ; 왕상 21:27 ; 민 14:39~40).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우상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에게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왕하 17:32~33). 기타 “하나님께 대한 감사”, “순간적인 영적 기쁨”, “종교적인 일에 대한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예후(왕하 10:16)와 회심하기 전의 바울(갈 1:14 ; 빌 3:6)과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서처럼(행 22:3 ; 롬 10:2)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간절한 종교적 갈망”에도 가짜가 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강하게 소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은혜로운 정서는 아닌 것이다.51) 가짜를 보고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기쁨이 왔다고 해서 (즉, 죄에 대한 각성이 있고 난 후에 평화와 기쁨이 왔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를 입증해 주지는 않는다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사람들은 마귀를 통해서도 무서워하는 마음을 주입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두려움의 정서를 가질 수도 있지만, 마귀에게 그 일이 허락된다면 “마귀도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52)
아홉째, 에드워즈는 종교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외적인 예배의 의무에 많은 열심을 보인다고 해서 그 정서가 참된 신앙의 성질을 가진 것인지 입증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향은 전혀 은혜를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53)
열 번째, 하나님께 찬양을 열심히 많이 한다고 해서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은혜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해서 고조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54) 그러나 나중에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찬양을 열렬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정서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열한 번째, 에드워즈는 자기가 경험한 것이 신적인 역사이고, 또 자신들은 좋은 상태에 있다고 강하게 확신한다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잘못된 확신일 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위선자가 거짓된 소망으로 확고하게 서게 되면,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소망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참된 성도들은 때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겸비해지지만 위선자들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된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시각이 없습니다. …… 위선자들에게 있는 확신은 죄가 그 확신을 흔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적어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가장 부패한 삶으로 가장 사악하게 살면서도, 자신들의 소망을 담대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55)
열두 번째, 외면적 모습이 아주 감동적이고 참된 신앙인들이 보기에 기쁨을 주는 그런 모습을 지녔다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화려하게 신앙 고백을 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흔한 일입니다.”56) 그는 말한다. “모든 외적인 표현들과 모습에서, 위선자와 참된 성도가 얼마나 비슷합니까!” 외면적인 훌륭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신앙의 진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이나 향기가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익은 열매로 판단해야 합니다.”57)
⑵ 참된 중생을 입증하는 12가지 표지
제3부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거듭남의 역사가 주어질 때 나타나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로 다음 12가지를 말했다.
첫째,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정서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감화와 작용’에서 온다고 말했다. 참된 정서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이 영구적으로 거하시기 위해 참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본성의 원리로서 또는 생활과 행동의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천으로서 성도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58)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면 전혀 새로운 감각이 생긴다. “하나님의 성령의 구원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은혜로운 역사와 정서 가운데는,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내적인 지각과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 성질과 종류에 있어서 그들이 거룩함을 입기 전에 그들의 마음에 가졌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59)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참된 성도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게,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행사하여 그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마치 꿀을 쳐다보고, 마음으로 그 맛을 상상하는 것과 그 꿀의 단 맛을 직접 맛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과 같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둘째로,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정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초월적이며,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에 대한 감동’에서 온다고 말했다. 이기심이나 탐욕스런 자기 사랑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하시는 일, 하나님의 방식 등은 참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된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랑스러우신 분이시요,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요, 최고로 사랑스러운 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치에 합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갖게 하는 제일의 요건임에 틀림없습니다.”60)
하나님을 가장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탁월성이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신성은 무한히 탁월하다. 그 하나님의 본성이나 신성은 무한히 아름답고, 빛나며, 영광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감동에서가 아니라 자기 정욕으로,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혜택이 자기 사랑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가 있음을 에드워드는 경고했다.
셋째, 에드워즈는 참된 거룩한 정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함 중에 특히 “도덕적 탁월함”의 사랑스러움에 그 토대를 둔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적인 완전과 도덕적인 완전 사이를 구분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라 할 때는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행위자로서 발휘하시는 속성들을 뜻합니다. …… 한마디로 그의 거룩하심을 뜻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나 완전성들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도덕적 선하심이 아니라, 그의 위대하심을 이루고 있는 속성들을 뜻합니다.
1. 거듭남의 정의 :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
에드워즈에 있어서 거듭남이란 성령의 부으심이요, 놀라운 변화를 초래하는 신적인 역사다. 에드워즈의 정의에 의하면, “거듭남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하여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great) 변화”를 의미하며, “사악한 자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2)
사람이 거듭날 때 먼저 성령이 주입되는데, 이때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며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3) 이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을 주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4) 이러한 신적인 믿음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칭의를 얻게 된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주입으로 일어나는 위대한 마음의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하였으며, 그것은 회개, 회심과 같은 말이라고 했다.
“나는 회개와 회심을 같은 말로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행 3:19)이 그것들을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백히 많은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metanonia(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회심(conversion)이란 단어도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변화 혹은 전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거듭남이란 용어는 특별히 마음의 수동적인 측면에서 본 변화입니다).”5)
에드워즈는 거듭남과 회심과 부르심과 성화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부르심과 회심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구절에서 부르심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부르심은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역사입니다.”6) 또 그는 초기 성령이 주입되면서 ‘거듭남’과 ‘성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성령 혹은 하나님의 사랑은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면서 생명의 원리로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고 성화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그들에게 부으십니다.”7)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화를 거듭남 이후에 오는 일평생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하기도 하였다.8)
2.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주어지는 거듭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생각이 에드워즈 신학의 전반에 흐르는 중심축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의지하는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God Glorified in Man’s Dependance, 1731)이라는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구속의 단계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하신 것입니다.”9)
에드워즈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그가 이것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3. 성령의 내주 : 생명의 원리
에드워즈는 성령님께서 주입되자마자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내주하신다고 했다.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을 아는 지식과, 거룩한 성향과 모든 은혜가 주어지고 지속된다.”10)
성령님께서는 내주하시는 분이 되셔서 영혼 안에 ‘생명의 원리’가 되신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은 거듭날 때에 “초자연적인 원리가 주입된다(infused).”11)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님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적인 원리가 되신다.12) 사람이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될 때 “지각과 행동에 새로운 원리”를 갖게 된다.13) 거듭날 때에 은혜의 주입으로 이러한 새로운 원리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웬의 가르침과 똑같다.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내주하는 생명의 원리로 행동”하신다는 것은 에드워즈 중생론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14)
4. 주입된 경향성
에드워즈의 경향성의 문제가 그동안 에드워즈 학자들 사이에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과 획득되는 경향성의 구별을 어떻게 했는가?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의 필요성을 말하고, ‘획득되는’ 경향성을 부인한다. “주입된 경향성(Infused Habits): 차츰 선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악한 마지막 순간이 있을 것이며, 그 사람이 선해진 첫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정죄의 상태에 있는 마지막 순간이 있을 것이며, 구원의 상태에 있는 첫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경계선에 있는 그 한순간 전에 죽으면 지옥에 가고, 한순간 후에 죽으면 천국에 가는 그런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그전보다 엄청나게 나은 사람이 되는 한순간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획득되는 경향성의 개념은 잘못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15)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새로운 경향성을 주시는 것은 성령의 주입으로 인해 즉시에 새로운 경향성을 주시는 것이지, 어떤 인간적인 설득에 의해 점차적으로 새로운 경향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5. 주입의 첫 역사인 성령의 조명
에드워즈가 성령의 주입과 성령의 조명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의 말을 보자.
“회심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이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기초이다―마음의 기질과 성향(disposition)과 영의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회심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수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영혼 속에 내주하시면서 생명과 행동의 원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본성이요 신적인 본성입니다. 영혼의 본질이 변화됨으로 신적인 빛을 받아들입니다. 신적인 것들이 이제는 탁월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영혼의 본질이 변화되지 못한 상태였을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첫 번째 활동, 혹은 신적인 기질이 발휘하는 첫 번째 활동은 영적인 이해 혹은 마음의 감각, 즉 영적인 것들에 대한 영광과 탁월함을 지각함에 있습니다. 이것은 의지의 어떠한 타당한 행동보다 앞섭니다.”16)
이로 보건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주입이 먼저이고 조명은 주입의 결과이다.17) 에드워즈의 주입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것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고 이해와 행동의 새로운 원리로 작용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조명은 주입의 결과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새로운 이해의 원리로 역사하신 결과이다. 물론 주입과 조명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그림 3〉 에드워즈의 구원의 순서: 주입과 조명의 관계
성령의 주입
↓
( 성령의 내주) ┌─ 이해의 원리 → 조명(sense of heart=믿음) → 칭의
새로운 원리─┤ ↓
(새로운 본성) └─ 의지와 성향, 행동의 원리 → 새로운 의지, 성향 , 행동
6. 거듭남과 믿음과 칭의의 관계 ― 거듭남의 선행성(先行性)
에드워즈는 거듭나야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성령의 주입으로 오는 믿음을 말한다. 에드워즈가 거듭남을 얻기 위해서도 믿음을 가지라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믿음은 주로 거듭남 후에 오는 신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청교도 신학의 특징이다.
⑴ 믿음의 정의 : 그리스도를 보는 것
성령이 마음에 부어지면 “신적인 일들의 거룩함 혹은 도덕적 완전함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이 생긴다. 에드워즈는 이 ‘마음의 감각’이 곧 믿음이라고 하였다.18)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로운 감각이라는 사상을 『신앙 감정론』을 대표하는 독특한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드워즈의 전체 작품 가운데서 어떤 사상도 이보다 더 창조적인 것은 없으며, 청교도적 신앙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 교리보다 더 광범위한 것은 없다.”19)
에드워즈는 '믿음'을 새로운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의 특권을 수반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아들을 보고 믿는’(요 6:40)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고후 3:18 ; 4:6).”20)
⑵ 철저한 전가로서의 칭의
에드워즈는 거듭남이 믿음보다 먼저 와야 된다고 했으나 철저한 전가로서의 칭의를 동시에 가르쳤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값없이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 모두가 전가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개인적 순종과 고난이 우리의 순종과 고난으로 판단됩니다.”21)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서 놓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을 모두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한다.”22)
⑶ 칭의 얻는 믿음
에드워즈는 칭의 이전의 인간의 선행의 공로를 분명히 거절한다. 가령 “그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이나 작은 선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23)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이 칭의에 근거가 되지 못하고 전가에 의한 칭의를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는 칭의를 얻는 믿음의 본질에 사랑과 회개가 포함된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사랑은 참된 살아 있는 믿음의 요소이며, 참된 믿음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실제적인 믿음에 있어서 생명이요 영혼”이다.24) 그는 사랑뿐 아니라 ‘회개’도 칭의 얻는 믿음의 본질이라고 했다.25)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모든 죄의 길에서 돌아설 것을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원치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죄에서 구원하는 구주로, 죄의 길에서 구하시는 구주로 영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분리되는 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죄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6)
(4)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행동으로서의 믿음
믿음이 칭의의 조건인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결코 믿음 안에 존재하는 어떤 탁월함이나 가치 때문(도덕적 적합성, moral fitness)이 아니라, 이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이 맺고 있는 관계(자연적 적합성, natural fitness)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데, “믿음은 바로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27) 에드워즈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믿음은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어떤 행동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어떤 행동”이다.28)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적극적으로 연합한다.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 행동” 자체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함으로써 법적인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에 있는 실제적 연합이 법적인 것의 기초입니다.”29) 에드워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했다. “믿음은 지고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믿는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를 의롭다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소유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값 주고 사신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하는 것입니다.”30)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⑸ 믿음에 앞서는 성화(중생)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데 믿음과 칭의가 성화보다 앞서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성화가 믿음에 앞서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행동이 있기 전에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뒤이은 행동이 있기 이전에 먼저 죄인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즉, 성결이 발휘되어지기 전에 먼저 성결의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듯이) 믿음의 행동이 있기 전에 본질적으로도(in nature) 어떤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성공적인 행동이 되려면, 시간적으로도(in time) 먼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정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 즉 그에 대한 적합하고도 진실로 사랑하는 개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혼이 성화되어지기 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31)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명은 성화를 칭의보다 앞세우는 약점이 있다.
7. 중생 체험의 성질 : 초자연적으로, 총체적으로, 즉시에 주어지는 중생
에드워즈는 중생을 ‘새 창조’로 말하였는데, 새 창조의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그리고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32)
⑴ 에드워즈는 첫째로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중생’을 말했다. 그가 새 창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즉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33) 즉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명백해지는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성도들이 받는 그 은혜로운 감화와 그들이 체험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효력들은 전적으로 본성 그 위에서 나는 것이며,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 속에서 발견하는 어떤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는 본성적 원리들을 행사하여 얻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34)
에드워즈는 죄인에서 성도로 바뀌는 이 변화는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고 “물리적인(physical) 변화”35)라고 말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의 어떤 직접적인 영향이나 활동이 세상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창조된 존재에게 조금이라도 임한다면, 사도 시대 이후로 그것은 물리적인 임함입니다. 만일 그것이 어떤 동기들을 일으키는 생각 중에 역사하든지, 어떤 점에서건 어떠한 효과를 낳거나 촉진하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여전히 물리적입니다. 어느 점으로나 그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기질이나 본질이 즉시 변한다고 가정한다면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36)
⑵ 에드워즈는 둘째로 ‘총체적 중생’을 말했다. 그는 중생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 때에 일어나는 변화는 인격 전반에 걸친 변화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새 사람이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속만 새 것이 아니라, 바깥도 새롭게 된 자입니다. 그들은 영과 혼과 몸 전체가 통틀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옛 것은 지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와 새로운 혀와 새로운 손과 새로운 발을 가졌습니다. ― 즉 새로운 대화 내용과 새로운 생활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합니다.”37)
⑶ 에드워즈는 셋째로 ‘즉시적 중생’을 말했다. 그에 의하면, 회심은 “즉시에” 이루어지는 역사이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다.38) “회심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심의 준비 단계인 지식, 개혁, 그리고 죄의 깨달음은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회심 이후에 따르는 은혜의 역사도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전적인 부패와 타락의 상태로부터 건짐을 받아 은혜의 상태로 들어가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소유하게 되며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수단인 ‘회심’이라는 이 은혜의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39)
8. 중생의 표지 :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 나오는 진정한 거듭남의 표지
에드워즈는 누가 참된 중생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연구를 많이 했다. 그 결실로 나온 책이 『신앙 감정론』이다. 새뮤얼 홉킨스(Samuel Hopkins)는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는 일에 있어서 에드워즈만큼 힘을 쏟은 사람이 없고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신앙 감정론』은 본래 베드로전서 1장 8절을 본문으로 해서 1743년에서 1746년 초까지 노샘프턴에서 전했던 연속 설교인데, 후에 수정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1746년에 발행되었다. 에드워즈는 처음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들’의 본질과 표지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고백했다.40)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론』을 3부로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는데, 1부는 정서가 종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다루었고, 2부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라고 볼 수 없는 것 12가지를 다루었고, 3부에서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 12가지를 다루었다. 그는 정서(affections)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1)
제1부에서 에드워즈는 종교는 머리보다 마음에 그 좌소가 있다고 말했다. “종교의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좌소가 바로 마음입니다.”42) 이는 메마른 이성주의와 형식주의를 겨냥한 말이다. 오늘날에도 성령을 느껴야 하고 체험해야 한다고 하면, 마치 못 들을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높은 정서들을 정죄하는 사람은 높은 정서를 갖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신앙적인 정서가 없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은 신앙적 정서가 없으면서도 신앙적인 정서를 보이는 사람들을 정죄하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전혀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43)
에드워즈는 이와 같이 ‘마음의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한편 제2부에서는 크게 고조된 감정이나 이상한 신비 체험을 은혜의 징조로 보는 열광주의의 오류를 크게 경계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신앙을 통해서 사탄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합니다. 기독교회의 시작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사탄은 이런 거짓 신앙을 성공적으로 활용하여 신앙의 소망스럽고도 행복한 부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44) 제1차 대각성 운동 당시 열광주의는 진정한 부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에드워즈는 분명 종교적인 정서이지만 꼭 구원에 이르는 은혜로운 정서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들로 다음과 같이 12가지를 말하였다.
⑴ 참된 중생을 입증하지 못하는 12가지 표지
첫째,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가 매우 크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인 것을 입증해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영적이지 못하고 구원과는 아무 상관 없는 종교적인 정서이면서 매우 높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큰 무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극도로 그리스도를 높이며 큰 소란을 떨었습니다. …… 사도 요한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소동을 벌인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에 큰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습니다(요 12:18). 이 때에 큰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치자,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저를 따르는구나.’라고 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한다. “신앙적 정서가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45)
둘째, 에드워즈는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 정서가 참된 신앙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 정서가 영적인 것이라는 확실한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님은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 대한 커다란 정서로 인해서도 몸이 큰 영향을 받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46)
셋째, 신앙에 대해서 뜨겁게,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해서 꼭 참된 은혜로운 정서를 가졌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지나치게 많이 말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부류의 사람 가운데서 이런 사람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징조이기보다는 나쁜 징조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잎이 지나치게 무성한 나무는 좀처럼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 사도 유다는 초대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대단한 신앙이 있는 척 가장함으로 잠시 동안 의심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을 ‘저희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유 1:12)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들을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벧후 2:17)라고 말씀합니다.”47)
넷째, 에드워즈는 신앙적 정서와 흥분이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자신들이 고안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들이 체험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어떤 영적 존재에게서 온 것”일 수 있다.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일 수도 있다. 혹은 “뇌가 병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이상한 생각과 상상”일 수 있다.48)
다섯째, 놀랍도록 성경 말씀으로 마음에 다가왔다고 해서 참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정서라고 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그런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마음 속에 아주 달콤한 약속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약속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내게 말씀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성경 본문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그 본문과 연관된 어떤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떠올라서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이런 착각에 빠지는지 설명했다. “이 문제에서 무지하고 또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 안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고, 순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서 비롯된 체험들은 반드시 옳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성경 이것저것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기만하려고 시도했다.”라고 그는 경고했다.49)
여섯째, 에드워즈는 겉으로 사랑의 표시가 난다고 해서 꼭 구원하는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이 있더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를 갖지 못한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하반절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식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50)
일곱째, 여러 종류의 다양한 종교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그는 “모든 유의 은혜로운 정서에 가짜가 끼어드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나 사울이나 아합이나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 삼상 24:16~17 ; 26:21 ; 왕상 21:27 ; 민 14:39~40).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우상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에게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왕하 17:32~33). 기타 “하나님께 대한 감사”, “순간적인 영적 기쁨”, “종교적인 일에 대한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예후(왕하 10:16)와 회심하기 전의 바울(갈 1:14 ; 빌 3:6)과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서처럼(행 22:3 ; 롬 10:2)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간절한 종교적 갈망”에도 가짜가 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강하게 소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은혜로운 정서는 아닌 것이다.51) 가짜를 보고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기쁨이 왔다고 해서 (즉, 죄에 대한 각성이 있고 난 후에 평화와 기쁨이 왔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를 입증해 주지는 않는다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사람들은 마귀를 통해서도 무서워하는 마음을 주입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두려움의 정서를 가질 수도 있지만, 마귀에게 그 일이 허락된다면 “마귀도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52)
아홉째, 에드워즈는 종교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외적인 예배의 의무에 많은 열심을 보인다고 해서 그 정서가 참된 신앙의 성질을 가진 것인지 입증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향은 전혀 은혜를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53)
열 번째, 하나님께 찬양을 열심히 많이 한다고 해서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은혜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해서 고조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54) 그러나 나중에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찬양을 열렬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정서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열한 번째, 에드워즈는 자기가 경험한 것이 신적인 역사이고, 또 자신들은 좋은 상태에 있다고 강하게 확신한다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잘못된 확신일 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위선자가 거짓된 소망으로 확고하게 서게 되면,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소망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참된 성도들은 때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겸비해지지만 위선자들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된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시각이 없습니다. …… 위선자들에게 있는 확신은 죄가 그 확신을 흔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적어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가장 부패한 삶으로 가장 사악하게 살면서도, 자신들의 소망을 담대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55)
열두 번째, 외면적 모습이 아주 감동적이고 참된 신앙인들이 보기에 기쁨을 주는 그런 모습을 지녔다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화려하게 신앙 고백을 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흔한 일입니다.”56) 그는 말한다. “모든 외적인 표현들과 모습에서, 위선자와 참된 성도가 얼마나 비슷합니까!” 외면적인 훌륭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신앙의 진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이나 향기가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익은 열매로 판단해야 합니다.”57)
⑵ 참된 중생을 입증하는 12가지 표지
제3부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거듭남의 역사가 주어질 때 나타나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로 다음 12가지를 말했다.
첫째,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정서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감화와 작용’에서 온다고 말했다. 참된 정서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이 영구적으로 거하시기 위해 참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본성의 원리로서 또는 생활과 행동의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천으로서 성도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58)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면 전혀 새로운 감각이 생긴다. “하나님의 성령의 구원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은혜로운 역사와 정서 가운데는,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내적인 지각과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 성질과 종류에 있어서 그들이 거룩함을 입기 전에 그들의 마음에 가졌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59)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참된 성도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게,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행사하여 그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마치 꿀을 쳐다보고, 마음으로 그 맛을 상상하는 것과 그 꿀의 단 맛을 직접 맛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과 같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둘째로,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정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초월적이며,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에 대한 감동’에서 온다고 말했다. 이기심이나 탐욕스런 자기 사랑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하시는 일, 하나님의 방식 등은 참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된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랑스러우신 분이시요,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요, 최고로 사랑스러운 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치에 합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갖게 하는 제일의 요건임에 틀림없습니다.”60)
하나님을 가장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탁월성이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신성은 무한히 탁월하다. 그 하나님의 본성이나 신성은 무한히 아름답고, 빛나며, 영광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감동에서가 아니라 자기 정욕으로,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혜택이 자기 사랑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가 있음을 에드워드는 경고했다.
셋째, 에드워즈는 참된 거룩한 정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함 중에 특히 “도덕적 탁월함”의 사랑스러움에 그 토대를 둔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적인 완전과 도덕적인 완전 사이를 구분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라 할 때는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행위자로서 발휘하시는 속성들을 뜻합니다. …… 한마디로 그의 거룩하심을 뜻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나 완전성들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도덕적 선하심이 아니라, 그의 위대하심을 이루고 있는 속성들을 뜻합니다.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EC%A1%B0%EB%82%98%EB%8B%A8-%EC%97%90%EB%93%9C%EC%9B%8C%EC%A6%88%EC%9D%98-%EC%A4%91%EC%83%9D%EB%A1%A0%EB%85%B8%EB%B3%91%EA%B8%B0-%EB%B0%95%EC%82%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