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인도에 의한 초자연적인 신학과 자연적인 인간의 신학
한 사람의 신학이 올바르게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 매우 위험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회심한 사람들은 신앙에 혼란스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해의 부족으로 여러가지 잘못된 신학적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은혜로 중생한 사람이라면 점점 더 오류에서 벗어나서 후에는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올바른 신학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그러나 만약 회심했다는 신자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신학이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 잘못된 것을 지속하고 있다면 그의 회심은 참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오랜동안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사가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 잘못된 이해, 즉 역사 속에서 경건한 신앙인들이 이단이라고 정죄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위험한 사람이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교사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보자면 펠라기우스, 반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율법폐기주의적 칼빈주의(이들은 머리로는 칼빈주의자들이지만 마음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기에 신학이 일관되지 못하고 매우 혼돈스럽습니다) 등을 경건한 신앙인들은 이단으로 보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인간적인 신앙으로 본 것입니다.
인간론과 구원론은 연결되어 있는 교리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선함을 말하기에 행위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부분적 타락을 말하기에 믿음과 행위 구원을 말합니다. 알미니우스도 부분적 타락을 말하기에 믿음을 구원의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과 구원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경건한 신앙인들이 이들을 이단으로 본 이유는 이들의 신학은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인간적인 신학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는 성경에 따라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보탬도 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진노 아래에 있을 뿐입니다. 즉 칭의의 원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과 구원에 대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정신은 거짓된 펠라기우스나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구원론의 회복이고, 종교개혁자들 모두를 포함한 넒은 의미의 개혁주의는 하나의 주의가 아니고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칼빈주의는 교리적으로 순수한 고백종교이다. 우리는 교회적 순수성을 강조하며 오직 그것이 칼빈주의이다. 칼빈적인 것을 배제하고 지상에 참종교는 없다. 본질상으로나 의미상으로 칼빈주의적일 때만이 참신앙이라 할 수 있다."(B.B.워필드)
구원의 공로적 원인과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신앙
구원의 공로적 원인은 오직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죄책을 감당하심과 의의 순종만이 우리의 유일한 칭의의 원인입니다. 그것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면 그 사람은 개혁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이단입니다. 때때로 율법폐기주의적 알미니안주의자나 율법폐기주의적 칼빈주의자들은 정통 개혁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로 몰았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공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 매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신복음주의자들은 청교도나 개혁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매도합니다. 그들은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성격에 대해 이해하지도 올바로 구분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매우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더 강퍅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올바르고 훌륭한 개혁주의자들을 행위구원론자로 몰아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살아서도 그러한 취급을 받았고 그러한 위선자들과 싸웠는데, 죽어서도 그러한 말도 안되는 취급을 받습니다.
개혁주의자들 안에서 구원에 있어서의 논의는 믿음을 공로적 원인으로 보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닙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또한 구원의 수단으로서 믿음의 성격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입니다.
무지한 사람들, 마음은 알미니안주의자이면서 머리로는 칼빈주의를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혼돈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아무런 구분도 하지 못하고 마구 비판하지만, 그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을 비판합니다. 이들의 설교나 주장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들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넘나듭니다.
이들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믿음의 성격을 말하는 모든 사람을 다 행위 구원론자로 몰아버립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매우 혼돈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신복음주의자들처럼 믿음을 매우 단순화시켜 버립니다. 신복음주의자들처럼 율법과 복음 모두를 강조하는 사람을 행위구원론자로 몰아버리고, 복음에 강조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하고 기준없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축시키거나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부자 청년에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신 예수님을 율법주의자, 또는 신율법주의자로 몰아버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매우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구원의 원인적 근거로서의 믿음과 구원의 수단적 근거로서의 믿음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구원얻는 수단으로서의 믿음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도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구원 전체의 본질적 이해에 있어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를 넘나듭니다.
믿음의 내용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으로서 믿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신학자들은 믿음의 내용과 믿음의 성격으로 나누었습니다. 여러 분류가 있지만 이것이 가장 간명한 분류입니다. 둘째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는데 필요한 지식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경건한 사람들은 고민했습니다.
구원에 필요한 지식은 성경 전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원얻는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신학서적으로 충분할까요? 신약성경으로 충분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책으로 충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고, 이것에 대한 논의는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경건한 사람들은 성경 전체를 전하고, 보조적으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교리를 전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두번째로 구원얻는 믿음에 있어 필수적인 내용은 무엇인가?에 대해 신학자들은 고민했습니다. 이것 또한 매우 어려운 내용입니다. 초대교회의 경건한 사람들은 성경을 일차적으로 여기고, 그다음 최소한의 내용을 담아 사도신경이나 신조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단에서 보호할 뿐만아니라 구원얻는 믿음의 최소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 이단과 대항하여 신앙고백을 형성했는데, 이를 통해 구원얻는 믿음의 내용과 올바른 신앙을 정의하려고 했습니다. 대개의 신앙고백들은 구원에 대한 필수적인 교리들을 앞부분에 다뤘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본질적이지 않은 교리들을 다뤘습니다. 즉 그 앞부분의 내용들(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은 구원에 있어 필수적인 내용으로 다뤘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은 구원얻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구원에 있어 반드시 알아야 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만 믿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너무 복잡하게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알려진 개혁주의자 중 어떤 목회자가 쓴 교리서를 보았는데, 구원은 간단하고 성화는 어렵다고 한 글을 본적이 있는데 이는 신복음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입니다. 믿음의 내용에 대한 충분한 이해없이 쉽게 가르치는 그리스도는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구원얻는 믿음의 내용에 있어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매우 지나친 사람들은 4영리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구원에 있어 필수적인 믿음의 내용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를 들어 자기 마음대로 믿음을 단순화시키는 사람은 성경에 대한 큰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들의 고백과 내용을 성경 전체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쓴 서신에서 그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한 이해없이 그 구절을 자기 생각대로 이해하는 것은 큰 무지이며, 위험한 생각입니다.
믿음의 내용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죄를 아는 지식 또한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구원얻는 회개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의 회개는 믿음과 동의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고 믿음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입니다.
구원얻는 수단으로서의 믿음의 성격(본질)
칭의와 연결되는 구원얻는 믿음의 성격에 대해 경건한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용어들을 하나하나 주해하고, 그 내용과 성격을 규명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또한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과거 목회자들은 역사적 믿음, 이적적 믿음, 일시적 믿음, 구원얻는 믿음으로 나누었습니다.
구원얻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습니다. 벌콥은 첫째로 지적 요소를 말하고(위에서 살펴본), 거기에서 믿음의 내용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 지식의 성격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합니다. 둘째로 감정적 요소를 말하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 안에서 계시한 모든 것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확실한 지식일 뿐만아니라, 성령이 복음으로 내 안에서 일으키는 내면으로부터의 신뢰"라는 내용을 언급합니다. 셋째로 의지적 요소를 말합니다. 그는 이것이 믿음의 요소 중 정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수많은 정통주의적 학자들과 경건한 목회자들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역사적이고 일시적인 믿음과 구별된 구원얻는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에 따라 의지적 요소를 강조했습니다. 벌콥은 "이 의지적 요소는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서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며, 허물많고 타락한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복속하고, 그리스도를 용서와 영적인 생활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 신앙은 확고한 안정감, 평안, 감사와 기쁨의 감정을 수반합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확실성이므로 영혼의 내부에 평안과 확신을 불러 일으킵니다."고 말합니다. A.A. 하지는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도덕적 행동으로 신자의 영적인 상태가 진리와 합치하는 것이 그 기초가 됩니다. ~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로 형용하는 심적 상태는 복합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대하는 특수구절의 성질에 따라 다릅니다." 더 분명한 이해를 갖고 싶으면 이신칭의에 대한 에드워즈나 오웬의 글을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신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믿음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 또는 행위구원론자로 몰아버립니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구분을 하지 못하고 혼란 가운데서 동일한 비난을 한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이들은 개혁주의책을 보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한 알미니안주의자들입니다). 신복음주의자(알미니안주의)들은 이러한 믿음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예비주의자들, 믿음의 의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 순종, 믿음의 본질적인 부분으로서의 사랑, 체험, 믿음의 결과로서의 열매를 말하는 개혁주의자들을 모두 율법주의자들로 몰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또 주장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알미니안인데 머리에는 청교도들이 들어오니 혼돈된 상태에서 헤멜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믿음의 내용과 성격을 구분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믿음과 확신에 대해서도 구별을 하지 못합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루터는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 믿음은 꿈꾸는 그 무엇, 인간적인 환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용어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믿음에 도덕적인 진보나 선행들이 수반되지 않음을 보면서 여전히 믿음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게 될 때, 그들은 믿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우리가 올바르게 되고 구원을 얻으려면 행위들을 하여야 한다고 선언하는 오류에 빠진다(율법주의).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추리력으로 그들은 그들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여기는 한 생각을 날조하여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른다(반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우스주의).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며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에 상응하는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더 나은 삶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 하지만 믿음은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요1:13).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 "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알미니안들은 믿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다고 말합니다(이렇게 말하는 거짓된 칼빈주의자가 있다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가 믿음을 불러 온다고 말합니다. 칼빈주의자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주심을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믿음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처럼 위험한 사람이 없습니다. 믿음의 성격을 단순화시키는 사람처럼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이 없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를 넘나들면서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터무니 없이 비판하는 무지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이러한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어디에서 답을 찾게 될지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구원에 필수적인 조건들
성경은 구원에 관계하여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 구절에서 말합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구원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들로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강조한다고 해서 신복음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로 몰았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구원의 원인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의 원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믿음과 구원의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칭해서 구원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들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확신이 없이 구원을 추구하는 모든 분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얻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이것을 무시하고 알미니안들처럼 단순한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율법폐기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되 분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나누지 마십시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구원에 이르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율법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율법폐기주의자입니다. 어떤 쪽으로 더 흐를 뿐이지 두 요소를 모두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 모두에서 건져주실 때까지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진리를 추구할 때 행위구원이니, 신율법주의니, 율법주의자니 하고 매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여러분들은 아마도 알미니안적인 교회에서 이렇게 취급받았을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율법주의자가 생기는 것은 그들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가 생기는 이유는 1.복음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은혜의 무조건성, 충분성 등등의 이해가 충분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2.죄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바리새인은 죄를 깊이 알지 못한 율법주의자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리처럼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눅18:9-14). 개개의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상태에 따라 설교자는 율법을 더 강조할 수도 있고, 복음을 더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깊은 곳까지 모른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전 경륜 모두를 다 충분히 전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신복음주의자들처럼 복음만 설교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고, 모두를 그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없이 그리로 이끈 사람들이 율법폐기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치우친 사람들입니다.
성경 밖으로만 나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지침들을 따르고 이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성경의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나아가십시오. 영혼을 사랑하지도 다루어 보지도 않은 신학자들의 탁상공론을 듣지 마십시오. 오늘날의 불경건한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글을 읽으십시오. 청교도들 중에서도 더 뛰어나고 선명한 사람들의 책들을 읽으십시오. 퍼킨스, 번연, 차녹, 플라벨, 오웬, 얼라인, 브룩스, 에드워즈, 찰스 하지를 읽으십시오.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에드워즈가 1741년 이후에 쓴 글이나 설교들을 읽으십시오.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언제나 성경을 꾸준히 읽어가면서, 성경과 비교하면서 읽으십시오. 이 사람들을 잘못 이해하면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분들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위험하다는 것인지 물어보십시오. 알지도 못하면서, 이 분들의 책을 깊이 읽지 못했으면서, 비판하는 신학자들의 2차자료를 보고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말은 무시하십시오.
백스터 읽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백스터가 율법폐기주의자들에게서 떠나게 하기 위해, 신학을 엄밀하게 정의하다가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스터는 결코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백스터의 후계자들은 더 멀리 나갔습니다. 그들을 신율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들의 글이 남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백스터는 구원적 신학 위에 서 있습니다. 백스터의 교리책으로 신학을 세울 필요는 없지만 백스터를 읽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정말 두려워할 책은 백스터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책입니다. 후커나 쉐퍼드의 책 읽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들은 결코 율법주의자들이 아닙니다. 많은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도 단점이 있습니다. 세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성경에 대한 이해를 더 넓혀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비판하는 학자나 사람들을 오히려 훨씬 더 주의해야 합니다. 제 개인적인 결론으로는 에드워즈나 찰스 하지를 통해 신앙을 정리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간단하게만 다루었는데 성경과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을 통해 신앙을 더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