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하는 주님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조나단 에드워드)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9-31)
사도로부터 이 편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지혜가 크게 논란되는 지역에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도가 이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고린도는 아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여러 세대 동안 세상에서 철학과 학문의 가장 유명한 터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지혜를 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신 방식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학식 있는 헬라인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은 소위 자기들의 모든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노력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셨습니다. 사도는 다음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1. 구속의 일에 수반된 여러 가지의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이 자신을 결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2.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이 목적이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람들이 자기들의 선을 위해 구속의 역사 속에서 오직 절대적이고 직접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러합니다.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
첫째로,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타락하고 난 뒤 다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은 바로 그 네 가지 항목에 들어있습니다. 달리 더 작 나눌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분명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네 가지 모두가 되십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으니’ 그 안에 모든 합당한 총명의 참된 탁월함이 있습니다. 지혜는 헬라인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이십니다. 참 지혜가 우리의 지성에 분여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우리가 ‘의’를 가지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도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져’(성화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총명뿐 아니라 탁월한 마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에게 전가된 의가 되십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든 비참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모든 복락과 영광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좋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좋은 것이 하나님을 의지함에 달려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로 말미암아 이런 은혜를 입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되셨으니.’
셋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 안에 있는 분깃을 얻고, 그를 통해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통하게 하는 믿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성삼위의 각 위를 의지해야 할 필연성이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달린 존재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의존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갖는 방편인 믿음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교 리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받으시되, 구속받은 자들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저는 첫째,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둘째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신다는 점을 보여 주겠습니다.
Ⅰ. 구속받은 자들의 절대적이고도 보편적인 교회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방식의 본질과 방도는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일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나 즉각적으로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게끔 하는 데 있습니다. 구속받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그들은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어떤 존재가 자기의 선을 위해 다른 존재를 의뢰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좋은 것을 위해 하나님을 의뢰하는 방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십니다. 그리스도에게서 그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그 모든 좋은 것을 받아 가집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것을 가지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주어진 ‘선 자체’이기에 모든 선한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은 이런 모든 방면에서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직접적이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게 됩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총체적 은혜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좋은 것의 ‘원조’이십니다. 우리는 구속주를 하나님께서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구세주를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니 그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께 속하실 뿐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직무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실 일을 맡기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구세주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구세주를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하실 이를 주시기도 하시고, 구속하신 이가 사신 것을 제공해 주시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우리가 그에게 인도함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친밀하게 교제할 믿음을 받아 그 에 분깃을 얻게 된 것도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 놓으신 모든 은택을 우리가 받는 것도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지옥 불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받으사 구속받은 이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구속받은 이들이 자기들이 모든 탁월한 지혜와 거룩함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그 성령께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며,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도 친히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작용과 내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을 아는 지식과, 거룩한 성향과 모든 은혜가 주어지고 지속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은혜를 나누어주실 때에 방편들이 사용되지만, 우리가 이런 은혜의 방편들을 갖게 도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편들을 유효하게 만드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릇이 훌륭해 보배가 담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경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 가지의 규례들을 가지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규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에 달려있습니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자들의 모든 충족성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음 사역자들의 성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즉각적인 축복과 감화에 달려있습니다.
① 구속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도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은혜는 주어진 것의 탁월함에 비례하여 볼 때 대단한 것입니다. 은사는 정말 무한하게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 은사는 무한하게 가치 있으신 분, 즉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받아 가지고 있는 은택에 비추어 볼 때 은혜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은택은 이중적으로 무한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한한 자로부터 구원을, 바로 그분 안에서 받았다는 데서 그러하고, 영원한 비참에서 구원받았다는 데서 그러하며, 그리고 우리가 또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 은사를 주신 은혜의 처사는 그것을 받은 우리들의 무가치함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은택을 받기는커녕 그 정반대로 나쁜 것만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방식을 감안하여 볼 때도 그 은혜는 위대하며,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아 가지는 그 통로가 되는 방편과 방식의 쉬움과 용이함을 생각해도 그 은혜는 역시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를 내어 주시되 육신, 또는 우리 인성을 취하게 하사, 우리와 함께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죄는 없지만 죄 있는 연약의 모습으로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낮고 환란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위한 제물로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은혜를 주셔야 하는 의무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타락한 천사들에게 하신 것같이 타락한 인생들을 물리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가 회개하기 훨씬 전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만한 매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여러 은택들이 이러저러한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 은혜를 오직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하심의 결과로 돌립니다. 그런 면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사람은 이제 타락하기 이전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타락 이전에는 온전한 순종의 보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더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꼭 필요로 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 은혜만이 우리에게 영광을 베풀어주고 지옥과 영원한 진노에서 건짐 받게 합니다. 첫 번째 언약 아래서는 의의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주관적인 은혜를 필요로 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고, 우리를 죄책과 무한한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첫 언약 아래서보다 훨씬 더한 것을 위해 하나님이 선하심에 의지하듯이, 우리는 훨씬 크고 더욱 대가없이 놀랍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의지적인 기뻐하심에 더욱 의지합니다. 우리 첫 조상들은 거룩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의존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첫 삶으로부터 원의(原義)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지금과 같은 주권적인 기뻐하심과 선하심의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본시 사람은 거룩하게 지음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을 거룩하게 지으신 것은 하나님다운 일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을 거룩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아마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어긋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타락한 삶들이 거룩하게 될 때, 그것은 순전히 의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타락한 피조물에게 거룩함을 주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비참해지기 전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더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의존은 훨씬 더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불충분성과 무능성이 타락하고 모자란 상태에서 훨씬 더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예 나면서부터 죄악적이고 전적으로 오염되고 거룩하게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에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에 산출되는 효력도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사람이 거룩하였고 언제나 그런 거룩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다면, 필연적으로 거룩을 고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간 본성에 절대적인 것으로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표현을 받은 다음에야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영접을 받을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비참하고, 후에 행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더욱 분명하게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유의 공력을 인정받을 만한 탁월함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피조물의 탁월성 안에 공로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펴본다 하여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참다운 탁월함 없이 무한하게 괴이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어떤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가, 후에 모든 선한 것으로 부요함을 입었으니 말입니다.
②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받습니다. 사람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일을 은혜에 속한 일뿐 아니라 놀라운 능력에 속한 것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낮고 비참한 깊은 구렁에서 끌어 내사 거룩하고 복된, 높아진 상태로 올려놓는 데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속의 매 단계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한 일의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의 유지도 하나님의 능력 때문
타락한 사람이 새로 지음을 받지 않고는 참된 거룩에 이를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를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골 2:12, 13)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창조하거나 죽은 몸을 살리는 것 이상으로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통해 도달한 효력이 더욱 크고 탁월합니다. 거룩하고 복된 존재와 회심의 일을 통해 산출되는 영적 생명은 단순하게 존재하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영광스러운 효력입니다. 본래의 상태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그 상태는 죄 가운데 죽은 상태요,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깊은 비참의 상태입니다. 그 상태는 새로 지으심을 받아 도달한 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되, 그저 죽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상태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상태에서 보호받는 것도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라고 베드로는 주장합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같이 그 은혜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이며, 하나님에 의해 은혜가 유지됩니다. 마치 창공의 빛이 하루종일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새벽에도 낮에도 저녁 석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은혜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 은혜의 역사를 실행에 옮길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죄를 다스리고 자기의 마음의 부패한 성향을 제어하고 거룩한 원리를 증가시켜 선한 역사로 열매 맺게 하는 데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영혼이 온전히 본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또한 영혼을 기쁨과 복락으로 채우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습니다. 그리고 몸이 다시 살고 완전한 상태에 이르러 하나님의 나라의 거민으로서 온전하고 복되고 완전해진 영혼의기구가 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일련의 이러한 행동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일련의 이러한 행동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가장 영광스러운 효력들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범죄하기 이전의 처음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오죽 더 하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의 많은 일들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의 더욱 놀라운 행사에 의지해야 합니다. 처음 범죄하기 전에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효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더 주목할 만하게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믿음의 길에는 크고 어려운 일과 대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부패하여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효력입니다. 호감을 갖고 있거나 대적하는 세력이 전혀 없는 곳에서 거룩을 주는 것보다 사단의 손에서 영혼을 구출해 내고 흑암의 세력에서 그를 건져내어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역사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재물을 나누느니라”(눅11:21, 22).
그 사람의 마음에 아직도 저항하는 죄가 남아있고 사단이 모든 힘을 동원하여 훼방하는 가운데서 그 영혼을 은혜와 거룩의 상태 속에 붙잡는 것은, 사단이 사람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에 사람을 범죄하지 않게 지키는 경우보다 더욱 영광스런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모든 선한 것을 위해 하나님께 어떻게 의존하는지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말입니다.
2. 모든 것을 주신 분에게 모든 것을 의뢰함.
자기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의 원조요, 원천일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중보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지혜, 죄, 용서,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 참된 위로와 행복, 영원한 생명과 영광은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중보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 중보자를 통해 얻게 된 것이었기에 우리는 그 중보자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모든 좋은 것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중보자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보자가 구속하여 놓으신 것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중보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대상인 물과 본질인 샘은 같다.
우리의 복락들은 구속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들입니다. 그 구속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 복락들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르는 분을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값을 받고 사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을 주고 사시는 분도 되고, 그 값 자체도 되십니다.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라는 말씀과, 그리고 9장 26절의 “이제 저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라는 성경 말씀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드려진 것은 인성(人性)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성은 신성(神性)을 가진 인격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성은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의 좋은 것을 가질 때, 우리는 첫 사람의 최초의 상태와 다른 국면에서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 때에는 사람이 자기의 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부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한 것을 받기 위하여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좋은 것을 받는 원천으로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당시 첫 사람이 무죄한 상태에서 의존하였던 저가의 의는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자기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 의는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곧 바로 하나님’만 의지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의지하는 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義)’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23장 6절에서는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명칭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의이기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속함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통하여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3.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복락의 생명수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을 내용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선이십니다. 구속받은 자들의 선은 대상도 되고 본질 그 자체도 됩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대상으로서의 선이라고 할 때는, 구속받은 자들이 행복하게 소유하고 누리는 외적인 좋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유한 본질적인 선이란 그 영혼 자체 내에 있는 탁월함이나 즐거움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두 방면 모두에서 자기들의 좋은 것을 다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님 자신이 그들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좋은 것입니다.
①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들의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집니다. 그들 구속받은 자들은 구속을 통해 소유하고 누리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선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시고 사신 모든 선한 것의 총체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업이십니다. 또한 성도들의 영혼의 분깃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요, 보화요, 그들의 식물이며,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시요, 그들의 장식이며, 면류관이요, 영원한 명예와 영광이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죽을 때까지 받는 위대한 선이시며, 세상 끝에 부활하게 되어 만나는 위대한 선인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하늘의 예루살렘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산의 가운데로 흐르는 생명수 강이시며’ 그 동산 가운데서 자라는 생명나무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은 성도들이 마음을 언제나 새롭게 하고 위로해 주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영원한 잔치상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다른 것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 천사들과 서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사들이나 다른 어떤 것들 속에서 즐거워하거나, 또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②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의 모든 ‘본질적인’ 선을 가지게 됩니다. 본질적인 선은 두겹입니다. 그것은 탁월한 것이기도 하고 즐거운 것이기도 합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이 두 가지를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여 받기도 하고 하나님 안에서 소유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께 참여함을 통하여 영적인 탁월함과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탁월함을 전달받아서 탁월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아름다우심, 곧 당신의 아름다운 형상을 그들의 영혼에 투영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벧후1:4).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존재들입니다(히12:10).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기쁨을 전달받음으로써 아름답고 복된 존재들이 됩니다. 마치 달이나 항성들이 태양 빛으로 말미암아 밝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영혼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분출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에 있어서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참여하고 하나님께 참여합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와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탁월함과 복락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들은 성령을 힘입어 존재하고 그들의 원리이신 성령 안에 존재합니다. 성령께서는 거주하시는 분이 되셔서 영혼 안에 생명의 원소가 되십니다. 영혼 안에, 영혼에 대하여, 영혼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께서는, 물이 샘에서 비롯되듯이 당신 자신을 전달하시고 역사 하심으로써 참된 거룩과 기쁨의 샘이 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속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7장38, 39절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는 구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우리를 사신 모든 것의 총체는, 4장에서 말한 샘물이고 7장에서 말한 생명수 강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받게 될 모든 복락의 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입니다(계22:1).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요한복음 7장 38, 39절에서 생명수의 강으로 설명되는 것이고,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복락의 강수’라고 불리워집니다.
장차 받은 은혜가 더 크다
여기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충만한 선이 그 내용이 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전달받는 것은 성령의 참여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그의 충만하심을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기업의 총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소유하는 적은 성령의 은혜(앞으로 받을 것과 비교할 때 적다는 것임-역자주)를 가리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의 보증이라고 부릅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라고 기록하였으며, 5장 5절에서는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13절, 14절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성령과 선한 것들을 성경에서는 같은 것으로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성령께서 영혼을 향하여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함하여 주시는 것같이 말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말씀하시며,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사 확보하여 우리에게 주신 복락의 총체요, 복음적 약속들의 주인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우리로 하여금 …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갈3:13,14)라고 하였으며,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는 ‘약속의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의 일을 마치시자마자, 당신이 구속하신 모든 이들에게 즉시 건네 주신 바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2:33)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따라서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거룩과 행복이 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 거룩과 행복은 다 하나님의 성령의 교통하심과 내주하심과, 역사하심 속에 있습니다. 거룩과 행복은 이 세상과 내세에서 다 성령의 열매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속주(救贖主)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구속주로 말미암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구속자이시며, 구속의 값이 되십니다. 그리고 또한 구속의 값을 주고 사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의 성경 구절에서 ‘그에게’라고 번역된 헬러어는 ‘그 안에서’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고전8:6).
Ⅱ. 구속의 역사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방편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곧, 구속받은 자들이 그렇게 크고 보편적으로 당신을 의뢰하는 것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입니다.
1. 은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충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모든 충만하심을 주목하고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기에 그 완전하심과 충만하심을 주목하고 인식할 당위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더 크게 의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기울이는 관심은 커지게 되며,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주목하여 인식하는 기회는 많아집니다. 그런 논리로 더 나아가서, 성삼위의 격위(格位)들에 속한 신적인 완전하심들을 더욱 크게, 더욱 절대적으로 의뢰하면 할수록, 그 각 격위가 가지신 신적 영광을 관찰하고 인정할 기회를 더욱 많이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더 세심히 관찰하고 한번이라도 더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특별하게 주목되고 관찰되도록 우리 마음이 기웁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의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소홀히 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우리가 크게 의지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관심을 쓰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과 그 완전하심들에 크게 의존되어 있고, 그렇게 많은 방면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의존하고 있으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선에 가장 잘 들어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돌린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충분한 모든 것이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일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주목할 기회를 더욱 크게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그만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므로, 피조물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더욱 크게 드러나는 셈입니다. 피조물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그 만큼 크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눔은 배은망덕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충만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진다는 사실은 아름다움과 복됨에 있어서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충만하심을 묵상하고 알게 될 기회도 그만큼 더욱 커지고, 마땅히 그래야 할 당위성도 크게 더해집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절대적이고 즉각적이며 보편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이의 충만하심과 영광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고 얼마나 배은망덕한 처사인가요!
2. 아무것도 아닌 사람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상대적으로, 아니면 피조물의 영광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얼만 위대한 것인지 드러납니다. 피조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있음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신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무한하신 분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와 거룩하심은 우리들의 것보다 더욱 무한히 더 위대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마무리 크게 의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차이를 깨닫되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의 영광에 비하여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는 정도가 아니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피조물로부터 영예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자기를 하나님과 평준한 수준에 놓고서, 아니면 하나님과 다투는 자리에까지 자신을 높인다면, 자기가 마땅하게 처할 위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것 만큼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덜 높이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에 각각의 존재의 처할 위치를 정해 놓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성경이 하나님의 의중을 계시한 것이라고 우리가 인정할진대). 다시 말하며, 하나님께서 전체를 장악하시어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비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게 정해 놓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존재들이 ‘당신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 비하여 당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함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은 더욱 적어지는 것입니다.
3. 전부이자 중심이신 하나님
피조물이 범사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만드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체 영혼을 사로잡아 우리 영혼의 온전한 존중심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이 존중심은 그가 의뢰하는 여라 가지 대상에게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선을 위하여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의지하고 나머지는 우리 자신을 의지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의지한다고 합시다. 아니면, 우리가 우리의 선을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 얻고, 나머지 부분의 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서, 또 그 나머지는 하나님도 그 다른 존재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에서 얻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선(善) 자체와, 우리에게 선을 주는 존재를 한꺼번에 생각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선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존경심을 자아내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전부 중심이신 하나님 안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적용
1. 처음부터 끝가지 의뢰하라.
우리는 여기서 구속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지혜를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빠져들어 간 허망하고, 비참하고, 낮고, 상실되고, 파멸된 상태를 당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습니다. 다른 방면들에서와 같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서는 특별하게 사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사람이 타락하여서 빠져들어 간 죄의 음침한 심연과 비참에서 사람을 건져내시어 높이 드시기를 기뻐하사, 탁월함과 존귀함으로 지극히 높이시고 영광의 복락과 영광의 높은 고지로 영예롭게 하셨지만, 피조물 된 사람이 어느 방면에서도 자랑하고 뽐낼 것을 전혀 갖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은 분명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절대적이고 순전하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속한 것입니다. 성삼위의 각 위는 이 일에 있어서 동등하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성삼위의 각 위를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으며, 성령으로 인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役事)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으로 나타나십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모든 것 중에 오직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게 아주 합당한 진리입니다.
2. 왜 때로는 의지하고, 때로는 의지하지 않는가
어떤 방면에서고 하나님을 그렇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는 신학이나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구속의 의도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학 체계는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가져다 놓는 것이고, 언급된 어떤 방면에서든지, 구속의 일에 속한 어떤 일에서든지 사람을 성부나 성자, 아니면 성령의 자리에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체계들은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아무리 인정한다 할지라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어떤 일들’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속주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은사를 주시는 면에서는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속주 안에 있는 ‘기업’을 얻기 위해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신 일이 온전히 하나님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라고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면에서는 아들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위해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주시는 은택을 힘입기 위해서는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방편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방편이 유익을 주고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을 얻고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분적으로 의지합니다. 또 거룩함을 얻고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주권적인 은혜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단순하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호의로 받아 주시는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인정합니다. 어떤 합당한 공력이 없이도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어떤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끌림을 받거나 감동하는 일이 없더라고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단순하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부지하고, 그로 말미암아 삶의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되었다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얻게 하는 의기 우리 자신 속에 본래부터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옛 언약 아래 있을 때부터 그러하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이 올라간다. 우리가 모든 일을 위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다는 우리의 체계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복음의 의도와 복음의 율조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음에 입혀주신 그 영광과 광채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언어를 발하라.
이리하여 우리는 어째서 믿음이 이 구속의 은총을 받는 방편인지 그 이유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성질에는 이 구속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아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속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은 아주 지당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해 구속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이 구속의 은총을 받는 이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야말로 합당합니다. 믿음은 구속의 일에 있어서 진실한 것이 무엇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영혼은 자신의 의식과 행동 속에서, 구원 문제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믿음은 모든 구속의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드립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게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자기가 ‘곤고하고, 가련하며, 비참하고, 눈멀었으며, 벌거벗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은 참된 마음의 위대한 요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라는 성경 말씀처럼 진정으로 구속받은 이는 어린 아이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믿는 영혼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115:1)라는 말씀이야말로 믿음을 가진 영혼의 언어입니다.
4. 하나님만을 자랑하라.
우리는 하나님만 높이며 모든 구원의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만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것을 죽이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성향을 죽여야 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힘이나 선함을 의존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행복을 기대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 행복을 얻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 한 분만을 높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고 신뢰함으로써 말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역자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누가 자기는 회개하였고 거룩함을 입었고 자기 마음에 참된 탁월함과 신령한 아름다움을 부여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예와 복락을 얻었으며, 영생의 후사가 되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하나님만이 자기를 이 세상의 가장 악한 자들과 다르게 하시고 지옥에서 저주받은 비참한 자와 다르게 하신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많은 위안과 영생의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는 자기의 소망을 이유로 거만해 하지말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임을 생각하고 하나님만 높여야 합니다. 어느 사람이 거룩함에 있어서 뛰어나며 선한 일에 있어서 넘치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것의 영광 중 어느 것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 이 설교는 1731년 7월 8일 보스톤에서 열린 공개 사경회에서 행한 것이며, 설교를 들은 여러 목회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의 요청에 의하여 출간된 것이다. 이 설교는 책으로 출간된 에드워즈의 첫 번째 글이다. )
포도나무선교회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