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는 중심에서 시작된다. 바로 눈, 곧 흐려진 인간의 영혼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매우 깊고 본질적이어서 단편적으로 조금씩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맑아지기 전에는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다.
우리의 눈이 성할 때에 비로소 온몸이 밝아질 것이다.
루터도 회심하기 전에는 금식과 기도와 많은 고민으로 점철되었지만, 비참하고 불행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신칭의라는 영광스러운 교리를 깨닫고 그의 중심이 바르게 되었고,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요한 웨슬리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의 중심은 여전히 불행하고 패배감에 찌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알더스게이트가에 있는 방에서 모임을 가지던 중에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며 마침내 중심이 바로 서게 되었다. 그의 눈이 온전해지고 새사람이 되었다.
오늘날 인생의 각 영역에 대한 치료법이라는 것들은 얼마나 복합적이고 복잡한지 모른다. 그런데 이 치료법마저도 그 중심 원리가 바르지 않으면 너무나 무익할 뿐이다. 눈이 나쁘면 신체의 각 부분을 환하게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당연히 몸 전체가 어둠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샘의 근원이 독으로 오염되면, 아무리 독을 없애려고 노력해도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항상 독을 머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4:1)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0)
치료되어야 할 부분은 중심이요 마음이며 문제의 원인이지, 결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 문제의 결과가 아니다. 주님은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마12:33)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우리이 중심이 치료되어야 한다. 바르게 되어야 할 부분은 인간의 행위나 지식이나 인간에 관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오직 인간 자체가 바른 위치에서 하나님과 근본적이고도 중심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증상과 합병증만 치료할 뿐 질병 자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의사는 돌팔이 의사이다. 여기서 질병이란, 죄로 인해 타락하고 훼손된 인간의 영혼을 말한다. 그런 질병에 걸린 사람은 눈이 흐려져서 앞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빛이 그의 몸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그 사람에게 있는 모든 어둠이 오직 그의 눈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눈만 치료 받으면 된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직접적인 복음인가! 치료되어야 하는 바로 그 한 가지가 치료되어 제자리를 찾을 때에 나머지 것들도 자연히 바르게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3)
“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눅11:36).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지난날 복음주의자들의 설교에 대하여 가장 자주 언급되었던 비판이 ‘그들의 복음이 사회 상황과 문제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복음이 한 개인을 구원하기에는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치료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역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실상 이들의 비판은 사실이 아니다.
지난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는 바로 복음의 주장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던 시절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웠던 때는 신앙 부흥이 일어나고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던 시기, 즉 복음 진리가 강조되었던 시기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맞는 진리가 아닐까? 종교개혁과 청교도 시대, 18세기에 일어났던 위대한 복음주의 영적 대각성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 했던 운동이 복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과연 어느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의학이 발달하고 많은 병원이 설립되며 노예제도가 폐지될 수 있었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바로 복음이라는 동일한 뿌리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사회발전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례도 수천 건에 달한다. 죄의 노예가 되어 거기서 벗어날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 자기 가족들을 빈곤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고 난 후에 그 모든 환경과 처지가 완전히 새로워진다. 때때로 복음은 한 사람을 회심시킬 때 그의 외모까지도 바꾸어 버린다. 일단 한 사람이 바로 서게 되면 그 사람이 다른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게 되는 것이다.
샘의 근원이 깨끗하면 시냇물도 깨끗할 수밖에 없듯이, 질병 자체를 치료하면 증상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복음이 아니고서는 지금까지 진정으로 사회적인 여건을 개선시킬 수 없었을 것이며, 앞으로도 개선시킬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00여년 동안 인간과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얻을 결과가 무엇인가? 얻게 되는 결론은, 그렇게 노력했지만 사람들을 교육하고 더 좋은 집을 공급하는 것이 반드시 새로운 인생이나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밖에 없다.
- 로이드 존스, 「타협할 수 없는 진리」, pp 137-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