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출애굽기 33장에서 장막을 한적한 곳으로 옮긴 것은, 백성들이 좀 더 순결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깨닫게 하려는 조처였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오랜 세월 이어진 교회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교회가 정화되어 영적으로 부흥할 때마다 대부분 이 원리가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이와 똑같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주님과 제자들은 늘 회당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자주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았다. 신약성경을 잘 읽어 보면, 이 원리가 갈수록 더욱 분명해지다가 마침내 기독교 교회가 유대교와 회당 예배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진리를 깨우친 사람들이 따로 모이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진 밖으로 나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고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번에는 역사를 훌쩍 뛰어넘어 종교개혁 이전에 몇몇 나라들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자.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는 왈도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영적 진리를 깨우치고 새로운 영적 활력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참교회와 참복음을 크게 왜곡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떨어져 나와 산에 있는 동굴에서 모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모여 말씀을 배우고 기도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비롯해 네덜란드의 여러 지역에서도 ‘공동생활 형제단’이라고 알려진 기독교인들이 그와 비슷한 운동을 시작했다. 얀 후스는 그들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세가 했던 대로 행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33:7).
이런 일은 종교개혁 이전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종종 일어났다. 개신교로 전향한 많은 교회들, 곧 영적으로 개혁된 교회들은 다른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에서는 위대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났다. 청교도는 모세의 행위를 그대로 본받아 따로 모여 함께 행동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더 나은 길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더욱 순결한 예배를 원했다. 그들 역시 사람들의 오해와 비웃음을 샀다. 그들에게 붙여진 ‘청교도’라는 호칭 자체가 그들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구하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만 온 마음을 기울였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언약도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를 떠났다. 그러고는 일단 네덜란드로 몸을 피했다. 그들은 성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고 싶어했다. 그들은 따로 떨어져 나와 함께 행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북아메리카에 도착했고, 미국이라는 큰 나라를 건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것은 모세가 출애굽기 33장에서 했던 행동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다음 세기인 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교회가 타락하여 불행한 상태에 처하자 복음주의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휫필드의 주도 아래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운동(Calvinistic Methodism)’이 일어났고, 웨슬리 형제들의 주도아래 또 다른 형태의 메서디스트 운동이 일어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메서디스트 운동이 전개되었다. 영적 생명을 회복한 사람들은 모두 기존 교회에서 영적 양식이나 도움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따로 모였다. 그들은 작은 공동체와 연합회를 형성했다. 처음에는 형식을 갖추지 못했지만, 차츰 조직화하는 과정을 거쳐 독립된 단체를 만들었다. 영적으로 각성한 사람들이 그런 단체에 합류했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담대히 말씀을 전했다. 그 결과 큰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원리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성경은 물론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발견한다. 시대적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 교회의 상태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그저 한숨만 쉬는 것이 아니라 행동했다. 그들은 함께 모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평화롭고도 고요한 곳에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배우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다. 장막을 진 밖으로 멀리 옮긴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33:7)라는 말씀대로, 그곳에 나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필요할 때 즉시 행동해야 한다. 따로 모여 행동하다 보면, 마침내 다른 사람들도 무언가 실질적이고도 참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처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동참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귀하게 여기고 인정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런 복을 허락하셨다.
로이드 존스, 「영광을 바라보라」, pp 246-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