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정통성은 영적 깊이와 능력을 통해 균형을 잡아야 한다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는 진지한 독서와 건전한 신학의 회복을 통해
이론적으로 정확한 사람들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들의 정통성이 영적 깊이와 능력을 통해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을 염려했다.
로이드 존스가 보게 된 위험은 “행동가”로서의 실천이 없이
지식을 배우기만 하는 젊은이들의 위험이었다.
“독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사람이 단순히 책만 읽고 산다면
그는 결국 완전히 무익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로지 존 오웬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윌리엄 테일러가 지적하는 것처럼, 젊은 목사는 다른 목사들이
“사반세기 동안 한걸음씩 길게 단계를 거치며”
도달한 높이를 단숨에 뛰어오르려고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로이드 존스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지성적 요소를 강조했고,
“권위들”, 신앙 고백서들, 교회가 어떻게 개혁되었는지에 대한 논증들에 너무 큰 비중을 두었다.
때때로 그들은 마치 연구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말했고,
은혜 교리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같은 확신을 갖고
세례나 교회 정치와 같은 부차적 진리들에 대해서도 주장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쉽게 분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생각하는 것의 필수성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것은 과도한 반응의 전형적인 한 사례였다.
“어떤 사람의 전체 사역이 참된 신학을 찾음으로써 변화되었을 때
그는 물론 이 변화를 위해 어떤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요구되는 강조점은 심지어는 진리도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더 깊은 영성을 요청했고,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촉구하는 신약 성경의 요구,
특히 영광의 후사들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기쁨과 찬양을 더 크게 요구했다.
칼빈주의 신념을 회복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에큐메니컬 운동의 연합에 대한 참된 대안은
복음의 핵심을 고수하는 모든 사람이 포괄적으로 연합하는 것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이 역사 속에서 이 중대한 연합을 이룰 때
부차적인 진리들로 말미암아 서로 갈라지는 것은
전체 집이 불에 타고 있는 위험 속에 있을 때
가장 좋은 방을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 이안 머리, 『로이드 평전 3』, pp 5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