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쉐퍼드는
존 코튼(John Cotton),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리처드 매더(Richard Mather) 등과 함께 뉴잉글랜드 청교도 일세대 지도적 목사들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초창기에 설립된 교회인 케임브리지 제일 교회와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의 설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반율법주의적 성향을 노출한 허친슨 부인으로 인한 위기 이후 그의 신학은 당시 뉴잉글랜드의 주류 정통으로 간주되었고 그후 여러 세대 동안 뉴잉글랜드 신앙과 신학의 초석으로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쉐퍼드는 1605년 영국 노샘프턴 근처의 토우스터(Towcester)에서 3남 6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부친은 식료품상을 해서 꽤 돈을 번 사람으로 상당히 경건하고 열심있는 신앙인이었다. 어머니도 경건하고 애정어린 분이었으나 토마스가 네 살 세상을 떠낫다. 그래서 그는 사랑없는 계모 밑에서 자라야 했다. 동네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그는 조부모댁, 삼촌 댁 등등으로 옮겨 다니며 자라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얼마 후 부친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큰형의 양육을 받으며 성장햇다. 그 형은 토마스에게 부모와 같았다. 훗날 그는 형이 자기에게 애정을 많이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소학교에 입학한 후 어느 교장 덕분에 그는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학자가 될 자질을 보였다. 그리하여 세퍼드는 열다섯 살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임마누엘 칼리지에 입학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세퍼드는 학생들과 함께 술 자리에서 만취의 경험을 하게 되는 데 이 일 직후 그는 취중에 자신이 보였던 금수같은 행동을 기억하고 혼란과 수치심에 가득 차게 된다. 그는 들판으로 달려가 주일날 종일토록 거기서 숨어 범죄자처럼 떨며 지낸다. 그 죄의 경험은 그에게 그 행위에 디한 통렬한 슬픔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의 극심한 죄성과 그의 모든죄에 대한 회개의 필요성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었다.그것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그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날이었다. 그날 그는 죄와 자신의 길들의 사악함을 매일 묵상하기로 결심한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당대의 가장 유능한 청교도 신학자요 설교자인 존 프레스톤을 만나게 된다. 그는 1622년에 임마누엘 칼리지의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프레스톤의 설교에 의해 쉐퍼드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더 깊고 뚜렷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참지식을 얻고 자기 마음의 감추인 악들과 은밀한 죄들을 보게 되엇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전격적 회심과 갱신을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한다.
어느 주일 저녁, 영원한 유기와 고통에 대한 생각들로 너무 괴로워진 쉐퍼드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다처럼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예상하고 자살해 버림으로써 자기가 가야 할 지옥으로 서둘러 가 버리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끼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 주님이 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영혼의 고뇌에서 벗어나 빛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 그때 그는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사랑을 드러내셨으며 그 모든 광란하는 생각들을 잠잠케 해 주셨다. 이제 그는 영광, 위엄, 신비를 보았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의 눈을 여시고 비참에서 그를 건지셨다. 한때 그의 영혼을 거의 파괴시키고 절망으로 몰아간 그러한 무서운 경험으로 인해 그는 후일 영적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 대한 남다른 동정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체험 후 안정을 얻은 그는 열심히공부해서 케임브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1627, M. A.). 영국교회에서 부제직(deacon)을 얻은 쉐퍼드는 얼스 콜론(Earles-Colne)등 여러 마을들에서 많은 영혼들을 회심시키는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다가 1630년에 주교 라우드(Laud)의 소환을 받는다. 거기서 영국 교회의 의식에 완전한 순응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목회 사역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후 그는 신대륙으로 이주를 결심한다. 추적자들을 따돌리면서 배를 타려 했으나 여러 번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출항에 성공한다. 가족들과 함께 항해 중 여러번 죽을 고비들을 넘기고 쉐퍼드는 1635년 10월 초, 보스턴에 도착한다.
1636년 2월 쉐퍼드는 후에 케임브리지라고 불리게 된 뉴타운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사역을 시작한다. 1636년에 발생하여 그해 말과 이듬해 초에 절정에 달한 소위 '허친슨 논쟁' (Hutchinson Controversy)에서 허친슨 일당의 오류를 규명하고 그들을 추방하는데 중심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뉴잉글랜드 청교도 주류 정통의 확립자가 된다.
1636년, 쉐퍼드는 하버드 대학 설립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버드 대학이 뉴타운에 설립된 이유는 이 지역은 쉐퍼드의 정통적이고 성공적인 목회 영향으로 인해, 당시 보스턴 교회 전체를 위협하고 있던 반율법주의의 위협에서 잘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48년 케임브리지에서 대회가 모여 뉴잉글랜듸 회중교회주의를 명문화한 '케임브리지 강령'(Cambridge Platform)이 기초되었을 때 쉐퍼드는 그 작성에 주역을 담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존 코튼, 토마스 후크와 함께 회중교회제도롤 옹호하고 반석 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가정적으로 그는 불행했다. 1632년 결혼한 첫 아내가 보스톤에 도착 직후인 1636년에 사망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도 죽는다. 재혼한 아내는 토마스 후크의 딸이었는데 그녀도 9년 뒤에 죽었다. 둘째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세 아들 중 첫째 아들은 출산 중 사망했고 셋째 아들도 생후 4개월만에 죽는다. 1647년에 세 번째 아내와 결혼하고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항상 몸이 약했고 창백한 안색의 소유자였던 그는 1649년 9월,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쉐퍼드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는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