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키슬러, 『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부흥과개혁사
1. 청교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생각을 높이 고양시켜 준다.
청교도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까지 높여주며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기에 진실로 합당한 분이심을 보여 준다. 제레미아 버로스는 <복음적 예배>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적당히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약간의 경고를 해야 할 것 같다. 여러분이 청교도를 읽기 시작하면 ‘영적인 의미에서’ 다소 고독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은 읽고 느끼면서 흥분하기 시작하겠지만,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알아 들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참으로 고립될 수 있다. 여러분이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았던 것과 동일한 비전을 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실체는 여러분의 지성으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무한히 벗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여러분은 보통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생각하는 차원의 깊이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이처럼 빈약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책을 거의 읽지 않게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 우리는 지금 글자문화 대신에 시각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사진, 비디오, 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고 작용이 이미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굳이 개념들과 씨름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사진 속에 있는 내용을 해석해 준다. 청교도 시대에는 사상들이 책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책 속에 있는 사상들과 씨름해야 했다.
현대 작가 닐 포스트맨은 <스스로를 속여서 죽음까지 몰고가기>에서 이 내용을 폭넓게 다루었다. 포스트맨은 독서와 사고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 준다. 청교도는 무엇보다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다. 또한 청교도는 위대한 독서가들이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2. 청교도는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청교도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토머스 굿윈, “만일 내가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즉시 떠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는 천국은 내게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천국답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더함, “만일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면 그리스도밖에 다른 모든 것은 전적으로 혐오스럽다.” 우리는 그리스도도 조금, 다른 많은 것들도 조금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를 원하며, 그리스도밖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목사였던 새뮤얼 러더포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의 달콤함은 내게 우주만큼 크다네. 오, 영혼이 가장 높은 하늘만큼 넓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담아 낼 수만 있다면! 수십조 개의 세상과 그만큼 많은 하늘이 있고 그곳이 사람들과 천사들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일세. 그리스도는 생명의 샘이시네. 저 아름답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네.”
3. 청교도는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인생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스도가 만유시고 만유 안에 계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제레미아 버로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분이심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영혼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분임이 확실하다!” 버로스는 마치 그리스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인생의 운명에 대해 한탄하느라 온종일 시간을 허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당신을 만족시키기는 데에는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신성모독인가!”라고 말한다. 프로이드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이미 한 청교도가 현대의 심리적 혼란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
4. 청교도는 삶과 경건에 있어 성경의 충족성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성경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려 주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삶과 경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여러분은 오늘날 사람들이 “나는 자존감을 찾는다” 혹은 “나는 그저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싶다”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을 들어왔다. 그러나 자존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해 좋게 생각해야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발견한 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이사야는 자신이 발견한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과 같이 창조되었다면 어떻게 자존감을 결여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 일대일로 자기의 생명을 교환하신 것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가치이다!
청교도는 성경에 기초한 참된 상담자였다. 그들은 최고의 상담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해석되고 적용될 때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300여년전 아이작 엠브로즈는 <그리스도인 군사>에서 성경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조언을 받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상처 때문에 위로를 얻고자 하는 영혼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의사도 아닌 불신자에게 당신의 질병을 보여준단 말인가? 모든 질병을 고치는 하나님께로 가시라. 하나님은 진정으로 당신을 인도하신다. 바울이 성령에 의해 회심했을 때,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즉시로 하나님께 순종했다. 혈육과 의논하지 마시라.”
하나님은 영혼을 창조하시고 영혼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기에 영혼을 다루는 법을 가장 잘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가장 친숙한 사람들이야말로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들이다. 사실상 청교도는 ‘영혼의 의사’로 불린다. 토머스 왓슨은 <죄는 영혼의 질병이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의사다>라는 논문을 썼다.
5. 청교도는 죄의 본성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를 가르쳐 준다.
6. 청교도는 실제적인 삶에서 우리를 도와준다.
팀 켈러는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생활 지침서>를 ‘이제껏 만들어진 성경적인 상담안내서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패커는 이 책을 기독교 서적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훌륭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켰던 사람의 천재성을 보여 준다. 죄악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던 심리학이라는 용어가 차츰 병든 마음을 고치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심리학은 영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목사들의 손에서 불신자가 대부분인 상담가들의 손으로 옮겨졌다.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연습>은 청교도의 경건생활의 안내서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의 기본 생각은 한 사람의 하루와 인생을 성경을 기준으로 규정해 보자는 것이다. 존 거스트너 박사는 이 책이 청교도 운동을 낳았다고 했다. 나다나엘 래뉴의 <고독, 경건한 묵상으로 향상시키기>는 영적인 묵상에 관한 청교도 작품 중에서 고전으로 손꼽힌다. “여러분이 홀로 있는 시간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묵상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선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시간을 향상시킬 수 있다.” 청교도에게 제11계명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지니라“일 것이다.
7. 청교도는 성경적인 복음전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늘날의 복음 전도는 대체로 인간중심적이다. 그러나 청교도의 복음전도는 하나님 중심적이었다. 오늘날 거의 상실된 하나의 교리가 청교도에게 있었는데 그것은 ‘구도’ 혹은 ‘구원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수단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은 수단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면 나는 누군가가 그리스도에 관한 정통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들어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면 하나님의 정상적인 수단은 그 복음 설교일 것이다.
그가 구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않지만(왜냐하면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구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는 있을 것이다. 청교도는 “만일 여러분이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면, 올바른 마음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을 찾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구도로서 구원을 얻지는 않지만 구도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8. 청교도는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가지도록 도와준다.
고후5:9,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어떤 청교도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미소는 나의 가장 큰 상급이요, 하나님의 찡그리심은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 비슷해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청교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원에 대한 투자가 될 것이다. 제레미아 버로스의 <복음 경외>는 올바른 우선순위에 관한 책으로서, 이사야 66:2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일곱 편의 설교를 담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9. 청교도는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 준다.
솔로몬 스토다드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의 의로 나타나는 것은 든든함> 은 전가된 의에 관한 책이다. 전가된 의와 주입된 의 사이의 영원한 차이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갖는 사람이 별로 없는 오늘날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둘의 입장 차이는 로마와 제네바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과 지옥의 문제이다.
10. 청교도는 성경 말씀의 권위를 높여 준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청교도 거장들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의 권위는 반드시 믿어야 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서, 인간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진리이시고 모든 권위의 원인이신 하나님께만 온전히 의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마28:18-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설교자들이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고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2:15). 우리는 신실한 사역자가 바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다. 토마스 테일러,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엄과 권위가 영원히 보존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듯이 말해야 한다. 말씀의 권위에 저항하거나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서운 죄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꾼들이 거절 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신명기 30:20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동일시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청교도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에서 왔다. 만일 우리가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알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려면, 우리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지런하고도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교도를 읽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다. 사실상 청교도를 읽는 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성인들이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비슷해질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청교도를 읽는 것은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다. 오, 우리가 청교도와 같이 가장 높이 경배하고 찬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 마르투스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