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는 가장 절실한 문제요, 따라서 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양심이 어떤 일을 행하든 머뭇거릴 수밖에 없고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의심에 빠지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동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이 자유의 문제는 의롭다 하심의 가르침에 뒤따라붙는 것이므로, 의롭다 하심의 힘을 올바로 깨닫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진지하게 경외하는 이들은 이 자유에 관한 가르침에서 다른 것과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큰 유익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도, 복음의 진리도, 영혼의 내적 평안도, 절대로 제대로 아는 것이라 할 수가 없다.
의롭다 하심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문제에 있어서는, 율법에 대한 언급이나 행위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다 제쳐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만 매달려야 한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데서 방향을 돌려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무가치하고 불의한 우리들이 어떻게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양심이 어떠한 확신을 얻으려면, 율법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에게 율법이 전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올바른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양심이 율법을 생각하고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계속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권면하고 강권하여 선을 행하도록 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전혀 다른 것이므로, 이 두 가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경건을 향한 일종의 갈망이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인은 거룩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엡1:4,살전4:7,살전4:3).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극하여 순결함과 거룩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과연 무엇을 의지할 수 있을지를 양심이 고만할 때에는, 절대로 율법의 요구들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의 근거로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논지의 거의 전부가 바로 이 문제 하나에 걸려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1-4)
이 구절들은 분명 단순히 의식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무언가 높은 어떤 체계를 말씀하고 있다. 물론 사도 바울이 거기서 구약의 의식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심으로써 폐하여진 율법의 옛 그림자 속에 기독교 교회를 다시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짓 사도들을 반박하는 중에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거론하는 가운데 그는 그보다 높은 문제들을 제시하였고, 바로 그 높은 문제들에 바울의 논지 전체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자가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율법의 정죄 아래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안전 가운데서 안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의 논지가 우리가 다루는 이 문제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갈4:5). 그리고 신자들이 양심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그 자유를 쓸데없이 불필요하게 속박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순종은 율법의 강요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멍에서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자유로운 양심으로 기꺼이 순종한다. 율법의 멍에 아래 매여 있으면 언제나 두려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먼저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지 않고서는 절대로 양심이 자의로 기꺼이 하나님을 순종할 마음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율법은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은 모두 정죄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을 행하여 그 행위 속에 선한 것이 조금은 있다고 인정받고 싶어도, 그 행위가 불완전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바로 율법을 범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율법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우리의 행위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율법의 가혹한 요구나 혹은 율법의 준엄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부르시는 부름을 듣게 되면, 그 부름에 기쁨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될 것이다.
아들은 종들과 다르다. 비록 부모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일을 마치지는 못했지만 자기들의 순종과 마음의 기꺼운 헌신을 부모가 받을 것이라고 믿고 부모 앞에 그대로 내어 놓는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의 섬김의 행위가 아무리 작고, 아무리 보잘것없고 불완전해도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받아주실 것을 분명히 확신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라”(말3:17). ‘아낀다’는 말은 너그럽게 인정하고, 부족함이 있더라도 허물치 않으며, 동시에 그 섬김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확신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런 확신이 없다면, 무슨 일을 한다 해도 결국 헛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선행을 격려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경건한 족장들의 모든 선행들이 믿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말씀하며 그들을 믿음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게 된다(히11:2이하11:17).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그들이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다. 즉, “죄가 너희에게서 완전히 사라졌고 의가 너희 속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혹시 그 남아 있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지 않으실까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고, 따라서 너희의 행위가 율법을 기준으로 판단받거나 평가받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 죄를 지어도 무방하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주장할 권리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95-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