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 - 로이드존스 -
얼마나 영광스럽고 끝없는 주제입니까? 이것이 언제나 신자들을 향한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주님의 연합의 결과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요.
이 주제는 두 가지 주요 항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은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사한 용어들을 말씀드겠습니다. 객관적이라는 말 옆에는 '언약적'이라는 말을 주관적이라는 말 옆에는 '영적'이라는 말을 놓아 보십시오. 지금은 몇 가지 제목만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화 교리를 다룰 때 그 중 일부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조금만 알아보도록 합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언약적이고 객관적인 면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저는 심지어 계속해서 객관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언제나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관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의 느낌을 원하며 그런 느낌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 근거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감정이 사라지면 우리도 불행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객관적인 진리에 근거해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몇 가지 일이 생겨나고 이 일들은 우리의 지위 상태 신분에 영향을 줍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로마서 5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용어입니다 본질상 우리 모두는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만드셨습니다. 그는 언약의 머리입니다.
미합중국의 예를 들어 봅시다 그 나라는 여러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주는 자신들의 주 의회-어떤 의미에서는 주 정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이 모든 주를 포함하는 연방 정부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모든 주는 연방적 연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와 같은 언약적 연합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그가 행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아담이 범죄했기에 우리도 범죄했습니다. 그가 타락했기에 우리도 타락했습니다. 이것이 원죄와 원죄책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 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가르침 사이의 대응관계를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장 6절을 주관적으로 혹은 경험적 의미에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객관적 의미입니다.
내가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그가 못박혔을 때 나도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진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십니다.
로마서 6장 5절에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6장 8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11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모든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이 언약적 관계로 인해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나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십시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하는 바는 비록 우리가 여전히 땅 위에 있지만 언약적으로 그리고 이 관계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10)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 역시 분명히 언약적 진술 법적 혹은 법정적 진술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당황스럽게 여겨지는 분이 아무도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저는 여러분과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로 인해 주저앉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성경의 진술입니다. 물론 이 용어들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어려운 법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집니다.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고리도전서 1장 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 일이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면에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칭의에서 바로 영화로 넘어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은 파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정말로 말해 주고 있는 사실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연합은 인치심을 통해 발생하지만 둘은 분리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한량없이 받으신 성령을 받습니다.
이 연합의 그 다음 결과는 우리가 양자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도의 교리이며 나중에 다룰 것입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양자 됨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양자 됨은 연합의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 사항입니다. 바울이 또다시 로마서 8장에서 논증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상속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광을 받는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이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인한 언약적이고 객관적인 결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관적이고 영적인 결과들 중 중대한 것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과 요한일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이것은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기고 합니다. 얼마나 엄청난 개념입니까!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됩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8:29)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이 세상에 살고 계셨을 때의 모습처럼 변화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처럼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 맏아들입니다.
그 결과 우리도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되고 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마지막 사항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그리고 심지어 그의 죽으심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얼마나 위대한 사상입니까! 우리는 이 일을 성취하고 곰곰히 생각하며 이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감히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의 교리에 대해 이보다 더 훌륭한 진술이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가운데 있는 자신의 고난을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역경의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이것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신비적 연합의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와 같이 신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너무 깊이 묵상한 나머지 그들의 손에 못자국, 즉 성혼이 나타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와 주님 간의 이 연합에 대한 진리를 더 깊이 깨달을수록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더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사53:3)이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으며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및 연합을 가장 민감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상투적인 말을 늘어 놓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그런 말은 순전히 육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고통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와 그들의 상실된 상태 때문에 정말로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혼의 탄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관심과 고통 영혼의 고뇌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세주와 우리가 연합한 것의 주관적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자와 주님 간의 연합이라는 이 놀라운 교리에 눈을 뜨게 하소서 우리가 힘을 다해 이 연합을 상세히 연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의 죽으심을 닮도록 심어졌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상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소서.
우리 모두가 기뻐해야 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되는 연합의 결과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끝없는 주제입니까? 이것이 언제나 신자들을 향한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주님의 연합의 결과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요.
이 주제는 두 가지 주요 항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은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사한 용어들을 말씀드겠습니다. 객관적이라는 말 옆에는 '언약적'이라는 말을 주관적이라는 말 옆에는 '영적'이라는 말을 놓아 보십시오. 지금은 몇 가지 제목만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화 교리를 다룰 때 그 중 일부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조금만 알아보도록 합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언약적이고 객관적인 면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저는 심지어 계속해서 객관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언제나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관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의 느낌을 원하며 그런 느낌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 근거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감정이 사라지면 우리도 불행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객관적인 진리에 근거해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몇 가지 일이 생겨나고 이 일들은 우리의 지위 상태 신분에 영향을 줍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로마서 5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용어입니다 본질상 우리 모두는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만드셨습니다. 그는 언약의 머리입니다.
미합중국의 예를 들어 봅시다 그 나라는 여러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주는 자신들의 주 의회-어떤 의미에서는 주 정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이 모든 주를 포함하는 연방 정부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모든 주는 연방적 연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와 같은 언약적 연합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그가 행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아담이 범죄했기에 우리도 범죄했습니다. 그가 타락했기에 우리도 타락했습니다. 이것이 원죄와 원죄책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 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가르침 사이의 대응관계를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장 6절을 주관적으로 혹은 경험적 의미에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객관적 의미입니다.
내가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그가 못박혔을 때 나도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진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십니다.
로마서 6장 5절에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6장 8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11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모든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이 언약적 관계로 인해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나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십시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하는 바는 비록 우리가 여전히 땅 위에 있지만 언약적으로 그리고 이 관계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10)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 역시 분명히 언약적 진술 법적 혹은 법정적 진술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당황스럽게 여겨지는 분이 아무도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저는 여러분과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로 인해 주저앉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성경의 진술입니다. 물론 이 용어들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어려운 법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집니다.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고리도전서 1장 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 일이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면에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칭의에서 바로 영화로 넘어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은 파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정말로 말해 주고 있는 사실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연합은 인치심을 통해 발생하지만 둘은 분리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한량없이 받으신 성령을 받습니다.
이 연합의 그 다음 결과는 우리가 양자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도의 교리이며 나중에 다룰 것입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양자 됨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양자 됨은 연합의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 사항입니다. 바울이 또다시 로마서 8장에서 논증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상속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광을 받는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이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인한 언약적이고 객관적인 결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관적이고 영적인 결과들 중 중대한 것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과 요한일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이것은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기고 합니다. 얼마나 엄청난 개념입니까!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됩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8:29)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이 세상에 살고 계셨을 때의 모습처럼 변화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처럼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 맏아들입니다.
그 결과 우리도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되고 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마지막 사항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그리고 심지어 그의 죽으심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얼마나 위대한 사상입니까! 우리는 이 일을 성취하고 곰곰히 생각하며 이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감히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의 교리에 대해 이보다 더 훌륭한 진술이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가운데 있는 자신의 고난을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역경의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이것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신비적 연합의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와 같이 신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너무 깊이 묵상한 나머지 그들의 손에 못자국, 즉 성혼이 나타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와 주님 간의 이 연합에 대한 진리를 더 깊이 깨달을수록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더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사53:3)이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으며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및 연합을 가장 민감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상투적인 말을 늘어 놓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그런 말은 순전히 육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고통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와 그들의 상실된 상태 때문에 정말로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혼의 탄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관심과 고통 영혼의 고뇌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세주와 우리가 연합한 것의 주관적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자와 주님 간의 연합이라는 이 놀라운 교리에 눈을 뜨게 하소서 우리가 힘을 다해 이 연합을 상세히 연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의 죽으심을 닮도록 심어졌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상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소서.
출처: 포도나무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