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 적 용
12장, 참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
만약 거듭남이 내적인 변화, 생명의 원리, 마음 속에 주입된 법, 영혼 속에 심어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1. 세상에는 참된 새로운 피조물들이 너무 적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나이가 들어서 장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노년에 이르도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하고 있을까요? 옛 본성이 아직까지 강하게 역사하고 있고, 사망의 몸이 이삼십 년 전보다 더 강하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월은 변했는데,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1) 비속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시나무가 포도나무로, 찔레가 무화과나무로 간주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죄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할례 받은 것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2:11). 즉 그것은 육신이나 자연적인 몸 속에 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죄의 몸을 벗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육신의 몸을 버리지 못한 자들은 그 몸의 모든 지체들 속에 활동하는 죄의 몸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적인 피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옥의 피조물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러한 사람들 속에 있겠습니까? 그들은 참지 못하여 자신을 더럽히지만, 그분은 거룩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불명예와 다른 사람의 영혼의 파멸을 위하여 힘쓰지만, 그분께서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대조해 보면,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옥 가까이에 있습니다. 죄를 단순히 한 번 껴안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본성의 빛을 거스르는 욕정일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과 권위, 그리스도의 본성을 모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거룩하시고 흠 없으시고, 죄와 죄인들과는 다르셨던 그분을 닮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2)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 새창조의 증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용하는 언어를 고치기도 하고, 혹은 행동을 바꾸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기 저기 한두 사람 정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을 입에는 올리지만, 그 마음에는 실제로 사탄의 형상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습니다. 종교 교육을 통해서 사람의 뜻으로 태어났을지는 몰라도, 영적인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결국 은혜가 없는 기독교, 거룩이 없는 믿음,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는 아닙니까?
거듭남에는 믿음, 사랑, 그리고 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마치 어떠한 특성이 그 형태를 의존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은혜를 의존합니다. 새창조가 이루어지는 곳마다 이러한 특성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새로운 피조물도 없습니다.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이를 수는 있겠지만, 거듭남이 없다면 그곳에 들어갈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닮은 사람들에 대한 소문들이 어떻게 이렇게도 적은 것일까요! 하늘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열심히 어떻게 이렇게도 적은 것일까요! 이러한 움직임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편안히 누워 있습니다.
2. 종교적 소신의 변화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신조의 변경, 신학적 의견의 변화가 새 피조물이 되었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로 종교를 바꿨다고 해서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통한 교제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자마다’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구원얻는 믿음을 교리적으로 동의하는 것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새창조를 의견의 변화, 곧 진리에서 오류로, 아니면 오류에서 진리로 그 의견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지 머리 속에서의 변화일 뿐입니다. 새창조의 변화는 마음에서의 변화입니다. 전자는 의견의 변화이고, 후자는 정서의 변화입니다. 전자는 지성을 완성시키지만, 후자는 지성과 의지, 나아가서 영혼 전체를 완성시킵니다. 진리의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진리의 성령에 의해서 되살아난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오류에서 진리로 돌아섰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에 대한 미음의 틀이 바뀌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참되게 변화된 사람과는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는 복음이 영혼의 활동이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순결하게 하며, 또한 방향을 제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가진 자는 위대한 일을 떠벌리겠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그것을 실천합니다. 위대한 일을 상상만 하는 것은 열매가 없이 잎만 무성한 것과 같습니다. 백향목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그림자 아래에서 쉴 수 있게는 해 줄지라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채워 줄 열매는 없는 것입니다.
3. 도덕의 변화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도덕적 신실함, 큰 범죄를 짓지 않는 것 등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를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성의 법에 묻어 있는 약간의 먼지를 떨어내긴 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은혜의 법의 글자가 하나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는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영혼 속에는 사탄의 형상이 더욱 깊게 새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1) 도덕은 가치 있는 것입니다
도덕은 사람들 사이에서 필요하고도 적절한 일입니다. 도덕은 인간 사회에서 아름답고 자연적인 양심에 흡족하며, 몸에 안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도덕이 없다면 세상은 정신병동이나 푸줏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친절함, 정의, 자비, 사랑, 동정 등은 유용하며 권할 만한 일입니다. 우리 구주께서도 그러한 일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로 영원한 상급을 주실 정도로 그렇게 사랑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2) 도덕의 면류관을 썼다고 하더라도 보좌에 앉지는 못합니다
도덕은 흥미로운 그림이고 유쾌함을 주는 묘사이며 유용한 착상이긴 하지만, 생명을 주는 원리는 아닙니다. 전구는 환하게 빛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별은 아닙니다.
은혜에 속한 왕관을 도덕의 머리에 씌어 놓고, 그것을 새창조의 보좌에 걸맞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도덕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본성을 증진시키지만, 거듭나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원리가 없는 아주 잘 그려진 그림입니다. 외적으로는 닮았지만 내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생명을 전달해 주는 면에서는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1) 도덕의 변화가 사망의 몸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도덕의 변화는 외적으로 화려한 것들을 잘라 내지만, 내적인 뿌리를 잘라내지는 않습니다. 악취와 부패는 제거하지만, 죽음을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향료 처리가 된 시체는 비록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향료 처리를 하지 않아서 썩은 시체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죽은 것입니다. 도덕적 변화는 죄의 능력을 제거하거나 부패한 본성을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7,18)
아담 속에 본성의 빛을 거스르는 부도덕함이 원래 있었습니까? 그는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구체적으로 주어졌던 금령을 어겼습니다. 그는 술에 취했던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했던 것도 아니며, 험한 욕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의 큰 죄는 마음의 교만과 불신앙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외적으로 행한 죄악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담이 그러했듯이, 외형적인 더러운 죄들은 없지만 마음속에는 영적인 죄악들이 쌓여 있습니다. 참된 의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새 아담도 없고, 살리시는 성령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도덕도 아담을 더 이상 낙원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떠한 도덕도 우리를 낙원으로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2) 최상의 도덕이라도 새창조가 없으면 육에 그칠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모든 사람들은 육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최고의 수준이지만, 아직 영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물이 펄펄 끓어도 그것은 여전히 물입니다.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도덕도, 단지 정제된 육으로서 좀 더 고상한 형태의 옛 본성일 뿐입니다. 여전히 이전처럼 생명이 없습니다. 옛 본성이 조금 고쳐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가 그 영혼에 형성된 것입니다. 도덕적인 덕은 피부에 덧칠한 것일 뿐이지만, 새롭게 하는 은혜는 마음을 살아나게 합니다. 전자는 외적인 행동을 변화시킬 뿐이지만, 후자는 내적인 정서를 변화시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려냅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별과 같이 빛나고, 또 어떤 사람은 좀 약하게 빛납니다. 그러나 모두 빛의 본성, 주님 안에 있는 빛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됩니다. 그것처럼, 도덕적 덕성의 면에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모두 육의 본성이라는 면에서는 공통된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요3:6). 니고데모나 유다, 모두가 육적인 사람입니다. 그 정욕이 좀 더 세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동물적인 생명일 뿐입니다.
(3) 도덕과 새창조는 근본이 다릅니다.
도덕과 새창조는 그 출생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어야 합니다. 도덕적 덕은 인간의 노력과 반복적 실행에 의해서 얻어집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주입된 습관입니다. 그것은 자연적 본성의 줄기에서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고, 그 본성의 능력으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자연의 습관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공통된 은총의 열매이지만, 은혜의 습관은 특별한 은총의 열매입니다. 전자가 자연의 빛이 깨어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 자연의 빛 위에 영적인 빛과 사랑이 비춰지는 것입니다. 전자는 양심의 작동에 의해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면, 후자는 성령의 숨결에 의해서 사망 가운데서 깨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4) 도덕은 행동에 국한된 것이지만, 새창조는 모든 면에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도덕이 부분적으로 육을 깨끗하게 만든다면, 새창조는 육과 영, 모두를 깨끗하게 합니다. 전자는 손발로 옳은 일을 행하게 한다면, 후자는 마음을 청결하게 합니다. 전자는 몸을 씻는 것이라면, 후자는 영혼의 모든 부분을 씻어 내는 것입니다. 전자는 어떠한 불법적인 행동을 그만두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새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찌니라”(겔18:31) 전자는 육의 추잡한 일들을 집어던지는 일이라면, 후자는 성령의 열매를 낳는 새로운 뿌리입니다.
(5) 그 직접적인 원리와 경향에 있어서 새창조와 다릅니다.
도덕은 말씀을 듣고 외적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어떤 이들은 일시적으로 새로운 말씀의 빛을 따라서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창조는 하나님의 율법과 뜻을 잘 판단하여 진심으로 시인하면서 행합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분께서 재공하시는 그 무엇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자신이 도덕적으로 신실하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단정 짓지 마십시오. 어떠한 덕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참된 은혜를 받은 덕은 아닙니다. 당신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또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은혜들은 그 뿌리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배아적인 원리로 숨겨져 있지만, 때가 되면 나타날 것입니다. 더 위대한 덕이 덜 위대한 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덜 위대한 덕이 더 위대한 덕을 보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죄를 억제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의 증거가 아닙니다
단지 억제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억제하는 은혜와 새롭게 하는 은혜는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막는 것입니다.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창20:6). 반면, 후자는 전자를 배경으로 해서 자유의 영으로 살리는 것입니다.
억제는 국가공무원의 손에 있는 법률 때문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자들이 모든 죄를 증오하고 있습니까? 외적인 것에 그치는 억제함은 거듭남의 증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지옥에 가 있는 자들은 그들이 지상에서 즐겼던 쾌락을 제한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상태가 바뀐 것이지, 기질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지옥에서 놓임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내적인 변화 없이 똑같은 기질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처벌들이 본성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온 머리가 멍들고 온 마음은 피곤한 상황에서는 죄악들을 행할 힘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곧 힘이 회복되면 이전보다 더욱 악한 짓을 하게 됩니다. 억제함의 가장 좋은 효과는 죄를 더욱 조심스럽게 경계하는 것일 뿐입니다. 죄를 짓는 행위가 비록 억눌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 습관은 여전히 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5. 깊은 우울증이나 감정의 돌발적인 표출은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가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는 하나의 습관이며, 마음에 쓰인 법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아픔이나 갑작스러운 감정이 아닙니다. 상상 속에 떠도는 것이나 순식간에 불타 버리는 열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본성이며 신적인 체질로서, 모든 기능적 구조 위에 작용입니다. 지성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의지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고, 정서의 안정되고도 지속적인 불길로 그 분을 향하여 제단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께 일치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자아 전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빨리 없어져 버릴 공상의 결과이거나 우울한 기분으로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그 영혼이 변화되어서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몸의 체질에 의해서 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 감정들은 습기가 많은 기후에서는 대리석처럼, 땀을 흘리는 듯하지만 여전히 단단합니다. 감정에만 작용하는 것은 스폰지에 물을 적시는 것과 같아서, 쉽게 물을 빨아들이지만 조금만 눌러도 물이 빠져 버리게 됩니다.
은혜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지 않으면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감정이 충동적으로 일어났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의 행사는 갑작스러운 충동이나 우울증적인 변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심정과 정신, 그리고 의지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안정된 감정은 새로운 피조물인지 아닌지를 편단하는 아주 좋은 특성이 됩니다.
6. 새로운 피조물은 탁월합니다
새 피조물은 얼마나 탁월한 것일까요? 그것은 신적인 본성을 갖는 변화이며, 하나님을 닮는
것이고, 해 아래 가장 위대한 도덕적 변화보다 더욱 탁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변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숙의 과정에서 더욱 영광스러워지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손길로 역사하셔서 그것을 완성하실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워질 것입니다.
새 창조는 옛 창조보다 더욱더 탁월합니다. 은혜가 자연보다 뛰어나고 그리스도가 아담보다 탁월한 것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한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한 일입니다. 신적인 아름다움을 갖는 것,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모든 은혜에 있어서 조화를 이루는 것보다 더 탁월함이 있겠습니까? 자연적인 소질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그 탁월함에 있어서 거듭난 사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연적인 소질을 가진 자는 “신의 성품(본성)에 참예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7. 새로운 피조물은 존중을 받고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다음으로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형성하신 것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사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다음으로, 우리가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세상에 파송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무시하는 자는, 그들을 만드시고 새기신 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와 비슷한 것만을 사랑합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복사본은 원형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닮은 부분이 더 많을수록 세상에서는 더욱 멸시당하며 조롱당하게 될 것입니다.
8. 새로운 피조물이 지은 죄는 중히 취급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다면, 거듭난 사람들의 죄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욱더 심각한 것입니다. 사실 새로운 피조물도 죄를 지을 수 있고, 또한 짓고 있습니다. 새사람이 그 모든 지체들과 본질적이고도 통합적인 부분들과 더불어서 그 안에서 지음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망의 몸은 여전히 그 모든 지체들과 함께 죄의 온상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게 된다면 자연인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죄를 짓지만, 거듭난 사람은 그의 마음 속에 새롭게 형성되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성령의 작품에 오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고상한 그 작품의 목적을 망쳐놓는 것이며, 성령의 전에 도적을 들여놓은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도록 더 나은 가르침을 주셨던 성령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는 당신에게 더 깊은 슬픔을 주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근심은, 새로운 피조물 속에 있는 불변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영과 닮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근심은 회개를 가져 옵니다.
스테판 차녹, 바로 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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