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회개 (The Repentance of Believers) 막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 설교는 1767년 5월 24일 Londonderry에서 )
(조종남 역 "존 웨슬레의 설교선집" 7번 쪽, 구미중앙교회 김성호성도 타자)
① 회개와 믿음은 기독교의 입구(gate)에 불과하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회개와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기 시작할 때나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코스를 시작함에 있어서만 필요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사도에 의하여 확인된 것 같습니다. 그는 히브리 신자들에게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권면하면서 그들에게 가르치기를 먼저 이런 "그리스도의 도의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터를 다시닦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다음의 사실을 의미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기 위해 처음에 가졌던 모든 생각을 순차로 버려야 한다"는것입니다.
②그리스도인의 생활, 특히 그 시작에 있어서 더욱 필요한 것이 회개와 믿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회개라 함은우리들의 심한 죄성(罪性), 죄책(罪責), 무력함에 대하여 깨달아 아는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즉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나라가 우리 생에 임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곧 회개는 믿음에 선행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라 함은 우리가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 곧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롬 14:17)을 받아들이는것입니다.
③그렇지만 우리가 "복음을 믿은'(막 1:15) 후에도 필요만 회개와민음이 있습니다(물론 이 때에는 이 말들이 앞서 사용했던 의미와는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입문 단계에 들어선 후에도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안으로서의 생활의 모든 단계에서 계속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앞에 놓여진 경주를 달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먼저 말한 그 '회개와 믿음' 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은총 안에 계속 머무르며 성장하기 위해서도 이 '회개와 믿음' 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은 후에도 계속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장 주의깊게고려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1]
먼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까?
(1) 회개는 흔히 하나의 내적 변화 곧 죄에서 거룩하여지는 마음의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의미에서 밀하고있습니다. 곧 일종의 자아인식으로써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다고 해도 죄에 대해 책임이 있고 무력한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2)진실로 우리가 이것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 즉 죄인이 되었던 우리들이 예수님의 보혈에 의한 구속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처음으로 비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이어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우리의 죄는 가리워질 뿐 아니라 멸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악을 느끼지 않을 때 아무 악도 없는 것이라고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생각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악은 그 때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하여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입을 때 전적으로 성화되는것이라고 믿고 성경이나 이성이나 체험에 반대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죄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입을 때에 멸절된다고 전적으로 믿으며 또 이것을 열심히 주장합니다. 신자의 마음 속에는 죄가 없으므로 그 순간부터 온전히 깨끗하다고합니다.
우리는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만, 그들이 자기 마음 속에있는 죄에 대하여 느끼지 않고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곧 죄가지배하지는 않지만 아직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이 죄에 대하여 깨닫는 것이 우리가 지금 말하는 '회개' 에 속하는 커다란 한 가지 사실입니다.
(3) 왜냐하면 모든 죄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얼마 안 가서자기 마음 속에 아직도 자만(自慢)이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러 면에 있어서 자기가 마땅히 생각하여야 할 것보다 자기를 더 높이 생각하고 또한 남에게 받은 칭찬을 스스로 취하고 마치 그것을 받지 아니한 것처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기가 아직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 확신을 내버릴 수도 없고 또한 내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아직도' 그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증거하고 계십니다.
(4) 또한 그는 얼마 안 가서 자기 마음 속에 고집(self will) 곧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한 의지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의지란 인간에게 이해력이 있는 한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 곧 참으로 지각있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정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은혜로운 주님께서도 사람으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은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간 의지는 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리고어떤 경우에든지, 아주 심한 환난 중에서도 우리 주님께서는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도 언제나 그렇게 하지는못합니다. 사람은 종종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어느 정도 높이곤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지만 사람은 자기 성질에 맞기 때문에 하고자 합니다. 또 어떤 것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데도 자기에게 고통이 되므로 행하기를 싫어합니다. 진실로 이런 사실은 그가 믿음 안에 머물러 있어 전력을 다해 싸운다손 치더라도 죄가 여전히 존재하며 또한 그가 이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 고집은 자만과 마찬가지로 우상의 일종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반대됩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참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그들 마음 속에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이런 것을 많은 경우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에 '사망에서 생명으로옮겨졌을때' 그는하나님 외에는아무 것도 더 원치 않았던 것이 시실입니다. 그는 진실로 다음과 같이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소원은 주님에게만 있고 주님의성호를 기억하는 데 있나이다."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없나이다"(시 73:25).
그러나 항상 그렇기는 못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간일지는모르지만 그는 다시 '육신의 정욕'이라든지 '안목의 정욕' , '이생의 자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요. 만일 계속하여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정욕이 다시 살아남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정욕은 그를 타락시키려고 고통을 줄 것이며 마침내는 그를 무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는 과도한 애정 즉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욱 사랑하고자 하는 강한정욕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 피조물이란 자녀나 부모나 남편이나아내 또는 자기 영혼처럼 가까운 친구일 수 있습니다. 그가 이 땅의 것이나 향락을 사랑한다는 것은 천 번이고 여러 가지 면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 만큼 그는 하나님을 잊고서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구하지 않으며 마침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향락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될것입니다.
(6) 신자는 매순간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다시 안목의 정욕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크고 아름답고 또는 귀한 것을 생각하는욕망을 만족시켜 보려는 정욕입니다. 얼마나 여러 모양으로 이 정욕이우리 영흔을 공격해 옵니까? 아마도 우리는 의복이라든가 가구라든가하는 이런 사소한 것으로 불멸의 영혼을 만족시켜 보려고 계획하지는않을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올 세상의 능력들을 맛본 후일지라도 쓰고나면 없어지고 마는 것들에 대한 어리석고 저열한 욕망에 또 다시 빠지는 수가 흔히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를 잘 알고있는 신자들일지라도 이 '안목의 정욕'중 한 가지에 불과한 '호기심' 을 발로 짓밟으며 정복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단지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호기심을 갖게 되는 마음을 정복한다는 바로 그한 가지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7)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이생의 자랑을 온전히 정복한다는 것이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사도 요한은 이 말을 세상에서 말하는 '명예욕'과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에서 오는 명예를 좋아하고사모하는 것, 즉 칭찬에 대한 욕망과 사랑인데 그것은 항상 세상 사람의 비난에 대한 공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것과 병행되는 것은 악한 수치(evil shame), 즉 우리가 마땅히 영광으로 삼아야 할 일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써 우리 영혼에게 천 가지의 올무를 가져옵니다.
진정 믿음이 강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속에 이런 악한 성질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졌으나 이는 부분적으로 못박힌것입니다. 이 악의 뿌리가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8) 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대하거나 혹 이웃도 사랑하지 않으려는 다른 성정들이 우리에게 있음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사랑을 가진 사람은 이웃을 해칠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질투, 그릇된의심, 근거없는 의심, 이치에 맞지 않는 의심, 이런 것들을 느껴본 적이 없으십니까? 이런 면에서 깨끗하신 분이 있다면 먼저 돌을 들어 그의 이웃을 치라고 하십시오! 형제 사랑과 반대되는 이런 성정을 때때로 느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만약에 악과 증오와 무자비가 없다면 어떤 시기도 없는것입니까? 특별히 우리가 원하지만 할 수 없었던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사람을 시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해를 당하고 모욕을 당했을 때,특히 우리가 각별히 사랑했고 도와 주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아끼지않았던 그런 사람에게서 해를 받고 모욕을 당했을 때 분노를 느끼지않습니까?
우리 속에서 이치에 어긋나고 감사를 모르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복수를 하도록 우리를 자극하지 않습니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대신악을 악으로 갚으라는 충동을 받지 않습니까? 이것을 볼 때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이웃에 대한 사랑에 반대되는 성정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9)탐심도 그것이 어떤 종류, 어떤 정도의 것이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분명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원어로 '필라르구리아' , 곧 돈을 사랑한다는 말로 '만악의 뿌리' 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플레오넥크시아' 곧 더 많이 가지고자하는 욕심 또는 재물을 늘리려는 욕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는 반대되는것입니다.
비록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지만 이런 데서부터 전적으로자유를 얻은 사람이 얼마나 적습니까! 물론 위인 마틴 루터는 이렇게말하곤 했습니다. 곧 자기는 속에 어떤 탐심이고 거듭난 이후만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도 가지고 있지 않노라고. 그렇다면 여자에게서태어난 사람치고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예수님은 제외하고) 탐심을안 가지고 있었고, 또 탐심 없이 태어난 사람은 루터 단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나는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도 그가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이 탐심을 조금이라도, 특히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탐심이 자만, 고집, 분노와 함께의롭다함을 입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인정할 수 있습니다.
(10) 많은 진지한 사람들이 로마서 7장 마지막 부분을 율법 아래에놓여서 죄를 깨닫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지 않고,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의롭다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라고 이해하게 된 것은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말하였으리라고 보는데) 틀림없이 위에서 말한 것같은 체험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곧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육신에 속한 마음이(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에게 "너희는 육신에 속하였다"고 하였듯이) 남아 있습니다. 즉, 타락의 경향성이 있는 마음, 아직도 계속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려는 마음이며 자만. 고집, 분노, 복수심, 세상사랑 또는 온갖 악을 사랑하는 그런 성벽인 것입니다. 환언하면, 순간이라도 굴레를 벗기면 곧 솟아 오르려는 '쓴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것입니다.
이런 부패성은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밝은 빛이 없으면 알 수도 없을 만큼 깊습니다. 신자들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를 깨닫는 것이바로 의롭다함을 입은 신자들에게 속하는 회개입니다.
(11)죄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으면 그 죄가 또한 우리들의 모든 말과 행실에 나타나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말들이죄와 섞여 있을 뿐 아니라 그 말들 자체가 전적으로 죄성을 띠고 있음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 말은 의심할 것도 없이 사랑이 없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형제 사랑에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황금률과 일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말은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이요,고자질하는 것이요, 온갖 수군거리는 것이요, 악담하는 것, 즉 사람이없는 데서 그 사람의 흠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당사자가 없는 데서 그 사람의 흠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점에 있어서 신자들 중에 범죄함이 없는 사람은 적지 않겠습니까? "죽은 자와 현재 없는 자에 대하여서는 좋은 것만 말하라"고 하는 옛 사람의 도덕률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설사 그렇게 행한다고 해도 또한 무익한 말들을 안 하고 삽니까? 이 모든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죄된 것이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말하는 무익한 말도 후일 심판의 날에는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12)그러나 저들이 계속하여 깨어서 기도함으로써 이런 시험에 빠지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저들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입술을지키며 행동하고 그들의 모든 말을 은혜 안에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히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그들이 온갖 주의를 다한다고는 하지만 매일 무익한 변론에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빠져드는 일이 없겠습니까? 저들이 하나님을 위하여서 말하고자 노력한다고 하지만 과연 불결한 것이 전혀 없는정결한 말들입니까? 그 동기에 있어서 그릇된 것은 전혀 없습니까? 저들이 지신들을 위해서는 조금도 말하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만 말합니까? 자기의 뜻은 조금도 행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전적으로 행하고자 합니까? 또한 저들이 처음에는 오직그리스도만 바라봄으로 시작하였는데, 계속해서 이웃 사람들과 담화할 때에도 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하고만 이야기합니까? 저들은 남의 죄를 책망할 때 죄인에 대하여 분노를 나타낸다든가불친절한 기분을 느낀다든가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까? 어떤 무지한자를 훈계할 때 자만하거나 자기를 좀더 낫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저들이 고통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할 때. 또는 서로 사랑하고 선한 일을하라고 권장할 때 속으로 '지금 너는 말을 참 잘하였다' 고 자찬하는 일은 없습니까? 또 어떤 허영, 가령 남들도 응당 그렇게 생각해야 하고또한 그렇게 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리라는 허영된 생각은 하지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에 신지들의 최선의 말에도 죄가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있습니까? 이런 것을 깨닫는 것이 의롭다하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속하는 회개의 또 다른 면입니다.
(13)저들의 양심이 철저히 각성되어 있다면 행동에 고착된 죄를 얼마나 많이 인식하겠습니까? 행동으로는 세상이 정죄할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판단한다면 칭찬받을 수 없으며 또한 변명할 수도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들의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아닌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 행동 가운데는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는 것, 즉 하나님을 고려하지도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행동 가운데는 하나님께만 마음을 쏟는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자신을 더 기쁘게 하기 위하여 행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자 할 때에 어떤 옳지 못한 성정을 느끼지는않았습니까? 그런 까닭에, 저들이 소위 말하는 선한 행동이라는 것은엄격히 말해서 악에서 완전히 떠나고 자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저들의 경건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저들이 사람의 영혼을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들을 때 종종 구원보다는 정죄를 받게 되지나않을까 두려워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공중기도나 개인기도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자 할 때 종종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가장 엄숙한 예배에 참여하였을 때. 또는 성만찬에 참여하였을 때 어떤 생각이마음 속에 떠오릅니까? 어떤 때는 마음이 땅 끝까지 방황하고 있지는않습니까? 때로는 제사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바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질 때는 없습니까? 그러므로 저들은 지금 가장 악한 죄에 대하여부끄러워 했던 것보다 더욱 자기들의 최선의 의무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것입니다.
(14)또한 저들은 얼마나 많은 태만의 죄(sins of omission)를 짓고있습니까! 우리는 사도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그러나 저들은 원수들에게나 나그네에게나 형제들에게 육신에 관해서나 영혼에 관해서 선을행할 수 있었지만 행하지 않은 예가 무수히 많았음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너무도 태만했던 것에대해 그들은 얼마나 많은 죄책을 느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듣는 일에 있어서, 또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얼마나 많은 기회를 소홀히 여겼습니까? 그러므로 성인(聖人) 어숴 감독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수고를 마친 뒤 거의 죽어가는 숨소리와 함께 "주여! 나의 태만의 죄를 용서하소서 !" 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15)그러나 이런 외적인 태만 외에도 저들 속에 있는 내적 부족을 수없이 많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과 신뢰를 찾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이웃과 모든 사람에게마땅히 가져야 되는 사랑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들의 형제와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을 멀리 떨어져 있는이에게나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마땅히 가져야 할 어느 정도의 거룩한 성정도 없으며 모든일에 있어서 부족합니다.
이런 것을 깊이 의식하는 가운데 M. De 렌티와 함께 "나는 가시로가득 뒤덮여 있는 땅입니다"하고 외칠 지경입니다. 아니, 욥과 함께"나는 미천하도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하고 외칠 지경입니다.
(16) 저희들이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속하는 회개의 또 다른 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심스럽게 또는 각별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 곧 그리스도를 믿고 그신앙이 주는 힘으로 육신을 좋지 않고 영을 좋아 행하는 자들에게는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믿기 전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를 지금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앞서저기른 사건으로 인하여 죽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속하시는 보혈이 아니었다면 저들은 절대적으로 정죄를 받았을 것입니다. 정죄는 저들에게서 옮겨졌지만 저들은 아직도 당연히 받아야 마땅하다고 철저히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의 극단이 있습니다(이 양 극단을 피해 나가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이 두 가지 극단에 빠져 실은 정죄 받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정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는 마땅히 정죄에서 벗어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어느 편이로든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 중간에 있습니다. 엄격히 말한다면 저 사람들은지옥의 저주를 받기에 마땅하지만 그 저주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희를 위한 대언자를 가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그리고 그의 중보의 기도는 계속해서 저들과 정죄 사이에 있는 까닭입니다.
(17) 저들이 무력함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또 다른 면입니다. 이 무력하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로, 이는 저들이 의롭다하심을 입기 전에 스스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거나, 선한 것을 원한다거나, 선한 말을 하며 선한 일을 하나도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지금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아직도 자신의 힘이란 어떤 좀류, 어떤 정도의 것이건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즉 선을 행하고 악을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나 마귀, 아니 자신의 악한 성질에조차 대항하고 정복할 능력이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들 자신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죄가 저들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원수를 정복시킬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힘도 전부이든 일부이든 간에 자연에서 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저들이 여러 해를 위하여 곡식을 곡간에 쌓아 두듯이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주어지는 힘입니다.
(18) 둘째로, 신자가 무력하다는 말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바 죄책이나 형벌로부터 지신을 도저히 구출할 수 없는 절대 무능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모든 은혜를 (우리의 자연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도 거듭난 자들의 마음 속에 아직 남아 있는, 곧 우리가 실험적으로 남아 있는 줄로 아는자만과 고집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분노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려고 하는 일반적인 성벽 중 어느 하나도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없애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모든 말과 행동에 고착되어 있는 악을 없앨 수 없습니다.
나아가, 무력하다는 것은 사랑이 없는 무자비한 말이나 무익한 말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무능력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태만의죄를 안 지을래야 안 지을 수 없는 무능력,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없이 많은 부족, 특별히 사랑의 부족,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가져야 할올바른 성정에 있어서 결핍 등을 보충할 수 없는 무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19) 만약에 이에 만족하지 않는 분이 계시면, 즉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마음과 생활에서 이런 죄들을 없앨 수 있다고믿으시거든 실험을 해보십시오. 과연 이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자만이나 고집이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갖게 되는죄를 내쫓을 수 있는가 없는가 실험해 보십시오, 평상시 쓰는 말이나생활 속에서 악을 깨끗이 제거할 수 있는지, 또는 모든 태만의 죄와 함께 섞여 있는 무자비하고 합당치 않은 말들을 피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자신 속에 있는 무수한 부족을 채울 수 있는지 없는지시험해 보십시오. 한두 번 시험해 보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시험해 보십시오. 오랫동안 해 보면 해 볼수록 이 모든 면에서 아주 무력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20)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멀리 흩어져 있고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의견을 같이 하고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위를 죽이며 안과 밖의 죄를 정복하여서 우리의 원수를 매일매일 약화시킬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완전히 내쫓을 수는없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을 때 받은 은혜를 가지고 그것들을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깨어서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마음과 손을 전적으로 깨끗이 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할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 번, 곧 두 번째로 "깨끗하여져라!"하고 말씀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 때에만 그 문둥병은깨끗하여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만 그 악의 뿌리, 육신의 마음은 멸절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이 생래(生來)의 죄는 멸절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두 번째 변화가 없다면 곧 의롭다하심을 입은후에 오는 즉각적인 구원이 없으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점진적인역사(이 역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외에 아무 것도 없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이 많은 죄가 남아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책을 가지고 형벌을 받을 자로 남아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죄가 우리 마음 속에남아 있어서 우리의 말과 행동에 고착되는 한 죄책, 즉 형벌 받아야 할당연성이 우리에게서 옮겨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니,그분의 엄격한 공의 안에서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계속적으로 죄책을 증가시키는 까닭입니다.
[2]
(1) 이런 뜻에서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은 후에도 회개를 하여야 하는것입니다. 회개를 하기 전에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병을 깨달을 때까지는 그 병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면 그 때 우리는 복음을 믿게 됩니다.
(2) 이것 또한 각별한 의미에서 곧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하여 믿은것과는 다른 뜻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민을 위하여마련하신 큰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의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음"(히 7:25)을전적으로 믿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에서 당신을 구원하실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말과 행실에 고착된 모든 죄에서 당신을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태만의 죄에서 당신을 구원하시며 당신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보충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나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God-Man)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 어려운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미 약속하셨으매 그가 행하시며 또한이루시리라는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는 그의 능력이 충분한 근거가 되는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강력한 말씀으로 거듭거듭 약속하셨습니다. 지극히 크고 귀중한 약속을 구약과 신약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장 오랜 계시의 말씀인 율법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라"(신 30:6)고 하셨습니다.
또한 시편에도 "그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그들의 모든 죄에서 구속하시리라"(시 25:22)고 하셨고, 선지서에서도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움에서 구원하리라"(겔 36:25 이하)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불을 일으키셨으니 ··· 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를이루어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눅 1:68 이하)고 하셨습니다.
(3) 그러므로 당신은 이 약속을 믿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 일을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쁨으로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온갖 불결한 데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지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지금 특별히 필요로 하는 믿음입니다. 즉 위대한 의사이시며 내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께서 나를지금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내일 하시고자 하십니까, 오늘 하시고자하십니까? 주님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오늘날 너희가 내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만일 이를 내일로 미룬다면 마음을강퍅케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음성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당신을구원하시고자하는것을믿으십시오. 주님께서지금 여러분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라."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깨끗하여지라." 믿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곧 알게될 것입니다.
(4) 당신을 사랑하여 자기 지신을 주사 나무 위에서 당신의 죄를 자기 몸에 친히 담당하신 예수님을 계속하여 믿으십시오. 그는 항상 효력이 있는 그 보혈로 당신을 모든 정죄함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의롭다함을 받은 상태에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해서입니다. 우리가 계속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고, 내재하는 죄에서깨끗함을 받을 수 있으며, 모든 불결함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들은 전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죄책과 형벌의 버림에서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됩니다.
주여, 순간 순간 나는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죽음의 공로를.
또한 그뿐 아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됩니다.
주여, 순간 순간 나는 갖습니다.
당신의 죽음의 공로를.
왜 그런고 하니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우리를 위한그의 중보의 기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 순간 새로워져서 아주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지금 정죄함이 없을 뿐만아니라 또한 주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전에 있었던 형벌에 대한 두려움(desert)도 없기 때문입니다.
(5) 바로 이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순간 순간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느낍니다. 우리가 오늘의 우리가 됨도오직 이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이 믿음에 의해 우리는 영적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지금은 우리가 모두 거룩하다고할지라도 다음 순간에는 악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 있는 한 '구원의 샘'에서 물을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시요, 우리 마음 속에 내주하시며,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중보의 기도를 드리셔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계속하여 도우심으로 믿는 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인도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모든 계획과 행동이 예수님안에서 시작되고 계속되며 마치게 됩니다.
또한 그분은 '성령의 감동' 으로 우리 마음의 생각을 씻으시사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으며, 그분의 성호를 가치있게 높일 수있게 하십니다.
(6)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회개와 믿음은 바로피차간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우리 마음 속에 남아있고 말과 행동에 고착된 죄를 느끼며, 믿음에 의하여 마음을 정결케 하고손을 씻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또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성정과 말과 행동이 아직도형벌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믿음에 의하여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고 또 우리를 늘 돌아보고 계셔서 계속적으로 우리의 정죄와 형벌을 다른 데로 돌려 주심을인지하게 됩니다.
회개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늘 깨닫는것이며,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자비 뿐 아니라 곤고한 때 도우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회개란 그분 외의 다른곳어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곤고할 때에 필요한모든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말합니다. "주님없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믿음은말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것을 할수 있노라"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는 영혼의 모든 원수를 정복할 뿐 아니라 내어쫓을 수 있습니다. 그분으로 나는 내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다하여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서만 종신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걸을 수가 있습니다.
[3]
(1)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여러분은 이런 견해, 곧 우리가 의롭다함을받을 때 온전히 성별되어 우리의 마음이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견해의 해독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의롭다함을 받은 그 때에 외적 죄의 지배에서구원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때에 내적 죄의 힘도깨어져 더 이상 죄를따를 필요도 없고 이끌릴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적 죄가 그 때 전적으로 멸절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 때 우리의 자만, 고집, 분노, 세상 사랑의 뿌리가 마음에서 제하여지고 육신에 속한 마음과 타락의 경향성이 있는 마음이 완전히 근절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진리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순전하고 무해한 실수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견해는 더 이상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게 전적으로 길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성한 사람은 의원이쓸데없고 병자라야 의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미 온전히 성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이상의 치료를 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가정(假定)에서는 우리가 죄에서부터 그 이상의 구출을 받는다는 것이 즉각적으로 되든 점진적으로 되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아직도 완전해지지 못하였고. 우리마음은 정결해지지 못하여 아직 그 본질에서 하나님과 원수되는 육신의 생각이 남아 있다고 깊이 깨닫는 것은, 즉 우리 마음에 있는 죄덩어리가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 멸절되지는 않았다고 깊이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그 이상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그 순간, 즉 거듭나는 그 순간에 '어둠에서 기이한 빛으로'곧 잔악한 마귀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땅에 속한 감각적이고도. 악마적인 마음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의로 완전히 전이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아직 죄의 깊은 데 머물러 있어서 구원의 능력이신 하나님을향하여 지금 바로 이 곳에서의 전적인 구원을 바라며 신음하고 있는것을의식합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 속의 깊은 부패를 깨닫지 못한 신자들, 또는 깨달아도 개념적으로만 가볍게 깨달은 신자들은 이 온전한 성결에 대하여관심이 적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체험이 죽을 때에나 또는 죽기 전이지만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때에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을 가질 수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이런 체험이 없다고 해서 그리 초조해 하지도 않고 또 그 체험에 대한 열망도 없습니다.
그들이 이런 것들을 보다 잘 알기까지는, 위에서 말한 대로 회개하기까지는, 또는 하나님께서 생래적인 그 괴물의 껍데기를 드러나게 하셔서 그들 영혼의 진상을 나타내 보이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결코 이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거운 짐을 느낄 때에야 비로소 죄에서 구원받고자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저들은 영혼의 고민 가운데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될 것입니다.
속에 있는 이 죄의 멍에를 벗겨 주옵시고 내 영을 온전히 해방시켜 주옵소서 나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내 속이 정결하여지고 내가 전적으로 당신에게 안겨질 때까지는
(3) 둘째로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받아들여진후에도 우리의 죄과(罪過, demerit) - 어떤 의미에서는 죄책이라고 할수 있겠지만-를 깊이 깨닫는 것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대속하시는 보혈의 참 가치를 발견할수 있게 되며, 이 보혈은 우리가 전에 필요로 했던 것과 같이 지금 의롭다함을 입은 후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는 이 언약의 보혈을 단지 하나의 평범한 것으로즉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가 도말된 것은 알지만 지금은 별로 필요치않은 어떤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위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며 모든 것을 구속하시는 그의 사랑
그의 흘리신 귀한 보혈로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나니
이것은 바로 여기서 말하는 회개이며, 믿음 또한 그것과 밀접하게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시실은 다음의 시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는 숨을 쉬는 순간 순간 죄를 짓습니다.
이 땅 위에 있는 나는 당신의 뜻을 행치 못하며 규례도 지키지 못합니다.
천사는 하늘에서 이를 행하고 있지만
그러나 샘터는 여전히 열려 있어 내 발을 씻고 마음과 손을 씻어 줍니다 내가 세상 안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4) 셋째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무력함을 깊이 깨닫는 것, 곧 우리가 받은 것도 의지할 수 없으며 더구나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남아 있는 악의 세계에서 구원받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깊은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우리의 제사장인 동시에 왕으로 모시고 의지하며 살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진실로 주님을 존귀케 하고 모든 은혜의 영광을 그에게 돌리며 그를 온전한 그리스도, 온전한 구세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게 됩니다. 이런 좋은 말들은 너무 자주 사용된 까닭에 거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도외시할 때에, 즉 주님을 모든 것의 모든 것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때에 강하고 깊은 의미로써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크신 능력이 하나님보다도 더 높아지려는 모든 것들을 철폐함으로써,우리의 모든 성정과 생각과 말과 일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지경에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롬 1: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