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
"우리가 세상에서, 특히 여러분에 대하여, 육적인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솔직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는 것이 우리 양심의 증거요, 우리의 기쁨입니다."(고후 1:12)
1. 이것이 신앙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모든 신자의 목소리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않는다."(요 8:12) 그래서 그에게 빛이 있는 동안, 그는 그안에서 줄거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였으니 그는 주 안에서 행합니다."(골2:6) 그리고 그가 주님 안에서 행하는 동안, 사도의 권고가 영혼 속에 날마다 자리 잡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시요.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시요"(빌4:4)
2. 그러나 우리가 집을 모래 위에 짓지 않기 위하여(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홍수가 일어나 그 집에 부딪쳐 올 때에, 집이 무너져 그 무너짐이 대단하게 되는 일이 없기 위한 일이지만) 나는, 이제부터의 이야기에서,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본질과 근거인가를 보이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여기 사도에 의하여 묘사된 대로 양심의 증거에서 생겨난, 영의 그 행복된 평강, 그 고요한 만족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더 철저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사도의 모든 말씀을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그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양심이라는 말, 또는 그 증거라는 말에서 무엇을 이해하며, 또 어떻게 이 증거를 가진 자가 항상 기뻐하는가를 이해해야 하는가가 확실히 보이게 될 것입니다.
3. 그런데, 첫쩨, 양심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이해하여야 합니까? 누구에게서나 입에 오르내리는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얼마나 크고 또 많은 책이 때때로 이 주제에 관해서 씌어져 왔는가, 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떻게 고대의 또는 현대의 모든 학문의 소중한 것들이 철저하게 탐구돼 왔는가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두려워합니다만, 이러한 모든 정밀한 탐구에서 이 양심이라는 말은 많은 빛을 받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이러한 저자들은 이치를 혼란시켜온 것을 아십니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여"(욥38:2), 그 자체는 평이하고 이해하기 쉬운 주제를 혼란에 빠뜨리게 한 것은 아닙니까? 왜냐하면 단지 어려운 말만 제껴놓으면,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내 그것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사항을 감지하고, 과거의 사항을 숙고하거나 회고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혹은 생활 속을 통과해 가는 모든 사항을 감지하고, 우리가 느끼거나 행하거나 하는 모든 사항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통과해 가는 동안, 혹은 지나가 버린 후 언제라도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의식이 있는' 존재라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에 관한 현재 또는 과거의 사항, 자기 자신의 기질이나 외적 행동, 이 양자에 대한 자각, 즉 내적인 의식 혹은 내면적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현재에 대한 지식, 혹은 이전 생활의 기억은 아닙니다. 과거 혹은 현재의 사항 어느 쪽인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은 양심의 역할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며 그러면서 가장 작은 일입니다. 그 주된 일은 변명하거나 혹은 고발하거나, 찬성하거나 혹은 반대하거나, 방면하거나 혹은 정죄하거나 하는 일입니다.
5. 최근의 어떤 저자들은 글쎄 여기에 새 이름을 주어 그것을 '도덕적 지각'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옛 말이 새로운 말보다 다음의 이유만으로도 훨씬 좋게 여겨집니다. 옛 말이 사람들 사이에 비교적 더 통용되고 친숙하며 그래서 이해하기 더욱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또 하나의 이유에서 그 편이 좋게 여겨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서적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영감된 기록 속에서 사용하도록 선택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서, 특히 성 바울의 편지에서 그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의미를 따르자면, 우리는 양심을 모든 영혼 속에 하나님에 의하여 - 세상에서 들어오는 - 심어진 하나의 성능 혹은 능력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 혹은 생활, 자기 자신의 기질, 사고, 발언, 행동 가운데서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나쁜가를 감지하는 능력 말입니다.
6. 그러나 사람들이 선과 악의 구별을 판정할 수 있는 그 규준(規準)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양심이 인도받는 것은 무엇입니까?(사도가 다른 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이교도의 표준은 "그 마음 속에 씌어져 있는 율법"(롬2:15)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외적인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 사람들은" 외적인 율법의 정한 바 "율법대로 행한다면, 그들 자신이 그들에게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율법이 그들의 마음 속에 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표준에 따라 행하고 있는가 아닌가 "그들의 양심이 또한 증언하며" 동시에 그들의 생각이 그 행위를 서로 고발하거나 심지어 변명, 즉 그러한 행위를 죄없다 하며 옹호하기도 합니다.(롬2:14-15)
그러나 선악의 기독교적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 즉 신구약 성서의 문서들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벧후1:21) 예언자들과 "옛 거룩한 사람들"(눅1:70)이 쓴 모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어졌고", 참으로 "사람을 교육하는 일에", 혹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가르치는 일에 "유익하며", 그것에 반대되는 것을 "책망하고", 잘못을 "고쳐주며", "의로 교육(혹은 우리를 훈련)하기 위한 성서 전부입니다(딤후3:16).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발 밑을 비쳐주는 등불이요, 그 모든 길을 밝혀주는 빛입니다. 성서만을, 옳고 그른 것, 참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판별하는 표준으로 그리스도인을 받아들입니다. 직접적으로 혹은 명백한 결과에 의하여, 성서에 명령되어진 것 이외의 아무것도 선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성서의 말씀들 가운데 혹은 부인할 수 없는 추론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악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성서가 (직접으로나 혹은 명백한 결과에 의해) 금지하지도 않고 명하지도 않은 것은 어느 것이든지 중립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선도 악도 아닌 것입니다. 성서가 모든 사항에서 그의 양심이 인도되어야 하는 완전하고도 유일한 외적 규준이기 때문입니다.
7.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의 양심이 사실상 이에 따라 인도되고 있다면, 그 때에 그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벧전 3:21)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이란 다른 곳에서 사도에 의하여 "거리낌 없는 양심"(행24:16)으로 말해졌습니다. 여기서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동23:1) 라고 어떤 때에 표현하고 있는 것을, 다른 때에 사도는 다음과 같은 표현에 의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나도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스스로 단련하고 있는 것입니다"(동24:16).
이제 이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이해, 곧 그 가운데 계시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기뻐받으실만한 완전한 뜻"(롬12:2)의 이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표준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알지 못하면, 우리가 그것에 따라 행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이 요구되고 있습니다(얼마나 소수만이 여기 도달하지 못한 것인지요). 우리의 마음과 생활, 내적인 기질과 외적인 생활양식 모두에 대한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알지 못하면, 그런 것들을 우리의 표준과 비교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 기질과 생활양식, 사고와 발언과 행위가 그 규준,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가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양심을 가지고 있대서 그것은 단지 악한 양심일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우리의 표준과의 이러한 일치에 대한 내적 지각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 습관적인 감지, 이 내적인 자각 그 자체가 적절히 말해서 '착한 양심', 혹은 (사도의 다른 표현법에 의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행24:16) 입니다.
8. 그러나, 이처럼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지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바른 기초를 놓도록 깨닫게헤야 합니다. "아무도 이 기초 이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 3:11)라는 것을 그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그가 마음에 두어야할 것은, 산 믿음에 의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 그 사람이 분명히 "내가 지금 몸으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나의 마음 속에 지금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2:20). 라고 분명히 증언할 수 있기 까지는, 아무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항의 증거, 확신, 실증입니다. 이 믿음에 의하여 우리의 이해력의 눈은 열리고, 신적인 빛이 그들 위에 부어지며 우리는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봅니다"(시119:18); 하나님의 율법의 탁월함과 순수함, 율법과 및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모든 계명의 높이, 깊이, 길이, 넓이를 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고후4:6)을 보면서 동시에, 우리가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속의 움직임을 지각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저 축복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질"(롬5:5) 수 있는 것도 믿음만에 의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모든 이스라엘에게 다음의 은혜로우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 입니다. "내 율법은 그들의 생각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다"(혹은 새길 것이다)(히8:10). 이 사실로 인하여 그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하신 율법과의 온전한 일치가 만들어지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10:5)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좋는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물론이요 그의 생활이 하나님의 계명의 표준에 전적으로 따릅니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가운데 신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사도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히 여러분에 대하여, 육적인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솔직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는 것이 우리 양심의 증거요, 우리의 기쁨입니다"(고후1:12).
9. "우리는 행했다"(고후 1:12). 원어로 사도는 이것을 한 단어 "아네스트라페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대단히 넓어, 우리의 모든 행동거지,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관계되거나 혹은 육체에 관계되거나 간에, 내적 또는 외적 상황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혀, 손, 지체의 모든 움직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우리의 행동과 말, 우리의 모든 힘과 성능의 사용, 하나님 혹은 인간에 관해서 우리가 받은 모든 재능을 사용하는 그 방식까지에 미치고 있습니다.
10.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했다"(고후1:12); 불경건한 사람들의 세상에서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이것은 비교적 적은 일이었습니다), 마귀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입니다. 악함 가운데, "앤 토 포네로" 악한 자의 안에 처한 사람들 가운데서 입니다.
아, 이 세상이여! 마귀가 끊임없이 호흡하고 있는 그 영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채워져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선이시요 또 선을 행하시는 것처럼, 이 세상의 신과 그의 모든 자녀들은 악이요, 또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 대해서(용허되고 있는 한도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 아비처럼 그들은 언제나 잠복하고 기다리거나, 혹은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벧전5:8)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파멸하기 위하여, 사기 혹은 강압, 비밀한 간계 혹은 노골적인 폭력을 사용합니다. 계속 우리의 영혼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며, 옛 혹은 새 무기로써 또는 모든 종류의 책략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악마의 덫 속으로,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로 이끌어 가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11.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솔직함과 진실함으로"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고후1:12).
첫째로, 솔직함(simplicity)에 대하여 말합시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밝은 눈"(눅11:34)이라는 이름 밑에서 천거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의 등불은 눈이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다"(동). 이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말과 행동에 있어서, 육체의 눈에 해당하는 것은 그 의향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의 영혼의 이 눈이 성하다면 당신의 모든 행동과 생활양식은 "밝을 것" 입니다. 하늘의 빛, 성령 안에서 사랑과 평강과 희락으로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단지 하나님에게 고정되어 있을 때에, 모든 사항에서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분깃, 힘, 행복, 매우 큰 상급, 시간과 영원에 걸쳐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님만을 목표로 삼을 때, 그 때에 우리의 마음은 솔직합니다. 즉 동요치 않는 견해,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고 신의 축복된 뜻을 행하고 감수하는 단순한 의향이 우리의 영혼 전체에 흐로고, 우리의 온 마음을 채우며, 우리의 모든 사고, 욕구, 목적의 불변의 샘이 될 때 - 솔직함은 거기 있습니다.
12.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실함'으로 행했습니다"(고후1:12).
솔직함과 진실함의 차이는 주로 다음과 같이 생각됩니다. 솔직함은 의향 그것에, 진실함은 그 실천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실함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단지 우리의 발언만이 아니요, 모든 교제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가끔 이 말을, 진리를 말하는 것, 혹은 간계, 궤계, 거짓을 아니하는 것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렇게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는 좀더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 야 하는데, 솔직함에 의해 우리가 겨누는 표적을 실제적으로 맞췄다는 의미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되게 사실상 진정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행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말이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로 전도되며 그것에 안내되어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이 위대한 목적에 고르게 공헌하며, 한결같이계속 흐름을 말합니다. 우리의 전 생활에서 하나님을 향해 곧바로 움직여 가며,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여 가는 일입니다. 견실하게 성결의 공도(公道), 정의와 자비와 진리의 길을 계속 걸어 가는 일입니다.
13. 이 진실은 사도에 의하여 '신적 진실' 혹은 '하나님의 진실'(에일리크리네이아 데우)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것을 우리가 이교도의 진실과 혼동한다든지 혹은 뒤죽박죽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입니다(왜냐하면 이교도들도 또한 그들 사이에서 일종의 진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존경심을 고백했었음을).
더우기 사도가 이것을 하나님의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적 미덕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진실이 향해져 있는 대상과 목적을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것은 모두 "세상의 천박한 것"(갈4:9) 가운데로 빠져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진실이라고 부름으로써 사도는 또한 진실성의 저자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를 전해주시는 빛의 아버지"(약1:17) 그 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더욱 분명히 그 다음의 말씀으로 선언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고후1:12)
14. "육적인 지혜로가 아니라"; 마치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려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연적인 이해력의 힘에 의해서도, 자연적으로 얻은 지식이나 지혜에 의해서도 그처럼(솔직함과 하나님의 진실을 따라)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지각, 좋은 성질, 혹은 양육 등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이 솔직함을 얻거나 이 진실을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철학상의 가르침은 물론이요 우리의 모든 타고난 용기와 결단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습관의 힘도, 인간교육의 가장 섬세한 규칙도 우리를 이처럼 훈련할 수는 없습니다. 이 나 바울이 누리던 모든 이점에도 불구하고, 육신(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한 그래서 단지 '육적인' 생래적 '지혜'에 의해 그것을 추구하는 한, 그 상태에 도달하기는 전연 불가능했읍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가능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바울만큼 그 지혜로써 거기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분만큼 본성과 교육 양면에서 모든 은사의 혜택을 받은 사람을 달리는 거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생존했던 어떤 사람에게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의 생래적인 능력 이외에, 그는 배움의 모든 이익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바울은 다소의 대학에서 공부했고 후에 그 당시의 유대국가에서 있었던 지식과 완전(integrity)에 관해서 말할 때, 가장 존경받고 있었던 인물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 교육에 관한 가능한 한 모든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자손이요, 자신이 바리새인이었으며 가장 엄격한 종파나 단체 안에서 교육 받았습니다. 바리새파는 다른 모든 단체와는 달리 한층 현저한 엄격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은 "그의 동년배들보다 훨씬 더 앞섰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한 사항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갈1:14). 그리고 "율법의 의에 있어서는 흠없는 사람이었습니다"(빌3:6).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써 저 솔직함과 하나님의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잃어진 노고에 불과했습니다. 그 깊고 뼛속에 사무치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그는 마침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동3;7-8)
15. 바울이 여기에 도달하기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탁월한 지식"(동3:8), 혹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롬 3:24) 방법 이외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거저 주시는 사랑, 즉 공로없이 얻은 자비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죄인인 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지금 하나님과 화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은 오히려 "우리 속에서 활동하셔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시는"(빌2;13) 성령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전자의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우리 영혼에 나타나자마자, 후자의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의 능력이 그 가운데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에게 불가능했던 일을, 하나님을 통하여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생활양식을 바르게 정돈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 사랑의 빛과 능력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육신의 지혜로서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우리가 세상에서 솔직함과 하나님의 진실함으로, 행했다"는 "양심의 증거"(고후1:12)를 가지는 것입니다.
16. 이것이 적절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증거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이가 어떻게 항상 기뻐하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높이며,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합니다"(눅1:46-47).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어떤 공로도 헤아리심이 없이 베푸시는 당신 자신의 사랑, 즉 기꺼이 거저 주시는 당신 자신의 부드러운 긍휼에서부터 우러나와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내가 이제 서 있는, "이 구원의 상태 가운데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롬5:2) 때문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성령이 내 영에 대하여 내가 어린 양의 피로 사신 바 된 것과, 또한 어린 양을 믿음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상속자"(고전12:27, 롬8:16-17)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자손,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영혼을 사랑하게끔 동일한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신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있었던 그 마음"(빌2:5)즉 내 마음 속의 모든 움직임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맑은 눈인 솔직함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엡5:25)분 위에 내 영혼의 사랑의 눈을 언제나 고정시키고, 내가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 만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뜻을 목표삼는 능력 ;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갈5:24),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여"(골3:2) 하나님 이외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성 ; "하나님의 모양대로"(창1:26)의 영혼의 갱신인바, 하나님의 형상회복인 성결)과 하나님의 영광에 부응하도록 우리의 모든 발언과 행위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진실함을 하나님께서 내 안에 느끼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나는 또한 실로 기뻐하고 있으며 또 다시 기뻐할 것은, 성령께서 끊임없이 양심 위에 부어주시는 빛에 의해, 내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살아가고"(엡4:1) 있고, "뱀의 얼굴에서 도망하듯 죄에서 도망하여", "모든 종류의 악에서 멀리하는"(살전5:22) 일,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종류의 가능한 선을 모든 사람에게 행하는 일, 내 모든 행동에서 주를 따르며, 주의 눈에 받음직한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내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내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되어지고 있는 것, 게다가 내 안에서 모든 내 행위를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내가 보고 또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속에 비취는 하나님의 빛을 통하여서, 내가 하나님의 길을 걷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내가 우로나 좌로나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보면서 나는 기뻐합니다.
17. 이상이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기뻐하는 그 기쁨의 근거요,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첫째로, 이것이 자연적인 기쁨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추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자연적인 원인으로부터도; 어떠한 기분의 돌연한 흐름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일시적인 기쁨의 충동을 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합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건강 혹은 편안함, 체질의 강인성과 건전성때문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질병이나 고통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강한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전보다도 훨씬 강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육체가 고통으로 인하여 거의 기진맥진해 있고 혹은 수척케 하는 병으로 인하여 야위었을 때에 그들의 영혼을 채워 준 것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어떤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그 기쁨이 외적인 성공, 사람들의 호의, 혹은 현세의 재산의 풍부함을 그 원인으로 할 수는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로 그 신앙이 불에서처럼 모든 종류의 외적인 고통에 의하여 시련을 겪었을 때에, 하나님을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심지어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다음과 같은 상황 속에 놓였던 그리스도인들 만큼 기뻐한 사람들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오물이나 쓰례기"(고전4:13)와 같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여, 이리저리로 방황했습니다. 굶주리고, 떨며, 헐벗은 몸으로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사악한 조롱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히11:36). 게다가 그들은 마침내 "기쁨으로 자기들의 갈 길을 끝까지 달리고 임무를 다하도록, 그 목숨을 자기들에게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행20:24).
18. 상술한 고찰에서 우리는,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양심의 우맹, 즉 선을 악으로부터 분간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추단해도 좋을 것입니다.
식별은 커녕, 이해력의 눈이 열리기까지 그는 이 기쁨에 대해서 전연 문외한이었습니다. 영적 선악을 분별하기에 적당한, 영적 지각을 지니기까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영의 눈이 흐리지 않습니다. 이전에 이처럼 눈이 날카로왔던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는 자연적인 사람에게는 아주 놀랄 정도로 가장 작은 것일지라도 재빨리 지각합니다. 티끌이 태양 광선 속에서 보이는 것처럼, 빛 속 곧 자존하는 태양광선 속을 걷고 있는 자에게는, 죄의 모든 티끌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양심의 눈을 더 이상 감지 않습니다. 그 잠은 그에게서 떠나버렸습니다. 그의 영혼은 언제나 훤히 깨어 있습니다. 더 이상 잠을 자거나 팔장을 끼고 쉬는 일이 없습니다!그는 탑 위에 서서 주께서 자기에게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를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고 있는"(히11:27) 바로 그 일에서 항상 기뻐하고 있습니다.
19. 또,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양심의 둔감 혹은 무감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움에 빠진"(롬1:21) 사람들 속에서, 그 마음이 무지각적이고, 무감각한, 지각이 둔화된, 따라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이로부터 일종의 기쁨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지각 없는 무감각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죄를 범하면서도 기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들은 아마도 '자유'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실상 그것은 단순한 영혼의 명정(술취함), 영혼의 치명적인 멍함, 마비된 양심의 어리석은 무감각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로서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장 섬세한 지각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 이래로 가지게 된 그러한 양심의 예민함을 그는 그 때까지 결코 가져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날마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도 또한, 그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아 나의 민감한 영혼은
피하고 싶어라.
몸서리쳐지는 악의 첫 접근을
눈동자처럼 재빨리
아주 가벼운 죄의 접촉을
느낍니다.
20. 결론을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복종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데서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마치 우리가 행위의 언약의 조건을 성취해야만 하는 것인 양, 그것을 지키는 기쁨이 아닙니다. 혹 마치 우리들의 업적이나 의로써 용서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일을 얻어야 하는 양 말입니다.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하여 이미 용서를 받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자신의 복종에 의하여 생명을, 죄의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획득해야 하는 것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를" 하나님은 살리셨습니다"(엡2:25)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살고 있습니다"(롬6:11)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언약에 따라 걷는 것을 기뻐하며 거룩한 사랑과 행복된 복종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게"(딛3:7) 되었으므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다"(고전15:10)는 사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시면서(우리의 결의난 뜀박질 때문이 아니요 어린 양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신과 화해시켜 주셨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으로 우리가 그 계명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워"(시18:39) 주셨고 우리는 기쁨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딤전6:12)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 마음 속에 살아계시는 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롬5:21) 일을 기뻐합니다. 우리의 기쁨이란 우리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는"(요5:17) 것처럼 (우리 자신의 힘 혹은 지혜로 인해서가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에 기꺼워 하시는 거슨 무엇이나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기를! 영원토록 그에게 찬양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015.03.10 13:27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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