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괄구원 (The General Deliverance)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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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요
I. 피조 세계의 원초적 상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II. 피조 세계의 원초적 상태는 현재 어떤 형편 속에 처해 있는가.
III. 하나님의 자녀들이 출현할 때 그 피조 세계의 원초적 상태는 어떤 형편으로 바뀔 것인가
I. 피조 세계의 원초적 상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1. 제일 먼저 우리는 피조 세계의 원초적 상태에 대하여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태가 출발된 자리, 즉 하나님의 동산으로부터 이 원초적 상태에 대하여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들판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이 아담과 함께 낙원에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곳은 그들에게 천국과 같이 절대적으로 행복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곳은 인간 자신의 상태와 매우 닮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의 사실을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다른 것을 상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땅위에 거하도록 만들어진 이 영만이 지상의 성소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선천적인 원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모든 영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 원리야말로 수천 번의 실험을 통하여 나타난 대로 전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비활동적인 물질로부터 영을 바르게 구분시켜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 사람은 이해력, 즉 자기 앞에 있는 대상은 무엇이든지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사람은 또한 가지가지의 사랑 표현이나 열정 표현을 할 수 있는 의지력을 부여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자유 혹은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는데 이 자유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이 헛것이 되며 흙 한줌 혹은 대리석 한 조각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길 수 없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또한 자유 없이는 모든 무감각한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선행도 악행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 이해력, 의지력, 그리고 자유 속에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인 형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2. 아담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아담은 그 후손들보다는 훨씬 더 민첩했거나 강했으며 아담보다 낮은 수준의 피조물들은 훨씬 낮은 민첩성이나 힘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아담은 인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이해력을 가졌음이 틀림없습니다. 아담의 이해력은 그 종류에 있어서 완벽했을 것인데, 그는 만사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어떤 오류도 없이 진리를 따라 판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의지력은 어떤 종류의 그릇된 편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며 그의 애정이나 열정은 규칙적이어서 그의 정확 무오한 이해력이 지시하는 대로 꾸준하고 한결같은 방법으로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의지력은 또한 오직 선한 것만, 즉 본래 선하게 만들어진 것에 비례하는 모든 선을 포함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자유는 이해력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었으므로 완전 무오한 이해력이 지시하는 대로 선택하고 거부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담이 가졌던 다른 모든 특성을 종합한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최고의 특장은) 그가 하나님과 교통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를 알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아담은 하나님을 알았고, 가식 없이 사랑했으며, 한결같이 순종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지력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러하듯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완전성이라 할 것입니다. 즉, 인간은 만물의 영혼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가진 바로 이와 같은 모든 기능들이 본래 속한 올바른 상태와 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행복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행복의 진수가 바로 여기에 있었으며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 의하여 이 행복은 증대되었습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모든 피조 세계 즉, 생령있는 자연이나 생령없는 자연 등 만물의 질서와 미, 조화를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창공의 청명함, 찬란히 솟아오르는 태양, 온갖 다채로운 것들로 옷입은 땅과 나무와 실과, 화초, 졸졸 소리내며 흐르는 시냇물을 보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악도 그가 누리는 희락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가 완전무결한 상태에 있었을 때 고통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심신에 끼치는 슬픔이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아담이 누리는 순수한 기쁨을 오염시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불멸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이와 같은 최상의 기능들을 부여받은 아담에게 걸맞은 명령을 내리시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 28)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 역시 노래하기를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 6-8).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다스리는 바 모든 피조물의 군주와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을 통하여 다른 낮은 피조 세계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과 다른 모든 짐승 세계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인간을 통하여 다른 피조 세계에 전달된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짐승들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 본래적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이 문제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세하게 숙고할 가치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짐승들 역시 적어도 오늘날과 마찬가지 수준의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생득적 원리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짐승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 수준의 이해력을 부여받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즐기는 바 각종 열정들과 의지력을 가졌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모든 생물들에게서 발견되는 수준의 선택할 수 있는 힘, 즉 자유를 가졌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이해력은 처음부터 완벽했으며 그들의 열정과 애정 표현은 규칙적이었으며 무엇을 선택하든지 이해력을 따라 했었을 것입니다.
5. 그렇다면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 즉 넘을 수 없는 선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성이 아니었습니다. 이성이라는 모호한 말은 제쳐 두고 좀더 단순한 용어 이해력이라는 말을 쓰게 될 때 짐승들 역시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또한 짐승들이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반면에 다른 열등한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짐승들이 어떤 정도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짐승들이 도저히 건너 뛸 수 없이 만큼 깊은 간격이며 인간과 짐승 사이를 갈라놓은 특별한 차이입니다. 인간의 완전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짐승들의 완전성은 인간에게 이와 같이 순종하는 데 있었습니다. 짐승들이 인간에게 순종을 지속하는 한 자기가 지어진 종류에 따라 행복했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기능들을 올바로 사용하는데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분명히 짐승들은 비록 희미한 정도이지만 사람이 지닌 만큼의 도덕적 선을 닮았었습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은 받은 은혜만큼 인간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할 줄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상호간에 정말 순수한 은혜를 베풀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상한 짐승들로부터 가장 미천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기능들로부터 수많은 짐승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 가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풍부한 먹거리와 쾌락--아직 고통이 낙원에 찾아오기 전이었으므로 고통과는 전혀 무관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온통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어느 생물이 죽어 가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셨기에" 그들은 또한 불멸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는 말씀은 얼마만큼 사실일까요. 그러나 이 말씀은 실로 현재의 상태와 얼마나 동떨어진 말씀입니까! 모든 요소들이 제 갈 길을 잃어 인간과 번갈아 가며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생령없는 자연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 세계는 참담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주에게 대적한 이후로 모든 생령있는 자연은 또한 얼마나 참혹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요!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다"고 당연히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짐승들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피조물들의 현재 상태에 대하여 눈을 돌려 볼 차례입니다.
II. 피조 세계의 원초적 상태는 현재 어떤 형편 속에 처해 있는가.
1. 낙원에서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이 인간을 통하여 인간보다 낮은 피조 세계로 흘러갔고 인간이 창조주와 모든 짐승들이 교통하는데 위대한 채널이 되었던 것처럼, 인간이 이 축복들을 더 이상 전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 교통 역시 필연적으로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보다 낮은 피조물 사이의 교통이 중단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축복들이 그 들 위에 더 이상 흐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피조물이 허무한 데," 즉 슬픔이나 모든 종류의 고통, 모든 악행에 굴복하게 되었는데 자기의 뜻이나 선택, 혹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인하여," 즉 하나님의 현명하신 허락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으며 일시적인 악으로부터 영원한 선을 끌어내게 되었습니다.
2.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들이" 어떻게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을까요."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인간 이외의 피조 세계들은 어떤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저차원의 기능들, 즉 원기나 힘, 민첩성에 있어서 많은 손상을 입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가 쉽게 상정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이해력에 있어서 훨씬 더 큰 손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지금 수백만 가지의 피조물들이 자기가 기어다니는 땅이나 붙어 있는 바윗돌 보다 조금 나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그 때에는 곤충들이나 벌레들조차 오늘날 모든 머리 좋은 짐승들이 가진 만큼의 이해력을 아마도 가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그 의지력과 열정에 있어서 훨씬 더 고통을 겪었을 텐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왜곡되고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해력과 정면으로 상충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가진 자유도 심하게 손상이 되었는데 많은 경우 전적으로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전적으로 압도해 버리는 바 이성을 잃을 정도의 식욕에 노예가 여전히 되어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의 기초는 길을 잃어버려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순종함으로서 가졌던 완전성을 상실함에 따라 짐승들 역시 인간에게 순종함으로 가졌던 완전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짐승들의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인간으로부터 도망쳐서 인간이 미워하는 현장을 열심히 피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짐승들 역시 인간과 노골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힘이 있을 경우 인간을 파괴하기조차 합니다. 우리가 흔히 가축들로 부르는 일부의 짐승들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어느 정도의 본래적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고 순종하고 있을 뿐입니다.
3. 이와 같은 일부의 가축들을 제외하고 다른 짐승들의 세계에서 선이나 감사, 자비, 올바른 성품 등의 잔영들을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정반대로 수천 가지의 짐승들 속에서 자신의 본성과 분리될 수 없는 바 야만적인 맹폭성과 무자비한 잔인성을 한결같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삼림과 평원에 서식하면서 주변의 무기력한 짐승들의 살을 찢고 피를 빨며 그 뼈를 부수는 짐승들이 사자나 호랑이, 늑대, 혹은 물에 서식하는 짐승들 중에 상어나 탐욕스러운 몇 가지의 괴물들, 혹은 새들 중에는 독수리밖에 없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작은 숲에서 노래하는 순진무구한 새들조차도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파리, 부지런한 개미, 예쁜 나비 등을 똑같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대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수없이 많은 불쌍한 곤충들을 쉴새없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웁니다. 육지에는 비교적 먹이감이 되는 짐승들의 수가 적은 반면에 물의 정은 좀 다릅니다. 바다든 강이든 간에 물 속에는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을 먹어 치우지 않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 물고기들의 숫자는 실로 삼림에 서식하는 먹이감 짐승이나 먹이감 새의 숫자를 훨씬 더 능가합니다. 그러나 땅과 공중에서는 자신과 같은 종에 속하는 짐승을 먹이감으로 삼는 경우는 없습니다. 심지어 야만적인 곰들조차도 다른 동료 곰들의 살을 찢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물 속에 서식하는 야만적인 어류들은 자기보다 작거나 약해 보일 경우 모조리 심지어 同類의 물고기들조차도 먹어치웁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오늘의 세계가 처한 현실이며 피조물이 허무하게 굴복한 데인 까닭에 백만에서 하나에 이르기까지 절대 다수의 피조물들이 다른 동료 피조물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자기 생명을 유지할 길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4. 그렇다면 수많은 피조물들의 형태, 즉 외적인 모양이 그 성품만큼이나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창조주의 손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을 때 각인 되었던 그 아름다움은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아름다움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있기는커녕 쳐다보기에도 충격적으로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쳐다보기에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칠 뿐 아니라 아주 심하게 형태가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그런데다가 기껏해야 추하기만 한 그들의 모습은, 비참한 나락에 빠진 인간이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왜곡되는 보통 때보다 더 심하게 자주 형태가 일그러지게 됩니다. 각종 고통, 육신의 연약함에서 오는 병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질병이 안으로부터, 상호 관계로부터, 계절의 불순함이나 화재, 우박, 눈, 폭풍우 등으로부터, 혹은 자기가 예측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수천 가지의 원인으로부터 이들을 덮칩니다.
5.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이제 사망은 사람에게만 이른 것이 아니라 아담과 같은 방법으로 죄를 범하지 않은 모든 피조물들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죽음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는 모든 연속적인 악들과 고통, 수만 가지의 고난들이 모든 피조물들을 덮치게 되었습니다. 이 뿐 아니라 (인간의 경우 죄악에 해당되고 심지어 짐승들에게조차 불행의 원천이 되는 바) 모든 불규칙적인 격정들과 추한 성깔머리들이 땅위의 "모든 피조물들 위에 덮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6. 이와 같이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는 시기에는 강한 피조물들이 약자들을 계속해서 파괴하거나 동등한 힘을 가진 자끼리 자주 물고 뜯을 뿐만 아니라 강자나 약자 공동의 적인 인간의 폭력과 잔인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의 민첩성이나 힘이 다른 짐승들에 필적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가진 기술 때문에 이 약점은 보완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짐승들의 힘이 거세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가진 기술 때문에 그들의 힘을 벗어나거나 모든 민첩성을 제압할 수 있으며 짐승들이 갖가지 수단이나 장치로 몸을 숨긴다 할지라도 쉽게 그 은신처를 알아냅니다. 인간은 광대한 평원과 울창한 숲을 지나 짐승들을 추격하며 공중의 들판에서 덮치고 바다 깊은 곳에서 이들을 찾아냅니다. 인간의 수중에 있어 주인의 명령을 잘 따르는 유순하고 친근한 짐승들이라 해도 인간의 야만적 폭력성이나 여러 가지 난폭함과 학대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못합니다. 불요불굴의 열심을 갖고 주인의 필요에 부응하고 기쁨을 주고자 하는 말이나 주인의 손이나 눈이 움직이는 것만을 기다리는 충성스러운 개라고 해서 이런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주인을 위해 오랫동안 충성스럽게 수고해서 이들에게 돌아오는 보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자신의 동료 짐승들에게 당하는 고통과 포악한 주인에게 당하는 고통 사이에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사자나 호랑이, 혹은 상어는 생명을 연장하고자 단지 필요성 때문에 하등 짐승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즉각적으로 고통을 끝내주지만 인간이라는 상어는 그와 같은 필요성이 전혀 없이 그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짐승들에게 괴로움을 가하는데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난 후 죽음이 찾아 올 때까지 계속해서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III. 하나님의 자녀들이 출현할 때 그 피조 세계의 원초적 상태는 어떤 형편으로 바뀔 것인가.
1. 그러나 "피조물" 심지어 짐승들 마저 이와 같이 탄식할만한 형편에 항상 처해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긍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심지어 이런 생각을 품는 것조차도 금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는 동안"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든지 안기울이든지간에) 이 탄식 소리는 허공에 흩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귀에 들어갑니다. 피조물들이 "다함께 고통을 겪을 때" 창조주께서는 모든 고통을 아시고 때가 이르러 완성되어질 탄생으로 피조물들을 점점 더 가까이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령있는 피조물들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진지하게 고대하는 것을 아시는데 이 때에 피조물들은 "현재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멸절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멸절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 이제 극명해질 수밖에 없는 사실은 저속한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단순 명료한 말씀, 즉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하는 말씀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총괄 구원의 전반적인 그림은 요한 계시록 21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말씀하실 때, 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 모든 피조물들에게 (성서에는 이런 제한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자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 다음과 같은 축복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3. 몇 가지 개별적인 것들로 주의를 옮겨 볼 경우, 모든 짐승들의 세계는 의심할 여지없이 창조되었을 때 가졌던 원기와 힘, 민첩성을 다시 갖게 될 것인데 일찍이 저들이 누렸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낙원에서 본래 가졌던 수준의 이해력을 회복하게 될 뿐 아니라 코끼리의 이해력이 벌레의 이해력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 그 이상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짐승들이 여하한 애정을 가졌든지 간에 이 애정 역시 엄청나게 증가된 모습으로 회복될 것인 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양되고 세련되어질 것입니다. 낙원에서 가졌던 자유 역시 완전히 회복될 터인데 행동거지 일체에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모든 불규칙적인 식욕과 고삐 풀린 격정, 그 자체가 악이거나 악으로 치달릴 경향성이 있는 일체의 성품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제 어떤 피조물 안에서도 격노라든지 맹폭성, 잔인성, 피에 대한 굶주림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와 정반대로 다음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라" (이사야 11: 6-9).
4. 이처럼 그 날이 이르면 피조물들이 무기력하게 굴복한 모든 허무한 것이 뿌리 채 뽑힐 것이기에 안으로든 밖으로든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탄식하는 날들은 종언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의심할 여지없이 이들이 가진 모든 무서운 모습, 일그러진 외양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창조 때 가졌던 태고의 아름다움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회복됨에 따라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행복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내부로부터 이들에게 불안을 끼칠 것은 전혀 없는 것처럼 외부로부터, 즉 더위나 추위, 폭풍우, 대폭설 등도 이들에게 불안을 주지 않고 오직 사시사철 화창한 봄만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새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땅에서도 고통을 끼칠 것은 일체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이 창조하여 부여할 수 있는 일체의 행복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동안" 피조물들이 겪은 고통을 보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땅 표면을 새롭게" 하시고 썩어 없어질 육신에 불멸의 옷을 입혀주실 때 순수하고 방해받지 않고 끊임없이 각자의 형편에 알맞는 행복을 구가하게 될 것입니다.
5. 만물의 아버지께서 가장 미천한 피조물까지 사랑으로 돌보시며, 그 결과 이들이 현재와 같이 종 노릇한 상태에서 겪은 모든 것을 대대적으로 고치실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푸신 관심에 버금갈 정도로 그렇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영웅이 멸망하는 것과 한 마리의 참새가 떨어지는 것을 똑같은 눈으로 보신다."는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단코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시구일지언정 결코 올바른 주장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실과 무한한 은총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자비가 당신이 지으신 피조 세계에 두루 넘치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축복하시길 즐겨 하시는 대상은 당신의 총애하는 피조물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가장 미천한 피조물에게까지 지대한 관심을 두시지만 인간에게 훨씬 더 많은 관심을 허락하십니다. 사람들 중에 최고인 영웅과 짐승들 중에 제일 낮은 참새가 있다면 분명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정도로 사랑을 베풀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예수께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훨씬 더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던지신 질문 "너희는 이것들 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아니하냐?"는 말씀 하나로 끽소리 못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의 순서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기신 당신의 형상의 수준에 비례해서 만물을 돌보신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6. 짐승들의 세계에 대한 어림짐작 하나를 더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지혜와 은혜가 충만하신 창조주께서 짐승들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사와 동등하게" 만드실 때, 짐승들을 지금 우리와 마찬가지로--즉,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피조물로--만드시길 기뻐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께서 선하신 까닭에 우리의 눈이 악해야만 합니까?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귀한 일은 분명히 하실 것입니다.
7. "이런 피조물들이 도대체 신천지가 도래할 미래에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는 질문이 (이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 모든 일에 이의를 제기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반대를 "이 피조물들이 지금 어떤 소용이 있는가?" 하는 또 다른 질문 하나를 제기함으로서 대답하고자 합니다. 만일 (일반적으로 이렇게 가정되듯이) 이 세상에 팔천 종의 곤충들이 있다고 할 경우, 이들 중에 칠천 종이 어떤 사용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만일 사천 종의 물고기가 있다 할 경우, 이들 중 삼천 종 이상의 물고기들이 어떤 사용 가치가 있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만일 육백 종의 새들이 있다고 할 경우, 이들 중 오백 종이 어떤 사용 가치가 있는지 누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만일 사백 종의 짐승들이 있다 할 경우, 이들 중 삼백 종은 어떤 소용을 위해서 존재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현재 디자인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는 그 때에 어떤 설계를 하실지 우리가 여전히 모른다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매우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 주제를 곰곰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떤 목적에 해답을 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길 기뻐하셨던 만큼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대한 목적--즉,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한 당신의 자비를 예증하는 일--에 대답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우리의 믿음을 극명하게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않느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당연히 설복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께서 공중의 새들과 들판의 짐승들조차 잘 돌보신다고 할 때 만물의 영장인 당신을 더욱 귀하게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영감받은 성경 저자가 말하듯이 "주께서 인간과 짐승 모두를 구원하신다면 분명히 인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신뢰하게될 것입니다."
9. 이제 다른 하나의 목적--즉, 죄를 전혀 짓지 않은 무수히 많은 피조물들이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반감을 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충분한 대답을 제공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은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었기에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실로 수많은 피조물들이, 특히 짐을 부리는 짐승들이 지상에 사는 동안 거의 모든 시기에 걸쳐 엄청나게 심한 고통을 겪고 있기에 그 결과 그들은 지상에서 그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불쌍한 피조물들에게도 죽음 후에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반감은 사라지게 됩니다. 즉, 이들 역시 언젠가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크게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10. 앞에서 생각해 본 것에 의하여 한가지 더 위대한 목적을 확실하게 대답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신이 지으신 만물 위에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권면받게 됩니다. 앞에 것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미물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며 주께서 그들조차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불쌍한 피조물들이 미천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 중에 어느 하나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고하는 것이 이와 같은 피조물들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넓혀주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피조물들이 굴복당한 허망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는지 살펴봅시다. 피조물들이 현재의 종 노릇하는 상태를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될 자유를 얻게 될 행복한 시간으로 눈을 돌리는데 이제 익숙해지도록 합시다.
11.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이성을 가진 그 어떤 사람도 부인할 수 없는 한가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을 금수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있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또 즐기지도 못하며, 도무지 이러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은 누구나 다 사실상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금수와 같은 처지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솔로몬의 주목할만한 말에 조금 언급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 3: 18). 이들 인생들은 자신의 행위로 치밀하고 고의적으로 인간 본성의 유일한 특징을 거부하는 까닭에 분명히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들이 이성의 일부를 가지고 있고 말할 수 있고 직립 보행을 한다는 것이 사실일지언정 인간을 금수의 세계로부터 구분시켜주는 유일한 특징은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짐승들에게 떨어진 똑같은 일이 이 인생들에게도 떨어집니다." 이들은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기에 "짐승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12. 보다 고상한 마음을 품고 있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존엄성을 더욱 더 주장토록 합시다. 보다 관대한 정신을 품고 있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피조 세계의 위계 질서에 있어서 으뜸이라는 사실을 알고 주장토록 합시다. 인간 됨의 특권, 즉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을 향유하기까지 당신은 쉬어서 안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피조물들이어, 고개를 들지어다! 당신의 존재를 가능케 한 근원을 향해 기도를 올릴지어다! "하나님을 알고 참 기쁨이 신앙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당신의 영혼이 알도록 가르칠지어다." 수만 가지의 축복으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그 분께 기도를 드릴지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결같은 교제를" 즐길지어다! 당신의 모든 생각 속에 하나님이 있게 할 때 당신은 참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 분을 당신의 하나님과 당신의 모든 것이 되도록, 즉 당신의 안목의 욕망과 마음의 즐거움, 그리고 영원한 분깃이 되도록 하십시오.
2015.03.10 13:29
총괄구원 (The General Delive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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