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기원과 본성
요한 웨슬리(John Wesley)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거룩합니다. 그리고 계명도 거룩하고 옳고 선합니다"
1. 아마 종교의 전 영역에서 이것만큼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내는 문제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도 바울이 '율법'이란 말을 쓸 때 그것이 유대의 율법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고 여기는 나머지 율법에 관하여 더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나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와 같은 설명에 만족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서간문(로마서)이 로마 사람들을 향하여 쓴 것이라는 점을 살피고 보면 사도 바울이 7장의 첫머리에서 옛 로마의 율법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보다 이와 같은 로마의 율법에 관하여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에 단지 깊이 하지 않습니다.
2.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신중히 살펴보면 율법에 관하여 이와 같이 가볍게 설명하는 것에는 만족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생각하면 할수록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율법'이란 말을 쓸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고대 로마의 율법도 아니고 모세의 율법도 아니라는 확신을 더욱 갖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야기의 대의를 주의깊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점은 명백히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7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므로 내가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주관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들은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우기 때문입니다. (무슨 율법을 말하였겠습니까! 로마의 율법만일까요 아니면 종교의식상의 율법일까요? 둘 중의 어느 것도 분명히 아닙니다. 도덕법입니다.) 평범한 예를 들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혼한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도덕 '법을 따라 그에게 매여 있느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에 대한 법에서 해방됩니다. 따라서 자기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 여자는 간음한 여인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는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간음한 여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특수한 예를 출발점으로 하여 바울은 유추로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곧, 모세의 모든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새로운 섭리 아래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욕을 먹지 않고도 '다른 이, 곧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에게 가서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를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변화를 일으키시는 그분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에는 우리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이것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때에는' 육신 즉 썩은 본성의 권세 아래에 있을 때,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우리가 알기까지는, 정복되지는 않고 다만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나타났고 불이 붙여진 '율법에 의하여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서 작용하여' 여러 가지 길로 나타나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모든 도덕법은 물론 종교의식상의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우리를 얽어 매던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율법이 이제는 죽었기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를 주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단지 모세의 율법의 법조문을 따라 외형적인 봉사로서- '법조문의 낡은 방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령의 섭리를 따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겨야 합니다.'(1절-6절)
3. 기독교는 유대의 율법을 무효로 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결코 없어질 수는 없으되 예전과는 다른 바탕 위에 도덕법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이야기를 끌어 온 사도 바울은 이제 반대 의견을 제시하면서 거기에 답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율법 자체가 죄입니까?' 물론 '율법에 의하여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라는 말을 오해한 나머지 그런 이야기를 끌어낼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십니다!') 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에 대하여 화해될 수 없는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디에 있든지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 곧 죄가 되는 악한 욕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7절). 이 정도로 서론을 전개한 다음, 바울은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네 절에서 이와 같은 일반적인 결론에다 덧붙여 설명하는데 특별히 도덕법에 관하여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12절을 들어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거룩합니다. 그리고 계명도 거룩하고 옳고 선합니다.'
4. 사람들이 별로 생각은 하지 않는 말이지만 이와 같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말들을 설명하고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사람들에게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율법의 기원과 둘째는 율법의 본성, 셋째는 율법의 속성 그리고 넷째로는 율법의 사용에 관하여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Ⅰ
1. 저는 우선 뚜렷하게 말해서 흔히 '율법'이라고 불리우는 도덕법의 기원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드시 모세 시대에 이루어진만큼 나중에 된 제도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노아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선포하였고 에녹은 또 그보다 먼저 했습니다. 사실은 그보다 더 높이 거슬러 올라가 세계가 창조된 때를 넘어서 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채 곧 새로 탄생한 '새벽별이 함께 노래하던' 영원 속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위대하신 창조주께서는 지각있는 존재들 곧 그분 자신의 첫 아들들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또한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각을 주셔서 참과 거짓을 그리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하셨으며, 이것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자유를 허락해 주셔서 어떤 것은 선택하고 또 어떤 것은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자유로 기꺼히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예배는 은혜로우신 주 하나님께 가장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었음은 물론이요 예배 그 자체가 상을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모든 기능들 특히 지각과 자유를 활용 하도록 하기 위하여 유한한 존재가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모든 진리의 완전한 모범으로서 율법을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사의 마음이 포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모든 선의 모범으로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는 또한 저들의 행복이 계속해서 늘어나도록 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그 율법을 순종할 때마다 저들의 본성이 완전해지도록 은혜가 더하여질 뿐 아니라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심판하실 때에 보다 큰 상을 받게 하여 주시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때에 지각있는 존재들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흙에서 일으키시어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어 선악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살아있는 영혼이 되게 하신 연후에 하나님께서는 첫 자녀들에게 주신 것과 꼭 같은 율법을 이와 같이 자유롭고 지각 있는 존재인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이와 같이 자유롭고 지각 있는 존재인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사실상 돌판이나 어떤 썩은 물체 위에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인간의 마음에 새겨놓으신 것입니다. 즉, 인간과 천사의 가장 깊은 영의 중심에 쓰신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결코 이해할 수 없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늘 가까이 있어서 하늘 한 가운데서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이 밝은 빛으로 그 광채를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4.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기원입니다. 인간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율법의 기원은 인간의 본성과 그 시대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아들들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그것은 찬란한 빛을 다 드러내어 비추었으며 '산들이 생겨나고 땅과 세계가 창조되었던 것'과 같다고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이 영광스러운 율법을 깨뜨러버림으러써 거의 전부 그것을 마음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지각의 눈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소외된 것'과 같은 정도로 캄캄하게 어두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손수 창조하신 것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분의 아드님의 사랑을 통하여 인간과 화해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손수 창조하신 것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분의 아드님의 사랑을 통하여 인간과 화해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어붑고 죄많은 피조물의 마음에 어느 정도 율법을 다시 새겨넣으셨습니다. 비록 태초와 같지는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가르쳐주셨습니다.
5.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의 처음 조상들에게만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와 꼭 같이 '참 빛'으로 모든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보여주셨습니다. 그 '참빛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빛입니다.' 그러나 이 빛에도 불구하고 모든 육체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길을 부패시켰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 가운데서 특별히 한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보다 완벽한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을 이해하는 데 더디기 때문에 그중에서 중요한 것을 두 개의 돌판에 적어주신 다음 명하시어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모든 자손들에게 대대로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6. 사실 하나님의 율법이 이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예전에 기록된 것을 귀로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듣기만 해가지고는 그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폭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홀로 성령을 통하여 이것을 계시하실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주신 은혜로운 약속을 따라 진정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계시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31:31이하)
Ⅱ
1. 본래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낙원에 있는 인간에게 주어졌던 율법과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의 마음에 새롭게 써주시기로 하나님께서 자비로 약속하신 율법의 본성에 관하여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위하여 먼저 살피고자 하는 것은 비록 '율법'과 '계명'이 때때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계명은 단지 율법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 택한 본문에서는 한가지 꼭 같은 것을 암시하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어느 편을 택하든간에 종교의식상의 율법(ceremonial law)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율법이 아니었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라는 말 속에서 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종교의식상의 율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입증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 다음에 따라나오는 말 '탐내지 말라'하는 것도 종교의식상의 율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종교의식상의 율법은 이 자리에서 문제삼을 것이 못됩니다.
2.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율법'이란 말을 가지고 모세의 율법(Mosaic dispensation)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이 때로는 그렇게 이해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 말이 그와 같습니다.(3:17) 즉, '하나님께서 미리 세워두신 계약' 곧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세워두신 계약이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겨난 율법' 즉 모세의 율법이 무효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택한 본문에서 그렇게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불완전하고 희미한 율법에 대하여 이처럼 높이 사도 바울이 찬양을 하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 어디서도 모세의 율법을 영적인 율법이라고 한다든가 거룩하고 옳고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실 것이라는 말도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게 뚜렷하게 '율법'이라고 한 것이 결국은 다름 아닌 도덕법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3. 이제, 이 율법은 영원을 사시는 지존(至尊)하시고 높으신 분에 대한 불멸의 그림입니다. 그분의 본체를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볼 수도 없지만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보일 수 있게 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감당할 수 있을만큼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을 보고도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말한 것을 이 율법에 적용시킬 수가 있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의 본체의 완전한 표현'입니다.
4. 고대 이방인의 속담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약 도덕적인 선(virtue)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를 취한다면 우리 마음 속에 얼마나 훌륭한 사랑을 불러 일으킬까!' 만약 도덕적인 선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이것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도덕적인 선이 하나로 되어 하나님께서 눈을 밝게 해주신 모든 사람들에게는 얼굴을 마주 대하듯이 바라볼 수 있게 형체를 갖추었습니다. 율법 곧 거룩한 선과 지혜가 눈에 보이는 형체를 취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부터 창조되지 않은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이제는 인간의 지각으로도 알 수 있는 형태로 옷을 입고 출현한 진리와 선에 대한 본래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5. 만일 하나님의 율법을 또 다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그것은 최고의 불변하는 이성(理性)이며 변할 수 없는 공정성이며 과거와 현재에 창조된 모든 사물의 영원한 적합성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모든 인간적인 표현들이 특히 하나님에 관한 깊은 내면적인 것들은 이와 같은 희미한 그림으로 설명하면서 흐리게 만들 때 그것이 얼마나 부족하고 부적당한 것인가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어린 상태에 있는 한 이 이상 더 좋은 길도 또 다른 길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예언'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흙의 장막(육신)에 거하는 동안 어두운 이성으로 우리가 말하는 것을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내가 '어린 아이와 같이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곧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것이 오는 때 온전하지 못한 것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6. 이제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율법은 영원한 정신을 베껴놓은 것이고 거룩한 성품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영원하신 아버지의 가장 귀한 소산이고 하나님의 근원적인 지혜의 발산이며 지존하신 분의 현격한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게르빔(Cherubim) 천사와 세라핌(Seraphim)천사와 하늘에 있는 모든 천군 천사의 기쁨과 놀라움이며 땅위에 사는 모든 지혜로운 신자들과 훌륭하게 교훈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이오 기쁨입니다.
Ⅲ
1. 이것이 영원한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이제는 세 번째로, 율법의 속성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속성의 전체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사의 지혜를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오직 오늘 택한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만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성은 세가지입니다. 거룩하고 옳고 선한 것입니다. 첫째로 율법은 거룩합니다.
2. 이 표현을 통하여 바울 사도는 율법의 효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本性)을 말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마치 야고보 사도가 꼭 같은 것을 다른 이름(단어)으로 말하면서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기록된, 다름 아닌 이 율법인)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로 순결하고'(3:17); -성결하고 흠없는;영원히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율법을 삶 속으로 그리고 영혼에다 옮겨서 기록해 놓을 때 율법이야말로 (사도 야고보가 말한 것 같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신앙; 곧 하나님께 드리는 깨끗하고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3. 사실상 율법은 가장 높은 경지에서 보면 순결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거룩합니다. 그렇지가 않다면 율법이 근원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산이라고 할 수도 없을 뿐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을 꼭 닮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죄와는 상관 없이 순결한 것이고 어떤 악도 근접할 수 없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결한 동정녀로서 더럽혀질 수도 없을 뿐더러깨끗하지 않은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하고는 썩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죄와도 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빛이 어두움과 사귀겠습니까? ' 죄가 그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가 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율법도 죄에 대하여 원수가 됩니다.
4.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이 죄, 그 자체라든가 죄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불경스러운 가정을 사도 바울은 그렇게도 몹시 미워하면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죄의 원인이 된다고 가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금하십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를 발견하는 것이고 어두움 속에 감추인 것을 찾아내어 밝은 대낮 한 가운데로 그것들을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죄는 죄로서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 사실입니다.(롬 7:13) 죄의 모든 변장한 모습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 추한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계명 때문에 죄는 더욱 악한 것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제 죄가 빛과 지식을 거슬러서 범해지고 무지에 매달려서 호소하는 것까지도 벗겨지고 말기 때문에 죄는 그 핑계를 잃고 그 변장한 모습을 잃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꼭 같이 그 추악한 모습을 더욱 더 드러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죄가 그 선한 것을 방편으로 하여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 자체가 순결하고 거룩한 것을 방편으로 하여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죄는 빛 가운데로 끌어낼 때 더욱 극성을 부립니다. 죄는 억누를 때에 커다란 힘을 가지고 튀어나옵니다. 이렇기 때문에 (죄를 깊이 느끼기는 하면서도 아직 그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경우를 들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기회를 얻어' 죄를 억제할 길을 찾아 노력하는 율법의 억제를 무시할뿐더러 더욱이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8절) 계명이 억누르려고 하는 온갖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을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났습니다.'(9절). 죄는 더욱 더 안달을 하며 극성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계명에 어떤 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계명이 악용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더럽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인간의 마음이 몹시 악하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그래도 '선합니다'
5. 율법의 두 번째 속성은 옳은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게 의당히 돌아가야 할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과 관련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을 마땅히 행하고 말해야 하고 생각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여 줍니다. 이것은 모든 사물과 온 우주와 모든 개인의 본성을 생각할 때에 그와 관련하열 적합하게 됩니다. 이것은 각자의 모든 환경과 또는 상호간의 관계에 적합하게 되는데 그런 것이 태초부터 존재하였든가 아니면 그 후에 어떤 시기에 생겨났든가 상관없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이든 우연이든 관계없이 모든 사물의 적합성에 정확하게 일치가 됩니다. 이것은 이들 중의 어느 것과도 어떤 정도나 상태로서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말이 그 의미 그대로 받아 드려진다면 하나님의 율법에 자의적인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비록 그 전체가 아직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좌우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은 땅과 하늘에서 꼭같이 최고의 우주적인 율법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율법의 원인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옳고 그른 것의 기원입니까? 하나님이 뜻(원)하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어떤 사물이 옳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뜻(원)하십니까?
나는 이 유명한 물음이 실용적이기 보다는 더 호기심을 끄는 것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그것을 다루는 식으로 보면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에게 피조물이 돌려드려야 할 것과 관련시켜도 이것이 그렇게 썩 잘 짜여져 있는 것은 못 됩니다. 인간이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켜서 무엇을 설명해달라고 하는 것도 온당한 일은 못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외심과 두려움을 안고 우리가 조금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실언을 하면, 그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7. 그렇다면 전적으로 어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그분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뜻(원)하시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은 율법의 원인이며 그것은 꼭 같은 것입니다.
8. 다시 말해서 율법 곧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불변의 법칙이 사물들의 본성과 적합성 그리고 그들 상호간의 근본적 관계에 좌우된다면 (물론 내가 말하는 것이 그들의 영원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간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영원한 관게는 모순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이 사물들의 본성과 관계성에 좌우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좌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모든 사물들 자체가 그들 상호간의 관계와 함께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심만을 위하여' 그들 모두가 '창조되었고 또 창조됩니다.'
9. 그러나 이것은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생각이 깊은 사람은 십중 팔구 문제를 삼을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다름아니라 모든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즉, 예를 들면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사물의 적합성에도 일치하는 일이고 또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관계에도 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0. 그렇다면 율법은 모든 사물에 관하여 정당하고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을 뿐만 아니라 선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솟아나오는 샘물과 같은 근원에서 이것을 쉽게 추정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빼놓고 본다면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선하심을오로지 빼놓고 본다면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거룩한 천사들에게 덧붙여 주시려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꼭 같이 인간에게 옮겨주신 것은 이것 외에 어느 것에서 동기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담이나 그의 후손들 즉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명백히 드러내시게 된 동기를 찾아보더라도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간들의 지각이 어두워진 뒤에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시도록 하나님을 움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단순한 사랑 아니었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에녹과 노아를 세우시고 의의 전도자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이요,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과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게 만드신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웠을 때에' 모세에게 기록된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그 율법을 주신 것은 홀로 하나님의 선하심 뿐입니다. 다윗과 그 뒤에 나온 모든 예언자들이 받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들(Oracles)을 설명한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율법을 폐하기 위함이 아니요 성취시키기 위하여'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 속에 율법을 기록해주셨고 원수들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중보적인 '나라를 하나님께 넘겨드려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때까지 사랑의 하나님의 말씀들을 설명하였습니다.
11. 그리고 하나님의 선(善)이 처음에는 주셨고 또 모든 시대를 거쳐서 보존하여주신 이 율법은 마치 샘울의 근원과 같이 선과 자비로 가득차 있고 부드럽고 온유합니다. 시편 기자가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꿀송이보다도 더 답니다' 사람의 마음을 끌고 사랑스럽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것이 포함됩니다. '무엇이나 사랑할만한 것이나 기릴만한 것'을 다 포함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어떤 덕이나, 어떤 찬양이 있으면' 이 모든 것이 율법 안에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사랑의 모든 보화가 다 이 율법 속에 숨겨져있습니다.
12. 그리고 율법은 그 본성에 있어서는 물론 그 효력에 있어서도 선합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가 좋은 것과도 같습니다.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의 열매는 '의와 평화와 영원한 확신'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율법 그 자체가 의로서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평화로 영혼을 가득히 채워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증거하는 가운데 더욱 기뻐하게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율법은 돈을 주고 산 재산의 일부로서 저당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물려받을 유산의 보증금 또는 약조금'에 해당한다고 보겠습니다. 우리의 육신 속에 명백히 드러나신 분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시며, 그 순결하고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확신시켜 주시고, '구원의 날에 우리를 인쳐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석을 만드시는 날에' '사람이 자신을 섬기는 아들을 아끼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없어지지 않은 영광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Ⅳ
1. 이제 끝으로, 율법의 사용에 관하여 말씀드릴 것만 남아있습니다. 첫 번째로 율법의 사용은 두 말 할 것 없이 세상의 죄를 확인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성령의 독특한 일입니다. 그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아무리 불충분하거나 부적합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면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가능하게 만들 것이고, 아니면 어떤 수단도 택하지 않고도 그와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건강하든가 병중에 있든가 뚜렷한 원인도 그 밖에 다른 외적인 이유도 없이 순간적으로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물론 이런 사람은 한 시대에 한명이 있을 정도입니다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신다'는 말을 듣고는 '그들 위에 머무는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율법을 통하여 죄인들을 깨우치게 하시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양심에 자리를 잡기만 하면 바위라도 산산조각으로 부수는 것이 바로 이 율법입니다.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살아있는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 곧, '양쪽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이 부분이 곧 d율법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이 율법은 속임수로 가득한 마음을 꿰뚫을 뿐 아니라 '영혼과 심령까지도 갈라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심령 골수'까지도 가릅니다. 이렇게 되어 죄인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모든 무화과 잎사귀는 떨어져 버리고 그 자신이 '비참하고 가난하고 불쌍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보게 됩니다. 율법은 사방에 비치어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의 '입은 다물어지고' 그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섭니다.'
2. 그러고 보면 율법의 첫 번째 사용은 죄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가 의지하는 생명과 힘을 파괴하는 것이요. 그가 사는 동안 그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이요, 그것은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실제로 죽은 것으로서 '모든 잘못과 죄 안에서 죽어' 모든 영적인 삶을 잃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율법의 두 번째 사용은 그가 살도록, 생명 곧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아나게 이끄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일을 함으로써 율법이 엄격한 교사의 책임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는 것보다는 힘으로 우리를 몰고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모든 것의 샘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수단을 통하여 육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깨버리고, 우리가 의지하는 상한 갈대조차도 남기지 않은채 모든 것을 놓친 죄인이 영혼의 쓰디쓴 고뇌 속에서 부르짖으며 마음의 깊은 곳에서 신음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의 영입니다.
내 모든 변명을 그쳤습니다.
주여, 저는 저주를 받아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돌아가셨습니다.
3. 율법의 세 번째 사용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의 성령이 이 큰 수단을 통하여 믿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 더 크게 교통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하고 중요한 진리가 세상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택하신 수많은 사람들 곧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된 사람들에 의해서조차 별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오면 율법과의 관계는 끝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마지막이 된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로 굳힙니다. '율법의 마지막' :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위하여' 즉, 의롭다하심을 위하여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마지막이 되십니다. 여기서만 율법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무도 의롭게 만들지는 못하고 다만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따름입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율법의 종지부 또는 범위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율법은 계속적으로 목적을 갖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나서도 해야 할 더 큰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고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계속적으로 모든 믿는 이들을 자극시키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폭을 알면 더 알수록 그들은 더욱 더 서로 권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가까이
주의 품에 거하며
주의 충만한 은혜와
더 큰 은총을 기다리자
4. 모든 믿는 사람들이 율법 이른바 유대의 종교의식상의 율법 곧 모세 율법 전체와 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봅시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율법들을 거두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도덕법과의 관계를 끝냈다고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이 율법과 관계를 끝낸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율법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는 아직도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게 하며 그리스도의 피가 매 순간 우리를 깨끗게 씻어주시도록 도웁는 일입니다. 둘째는 머리가 되시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능력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각 지체들에게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율법이 명하시는 것을 행하게 하며, 셋째는 우리가 아직 이루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주의 율법이 명하신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리고 우리가 주께서 약속하신 것을 충만하게 소유하기까지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을 희망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일입니다.
5. 모든 진실한 신자면 누구나 체험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나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하고 외치는 동안 우리는 날마다 그 거룩한 거울 속에서 점점 더 우리 자신의 죄 많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점점더 명백하게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아직도 죄인임을 알게 되며 우리의 마음이나 모든 방식이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매 순간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여줍니다. 즉 '너는 도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우리의 대제사장의 모형)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와 성물(聖物)도 우리의 남은 죄를 대속하는 것으로 드립니다.) (출 28:36,38)
6. 이제 이 이야기를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 합니다. 이 율법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손한 말과 생각도 금지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 완전한 법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우리는 내가 아직도 얼마나 부족한가를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더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주님의 피가 내 죄를 대속하시고 주의 성령이 내 마음을 정결케 하셔서 '완전하고 온전하며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주실 필요를 더욱 더 느끼게 됩니다.
7.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잠시도 떨어질 수 없듯이, 율법을 잠시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과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늘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믿음이 없는 악한 마음' 때문에 곧장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둘은 우리를 서로에게로 보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그리스도는 율법에게로 우리를 보냅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의 높이와 깊이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날라가게 만들며,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율법이 '금과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율법 하나 하나가 때가 되면 우리 주님께서 성취하실 은혜의 약속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8. '율법을 비난하고 심판' 하며 율법을 죄와 사탄과 사망과 같이 취급하여 그 모두를 함께 지옥으로 보내는 사람이여, 그대는 누구입니까? 사도 야고보는 '율법을 비난하는 일'이나 심판하는 것을 너무나 큰 악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형제를 심판하는 일을 율법을 심판하는 일과 꼭 같이 볼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율법을 심판한다면 당신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자입니다!' 당신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심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의 심판 자리에 올라앉아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그 능력을 당신이 행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탄이 당신을 이용하게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앞으로는 허수아비 같이 나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축복받은 은혜의 도구를 결단코 생각하거나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율법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만큼 주를 위하여 그것을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다음 가는 것으로 여기고 그 율법이 여러분의 영광과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9. 만약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과, 그것이 우리가 닮을 수 있는 하나님의 모든 완전한 것의 복사판이라는 사실과 특히 믿는 이들에게는 율법이 '거룩하고, 옳고, 선한 것' 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확신한다면, 그렇다면 율법을 더러운 것을 버리듯이 던져버리지 말고 더욱 더 율법에 애착을 느끼고 거기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결단코 자비와 진리의 법,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법 그리고 낮아짐과 온유와 순결의 법이 당신을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율법을 너의 목에 매고, 그것을 너의 마음판에 새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려거든 율법을 굳게 잡고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율법의 모든 의가 여러분 안에서 성취될'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가득찰' 때까지 율법이 여러분을 계속적으로 기대속의 보혈로 인도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희망을 계속적으로 확인하게 하십시오.
10. 만약 주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미 이루셨고, '주의 율법을 여러분의 마음에 이미 기록하셨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해방하신 그 자유에 굳게 서십시오.' 여러분은 유대의 규례와 죄와 지옥의 공포로부터만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전체에서는 거리가 멀고 다만 기독자의 자유 중에는 가장 작고 낮은 것들입니다) 사실상 무한히 더 큰 것은 죄의 권세와 마귀를 섬기는 일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서부터 해방된 일입니다. 이 자유에 굳게 서십시오, 이것과 비교한다면 그 밖에 모든 것은 이름조차 들먹일 필요와 가치가 없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굳게 서십시오! 이것이 완전한 자유입니다. 주의 율법을 지키고 주의 계명을 따라 흠잡힐 데 없이 행하십시오. '노예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마시오.' 내가 의미하는 것이 결코 유대적인 노예의 멍에가 아니라 지옥에 대한 공포의 멍에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여러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의 멍에와 겉으로나 속으로 율법을 범하는 멍에를 다시는 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이나 지옥보다 죄를 훨씬 더 죽도록 미워하십시오. 죄에 대한 형벌보다는 죄 그 자체를 훨씬 더 죽도록 미워하십시오. 교만과 정욕의 멍에를 조심하십시오. 모든 악한 성질과 악한 말과 악한 일의 멍에를 조심하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더 완전한 율법을 깊이 살피십시오. '자유의 법'을 깊이 살피며 '그 속에서 계속 행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게 될 것입니다.
2015.03.10 13:43
율법의 기원과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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