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1:1 로 기도하십시오!
영상 출처 : http://www.youtube.com/v/aFKQaxcR9XU?version=3
누가복음 11장 1절,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가 여기서 매우, 매우 중요한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진심으로 무서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외스러운 것이며 그가 하신 어떤 것보다 고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아무도 그 방주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그의 아버지를 부르고 있는 것은 그제까지 누구도 지구상에서 본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제자가 그에게 말합니다.
“주여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이것을 가장 놀라운 진술이며 사람들에게 간과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알아챘다면 놀라운 일은 어느 제자도 예수님께 “설교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물위를 걷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죽은 자를 살리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귀신을 내쫒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말을 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떻게 농구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아마 저에게 오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농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 전문분야가 무엇인지 찾고 물어볼 것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그의 전문분야에 대해 물어봅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물어볼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의 거룩한 권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나 물위를 걷는 것이 아닌 그가 기도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들의 눈과 귀를 믿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기도를 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기도를 듣습니까 아니면 종교적인 운율을 듣습니까,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말을 듣습니까, 표현형식을 듣습니까? 지성을 듣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임재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남자, 여자 혹은 아이의 기도를 듣습니까?
지금까지 누군가가 와서 “당신이 설교하는 것처럼 설교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랑할 무언가 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는 아닙니다.
“당신이 목회를 하는 것처럼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뛰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 삶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한가지 내가 알아챈 것은 그들은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릎을 꿇었을 때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것을 성취했을 때 그는 눈을 반짝이면서 말합니다 “당신은 이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타고나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기도를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했을 때 사람들은 차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보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삶에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육신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도 기도는 아주 중요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기도가 얼마나 더 중요할까요. 얼마나 더 우리가 기도에 의지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내가 가장 먼저 당신이 보길 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예수는 물러가사(slip away 사라지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가끔 우리는 우리가 가장 즐기고 싶은 것을 위해 그쪽으로 사라집니다. 경비일을 피하고 구기 스포츠경기를 보러 사라집니다. 직장에서 일찍와서 사냥하러 사라집니다. 부인이 쇼핑몰로 사라집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장 즐기는 일을 하기 위해 사라집니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까?
한 복음설교자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중나온 목사님들은 즉시 그를 골프장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이 골프장에서 골프를 하고 있을 때 그 설교자가 갑자기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십니다. 지난 어느날에...” 목사님중 한명이 말했습니다. “일터 얘긴 여기서 하지 맙시다. 여긴 우리가 쉬기위한 곳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곳입니다. 당신이 그에게 사라졌을 때 그와 동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난 그저 잠시 그에게 사라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만이 내가 도피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가 쉴 수 있는 곳입니다. 기도가 일처럼 될 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같지 않게 됩니다. 그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는 것을 봅시다. 세상은 소음들로 꽉 차있습니다. 특히 당신들 같은 목사들은 누구도 찾을 수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책들과 함께 있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닌 공부해야하는 무언가가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누군가는 말합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많이 기도해야 합니까? 그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린 이것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질문의 어리석음에 대해 봅시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 사라지는 것이 단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해서라는 건 불가능합니까?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장 12-13절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당신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매우 힘든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밤 새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보라 우리가 예수님보다 강한 사람을 찾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선택되어져야 하는 사람들을 선택하기 위해 밤새 기도의 자리로 가셨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린 예수님 보다 더 우위에 있습니다. 기도는 더 이상 아주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니게 되어졌습니다.
2.
마태복음 27장 37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겟세마네에서 치뤄 졌던 전쟁을 누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땅에서 무릎을 떼었을 때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전쟁이 거기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견뎌야 할 적들이 많습니까? 그들은 우리 땅에 있으며 우리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제들을 우리가 직접 상대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서 승리가 주어질 때까지 씨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기도로서 분투하며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에서는 오직 금식과 기도에 대한 말씀만 있습니다. 사탄은 이 부분과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 삶에는 너무도 많은 산들과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많은 일들이 당신을 낚을 기회를 엿보고 당신을 멈추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거기에 머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상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하나님앞에 얼굴을 숙이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해결해 주실 때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셨습니다. 그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것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두 절의 말씀을 보고 싶습니다.
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기도에 관한 말씀을 모두 모아 말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젊은 이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구별해서 특별히 기도를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좀 더 하나님의 임재를 삶에서 실행해 내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나는 기도할만한 혼자만의 공간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이여, 당신들이 혼자만의 공간에서 하나님과 1:1로 기도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임재를 실행하는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살아내는 힘, 기도의 삶을 살아내는 힘,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1:1로 보내는 시간, 주님과 함께 하기위해 기도를 위해 구별된 시간으로 부터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며 열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죠? 우리들은 많고 많은 기도제목들을 하나님의 왕좌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은 그것들과 씨름한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붙잡으려 노력하고 지속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들의 마음속의 청원들 기도제목들은 종이에 써져있고 그것은 아마 15년 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하나님께 “나는 당신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유지하고 버티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열정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기도에서 열정을 읽는 것은 기도가 끝남을 의미합니다.
다음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슬픈 말씀중 하나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8
왜 그렇게 슬픈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 아버지는 신실하시고 내 말은 진리이다. 그는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한 것을 들어주실 것이다. 내가 말한다 구하라 그럼 받을 것이다. 구하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멈추시고,
“그러나 내가 돌아올 때에 내가 이것을 믿는 사람을 한 명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아주 많은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용감하게 약속의 말씀에 대해 복종하지 않을 때 그리고 천국을 침노하려는 열정이 없을 때 혹은 우리 육신의 힘이나 지성으로 천국을 얻으려 할때 말입니다.
그는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지금 왜 예수님이 기도가 필요했었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에 대해 이미 언급했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이단들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천여년의 기독교 역사를 걸쳐 우리는 싸워야 했고 변명해야 했습니다. 우리에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해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있고 있는 것은 그 하나님이 성육신을 통해, 그 굴욕을 통해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된 적이 없었던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성을 가지고 지구에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행위의 지위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했냐구요? 왜냐면 그는 하나님이셨으니까요”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말씀에 강조가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지구에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친 모든 것, 일으킨 모든 기적들은 그가 사람으로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완전히 성령에 의지하여 행한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우리의 큰 형 예수님은 또한 우리의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모델이 됩니다.
그의 굴욕으로 그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그는 완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완전한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셀 수 없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의 손으로 우리를 구속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힘에 완전히 복종하였습니다.
우리 이해를 도울만한 것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우선 저는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힘에 완전에 복종하는 사람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보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저 뒤에서 기도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내가 아주 열성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내가 이 모임에 대해 아주 관심을 갖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들이 우리의 것을 원할까? 그들이 우리를 후원하길 원할까? 내가 설교하고 있지 않을 때는 나를 위한 많은 것들을 합니다. 내 음식을 걱정을 합니다. 신경이 쓰입니다. 나는 당신들 앞에서 저 말씀들이 내 마음에 있다고 위선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내 음식은 내 생계는 내가 사는 이유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다.
많은 이유를 가지고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며 주님의 식탁에서 깨끗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이것을 배우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맞습니다. 우린 예수님이 아닙니다.”
사람은 율법에 의해 심판받는 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율법에 의해 심판받습니다. 그러나 제겐 율법에 의해 심판받는 것은 작은 것입니다. 폴워셔가 율법의 척도에 의해 심판받는다면... 맞습니다. 저는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척도가 있다는 것 아십니까? 완벽한 사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비교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필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아 지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그리스도와 같아 지게 해 주십시오. 저를 내동댕이 치거나, 제 사역을 위협하거나 만약 당신이 저를 해치셔야 한다해도, 무슨일이 일어난다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같이 저를 만들어주십시오!”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많은 열매를 가져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들이...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한 중국 크리스챤이 미국에 와서 교회와 모든 것들을 보고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이룬 모든 것들에 완전히 놀랐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 없이 성취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의 독립선언 때 놀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속선언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종속. 이것은 우리같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에겐 완전한 종이 되는 것, 그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는 그보다 앞서도 안되며 뒤쳐져서도 안되며 옆에 걸어야 하는 것을 아주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보통 젊은 사람의 사역은 활동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기까지 단지 활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활동이 적어집니다. 심지어 열정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들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우리가 얼마나 우리 스스로 결단해서 일을 합니까? 이것은 아주 큰 죄가 아닙니까?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 결단하는 것. 우리는 심지어 우리 문화에서 그렇게 하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만약 차가 필요한데 돈이없다면? 그가 어떡할까요? 은행에 갑니다. 문제들을 우리의 손에 가져오고 우리 스스로의 결단에 맡깁니다. 그는 은행에 가서 그 일을 마칩니다. 그리고 은행에 종속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대신. “저는 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집이 필요합니다. 돈이 없습니다. 아버지...” “저는 사역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것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여주세요. 저를 이끌어주세요. 저를 인도하여 주세요. 완전하게 그에게 넘겨드리십시오. 절대적인 항복을 하십시오. 제가 마치 제 신앙고백을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입니다. 저는 당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육신에 있는 것으로 보길 원합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한 한 명의 사람으로 보여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당신들이 부름을 받은 이유라는 것을 알길 원합니다.
기도는 우리 의지가 끝남과 예수님께 우리가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누가 이런 질문들을 한다면 우린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왜 그곳에 가서 그 일을 하셨습니까?”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 그것은 당신에게 놀라운 기회가 열려진 것 같네요!”
“아닙니다. 나에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말고는 아무 기회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지를 멈춤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예수님께 영광을 가져다 드립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저는 이 부분을 우리가 주목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심은 그가 완벽하게 성령에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옷을 제쳐 두고 성육신하는 굴욕을 겪으심으로... 맞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성령의 힘으로 해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맏형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린 그처럼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이시니까요” 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진리이긴 합니다.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처럼 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맏형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완벽하게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힘에 완전히 의지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의 신성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를 닮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령의 힘에 완전히 의지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이제 몇 장의 말씀을 읽기 원합니다. 누가복음 4장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보이십니까? 그는 강제적으로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그는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를 돌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데 성령의 힘에 성령이 이끄는 것에 매우 민감합니다. 페루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믿음의 길을 가지 않으면 그에게 “당신은 술취한 사람이 아마존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비유가 오기도 합니다. “당신은 술취한 사람이 눈이 가려진 채 가족들과 다이너마이트로 가득 찬 스피드 보트에 앉아 아마존으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이끌림을 찾지 않는 것은 저것보다 더 심각한 것입니다.
당신들에게 뭔가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엔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혀 모르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린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성령은 말씀에 모순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짜인 것을 압니다.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말씀에 관해 예수에 관한 지식적인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가끔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것을 하게 만드는 성령에 이끌린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평범하지 않은 일이지만 말씀에 모순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달라고 성령께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기 위해 모든 일들에 민감해야 합니다.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 뿐 아니라 광야에서 계속 성령의 힘에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는 성령에 의해 그는 요단에서 갈릴리로 성령에 힘에 의해 돌아왔습니다.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에 권능에 의한 사역입니다.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역입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더 같은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고 신약을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순종하려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계명을 읽고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남편들이 선언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것이 맞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할 수는 없어요.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압니다. 다만 그럴 힘이 없는 것 뿐이에요.”
당연히 당신에게 없습니다! 당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성경을 펼쳐서 그 계명들을 봤을 때 당신은 당신을 광야로 이끌 방법은 성령의 힘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 계명들을 읽으며 울부짖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 저를 성령으로 채워주세요” 믿는 자의 그 지속적인 울부짖음 “채워주세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폴형제 우리는 그것을 가졌습니다.”
그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스펄젼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더 명백히 보게 해달라고 울부짖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일하심에 대한 지속적인 의지입니다.
제가 회심한 후에 제 큰 형, 핏맨이 책더미와 함께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허드슨테일러와 죠지뮬러의 자서전, 허드슨 테일러의 영적인 비밀 등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시작했습니다. 역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 시대와 장소가 다르고 교파가 다르지만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섬긴 그 남자와 여자들에게서 공통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의 기도생활, 그들의 성령으로 채워져야 할 엄청난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부터 떨어져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에만 공통된 점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이것을 주목해서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뒤로 돌아가 봅시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온 이 남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하고 진정한 이 되기 위해 육신에 들어가는 굴욕을 겪으신 것입니다. 단 한명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영광의 옷을 제쳐두고 사람의 몸으로 성령의 힘에 의해 걸으셨습니다. 그는 성령에 이끌려 그가 한 일들을 했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얼마나 더 절박합니까? 침례교회는 매우 바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가짜 사역을 보고 있습니다. 95%정도가 가짜입니다. 일이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성령의 힘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씀에 모순됩니다. 그러나 우리 침례교인들은 가끔 계속 그것들을 행합니다.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채워져야 하는 지속적이고 절박한 요구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9절은 말합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놀랍습니다.
누가복음 8장 46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킹제임스역은 힘(virtue)이 빠져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Somebody hath touched me: for I perceive that virtue is gone out of me. Luke 8:46)
예수님은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으로 휩싸인,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힘으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일이 되어 질 때 성령이 그에게서 나갔습니다.
연관이 많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것을 이렇게 비유하곤 합니다.
나는 설교자들이 설교의 은사로 설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힘 안에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행사가 끝나고 그들는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힘(virtue)이 그들에게서 빠져나간 것입니다. 성령은 그들을 매우 고양시키고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것이 끝나고 나서의 그 사람들은 마치 자기 딸이 차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안 어머니가 초인적인 힘으로 문을 열고 딸을 꺼낸 다음 나중에 그녀에게서 나간 힘 때문에 팔에 통증이 오고 피곤을 느끼는 것과 같았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성령의 힘으로 설교를 하는 것, 그 사람들은 그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이 계시는 성경말씀으로 설교를 한 것입니다.
기도는 예수님께 필수적이었습니다. 몇가지를 더 읽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방송인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의존적인 분이셨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실패하는 부분이다. 그는 기도를 위해 광야로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의존적이며 순종하셨고 그리고 승리하신 분이셨다.”
그가 한 말을 들어봅시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의존적인 것이 순종과 승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메튜 포는 “우리는 자신 스스로가 본이 되어 우리에게 은밀한 곳에서 기도를 하라고 명하시는 그리스도와 가끔 만난다.”
저 말은 양심을 찌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들에게 은밀한 기도를 하라고 본보기가 되는 것이 아닌 나의 말로 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는 그가 그의 계율을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은밀한 기도를 하도록 강압하는 그리스도와 가끔 만난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려고 언제나 개인적이고 은밀한 곳을 골라 기도를 하신다. 그것이 우리를 더욱 기도에 대한 부담을 가지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보다 하나님과 더 많은 용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는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백할 죄, 용서를 구할 이유, 거룩하게 되기 위한 요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에겐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은혜들이 없었음에도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위해 빈번히 그리고 습관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40:30
그는 우리가 하듯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었고 은혜에 은혜를 자비에 자비를 더해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1장에서 우리에게 표본이 되신 예수님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막 1:29-38
처음부터 봅시다. 그는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마가는 곧바로(imediately)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곧, 곧, 곧.... 만약 마가복음을 제대로 쭉 읽는다면 읽고나서 분명 지칠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스냅사진 같습니다. 거기엔 쉼이 없습니다. 곧, 곧...
회당에서 나와 곧 그들은 시몬의 집에 갔고 예수님은 시몬의 아픈 장모를 고쳤습니다. 큰 힘이 그에게서 빠져나갔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모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왔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저녁에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부 오클라호마에서 땅을 분할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모든 사람들을 줄을 세웠습니다. 수백명의 말, 마차에 탄 사람들이 한줄로 섰습니다. 왜냐면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을 때 그들이 동시에 그들의 땅을 찾아서 레이스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발길에 치어 죽기도 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그 상황을 알길 원합니다. 안식일이었고 수천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해가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안식일의 여정(sabbath day's journey)에 오르기 위해서 입니다(주: sabbath day's journey: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2000큐빗;약 1.2km 까지 걸을 수 있었다).
예수님께로 가기 위해서 입니다. 그 시간이 되면 예수님께로 가는 경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위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산타로사에 있는 산에 갔을 때 그곳 주민들은 제가 의사를 데려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곳엔 1500명 쯤이 성회에 참석했고 그것을 통해 제가 그들을 데려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약이 없었고 수술도구도 없었습니다. 있었다 하더라고 위생적이지 않은 그곳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전쟁터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필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필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그들의 아이들은 아파서 죽어가고 있었고 온갖 질병과 전염병, 상처, 부러지고 잘라진 사람들.... 그 상황은 완전히 악몽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오두막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고 저는 의사에게 그들의 말을 번역해주느라 3일 동안 복음전하는 것을 멈춰야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처한 상황을 아셨으면 합니다. 보통 예수님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 계셨고 기껏해야 몇명이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수천명이었습니다. 그들은 폭력적이었고 성난 상태였고 절박하게 안에 들어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화가 났고 괴로워했고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이 갈 시간이 올 것이고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그곳은 전쟁터였습니다. 그곳은 어떤 사역자도 지금까지 보지 못한 공포스러운 곳이었고 그런 곳은 우리를 완전히 녹초가 되게 만든 다는 것을 우리들은 압니다. 완전히 지칩니다.
그리고 1장에서 말합니다. 해가 지고 사람들이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35절을 봅시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그 사이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집 주변에 자리를 만들어 자고 있는 것을 상상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나와 사람들이 누워있는 자리를 헤쳐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자신이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버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잠을 하나도 잘 수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는 몸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나는 신중히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역자들에게도 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들이 기도, 말씀읽기 설교와 같은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일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일들에 뼈 빠지게 일하지 말아야 할 아주, 아주 큰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예수님의 삶에 대해 무언가 보기 원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 이제 할 만큼 했습니다.”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주여, 전 지금 기도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만지지 않은 다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너무 많은 사역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바로 그 순간의 예수님일 것입니다. 나는 마틴 루터가 한 말을 사랑합니다. 그는 “나는 할 일, 활동들이 너무 많아서 오늘은 적어도 3시간은 기도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완전히 우리와 반대 아닙니까? “나는 너무 할일이 많아서 기도할 시간이 없어” 우리는 그 선언으로 말합니다. 난 나가서 내가 성취해야 할 것들을 성취할 것이다. 내 육신의 힘으로!
36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그들은 “모두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뭐하시는겁니까? 지금 저 사람들이 안보이십니까? 이 밤에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아픈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고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우선순위를 알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찾는 것, 그의 하나님을 쫒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인간애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그리고 당신들이 인간애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 목사님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나는 가끔 목사님을 찾고 있는 교회에 초청되어 설교를 합니다. 나는 당신들도 해봄직한 한 특별한 방법을 씁니다.
나는 앉아서 칠판이나 화이트 보드를 교회 앞에 놔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목사가 하길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앞에 나와 목사가 해야하는 온갖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들을 마치는데 68시간이 걸리고 나는 말합니다. “목사가 얼마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길 원합니까?” 다음 질문은 “몇 시간이나 그가 앉아서 하나님의 알기위해 하나님의 얼굴을 찾길 바랍니까?
가장 큰 필요...나는 당신들을 모릅니다만, 나는 우리에게 가장 큰 필요를 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찾았듯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의 임재안에서 그의 힘을 받아서 어떤 것이 기도로 극복되지 못합니까? 제게 대답해주세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게 대답해주세요. 당신의 연약한 팔로 무엇을 해낼 수 있습니까? 제게 대답해주세요.
그는 철 장막을 하루 만에 내릴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나라 전체를 한 시간에 회심시킬 수 있습니다. 그를 부르십시오. 그를 믿으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오늘 저녁 저에게 매우 인정이 많으신 주님, 자비로우시고 항상 도우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기 당신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애원하는 기도의 마음을 부어주십시오. 치열하게 전쟁이 이기고 지는 그 곳을 보게 해주십시오. 가장 연약한자, 우리 중에 가장 재능이 없는 자, 시온의 제일 작은 종족 중에 제일 작은 사람이 열두 중족의 가장 훌륭한 전사보다 더 많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으로, 당신의 얼굴을 찾는 것으로 하나님의 힘을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말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