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의 댓가 - The Cost of Discipleship
마7:13-29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7장을 매우 강하고 위험한 장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먼저 마태복음이 무엇이 그렇게 강한지를 내용을 알고 봐야 할 것이다. 먼저 마태복음 5장을 보면 1-2절에서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말씀이 나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나는 마태복음을 읽을 때마다 강력한 것을 느끼곤 한다.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을 보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에 대하여 말한다. 왜 이렇게 산으로 올라갔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듯이 마태도 그러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 같다. 모세가 산을 올라갔을 때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내려왔었다. 그 당시 그 누구도 그 산에 올라갈 수가 없었지만 지금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내려 오셔서 그 백성들과 같이 계신 것은 놀라운 일이다.
1.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인가?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을 백성에게 전한 것 같이 예수님이 언덕위에 앉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그 백성들에게 말씀해 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이며 신앙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좇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중요한 내용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신학을 배우고 로마서를 읽고,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읽고 교리를 찾아 진리를 논하려 하지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방치하고 들여다보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손상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서를 읽고 훌륭한 진리의 교리를 사랑하고 지식으로 이해하고 완전히 받아드리지만 산상수훈에 오면 이 가르침이 너무 위험하고 지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을뿐더러 삶을 통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교훈이라고 생각을 한다.
마태는 5장 2절에서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입을 여시고 창세기부터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이러한 가르치심을 인간이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나서 우리가 이야기 하는 팔복에 대하여 가르치시기 시작하신다. 기독교는 도덕성보다 훨씬 값진 것이며, 우리가 받아드리는 몇 가지의 율법의 도덕성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의 내적 기질을 바꾸어 놓는 혁명이다. 그 누구든지 기독교를 알고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재창조의 사역을 통해 그의 중심의 본질을 바꾸어 놓으시며, 하나님의 재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이 메일을 받는데, 이러한 이메일을 받는 것은 당연히 나의 잘못이다. 하지만 칼빈주의자가 어떻게 행위구원을 주장 할 수 있는가 이다.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니다. 믿음의 증거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만약 인간의 교리이던지 인간의 부패라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행하면 나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강하고 매우 수준이 높은 팔복의 가르침은 분명 인간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2. 교리가 왜 중요한가?
이러한 일이 사람에게 나타나려면 이 일이 그 사람의 삶이 돼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이 없는 것은 교리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날 미국에서도 교리가 상실되어 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어두운 시대에 있을 때에는 교리가 상실되었다. 상실된 교리는 칭의의 교리이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완전한 타락에 있는 자들이며 불순종인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증오하며 인간은 하나님께 나오고 싶어 하지도 않고 나올 수도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역은 성령님의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역사로 인해 인간의 내면이 진정으로 새로워지며 계속적으로 진행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며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복음에 올바로 반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이 무엇인가?
믿음과 회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이며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면 분명 끝까지 끝내실 것이다. 구원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 우주 만물에 장식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데 그를 변화 시키시는 것이며 그의 중심의 본질을 변화 시키시며, 계속적으로 성화 과정 속에서 역사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변화가 없다면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변화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의 삶에서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삶을 살도록 그의 진로의 방향도 바꿔주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상 진전되어 간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장할 때가 있고 지연될 때가 있으며, 허우적대며 몸부림 칠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체적인 삶을 보면 분명 완전히 변화한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 속에서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분명 끝내시기 때문이다.
4.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무엇을 남기며 살아가는가?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변화 시키시는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를 계속 변화 시키셔서 삶의 흔적을 남기 실 것이다. 산상수훈 5장 3절부터 한번으로 끝나는 그러한 사건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므로 분명 흔적을 남길 것을 나는 믿는다. 이 말씀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분명히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손으로 직접 역사하시고 변화되는 것을 보시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분명 그들 마음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현상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그들의 삶 속에서 이러한 흔적을 분명 가지고 있을 것이다.
5. 결단주의식 전도가 올바른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현시대 와서는 결단주의로 변화 시켜버렸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선택했는가? 수백만 명이 오늘 날에 그리스도를 선택해서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인간의 단순한 선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중생의 역사와 동등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마태복음 7장으로 다시 가서 보면 먼저 5장으로 통해 산상수훈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특성으로 시작하여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특성이 나타내지는 가를 가르치신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특성이 나타난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들 이었으며 마태복음 7장 13절에 와서는 우리에게 매우 큰 경고를 주신다.
6. 오늘날에 전도나 강단에서 끊어진 메시지가 무엇인가?
오늘 날에 잘못된 전도는 개인적으로 하던 아니면 강단에서 하던 절대로 경고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전도하는 사람들도 경고의 메시지가 없다는 것은 나를 놀라게 한다. 존 번언의 천로역정에서도 계속적으로 경고를 하고 있지만 이제는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경고가 들리지 않는다.
때로는 목사들이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경고를 외치지만 전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고백한 이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외치지는 않는다. 이것이 우리 전도자들이 해야 하는 큰일이다.
7. 죽어가는 자에게 그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정당한가?
매우 잘 알려진 전도자에게로부터 편지가 왔었다. 그는 나에게 매우 화가 나있었고 22명이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어제 밤에 당신이 항상 반대하던 기도를 하였다. 나는 그에게 다시 편지를 쓰기를 당신이 카리스매틱을 믿고 있는지를 몰랐다고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가 다시 편지하기를 나는 카리스매틱이 아닌데 왜 나보고 카리스매틱이라고 하는가?하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구원 받은 것은 오직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데 당신이 어떻게 알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기도해 주는가? 하지만 그는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그럼 당신의 일이 무엇인가? 당신의 일은 복음을 올바로 전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회개 하게 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 아닌가? 아무리 그들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을 지라도 짧은 시간일지라도 아주 깊은 카운슬링을 해서 그들에게 경고와 언약을 가르쳐야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역사하시고 계신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경고가 있어야 하는 것을 잊었는가?”
8. 교회에서 경고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오늘 날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나서 며칠 믿는척하고 다시 세상 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역사의 증거를 볼 수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여러분들도 언제가 마지막으로 개종하는 자에게 경고를 하신 적이 있는가? 만약에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난 행동이며 더 나아가서는 말씀에서부터 떠난 가르침을 하고 있다.
언제 당신은 같은 교회의 성도에게 죄를 범하였을 때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경고를 한적이 있는가?
현시대에 와서는 경고가 변화한 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있다. 보통 요즘에는 교회에서 믿음을 떠나 행하는 행동에 대해서도 그냥 놔두는 식이다. 또한 만약 그들에게 경고를 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었나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식으로 행동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천국에서 모든 상급을 잃어버릴 것입니다.”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경고는 경고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나 자매들에게 대한 올바른 경고는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했을 때에 나는 그곳에 있었고 그것을 들었다, 당신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세례를 그리스도를 구속 주와 주님으로 고백한 것을 나는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몇 년 동안이나 가르쳐 왔다. 그 동안에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안에서 잘 걸어 온 것을 나는 봤는데 이제는 믿음에서 떠나 세상 적으로 행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당신의 영혼이 걱정이 된다. 만약 당신이 계속적으로 이러한 길을 간다면 과거에 당신이 믿음으로 행한 것들이 다 거짓이었음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확실히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시험하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있는가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9. 믿음의 선진들은 어떤 내용으로 책을 쓰고 어떤 내용의 설교와 전도를 하였는가?
이러한 식으로 경고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과거의 믿음의 선진들의 책들을 보면 무엇이 진정한 복음인가를 많이 썼다. 하지만 현시대에 서점에 가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찾아봐라 찾지를 못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이다. 복음의 내용을 나타낸 책은 보기가 드물 것이다.
나는 믿음의 선진들이 쓴 책을 읽으면 그들은 성경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지를 많이 써놓았다. 회개하여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울부짖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 시대의 책들은 감정을 속이는 술책과 교묘한 속임수를 통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너무나 많은 고서들은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하여 가르쳤으며, 그 당시 목사들은 영혼의 의사들로 그들의 교회의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점검하였다.
그러한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자신의 신앙고백이 거짓이 아닌가를 계속적으로 경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책은 서점이나 기독교 도서관이나 또는 설교에서 오늘 날 찾아 볼 수가 없다.
10.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늘 날과는 다르게 산상수훈의 결론을 내시면서 매우 큰 경고를 하신다.
먼저 13절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오늘 날에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보수적인 자유주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단순한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하다. 나는 비디오에서도 많이 보지만 그들은 절대로 신앙고백하는 사람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만약에 여러분들도 신앙고백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질문과 확고한 가르침 없이 그냥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아무나 다 신앙고백하면 받아주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유명인사 일지라도 아무리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믿어 왔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 되셔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는 것을 믿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질문을 피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또한 이러한 질문을 신앙고백자들에게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도자들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육적으로 지식을 자기고 있고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이 질문을 피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어떤 목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하게 하셨다“라고 하는 목사들도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것과 같이 경고를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뚜렷이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또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고 성경 말씀에서 말씀하는 메시아에 대하여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며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잘라내어 버려질 것이다.
이 세상의 하늘 아래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 구원을 줄 다른 이름은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나는 당당하게 오늘 날 많은 전도자들에게 말하기를 원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방법이 없고 그리스도가 전부이다.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두 무릎을 꿇어야 하며, 모든 입이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만약 그 누구라도 오직 예수님에게 인도하지 않고 인간의 소망을 갖게 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 무엇이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다 허망된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만드셨고 그를 위해 만드셨다. 여러분은 조심해야 한다. 진정으로 조심해야 한다.
로마 시대 당시에는 너무나 많은 신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그 많은 신들 중 하나라고 했다면 그들은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문화 속에서 그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구원의 길이라고 하였을 때 핍박과 죽음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른 신들은 다 거짓이며 이러한 신들을 믿고 있는 로마 사람들은 다 거짓을 믿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11. 자유주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오늘 날에는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전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강력하게 전하지 않는다. 그러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다. 또한 죄에 대하여 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그 사역에는 절대로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고 인간들의 더러운 죄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절대로 성령께서 그 사역에 참여하시거나 상관하지 않으신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오시면 분명 세상의 죄에 대하여 정죄하신다고 하셨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중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다. 그 좁은 문은 바로 그리스도시다. 어떠한 다른 문은 없다, 선택해서 들어가는 문제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문은 없다.
내가 성경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단지 골로새서 한 곳에서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하나님 아버지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타내신다. 모든 것이 아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아들과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의 중심적인 모든 것과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아들에게 초점이 되어 있다.
12. 오늘 날에 전도자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또 오늘 날 전도자들에게서 잃어버린 것은 기독교를 단지 문만 제시하지 길은 제시하지 않는다. 분명 문을 통과하면 그들의 삶에서 협착한 길을 가는 것이 증거로 남아야 하는데 그러한 증거는 없다. 그들의 삶의 방향과 그들의 삶의 특징이 협착한 길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들이 넒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적이다.
신학에 약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종교의식만 만들어 낸다면 그는 이단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 여러분이 좁은 길과 협착한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첫 시작부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말씀하신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현상이 사람에게 없다면 아무리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가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가짜일 것이다. 어떻게 죽은 자가 좁은 문을 통과할 수가 있겠는가? 절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좁은 문을 통과해서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13. 하나님은 구원 받은 자를 어떤 길을 걷게 하시는가?
구속 받은 자, 칭의 받은 자, 거듭난 자는 좁은 문만을 통과 하는 것이 아니라 협착한 길도 걷게 하신다. 이러한 자는 마지못해 좁은 문과 협착한 길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며, 사명감을 가지고 구원을 얻으려고 걸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가 협착한 길로 걸어가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변화했기 때문이며 협착한 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착한 길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중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도 사랑하며 그가 가르쳐준 협착한 길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우리 자신을 높게 보기 때문에 구원에 관해서는 너무 낮게 보는 것이다. 구원을 인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면 구원에 대한 결과의 삶은 그들에게 나타나도 그만이며 안 나타나도 그만 일 것이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것과 완전히 반대로 이야기 한다.
14. 재창조의 삶은 무엇인가?
창세기에서의 시작인 “태초에”라는 단어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태초에”라는 단어는 같지만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태초에“는 새로운 창조를 말한다. 거듭난 자가 성령의 역사로 그의 마음을 중생 시켜서 하나님의 능력이 태초적 창조에 나타났듯이 그 사람에게도 새 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재창조의 역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역사와 같이 그의 마음도 새로운 재창조와 같이 부활한다.
우리는 부활하였으며, 새로운 창조의 피조물과 같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삶은 협착한 길과 같으며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삶이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와 사단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몸부림치는 고통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Charles Ryrie가 말하기를 “자신이 아닌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너무나 잘못된 기독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그 자신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면 새로운 피조물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15. 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이라고 하셨을까?
물론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혼자 할 수 있게 그냥 두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고 진실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또한 거룩한 성경의 말씀을 통해 새 피조물로서 흔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삶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새피조물의 삶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상상해서 말씀보다 더 앞서간다는 뜻이 아니다. 또는 말씀보다 적게 생각해서 말씀에 못 미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은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며 성경은 유능한 말씀이다.
내가 속해 있는 남침례 교단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써진 것이지 아닌지에 대하여 오랫동안 싸워왔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승리하였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써졌다고까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더 큰 싸움을 해야만 했다. 감동으로 썼다는 것은 반정도만 온 것이다. 이제 그들이 싸워야 하는 것은 말씀으로만 충분하냐는 것이다. 만약에 충분하다면 성스럽지 못한 심리학이나 사회 심리학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또는 우리 마음이 나를 가르치는 것도 필요 없다. 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나의 마음이 나에게 가르치며 설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진리로 마음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협착한길은 이미 벌써 우리를 위해 준비된 길이며 우리에게는 특혜를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길을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셨던 것이다.
나는 몇 주 전에 정글에 있었는데 우리 식구는 같이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 왔는데 만약이 내가 그곳에 머물렀다면 여러분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곳에 있는 교회는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는데, 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곳에서 산악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가뭄 때었다. 계속적으로 가르치고 있었고 거기에는 35명 정도의 여자들이 옆쪽으로 따로 앉아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공부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여자들은 한 번도 글을 읽어 본 사람이 없었다. 그 공부가 끝나고 여자들만을 가르치기로 약속을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말로 전하였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얻는 식으로 공부를 하였다.
16.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은 분명 말씀 안에 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읽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절대로 협착한 길을 걸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자신이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가졌다고 말할 때 나는 그들에게 그럼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하고 다시 물어 본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교제를 나눈다고 하면서 말씀과 관계를 맺고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지 않은 것이다. 협착한 길은 말씀에 다 써져 있다. 오늘 날에 어린 목사들이 사역에 뛰어들지만 그들의 사역에는 아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늘 날 비극적인 현실이다. 나는 너무 빨리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사용당하고 싶으면 말씀의 큰 부분의 내용들을 외워라. 그리고 하나님께 사용당하고 싶으면 성경 말씀을 첫 카버부터 끝 카버까지 계속적으로 읽어라.그리고 하나님께 사용당하고 싶다면 하나님께 무릎 꿇어라. 나는 청교도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 앞에 사람들을 진정으로 복종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들은 지나치게 밀어붙이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 따르는 것보다 외면하는 것이 더 많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눈과 귀, 발 우리의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가는 방향과 사고방식과 우리의 내부와 외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좇아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행동하고 다닐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나는 간단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 왔다. 나는 나의 아들과 같이 Huntville에 있는 로켓트 박물관에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사람들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은 아이들을 집에서 공부를 가르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계속 대화하다가 알아낸 것은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산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잠시라도 사랑하신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또 질문하길 당신들은 당신의 삶에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린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하는 존재임도 알려 주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협착한 길은 우리의 원칙이 아니며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의 반응으로 원칙과 외부적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을 조정하는 것이다. 생각과 마음을 말씀에 복종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협착한 길이다. 이 길은 매우 고르지 않은 길이며, 까다로운 길이다.
출처 : 예수안에 하나교회(http://cafe.daum.net/1inch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