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 - 여러분은 하나입니까?
(Signs of a True Christian-Are You one?)
설교날짜: 2008년 7월 13일 금요일
요한1서 2장7절을 보겠습니다. 일어서 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기도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필요에 따라 많은 생명을 위하여 당신의 말씀을 사용해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앉으십시오.
요한1서를 보면서 진실로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한 증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 진실로 거듭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사실은 그들이 기도를 반복해 왔기 때문에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종교적 단체에 가입해 있고 종교적인 예배를 드려왔기 때문에 또한 단순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증거는 우리가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가고 그분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며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에 보면 참으로 거듭 났는지 우리의 삶에서 최소한 몇 가지 점검 해 볼 수 있습니다.삶이 변화되지 않는 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일생에 한번 복음주의적인 결심기도문으로 기도하고 크리스천이 된 많은 형제들과 살아가고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음을 압니다. 여러분,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기도를 반복해서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주어집니다. 그 참된 표지는 성경에 씌어 있는 참된 크리스천과 동일한 것들입니다. 본문에 참된 크리스천은 빛 가운데를 걷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또한 참된 크리스천은 자신의 죄에 민감하고 그 민감함이 그들을 회개와 자백으로 이끌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참된 크리스천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죄와 하나님 말씀에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된 크리스천의 삶은 습관적인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순종은 완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크리스천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죄에 민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참된 크리스천의 삶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실재적인 관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된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걸었던 것처럼 걷게 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기적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죄 없는 완벽한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걸음, 삶, 존재, 말 등의 모든 스타일, 모든 면에서 조금씩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점검은 2장 9절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참된 크리스천의 가장 위대한 표지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다른 인종(race)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형제”란 단어는 다른 인종의 누군가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인종은 하나입니다. 그 인종은 인간이며 본성적인 것이고 우리는 그것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다른 문화에서 온 누군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다른 문화에서 온 사람들과 모든 문화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것은 그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고 나무에 못 박는 원수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여기서 사랑하라고 하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다음의 예수님 말씀을 보십시오.“너희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 구절은 종종 교도소 사역과 빈민 봉사사역을 위한 말씀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일들을 모두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많은 제3국들에서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 음식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런 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음식이 공급되지 않고, 물이 공급되지 않고, 옷도 없으며, 거처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약 누군가 밖에서 문 사이로 음식을 넣어주지 않거나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굶어 죽게 됨을 의미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갈아입을 옷을 넣어주지 않는다면, 누더기를 걸치고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플 때 누군가가 오지 않는다면 아마도 병들어 죽게 될 것입니다.
1세기의 초대 기독교인의 상황으로 들어가 봅니다. 감옥에 갇힌 누군가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감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썩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죽을 것입니다. 만약 외부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는 다면 그들은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감시관에게 누군가 잡힙니다. 크리스천에게 음식을 가져다 준 사람은 크리스천임이 분명하며 그 역시 갇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옥에 있는 형제를 방문하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다른 크리스천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너무나도 강해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 놓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사랑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당신은 아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새 언약에서의 사랑은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하는 사람”, 그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여기서 동사는 현재형 시재입니다. 그것은 계속적인 미움, 계속적인 적대감을 말합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글쎄요, 저는 그렇게 큰 적대감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큰 미움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단지 부정적인 것 이상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사랑에 대한 긍정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자 잠시 뒤로 물러서 이것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저는 형제, 자매들에게 이런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너무나 위선자들로 가득합니다. 저는 이 작은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넒은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갈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어차피 위선자들의 모임인걸요?”
만약에 여러분이 그와 같은 말을 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인 마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이름은 중상자(slanderer)요 고발자(accuser)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못하고 그들 밖에서 판단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무언가를 알기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이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주일아침에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가족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교회멤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그들을 따로 분리 시켜 말할 수 있죠?”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보십시오.
참된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실패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넘어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일어날 한 가지는, 만약 당신이 정말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는 물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피보다 더 강합니다.
저는 몇 번 비행기에서 다른 문화에 있는 분과 나란히 앉게 되었습니다. 스위스나 영국이나 남미, 아프리카,어디건 완전히 다른 나라입니다. 앉아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크리스천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몇 초 만에 예전부터 알아 왔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증거가 됩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 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에 의해서 드러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는 완전히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이것을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했을 겁니다. 저는 자주 반복합니다.
저는 제 생애동안 하나님의 능력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선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신학생 시절을 기억합니다.
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예수님처럼 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섬기게 해달라고,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는 아니지만 저는 그를 높이 삽니다. 그가 더 큰 것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나귀와 돌들도 설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그것이 설교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처럼 되기 위하여 가장 어려운 장소에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과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중국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하기에 쉽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이 교회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진실로,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성경적으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이러한 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글쎄요, 당신이 알다시피, 저는 여기에서 공부했습니다. 저기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공부했습니다.”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은 사랑 하십니까?”입니다.
다음 절에 보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함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 받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속에 꺼림이 없으나”
자 이 말씀을 제가 말하고자 하는 맥락에 놓겠습니다.
당신이 “내 생애 들어본 중에 가장 지루한 설교자 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설교자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는 들어본 중에 가장 지루한 설교자예요”
그러고 나서 누군가 일어서서 말합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설교자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그분이 제 생애에서 만나본 가장 좋은 분이라고 생각 합니다”
“네, 저도 압니다. 저도 그 분처럼 사랑으로 누군가를 섬기는 분을 만나 본 적이 없어요”
네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거리끼는 것을 제거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말하게 됩니다, “설교가 지루하다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군요.”
그들은 크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재빠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리하지 않습니다.그들은 남이 해 내는 일을 해 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말합니다, “하지만, 그 분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것이 자명하다면, 무엇이 문제 입니까?
제게는 끔찍한 관계를 가졌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의 아내였는데, 저도 옆에 있었습니다. 저는 일어나고 있던 일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친구는 14년을 살았는데....아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그를 떠났습니다. 그녀는 아이들도 남겨두었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모든 것에서 떠나 버렸고, 그를 곤경에 빠뜨려놓고 떠났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친구, 자네는 무엇을 찾고 있었나?”
그가 말했습니다, “상관없어, 나는 그녀의 외모가 어떻든 상관없어. 나는 그녀가 얼마나 영리하든 상관없어.나는 그녀가 옷을 어떻게 입든 상관없어. 나는 상관없어...단지 나를 사랑해 줄 누군가를 원해. 그건 내가 원하는 전부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그 하나를 갖게 되었을 때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그 한 가지를 갖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11절에.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그것은 그의 삶의 한 영역이 아니라 전 존재가 어두움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어디서나 어둡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크리스천의 삶에 관하여 누군가에게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그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입은 닫혀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교회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적절한 수평적인 관계없이 적절한 수직적 관계가 불가능 합니다. 만약 당신의 관계가 주변의 사람들과 옳지 않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크고, 장대하고, 능력으로 가득한 불같은 신성한 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디서나 어둡습니다. 당신은 어디서나 어둡습니다.
몇 번이겠습니까? 저는 이것을 해 왔었습니다. 바쁘게 집을 떠납니다.....제 아내와 문제가 있어서 빨리 떠나길 원하여 차에 올라타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설교하러 갈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바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차를 타고 떠날 수는 있지만,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네가 하려는 일을 모른다. 너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진지한 사과를 하는 것이 낫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수평적인 관계를 갖지 못했다면 수직적인 관계에 대하여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그것은 하기에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 여러분에게 율법을 준다면, 제가 가서 여러분에게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레위기를 모두 지켜야합니다. 우리는 민수기,신명기, 창세기, 받은 모든 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여기에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의 반만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구속에 대한 성취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누가 우리를 사랑합니까? 당신은 누구를 얻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예수께 물었던 질문이었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는 자입니까? 누가 여러분의 이웃이 아닙니까?
“글쎄요, 당신은 그들이 저에게 어떻게 했는지 이해하지 못 할 겁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나무에 못 박지 않았고 여러분의 옆구리에 창으로 찌르지도 않았습니다.
더 질문이 있으십니까?
성경을 계속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3절을 보겠습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자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약 제가 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짧게 몇 시간만 머물러야 한다면, 저는 어리석은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어제 이겼던 공놀이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몇 시간 후에 떠나는 것이 확실하다면 저는 저와 그들에 관하여 가장 중요하고 중요한 것에 대하여 제가 사랑하는 이들과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거기에서 하셨던 것입니다.
34절에 가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글쎄요, 새 개명이 무엇입니까?”
요한1서에서 요한은 설명을 시작합니다. 요한은 새 계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요한은 그것을 오래전부터 있었던 계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새 계명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는 말 합니다. 그것은 새 계명이지 지나간 옛 계명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성품은 변함이 없습니다.그분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백성에게 사랑하라고 항상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명하신 계명입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계명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는 것은 그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며 죄를 짓지 않는 것은 그 한 계명을 지키는 것 입니다.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새 계명입니까? 폴 형제님?” 질문 하실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누군가 제게 질문합니다. “폴 형제님, 당신은 훌륭한 농구선수 입니까?”
저는 대답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훌륭한 농구 선수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잘했습니다. 지금은 엉덩이뼈를 교체했고, 팔 한쪽은 부러져서 팔꿈치가 아프지만, 예, 저는 필요하다면 지금도 할 수 있지요.”
만약에 누가 저에게 제가 훌륭한 농구선수냐고 질문하면 저는 “예”라고 제 삶의 맥락에서 대답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대답입니다.
하지만 마이클 조던에게 그가 훌륭한 농구선수냐고 질문할 때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과 제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둘의 세계는 다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이 여기서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항상 너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내가 사랑이란 단계를 높이 올리므로 새 계명이 된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목사님, 저는 모든 법을 순종해야 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 정말 힘들어 보이는 구약 시대에 살지 않는 것이 기뻐요.”
여러분, 사랑이란 단계는 매우 높이 올려 졌습니다.
구약은, “10% 입니다”
신약은 말합니다. “당신의 형제가 필요하면, 그를 얻기 위해서라면 당신의 집을 팔아서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시오”
여러분은 단계에 대하여 말하길 원하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분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방식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한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옥으로 가기 때문에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비에 대하여 말할 것이고 은혜에 대하여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때는 구두쇠처럼 됩니다.
저는 십자가에 그분을 못박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저는 그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분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주일에 저와 악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저는 가족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합니다. 저는 이제야 연구하고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동안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것을 마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가족에 대하여 가르쳐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결혼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당신을 만들어가기 위함이라는 것 입니다. 그것은 결혼의 최우선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의 조건을 충족시켜주지 않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35절을 봅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루마니아에서 제가 말씀을 나누고 있을 때 어떤 분이 저에게 와서 저에게 브로치를 꼽아주며 말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이 당신이 크리스천인걸 압니다.”
저에게 멘토가 되어주었던 한분이 나를 보면서 “자, 당신들이 가진 브로치로 당신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알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옷깃에 꽂힌 브로치, 당신이 걸고 있는 십자가, 당신이 들고 있는 성경으로 당신이 제자임을 알까요? 당신이 가진 지식으로 그들이 알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하는지를 보고 알게 됩니다.
자, 요한1서 14절을 봅시다.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더 이상 영적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줄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거한다”라는 말은 현재형이고, 죽음에서 습관적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단어는 그냥 거주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고 함께 체류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문자 그대로 죽음과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심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는 다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놀랄만한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경이로운 말입니다. 요한은 계속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람들은 이 구절을 사용하여 살인을 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해 왔습니다.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살인을 범하는 사람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것은 연쇄 살인범이 되는 것입니다.당신은 계속 미워하면서 계속 살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을 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려 합니까? 당신은 “네, 저는 그들을 사랑해요”라고 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음, 저는 그들에게 나쁘게 행동한 게 없어요.”
아닙니다, 당신은 그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누고자 하는 말은, 만약 여러분이 생각하는 기독교가 단지 이 건물에 와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실재적인 방식들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족이 혼란 가운데 있기 때문에 가족에게 너무나 많은 증오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 상황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토대를 둔 강한 가족들을 세워야만 합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편이 되야 하며, 아내들은 하니님을 경외하는 아내가 되야 하며, 부모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가 되어야 하며, 아이들은 사랑받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이러한 일이 꼭 일어나야 합니다. 아니면 모든 것이 농장 바닥에 쌓인 먼지와 같을 것입니다.(아무것도 될 수 없고 아무리 높게 쌓아올릴지라도 바람에 불어 없어지는 먼지와 같다는 뜻) (This has got to happen or everything else is just....well, it is so much saw dust on the barn floor that is all it is.
그리고 왜 우리는 올바르지 않는 한 여기에 있는 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을까요? 내가 항상 말해 왔듯이 오늘날 세계적인 선교에서 가장 좋은 일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선교에 가지 않고 그냥 집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교에 가게 된다면 그곳에서 복음이 아닌 것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결책을 원하지 문제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And why would we want to export anything here to someplace else unless we are right? I have always said the greatest thing that could happen to missions in the world today is for most Americans to stay home because when they get over there they teach a gospel that is not true. We don't want to be the problem. We want to be a part of the solution)
17절을 봅시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제가 이 본문을 설교할 시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보여드리고 싶은 전체 핵심은 사랑은 단순이 느낌이 아닙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함께 모여 포옹을 하고 쿰바야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단지 여기에 와서 내려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들이 돌아갔을 때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며, 그들의 삶에 연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집에 울타리를 치는 것과 같이 누군가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을 통과하기 위한 통행 카드가 이어야 하듯이 우리는 누군가가 가까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글쎄요, 여러분은 누군가를 멀리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1서 4장 7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절대로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롭습니다. 그분은 악한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진실로 그러하십니다. 그분은 진실로 그러하십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이와 같은 것을 전혀 본적이 없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위대한 정의를 찾을 수 없으며 이 말씀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것은 표현할 충분한 말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가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루살렘 밖에서 쓰레기 더미 위에서 계속 울부짖으셨습니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해 주세요.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성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금지들,그것들은 모두 하나님 사랑의 표명입니다. 오늘날 문화는 문자 그대로 미쳐 날뛰며 마음을 사악하게 뒤집어 놓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미디어에서 듣는 기독교는, 항상 그들에게 하지 말라는 것만 말함으로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끔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끔찍한 하나님은 단지 죽음뿐인 길에서 떨어져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문화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에 대하여 미디어가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 여러분, 제가 무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두 명의 작은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를 매우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불에 가까이 가려할 때 아이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안 돼, 하지 마, 하지 마.”
제가 그 아이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모두 잘못 되었다. 한명도 예외없이 잘못되었다. 하지만 난 너희를 사랑한다. 이것이 너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너는 옳게 될 수 있다.”
“무엇을 알고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
“내가 너를 만들었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것이다. 내가 너를 만들었다”
“제 삶의 방식들을 억압하려 하지 마십시오.”
“오, 아니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너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고 있다. 내가 너를 만들었다. 나는 네가 어떻게 일하는지 안다. 나는 너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글쎄요, 그건 저의 모든 것에 반합니다.”
여러분께 무언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저에게 모든 것에 맞선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구원받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든 것에서 맞선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글쎄요, 저는 이것을 포기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단념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많은 다른 방식들을 분명히 보여줬는데, 우리 모두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돌아서야 했으며 우리들 모두는 말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여러분에게 무언가 말합니다. 저는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어 말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이 분들이 교회에서 원하는 분들입니다: 도둑, 살인자, 매춘부, 중독자들, 자신들이 행동한 것이 너무나 끔찍해서 그것을 말하기조차 싫어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분들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씻음 받았고,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정한 세상에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참된 하나님, 자비로우시고 공의하신 그 분은 그의 아들이 나무에 달려 죽은 그날에 그러한 속성들을 완벽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해왔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보다 제가 더 나빴기 때문에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했던 일들이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무엇이 되었고, 무엇이 전혀 안되어 있는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화해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삶에서 죄가 여러분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과 관계하지 않고 있고 여러분은 그분에게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으실 때까지 여러분에게는 참된 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죄를 지어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모든 법을 어겼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희생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은 범죄자이기 때문입니다. 범죄는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분이 그것을 어떻게 하셨나요?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여러분의 자리에서 죽이시면서 여러분의 죄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 그 분은 죽었을 뿐 아니라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분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분은 끝까지 구원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은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구원하실 것입니다. 구원하실 것입니다!
스펄전은 “만약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딱 두 단어 뿐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는 구원하신다. 그는 구원하신다. 그는 구원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두 발로 서십시다.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끼신다면, 여러분 자신이 알고 있듯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구원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분은 나오셔서 저희에게 말씀하십시오. 이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가시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 것입니다. 내려오십시오. 저희는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저희는 어디든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기 원하시든지 저희는 앉아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글쎄요, 저는 구원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 삶은 혼란스럽습니다”
좋습니다. 저희가 여기에 있습니다.
“식사를 하지 않으십니까?”
예, 저희는 먹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종일 여기 앉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무엇이 문제이십니까? 여러분을 구원 하실 수 있고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에 저희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 : 예수안에 하나교회(http://cafe.daum.net/1inchrist)